네가 세상을 떠난 걸 몇 사람을 건너온 소식으로 들었어. 그것도 두 해 전이라고.
어차피 부칠 편지도 아니었으니 그냥 쓰려고 해.
그곳은 추억이 필요 없는 곳일 텐데, 나는 그런 이야기로밖에는 너를 불러올 수가 없네.
내가 너 없이도 너랑 잘 노는 곳, 기억 마당이야.
기억이란 게 질서나 규칙을 갖고 찾아오는 건 아닌데, 불쑥 찾아와도 네가 오는 길은 윤이 나 있어.
너는 기억 못 할 거야,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초등학교 3학년 때였지.
전학서류가 늦어지는 바람에 4월 마지막 날에야 학교에 간 나를
선생님이 앉힌 곳이 네 옆자리였어.
금방 길동무가 생기고 자리도 바뀌어서 너랑 친할 사이가 없었지만,
너는 전학생을 위해 선생님이 지정해 준 첫 짝꿍이었던 거야.
너를 특별히 기억하는 사건이 있어.
종업식 날인가, 선생님이 우리 둘을 따로 부르시고는 책을 선물해 주셨어.
너에게는 ‘알프스의 소녀’, 나에게는 '한산섬'.
나는 훌륭한 장군보다 알프스 산속을 누비는 예쁜 소녀가 훨씬 좋아 보여서
똑같이 선물을 받고도 네가 엄청 부러웠어. 책을 바꾸자고 하고 싶을 만큼.
그다음은 호남예술제 백일장이야. 5학년 때였을 거야.
우리가 서로 다른 학교 대표로 만난 건 네가 '돌연히' 전학 갔기 때문이야.
입선에 머문 내가 백일장의 주인공을 알게 된 기막힌 우연, 들어볼래?
난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신나고 즐거워.
그러니 내가 시시콜콜한 것까지 들먹여도 참아줘.
그 시절 알지?
비가 많이 오면 지붕이 새서 방바닥에 세숫대야며 양동이를 받쳐놓느라 소동을 벌였잖아.
천장에 사는 쥐들은 또 얼마나 극성맞았게!
방 천장은 빗물이며 쥐 오줌으로 얼룩이 지곤 했는데,
도배지가 없을 때면 땜질은 신문 몫이었어.
그날, 왜 언니들 방에 혼자 있었는지 몰라.
천장에 눈이 간 건 심심해서였을 건데, 대뜸 ‘우리 집’이란 글자가 들어온 거야.
‘어, 저 제목은…’ 하면서 책상 위로 올라가서 고개를 젖히다가 깜짝 놀랐어.
조학주, 네 이름이 있는 거야.
장원을 한 네가 거기 슬쩍 숨어서 내가 찾아주기를 기다린 것처럼,
그런 너를 내가 단박에 찾아낸 것처럼 의기양양 신이 났어.
부럽지 않았냐고? 그런 마음이 끼어들 새 없이 네가 자랑스러웠어.
그런 너를 다시 만난 건 중학생 때야.
그해, 우리 학교에 처음 생긴 장학생 제도 덕분에 우리가 만난 거야.
돌아보니 기뻤던 것에 비해 가까이 지낸 일이 없는 것이 이상하네.
반이 다르기야 했지.
함께한 기억이라면 2학년 때인가, 학교에서 금하는 클럽을 만든다고
별관 지붕 밑 방에 몇이 모였을 때야.
금세 흐지부지된 모임에서 내가 기억하는 건 네가 제안한 이름 ‘동그라미’야.
아, 또 있다.
도서관이 있던 작은 숲에서 노래 부르며 놀던 날.
합창단에 들어온 일 없는 네가 노래를 어찌나 근사하게 부르고 또 많이 알고 있던지, 놀랐어.
가끔, 그 시절의 너를 생각해.
너는 여전히 재기발랄했지만, 천재의 아우라가 묻힌 듯 사라진 듯 했고 다가가기가 어려웠어.
상처 입어 거칠어진 어린 짐승 같았고, 툭 건드리면 울음이 쏟아질 것 같기도 했어.
그런데 나에게는 그 압도적인 슬픔을 다독여 줄 힘이 없었던 거야.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그때 우리는 말하면 안 되는 것들,
말하지 않으면 그대로 지켜줘야 하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시국‧시절의 일들로 가정사가 꼬이거나 가정이 깨지거나 어려워진 집이 있다는 걸
그리고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일들로 고통 받는 일들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런 모습으로 너는 떠났어.
미션스쿨의 장학생보다 ‘일류고’를 택해서 떠난 너한테
짧은 시 같은 엽서를 몇 번 받았지만 그뿐, 그 후로는 풍문으로 네 소식을 들었어.
교사가 되었다거나, 만삭의 몸으로 충장로를 지나는 걸 봤다거나,
남매를 두었는데 둘 다 의사가 되었다거나, 몸이 좋지 않다거나….
이상하지. 친할 수 있을 때는 그냥 지나쳐 놓고, 왜 네가 계속 궁금했는지 몰라.
나만 그런 건 아니었어.
네 엽서 독자였던 친구들도 그랬어.
우리 중 누군가 진짜 소설을 쓴다면 너일 거라는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지.
그러고 보면 너만 너를 모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 너를 본다면 흔들어 깨우고 싶었어.
그 마음이 통했을까.
40년 만애 옛 친구들 작은 모임에서 너를 만난 거야.
남도행은 친정 갈 때뿐이었는데, 그 모임 덕분에 목적지가 다른 여행이 몇 해 이어졌지.
내가 불쑥 너에게 전화 건 날 생각 나?
네가 너의 노래를 담은 CD 두 장을 준 며칠 후일 거야.
양희은처럼 노래 잘한다며 듣기 시작했는데, 2% 부족한 느낌이 들면서
아마추어와 프로가 갈리는 지점이 보이는 거야.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몰라.
맞아, 그래서 전화한 거야.
내 기억마당의 너까지 데려와서는 네 진짜 꿈이 뭐냐고 물었지.
그건 네 꿈이자 내가 너에게 기대하는 꿈이기도 했어.
아무도 너한테 꿈을 물은 적이 없다고 말하는 네 목소리에 놀람과 설렘이 묻어나기 시작했어.
그리고 1년 지나서《할머니가 쓴 현준이의 일기》가 나왔지.
네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손자에게 쓴 칭찬편지,
어린이집 선생님이 글이 너무 아까워서 1년간 모아두었다며 돌려준 편지를 묶어서 말이야.
나는 또 너에게 할머니가 들려주는 동화의 꿈을 불어넣었고,
너는 요정의 여행 이야기 두 권으로 답했어.
너는 그 몇 해가 네 생애 통틀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했어.
그 말이 얼마나 고맙고 또 기뻤는지….
그런데 소식 끊어진 시간이 10년이 되어버렸네.
너를 더 멋진 세상으로 나가게 할 힘도 없으면서 부추겨만 놓은 건 아닌지,
몸만 더 상하게 한 건 아닌지, 그런 일들이 마음에 걸리면서였을 거야.
그렇다면 용서해 줘.
학주야,
너에게 처음 쓴 편지가 너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나의 방식이 된 것 같아.
죽음의 문을 통과해 네가 깨어난 곳이 환한 빛의 세상이면 좋겠어.
그 샬롬의 세상에서는 할머니의 동화를 들으려고 아이들이 달려오면 좋겠어.
어머나, 저것 좀 봐!
반짝반짝하는 아이들이 동그라미 그리며 둘러앉았네!
그 가운데 푸짐하고 또 사랑스러운 할머니가 앉아 웃고 있네!
(현대수필, 청색시대 <모서리엔 모서리가 없다>에서 2023)
첫댓글 아~ n.dolphin 님 주변엔 글로 잘 표현하는 분들이 많군요....
물리적으로 함께하지 안(못) 했어도 그리워하는... 뭉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