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시의 역사
우리 시의 이름인 광명 은 '해와 달이 비추어 예로부터 좋은 곳'이라 하여 그렇게 불려 왔습니다.
광명시는 한반도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지역이 평야에 위치해 있고 시의 전체적인 모양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중심주에는 구름산과 도덕산, 서독산이 길게 늘어져 있습니다.
도덕산의 서쪽은 광명동과 노온사동, 동쪽은 철산, 하안동이 자리잡고 있죠.
구름산 동쪽은 소하동, 서쪽은 가학동입니다.
철산동과 가학동에서 지석묘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초창기 수도인 위례성(지금의 하남시)근처 한강 유역에 있어
백제의 영토였을 것이라 추측되나 고구려의 남진에 따라 장수왕 대에는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그 때에는 안양시의 석수동·박달동, 서울의 봉천동·신림동·독산동·가리봉동·
시흥동·신도림동·영등포·상도동·대방동 일대와 더불어 '잉벌노현'에 속해 있었습니다.
신라가 통일한 후에는 경덕왕때에는 '곡양현'으로 개칭되면서 율진군의 영현이 되었습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금주로 불렸으며 문종30년(1069)에 처음으로 경기좌도에 속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태종 13년(1413)에 전국적인 지명 개혁으로 금천으로 변했습니다.
당시 금천현의 현청은 서울 시흥동에 있었습니다. 이후 정조 19년(1795)에 이르러
시흥현으로 개칭되었습니다.
고종 32년(1895)에는 지방제도 개정으로 시흥군이 되었습니다.
1914년 안산, 과천군이 시흥군에 통합되면서 시흥군 서면에서 4개리, 군내면에서 1개리,
남면에서 3개리를 합하여 서면이 생겼으며, 그 뒤 변동 없이 해방 이후까지 내려왔습니다.
1912년경의 호수는 832호, 인구는 3,842명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50년대 이후 서울시와
인접해 있는 서면 광명리와 철산리 일대는 서울에서 유입해온 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도시화 현상이 두드려졌습니다.
1970년 서면 광명리와 철산리를 관할구역으로 하는 서면 광명출장소가 설치되었고 이후
시흥시와 서울시, 광명출장소 간에 여러 차례 경계 변경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침내
1981년 7월 1일 소하읍과 광명출장소를 합하여 광명시가 탄생되었으며 현재까지
인구 35만의 대도시로 성장해왔습니다.
◆(2)광명시의 문화재
철산동 지석묘(향토유적 제1호/철산동 222/청동기 시대)
거석숭배 신앙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는 청동기 시대의 묘제 또는 제천단으로서
예배의 기능을 아울러 가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지석묘이다.
외형상으로 보아 남과 북 2개의 지석이 개석(蓋石)을 떠받치고 있는 탁자식 지석묘이다.
석실의 하부구조는 적석(積石)시설을 갖추고 있는 강화군 삼거리 제3호 지석묘와 비슷한
형식이다. 개석은 치석(治石)한 흔적이 많으며 장축(長軸)인 동서 길이는 292cm
남북의 길이는 185cm, 두계는 72-88cm의 규모이다. 지석의 동서 마구리동은 빠져나가 없고,
남북 지석이 개석을 떠받치고 있다. 남쪽 지석의 길이는 165cm, 두께는 40-45cm, 지표에
노출된 높이는 약 50cm 이며, 북쪽 지석은 길이 153cm, 두께 약 40cm, 지표에 노출된
높이는 49cm정도이다. 지석묘를 발굴할 당시 석실 내부의 흙속에는 가외편, 백자편, 청자편,
잡석 등이 뒤섞여 있었는데 이는 본래의 모습은 아니고 후대에 교란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지석묘가 원래 위치하고 있던 철산동 462-33번지는 동경 125 45"
북위 37 28"으로서 민가가 들어선 지역이었다. 이 일대가 도시개발 사업지구로 지정됨에 따라
1985년 1월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발굴, 이전, 복원 작업을 의뢰하였다.
이에 같은해 1월 5일부터 30일까지 발굴조사를 시행함과 동시에 인근 광명고등학교
교정 입구에 이전 복원하였다. 그러나 학교 교실의 부족으로 교사증축이 이루어짐에 따라
광명시 시정조정위원회의 심의,의견을 거쳐 1990년 8월에 현재의 시민회관 영내로 이전해
관리하고 있다.
광명의 古家屋
관감정(觀感停. 향토유적 제3호/광명시 소하동 1086/조선후기)
조선 중기 인조대의 명신이자 청백로 이름 높은 오리 이원익(李元翼, 1547-1643)이
50여년간의 관직생활에서 물러나 만년을 보낸 누정이다.
그는 선조2년(1596)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 8등으로 급제한 후 내외의 여러 벼슬을 거쳐
선조20년(1587) 안주목사(安州牧使)로 있을때 1년 3개월을 복무토록 규정한
군병방술제(軍兵防戌制)를 개혁하여 2개월로 단축함으로써 백성들의 고된 신역을 덜어 주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도순찰사가 되어 왕의 피난길을 선도했고,
이듬해 원군과 함께 평양 탈환작전에 큰 공을 세운 뒤 평안도 관찰사.우의정.제도도체찰사.
영원수부사등을 겸직하여 작전의 대임을 맡았으며, 변무사(辯誣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영의정에 올랐다.
이후 좌의정.영의정을 거쳐 3도도체찰사로서 전후의 질서 회복에 공헌,
선조37년(1604) 호성공신 2등으로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고 광해군의 즉위하던 1608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불합리한 폐단을 막고자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을 건의하여 농민들의 과도한 세금 부담을 줄이고 상공업의 발달을
촉진케하는 등 탁월한 경륜을 펼쳤다.
이원익은 문장이 뛰어나고 성품이 원만하여 서민적인 인품을 지녔으며, 특히
<오리 정승>이란 이름으로 많은 일화가 전한다. 이를 통하여 그의 인품과 이상을 엿볼수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원익이 벼슬에서 은퇴하고 이곳 초가에 살 때 인조가 승지를 보내어
그의 생활을 알아본 즉 비바람이 새는 퇴락한 집에서 곤궁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에 왕은 몇
차례 살 집을 하사하려 했으나 이원익이 극구 사양하자 왕이 자신의 간곡한 뜻을 전하며
감사(監司)로 하여금 집을 짓게 하여 하사하니 부득이 그곳에 살게 되었다.
옥호는 그가 국가에 끼친 큰 공훈과 청백리로 임관한 자세는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된다 하여
"모든 신민들이 보고 느껴야 할 것"이라는뜻에서 <관감정>이라 했다고 한다.
관감정은 병자호란 때 크게 훼손되었으나 후손들이 중건했고, 선조의 영정을 모시고
<관감당>이란 편액을 달았다고 한다. 현재 이 건물은 목조기와집으로 팔작지붕에 회벽을
했으며, 내부는 쪽마루이고 뜰은 장대석과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다.
이 건물의 바로 뒤편으로 이원익의 영정을 모신 작은 영당은 팔작지붕에 방풍판(防風板)이
부착되어 있으며, 입구에는 별체의 3문이 건립되어 있다. 영당의 <오리 영우 梧里 影宇>란
편액은 숙종 때의 이조판서를 지낸 당대 해서의 일가를 이룬 근옹 이관징(李觀徵 1618-1695)이
썼는데 "금상 19년 계유 10월 일 건 사우(今上十九年癸酉十月日建祠宇)"란 종서(縱書)로 보아
이 영당은 숙종 19년(1693, 癸酉)10월에 건립되었음을 알수 있다.
한편 관감당과 오리 영당 주변은 담장이 둘러싸여 있으며, 영당의 담장 뒤편으로는
강감찬을 중심으로 서견(徐甄)과 이원익을 배향하고 춘추로 제향하던 충현서원의 터가 있다.
또한 담장 안바깥채 관감당 바로 앞에는 이원익이 생존시에 각자(刻字)했다는
<탄금암 彈琴岩>이란 글씨가 새겨진 큰 바위가 있는데 규모는 가로 2.3m, 세로 3m 크기이다.
현재의 관감당 뜰에는 수령이 약 400년 되는 측백나무를 중심으로 주위 일대에는 수령이
약 100년 전후의 향나무, 오동나무 등이 있어 이 정자의 옛스러운 정취와 기품을 더 한층
자아내게 한다.
광명 書院址
충현서원지(경기도 기념물 제80호/소하동 1086/조선후기)
조선시대 금천현(뒤에 시흥군) 서면 오리동(뒤의 소하리). 현 광명시 소하동 영당마을에 있는
서원터로서, 오리 이원익을 배향한 서원이다.
이원익의 시호는 문충으로 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흥의 충현서원,
여주의 기천서원, 안주의 청천사 등에 제향되었다.
이 서원은 원래 삼현사(三賢祠)라 했으나 조선후기부터 충현서원, 충현사 등으로 불려왔다.
이곳에는 이 고장 출신인 고려시대의 대사 강감찬의 신위를 중심으로 좌우에 고려시대의
장령(掌令)서견(徐甄)과 조선시대의 공신 이원익의 신위를 각각 봉안하였다. 그런만큼 이곳
일대의 대표적인 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원익은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 은퇴해 살면서 처음에는 이곳 금천현의 촌로들과 상의하여
강감찬, 서견 두분을 기리는 이 현사를 건립하려 하였다.그런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이후 효종 9년(1658)이 고장 유림들이 오리 정승의 숭고한 뜻을 받들고자 사당을 세워
이원익도 함께 배향하고 삼현사라고 이름했다. 그리고 이를 널리 알리고자 노력한 결과
숙종2년(1676)왕이 사액(賜額)하였다.
이후 조선후기 정조 때 사액서원으로 충현서원이 건립되었고, 철종7년(1856)에 개축되었다.
그러나현재 서원 건물은 없어지고 주춧돌 일부만 남아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훼파되었는지는 알수 없다.
이 서원이 위치했던 지역은 이원익의 옛 집이 있던 곳으로 서원터 아래에는 <탄금암>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있고 이전에는 <관감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현재는
민가형식으로 지은 기와집 건물 바깥채만을 전에 있는 정자의 아름을 따서<관감당>이라는
당호를 붙여 놓았다.
관감당 뒤편에는 이원익의 영정을 모시기 위하여 17세기 경에 건립되었다고 하는
<오리 영우>1동이 있는데 정면 1칸, 측면 2칸의 작은 건물이다.
도덕산 城址
도덕산은 광명시의 광명동,철산동,하안동 일대에 걸쳐있는 산으로 남쪽 표고
198m의 독립봉으로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측되는 토석혼축(土石混築)의 산성터가 남아있다.
이 산성터는 한강유역 전체를 굽어볼수 있는 위치이며, 퇴미형의 석축산성인
군자산성지(君子山城址, 옛 시흥군 군자면 군자1리)와 마주보고 있는데 산성의 둘레는
약 700m정도이며,현재 석축이나 토축으로 생각되는 유구(遺構)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해발 178m 지점의 평탄한 대지에서는 몇 점의 사족토기(四足土器)나 기와조각이
출토되었다. 또한 이곳이 삼국의 발전과 대립의 중심지였음을 고려해볼때 이 산성터는
삼국시대 후기의 백제 유적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산의 정상에서 남서쪽 으로 군자산
봉수가보이고 토기 족이 채집되는 점으로 보아 이곳이 봉수대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대한 종합적인 발굴과 조사가 병행된다면 보다 정확한 실상이 밝혀질 것이다.
◆(3)광명시의 위인들
오리 이원익
명종 2년(1547) - 인조 12년(1634), 조선시대 명신, 본관은 전주, 자는 공리, 호는 오리,
태종의 제11대 왕자인 익녕군 치의 현손, 수천군 정은의 증손, 청기군 표의 손자, 함천군
억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동래 정씨로 외조는 감찰 정치이고 교위 정추의 사위이다.
명종 19년91565) 18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선조2년 별시문과에 병과 8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얼마뒤 저작, 봉상시직장을 지내고
선조 6년에(1753) 겨울에는 성균관 진적으로 성절사의 질정관에 뽑혀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호조,공조,예조, 형조의 좌랑과 황해도 도사를 역임하였다.
황해도 도사로 있을 때에 당시 황해도 관찰사로 있던 이이의 신임을 얻어 그의 추천으로
1576년 사간원 정언으로 벼슬을 옮겼다. 이어 사헌부의 지평, 장령, 집의, 형조정랑,
군기시판관, 사간원의 헌납, 사간, 흥문관 부응교 등을 지냈으며, 선조 15년(1582) 겨울에
홍문관 응교로 있다가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고, 첨지중추부사, 호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젊은 시절에 그의 기품은 매우 호방하여 독서에 전념하면서 틈틈이 집 뒷산인 낙산에 올라가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며, 음률에 조에가 깊어 옛사람의 악부에도 정통하였다.
때때로 삼각산의 백운봉, 개성의 성거산, 영동의 풍악산, 영변의 묘향산을 유람하는 등 산수의
경승을 즐기기도 하였다. 선조 16년 우부승지로 있을 때 당시 도승지로 있던 박근원의 죄에
연루되어 파직된 후 시골에 은거하며 독서와 시작에 전념했다.
4년후인1587년 이조의 계청으로 안주목사에 임명되었다.
이 때 그는 기민의 구휼과 지방민 교화에 크게 힘썼고, 1년에 3개월을 복무해야하는
군병방술제를 개혁하여 2개월 단축시키는 법제를 채택함으로 백성들의 신역을 덜어 주었다.
안주에서 시행한 치적으로 형조참판에 제수되었으며, 선조 24년(1591)에 사헌부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앞서 일어난 정여립의 옥사를 잘못 처리한 정철을 논죄하였다. 곧이어 그는
호조,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도총관,지의금부사를 겸직하였다.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도순찰사에 임명되어 임근의 피난을 도
왔으며, 체찰사 유성룡과 합심하여 국난극복에 전념했고, 명군이 내원하여 이듬해 평양을
탈환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때 품께가 승정대부로 승진되고, 선조 28년(1595)에는 우의정에
올라 제도도체잘사 영원수부사를 겸했고, 선무공신의 칭호와 함께 완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조정에 돌아온 뒤에도 그는 4도도체찰사를 겸임하면서 영남 성주에 독부를 개설했고,
군량 조달과 산성보수, 군률의 기강 등을 엄격히 하는데 힘썼다. 선조 30년(1597) 조정에서
원균으로 이순신을 대신하려는 논의가 일자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선조 31년(1598)영남에서 조정으로 돌아온 뒤 당시 명나라 장군인 경리 양호와 주사 정응태
사이에 알력이 생겨 정응태가 본국에 상주할 때 조선을 왜와 한편인 양 모함하자 영의정
유성룡을 대신하여 변무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후 영의정에 올랐으나, 일본과 화의를
주장하여 북인의 탄핵을 받고 사직된 유성룡을 변호하다고 사직하고 동호에 물러나 살았다.
선조 33년(1600) 이항복의 사직으로 좌의정에 임며오디었으나 병으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 3도도체찰사로 전후 복구에 힘썼으며, 선조37년(1604) 호성공신2등으로 완평부원군에
봉해졌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영의정에 재임되었고 이 때 그는 대동법의 실시를 건의하며
시행세목을 작성하여 경기,강원도를 비롯한 전국에 이를 실시케 함으로 불합리한 조세제도를
시정하여 농민들의 세금 부담과 아전들의 농간을 줄였으며, 아울러 상공업의 발달도 촉진시켰다.
한 편 그는 광해군과 정인홍 등 대북파가 주모한 임해군의 옥사 때 그잘못을 직언하 바 있고,
뒤이어 광해군이 계모인 모후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려고 하자 이에 극력 반대하여 홍천에
유배되고 다시 여주에 이배되었다가 1619년에 풀려 나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영의정이 되고,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처형을 명했으나 반대하여 유배에 그치게 하였다.
이듬해 이괄의 난 때는 왕을 공주에 호조했고, 인조5년(1627)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가
되어 세자를 전주에 시종했으며 이어 훈련도감 제조를 지낸 다음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선조 때 유성룡과 함께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당색이 남인에 속했으나 성품이 원만하고 생각이
깊어 정적들에게도 호감을 받았고 청렴결백하고 서민적인 인품으로 오리정승이란 이름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가 노년을 보내던 금천 오리동 집은 너무 비좁고 누추했으므로, 인조는
몰수한 역적의 집을 이원익에게 여러 차례 하사했으나 그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마침내 임금은 유사에게 명하여 그의 고향집에 새 집을 기공토록 하였으나 그는 사양했지만
거듭 어명이 내지자 겨우 두 세칸의 집을 엮고 청빈하게 살았다.
인조 12년91634) 1월 29일 노환 끝에 향년 88세로 오리동에서 별세하니,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흥의 충현서원, 여주의 기천서원, 안주의 청천사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이다.
저서로는 <<오리집>> <<속오리집>> <<오리일기>>가 있고, 작품으로는 <고동답주인가>
가 있다.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 노년을 보내던 광명시 소하동 옛 집터에는 관감당과 오리영우 등의
건물과 충현서원터가 남아 있다.
특히 영우에 보관되어 있는 그의 영정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0호로, 관감당은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묘는 광명시 소하동에 있는데 신도비와 함께 경기도 기념물
제85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도비는 우승지 이준이 명을 짓고, 그의 손서인 호목이 쓴 것으로
인조 12년(1634)에 건립된 것이다.
정원용
정원용은 순조2년(1802) 정시문과 중 을과에 급제한 뒤 순조,헌종,철종,고종 등 4대에 걸쳐
72년 동안 조정에서 중요한 관직들을 두루두루 역임했다. 의정부와 중추원에서만도 33년간
재직하였으며, 고종 11년 그에게 문충이란 시호가 내린다.
관직에 있는 동안 사회기강이 무너져 지방 관청들에서 백성들인 농민들에게 가혹한 세금수탈
등이 이루어져 부정부패한 모습이 나타나고, 이를 규탄하는 민란이 일어나게 됨에 따라
암행어사 제도의 부활을 주창했다. 또한 노령의 나이지만 삼정이정청의 총재관이 되어
정액이상의 세금포탈에 대한 백성들의 민원이 빗발치는 지역의 관리들을 엄중 문책했다.
뿐만 아니라 경술과 문장에도 조예가 깊었다. 저서로는 <경산집 40권> <황각장주 21권>
<북정록 10권> <수향편 3권> <문헌 5권> 등이 있다.
묘비는 고종 13년 91878)에 건립된 것으로 묘비명은 이조판서를 지낸 맏아들 기세가 썼으며,
글씨는 우의정을 지낸 손자 정범조가 썼다. 그리고 당시 그가 관직 재직시 입었던 유품은
민속자료 13호로 지정되어 국립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순신
이순신은 조선중기 선조 때의 무신으로 전주 이씨 양녕대군의 후손이다.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방답진 첨절제사로서 충무공 이순신의 주우이장이 되어
당항포 싸움에서 왜선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서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전방부대장으로 한산도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고 부산포 해전에서도 왜선을 크게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런 공로로 이후 유도방위대장, 전주부윤, 전라도 병마 절도사를 거쳐 충청도
수군 절도사로서 장문포 해전,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왜교성 전투에서도 큰 전과를 올렸다.
선조 31년91598)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노량해전에 참전하여 싸우다 충무공이
전사하게 되자, 충무공의 지휘봉을 대신 잡아 전군을 지휘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황해도 병마절도사, 전라도 수군절도사 등을 지냈으며, 한때 간신들의 모함으로 파직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는 비운을 겪기도 했으나, 선조37년에 다시 임진왜란 때의 공이 인정되어
<선무공신>3등에 올랐다. 묘소는 일직동에 있으며, 1980년 초에 그 주인이 밝혀져 보존되어 왔다.
丘次崇
생몰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평해. 병조참의 춘보의 아들이며 대사헌 치곤의 아버지이다.
세종 24년(1442) 영해부사를 거쳐 문종원년(1451) 판예빈시사를 역임하고 벼슬이 첨절제사에
이르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묘는 광명시 학온동(옛 시흥군 서면 가학리)에 있다.
丘致
생몰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평해. 병조판서 차숭의 아들이다.
세조10년(1564) 진사로서 식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종 10년(1479) 해주목사를 거쳐
성종 11년 (1480) 사헌부 장령으로 인재등용과 소사제도등의 개선에 힘썼다. 성종21년(1490)
충주목사 성종24년 (1493) 이조참의를 지내고 연산군 1년(1495) 승지로서 명나라 사신
왕헌신이 돌아갈 때 모화관에 나아가 왕이 전별하지 못하는 이유를 오해없이 처리한 공으로
우승지에 임명되었다.
연산군 2년91496)에 좌부승지 한성부윤을 거쳐 대사헌이 되어 임금이 어진 선비와 대부들을
직접 영접하여 성학을 넓힐 것과 관직의 범람을 경계할 것, 그리고 정치에 참여하는 환관
김효강 등에게 죄줄 것을 주장하였다. 또 임금이 불교를 지나치게 숭상하여 소상재 대상재등을
마련하자 이를 반대하였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 천추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효종의 생신을 축하고 귀국한 뒤 강원도 관찰사로 나아갔고 다시 한서부윤이 되었다.
묘는 광명시 학온동에 있다.
金希說
생몰미상. 조선 중종대의 문신 본관은 순천. 자는 상경 호는 가정, 가곡 야경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종 14년(1519) 식년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사간원 정언 헌납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고 사헌부 지평을 거쳐 장령 홍문관 직제학을 거쳐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이어 호조참판 병조참판 시간원우빈객 한성좌윤등의 벼슬을 역임하고 중종 37년(1542)
전주부윤을 지냈다.
중종 때 대사간을 지낼 때에는 김안로 허향 채무택등 3흉을 탄핵했으면
외직으로 경주부윤 경기도 관찰사등에 재임할 때는 백성에 대한 구휼과 학문의
보급에 힘써 목민관의 귀감이라고 칭송되었다. 묘는 광명시 학온동에 있다.
李貞恩
생몰미상. 조선시대의 문인. 본관은 전주. 자는 정중 호는 월호 설창남곡. 태종의 손자이며
익녕군 치의 아들이다. 수천부정을 거쳐 수천도정에 올랐으며 종친부도정의 지낸 뒤 수천군에
추봉되었다. 덕행과 음률이 뛰어나고 시에 능하였으며 일찍이 그의 덕행과 문장은 추강
남효은이 추앙 존중하는 바가 되었다. 묘는 광명시 소하동에 있다.
李孝誠
세종 27년91445) - 중종 12년(1517) 조선시대의 공신.본관은 전주 부정을 거쳐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고 중종 원년91506) 정국공신 2등에 올라 운수군에 봉해졌다. 광진정을
건립했는데 뒤에 영조가 춘초정이라고 다시 이름을 지어 내렸다. 시호는 공소 양명이며
묘는 광명시 하안동에 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李億載
연산군 9년(1503)-선조 17년(1584) 조선시대의 문신. 본관은 전주. 자는 대년 수천군 정은의
손자, 청기군 영의정 표의 아들이며 영의정원익의 아버지이다. 종직으로 함천부수가 된 이후
중종 30년(1535) 함천도정에 올랐으며 선조15년 함천군에 봉해졌다. 보조공신에 추증되었다.
묘는 광명시 소하동에 있다.
李元輔
중종 25년(1530)-선조 22년(1589) 조선시대의 문신 본관은 전주 태종의 제11왕자인 익녕군
치의 현손이며, 수천군 정은의 증손, 청기군 표의 손자,참천군 억재의 아들, 영의정 원익의
형이다.생원시 합격한 뒤 통진군수 흡곡현령을 역임하였다.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묘는 광명시 소하동에 있다.
權詞중종36년(1541)-선조 38년(1605) 조선시대의 문신 본관은 안동자는 증오, 이조참판
침의 아들이다. 선조32년 문과에 급제한 뒤 형조형량 봉산군수 성균관 직강 등을 거쳐 벼슬이
사헌부 장령에 이르렀다. 묘는 광명시 일직동에 있다.
李性傳
명종 6년(1551)-선조 18년91558) 조선시대의 문신, 본관은 전주, 자는 선술,군수 수성의
아버지이다. 예조좌랑을 지냈으며 집읭에 추증되었다. 묘는 광명시 일직동에 있다.
李義傳
선조 1년(1568)-인조 25년(1647) 조선시대의 문신, 본관은 전주, 자는 의중 청기군 표의 증손,
함천군 역재의 손, 영의정 원익의 맏아들이다. 금천현 서면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에서
출생, 성장하였다.선조 31년 31세때 음보로 벼슬을 시작하여 과천 등 4개 현의 현감과 가평 등
5개 군의 군수를 지낸 뒤 철원부사와 이천부사를 역임하면서청백한 자세로 선정을 베풀었다.
특히 양근군수로 재직할 때는 치적을 쌓아 표리를 하사받았으며 품께가 통정배부로 승진되었고
양근군수에 재임되었다. 인조14년(1636) 완선군에 봉해졌고 인조25년 자헌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찬성에 추증되었다.묘는 광명시 소하동에 있다. 묘표는 매부인 허목이 썼다.
李厚源선조 31년(1588) - 헌종 1년(1660) 조선시대의 문신. 본관은 전주,자는 사심, 호는 우재,
남항거사로 불리낟. 세종의 제5대왕자인 광평대군 여의 7대손, 한의 증손, 인건의 손자이다 .
군수욱과 어머니 장수황씨 사이에서 양구현에서 출생하였으며 문정공 황정욱의 외손이다.
김장생과 성혼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는데 스승 김장생은 일찍이 "그 자태를 보고 가히
헤아리지 못하겠다"하면서 기뻐했다고 한다.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 3등으로
완남군에 봉해졌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이후 태인현감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출전하여 공을 세웠고 인조5년(1627)왜구를 잡은 공으로
충융사가 되었으며 이후 단양군수 안산군수를 거쳐 한성부 서윤을 지냈다.
인조 13년(1635) 익산군수로 있다가 같은해 10월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했고 이듬해
홍서봉 감상헌 등의 천거로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얼마 뒤 문학을 거쳐 1636년 12월
장령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하여 감상헌등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였다. 이 무렵 그는 대장 신경진의 비겁한 죄를 탄핵하고 남한산성에서는 독전어사를
겸임하였다. 이 때 그는 임금이 남한산성을 몰래 떠나 강화로 옮기는 것은 위태로운 계측임을
주장하였고 화의후 세자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는 문제에 반대하였다. 인조 15년(1637)
품계가 통정대부에 오르고 승지를 제수받았으며 호조참의가 된후 외직을 자청하여 광주목사로
나가 선정 베풀었다.
1639년 다시 승지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수원부사에 임명되고 병조참지를 거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 인조 20년 대사간, 이듬해 가선대부로 한성부우윤에 승진되었다. 이후 강황부유수수를
거쳐 대사간에 재임되었고 1644년 심기원이 난을 도모하자 수장이 되어 이를 제거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듬해 호참판에 오른 뒤 대사헌을 지내고 1646년 형조참판을 거쳐 가의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인조25년 다시 대사간이 되고 도승지 병조참판을 역임한 뒤 이듬해 함경도 관찰사로 나가
목민에 힘쓰고 <소학>을 간행하여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1649년 인조가 별세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형조참판에 이어 도승지 대사헌등을 역임하였다. 효종1년 그는 소를 올려 "김자점은
귀양보내고 유계등은 처벌하지 말며 성균관 유생의 동맹휴학인 권당은 관용하지 않을 수 없고
어진 정승이 정계를 떠날 때는 예우가 있어야 하며 이이 성혼 등 두 신하의 학문과 도덕의
실상을 임금이 알아주어야 할 것" 을 주장하였다.
이후 한성부판윤, 형조판서,공조판서,대사헌,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효종 6년 예조판서로 재임할 때는 추쇄도감의 제조가 되어 전국의 노비를 추쇄하여 강화를
방비케 했으며 또한 장악원에 소장되어 있던 <악학궤범>을 개간하였다. 효종 8년 9월
우의정에 올라 효종을 도와 북벌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송준길을 병조판서, 송시열을
이조판서에 추천하여 임명케 하는 등 인재 등용에도 힘썼다. 이듬해 정월 병으로 사직했으나
임금의 병이 심하여 조정에 나아가 세자의 일을 도왔고 1659년에는 자의 대비의 복상 논의에
대하여 기년제로 할 것을 주장하여 실현시켰다.
노년에 그는 광주 선영에다 집을 짓고 <오재>라는 현판을 달고 살았다. 현종 원년 노환으로
별세하니 향년 73세였다. 숙종 11년(1685) 광주 수곡서원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충종이다.
묘는 광명시 소하동에 있으며 그의 초상화가 전해온다.
愍懷嬪 姜氏
?-인조 24년(1646).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 사이에서 태어난 제1왕자인 소현세자의 빈이다.
본관은 금천, 시호는 민회빈이다. 우의정 석기와 고령 신씨 사이에서 5남3녀중 둘째 딸로
이 고장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인조 5년 9월에 세자빈으로 간택되고 12월에 가례를
올렸으며 인조 14년 원손인 석철을 낳았고 이어서 별손인 석린과 군주(딸) 3명을 낳았다.
병자호란 1년후인 1637년 소현세자에 함께 볼모로 청나라 심양에 갔다. 소현세자는 자기
가족과 수행원(판서 남이웅을 비롯한 300여명)이 거처할 심양관소를 짓고 이곳에서 조선
정부를 대리하는 현지기관으로 모든 연락사항을 관장하였다. 세자는 청나라 황제와
고관들과도 접촉을 갖고 양국의 관게유지에 원활을 기하려 했으나 다잇 조선 조정 내에서는
존명대의란 명분 아래 반청 부누이기가 고조되었고 임금은 점차 세자의 대청 태도에 불만과
의심을 나타냈다. 인조 22년 1월 세자는 전해에 세상을 떠난 강빈의 아버지를 조문학 위하여
강빈을 동반하고 일시 귀국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세자와 강빈을 미워하여 친상을 당한 강빈이
친정에 가서 일곡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세자 내외는 8년만에 일시 귀국한 고국을
등지고 그해 4월2일 다시 청나라에 가서 연경에 머물렀다.
북경에 있을 때 세자는 당시 그곳 천문대에 와 있던 천주교 선교사 아담 샤알에게서 서구
과학문명에 대한 여러 지식을 배웠고 <천문역산서>와 과학 천주교에 관한 번역 서적과 여지구,
천주상 등을 선물받고 뒤에 귀국할 때 휴대해왔다. 한편 청이 중을 제패하고 명나라 세력의
소생이 불가능하게 되자 청정부에서는 인조23년 세자 내외를 조선에 귀환시키기로
결정하였으므로 마침내 세자 일행은 볼모로 잡혀간지 9년만에 북경에서 귀국하게 되어 같은해
1월18일 입경하였다.
귀국한 세자 내외에 대한 임금의 태도는 의구와 적대감으로 일관했다. 그것은 청나라에서
세자에게 전위하도록 압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와 함께 부왕의 기대와는 달리 세자의
친청적인 태도, 귀국시 비단 황금 등 맣은 물화를 가져온 점 특히 임금의 총애하는 비 조소용과
세자빈의 반목등이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궁내의 반목과 무고가 끊이지 않는 험악한 공기속에서 세자는 귀국 2개월만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원인모를 병으로 급사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임금의 의도를 간파한 조소용 측의
사주로 독살당했다는 설이 유독했다. <인조실록>에도 "세자의시신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으며
칠혈에서 출혈되고 있어서 독약에 중독된 사람 같았다"고 기술할 정도였다.
한편 세자가 별세한 후 강빈과 조소용의 반목은 더욱 커지고, 조소용의 무고로 세자빈에 대한
임금의 태도도 정상이 아니었다. 남편인 세자의 장지와 장일 문제에 대한 강빈의 희망은
일축되었고 강빈에 대해서 시강원 재신들의 조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세곤(강빈 소생 제1왕손)
을 왕위 계승자로 삼자는 상소도 각하되고 마침내 인조는 조정의 공론을 무시하고 세손 대신
세자의 아우인 봉림대군(뒤의 효종)을 세자로 책봉시켰다.
이후 궁중의 분위기는 강빈에게 매우 불리하였다. 강빈의 소의 조소용의 무고로 조씨에 대한
저주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되어 원손의 보모인 최상궁을 비롯하여 강빈을 따르는 궁녀들이
처형 당했고, 강빈의 친정형제 자매들도 유배에 처했다. 인조 24년 정월어선(임금이 드신음식)에
독약을 넣었다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 소행의 장본인이 강빈이라는 무고가 있자 강빈을 후원
별당에 유폐시킨후 이해 3월 마침내 사사 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강빈의 옥사로 말미암아 70세에 이른 강빈의 어머니 신씨부인을 비롯하여 문두,문벽 등
친정동생 궁녀와 노비등이 장살되고 아버지 석기의 관작도 추탈되었다. 또한 강빈의 소생의
세손(당시 13세)과 별손 석린도 후환이 염려된다고 하여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끝내는 그곳에서
어린 나이로 병을 얻어 요절하였다. 귀국 직후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과 강빈의 옥사는 당시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던 조소용의 무고와 권력을 탐하던 간흉 김자점이 일체가 되어 일으킨
사건이었으며 강빈의 친정집과 그를 따르던 궁녀 노비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강빈이 사사된지 73년이 흐른 숙종44년(1718) 4월 세자빈의 무고함이 판명되어 위호를
복위시키고 시호는 <민회>라고 정해 신원시켰다. 윤 8월에 숙종은 세자빈의 총명함과 정덕을
칭송하고 손수 제문을 지어 빈의 원혼을 위로하는 한편 묘소를 개봉하는 대규모의 역사를
진행시키고 소현세자의 신주를 함께 묻게 하였다. 민회빈 강씨의 묘는 처음 민회원으로
추존되었다가 뒤에 고종 40년(1903) 다시 영회원으로 개칭하였다. 강빈의 친정 아버지 석기의
관작도 복위되고 그의 형제들도 모두 신원되었다.
묘는 일명 <애기릉><아왕릉>이라고도 불리며 광명시 학온동 산 141의 20번지에
있다. 사적 제357호로 지정되어 있다.
李守約
선조 23년91590)-현종9년(1668) 조선시대의 문신.분관은 전주 자는 이성.영의정 원익의 손자,
이천부사 의전의 맏아들이다. 광해군 때 조부인 원익이 유배되어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다가
인조 원년(1623)문음으로 선공감역이 되었다가 이듬해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인조6년(1628)에 연풍현감,인조11년에 감찰,인조17년에 형조좌랑에 올랐다. 이후 외직에
임명되어 인조23년 포천현감 효종 원년 순창군수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조부 원익이
인조묘정에 배향되자 장예원 별제에 특채되었고 효종 9년에 첨정을 거쳐 현종 3년에 창수를
지냈다. 저서에 <한중잡록>이 있다. 묘는 광명시 소하동에 있다.
李守誠선조 25년91592)-효종 7년(1656) 조선시대의 문신 본관은 전주,자는 자화,현령 경전의 아들로
예조좌랑 성전에 입양되었다. 생원시에 합격한 뒤 용담현령 양근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묘는 광명시 일직동에 있다.
李曾賢
인조 7년(1629)-숙종 20년(1694). 조선시대의 문신.본관은 전주, 자는 효사로 영의정 원익의
증손이다. 효종8년 사옹참봉을 거쳐 현종 4년 예빈시 별제를 지냈다. 이어 회덕현령
영천군수를 거쳐 선산부사,풍덕부사,공주목사 등을 역임한 뒤 숙종 20년 성주목사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李存道
효종 10년(1659)-영조 21년(1745) 조선시대의 문신,본관은 전주,자는 문백,호는 앙와이다.
상현의 아들로 증현에게 입양되었다.
숙종 3년 진사시에 합격한 뒤 숙종 18년 선공감역을 거쳐 형조정랑을 역임하고
동지충추부사로 완성군에 봉해졌다. 이어 지중추부사로 장성 등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의정부 찬성에 추증되고 아들인 참판 인복의 현달로 원종공신훈을 받았다. 저술로는
<전사통감>이 있다. 묘는 광명시 학온동에 있다.
李仁復숙종 9년(1683)-영조6년(1730) 조선시대의 문신,본관은 전주,자는 내초 호는 신절재이다.
영의정 원익의 5대손,수약의 증손,증현의 아들, 권석의 외손,남수명의 사위이다.
생원시의 합격한 뒤 숙종 36년(1710)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며 숙종 40년(1714)
문과증광시에서 3등으로 급제하였다. 외직으로는 안동군수를 지냈고-내직으로는
홍문관응교,도승지,병조참판등을 역임했다. 완양군에 봉해졌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당대의 문장가인 국포 강박과 교류가 깊었다. 묘는 광명시 소하동에 있다.
李延烈
숙종 34년(1708)-? 조선시대의 문신,본관은 전주,자는 영숙,거의 아들로 태어났다.
영조26년 식년시에 급제한 후 도정을 역임하였다. 묘는 광명시 학온동에 있다.
鄭東晩
영조 29년(1753)-순조 22년918220 조선시대의 문신,본관은 동래 자는 우고, 호는 졸암으로
대사간 계순의 아들이다. 정조 10년 진사시에 합격한 후 순조 4년 경릉참봉에 임명되었다.
순조 10년 영유현령, 순조13년 재령군수,순조15년 순흥부사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순조17년 선혜청 낭관을 거쳐 이듬해 진주목사, 순조22녀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 벼슬이
돈녕부도사에 이르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는 광명시 학온동에 있다.
李謙煥영조 15년(1839)-정조15(1791) 조선시대의 문신,본관은 전주,자는 자익, 호는 반청와이다.
교관 언충의 아들로 온양군수 언수에게 입양되었다.
영조 49년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이후 승지,대사간등을 역임했으며 외직으로는 순천,
홍주,수안등의 수령을 지냈다. 묘는 광명시 소하동에 있다.
李文煥
영조44년(1768)-헌종8년(1842) 조선시대의 처사. 본관은 전주, 자는 설칙. 호는 욱욱당이다.
익녕군 치의 후손으로 언백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문이 깊으면서도 벼슬에 뜻이 없어 자신의
몸을 바르게 처신하는데 힘쓰고 스스로 문명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부모에 대한 효도와 선조의 사당을 수리하는데 힘쓰면서 일생을 마쳤다. 묘는 광명시 일직동에 있다.
鄭述祚
생몰미상. 조선시대의 문신. 호는 삼춘당이다. 문효세자 때 시 강원에 있었고 한성판윤을 거쳐
봉조하가 되었다. 묘는 광명시 하안동에 있었다고 전하는데 확인되지 않고 있다.
成夏慶
순조 23(1823)-고종 36년91899) 조선시대의 문신, 본관은 창녕, 조명은 태경, 자는 치장, 호는
서암이다. 봉호는 증손,헌영의 손자, 낙우의 아들이다.
철종 6년 문과에 급제한 뒤 고종 9년 돈녕부도정을 거쳐 이듬해 승지에 임명되었다.
고종 12년 사간원 대사간으로 재임하면서 지현도봉장에 반대하였다. 묘는 광명시 학온동에 있다.
鄭基世
순조 14년(1814)-고종 21년(1884) 조선시대의 문신, 본관은 동래, 자는 성구, 호는 주계이다.
돈녕부 도정 동만의 손자, 아버지 영의정 원용과 강릉 김씨 사이의 맏아들, 예조판서 김계락의
외손, 김영수의 사위이다.
순조 31년 18세때 진자시에 합격한 뒤 헌종 3년 24세때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정자에 임명된 이후 주서, 선전관,성균관전적, 사건원정언,병조정랑,삼영종사관,
북평사 등을 지내고 헌종5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홍문관수찬,교리,응교,사간원 헌납,
사헌부 장령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병조참의,동부승지를지내고 성천부사로 나갔다가
성균관대사성,정시시관,규장각 직제학,예조참판,도승지 등을 지냈다.
철종 4년 강화부 유수, 이듬해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세제를 공정히 다루고 문교를 진흥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고종 원년 대원군 집정하에서 병조판서에 승진된 후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그리고 흥문관과 예문관의 제학등을 역임하였다.
대원군이 정권에서 물러난 후인 고종 13년 이조판서 겸 판돈녕을 지내고 품계가 승록대부에
이르렀으며 의정부 우찬성,좌빈객을 역임하였다.
고종 20년 기로소에 들어가 궤장을 하사받고 고종 21년 7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묘는 광명시 학온동에 있었으나 70년대말 충남 청양군 정산면으로 이장되었다.
成鐘永순조 27년(1827)-고종 27년(1890) 조선시대의 문신,본관은 창녕, 자는 중량, 호는 서은이다.
복영의 증손,진사 열의 손자,홍문관 교리 우규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종2년 사마시에 합격한 후 고종 11년 버슬이 돈녕부 도정에 이르렀다.
姜海昇
건양1년(1896)-1958. 현대의 행정가. 시흥군 서면 노온사리 출신이다.
본관은 금천으로 하석의 2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광주군청을 시작으로 가평군청,용인군청, 여주군청 등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고, 경기도 지사
관방주사,인천시장 서리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1940년에 부천군수,1950년 5월-1952년
5월까지 수원시장을 지낸후 관계에서 은퇴했다. 묘는 광명시 학온동에 있다.
成萬慶
헌종 8년(1842)-? 조선말기의 항일만족운동가. 본관은 창녕으로 시흥군 남면
유등리(현 광명시 학온동)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거주했다.
시흥군 남면 동학의 집강으로 활동하면서 광무 2년(1898)과 광무8년(1904) 2차에 걸쳐
이 지방의 다른 집강들과 함께 이른바 <시흥농민운동>을 주도했다.
일본의 침략과 간섭이 노골화되던 1898년 음력 7월7일 그는 군내 집강들과 봉건적인
정치체제의 문란에서 나오는 지방관리의 탐학과 가렴주구에 항의하는 농민봉기를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이날 그는 송대현, 김회상(하북면 반대방 집강), 이동식(서면 율일리 집강),
이덕정(동면 봉천리 집강>, 엄우영,낮순길,나한녀(상북면 당신리 소임)등과 함께 시흥군 내
42명의 동.리 집강들에게 사발통문을 도리고,전임 군수의 학정에 항거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 마을 지도자들은 음력 7월9일 각기 농민들을 동원하여 집회를 열고 제1차 농민운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그해 음력 28일에 일단 수습되었으나 그는 이 농민봉기의 주모자로
체 포되어 수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한편 일본은 조선 정부를 협박하여 경부선 부설권을 독점한 뒤 광무5년(1901)에 착공하여
1904년에 이 철도를 개통하여 관부연락선으로 일본과 연결시킴으로써 한국과 만주 침략의
주요 간선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일제는 경부선 철도를 건설하면서 영등포-수원간 공사에
시흥군민들을 강제로 동원하는 한편,철도 연변의 토지를 무상 수용함으로써 군민들은 일제의
탄압정책에 대하여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그는 조선에 대한 일제의
침탈과 친일 관리들의 비행에 분개하여 2천여명의 군민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제2차 항일
농민운동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제2차 봉기는 제1차때와는 달리 면밀한 동원계획과
조직체계를 세웠으니 먼지 1904년 9월13일까지 6개 면집강들에게 봉기 계획을 전달하는 한편,
시흥구 내의 모든 가구마다 1명씩 반드시 집회에 참여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9월14일 수천여명의 군민이 읍내 한천변에 집결하여 그의 사회하에
집회를 열고 노무자 모집의 불법성과 관리들의 비행을 규탄하였다. 집회에 참가한 군민들은
그의 수도하에 이날 오후 3시경 시흥 관아로 몰려가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때 관아
안과 주변에는 일본군 20여명이 미리대기하고 있다가 시위대가 몰려오자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에 흥분한 군민들은 투석전으로 맞서 군수 박우양 부자가 희생되고 일본인 2명이
참살되었으며 4명이 중상을 입게 되었다. 이후 일본 군경이 증파되어 군의 각 마을마다
군민들의 동정을 감시하는 한편 주동자들을 색출,검거했다.
그는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경기재판소에서 주모자로 종신형을 선고받아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했으며 2년후 한성재판소에서 15년형으로 감형되었다. 1907년 수종이 즉위하는
천추경절을 맞아 이때 평리원 <기결수 석방령>에 따라 고령자임이 고려되어 특사로 풀려났다.
李宗遠
고종 1년(1864)-? 독립유공자. 일명 원중 또는 종운으로 시흥군 서면 소하리 출신이다.
1919년 3월27일 밤에 그의 아들 정석이 독립만세 시위를 하다가 순사보 최우창 등에게
체포되어 노온사리 경찰 주재소에 강제 연행되자 그는 이 사실을 같은 동네의 청년 최호천,
윤의병등에게 이야기 한 것이 다음날 아들 이정석 탈환사건과 연계되어 이 지역에서 3월28일
야간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즉 이종원은 소하리에 사는 최호천을 찾아가 아들이 잡혀간 사실을 말하며 탈환해 줄것을
부탁하자 최호천,윤의병 등과 함께 주민 200여명을 이끌고 노온사리 주재소로 몰려가 전날에
체포된 이정석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 구내와 보통학교 뒤편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한 것이다.
200여명의 군중들은 돌과 벽돌로 무장하여 주재소를 포위하고 이정식의 석방을 외치며
게시판과 기물을 파괴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대구복심법원에 이관되어 시위의
주모자인 최호천,윤의병이 2년의 형량을 받은데 비해 이보다 훨씬 가벼운 벌금 30만원에
처하여졌다. 19922년 8월15일 광복절을 기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張元謙
고종 2년(1866)-? 독립유공자. 시흥군 서면 철두리(현 광명시 철산동) 출신이다.
1907년 음력 8월14일 밤 당시 42세였던 그는 박홍석,연창수 등 수십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직산군 읍내에 침입하여 주재경찰의 단총1정을 빼앗아 달아났다. 얼마 뒤 일경에게
체포되어 경성재판소에서 징역7년을 구형받았다.
李永來
고종 12년(1875)-? 독립유공자. 시흥군 서이면 비산리(현 안양시 비산동)에서 출생했으나 서면
일직리(현 광명시 일직동)에 거주했다.
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독립만세시위운동을 보고 돌아와 3월27일 서 이면
일동리(현 안양시 관양동) 백기화의 집에서 이종교를 비롯한 여러 사람 앞에서 다른 지역의
만세시위를 들려주고 시위에 동참해 줄것을 설득했다. 그리하여 이날 저녁 동네 서쪽
언덕위에서 주민5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크게 외쳐 이 지역 독립만세 운동을 고양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1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崔周煥
고종 22년(1885)-? 독립유공자. 시흥군 서면 소하동 출신이다.
1919년 3월27일 같은 마을 사람인 이정석(이종원의 아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자
3월28일 밤 최호천,윤의병,이종원,김인한,최정성,유지호 등과 함께 이정석 탈환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3월28일 오후7시경 홍순필이 경영하는 음식점에 모인 200여명의 군중 앞에서
최초천,윤의병,이종원등은 이정석을 탈환하기 위해 주재소를 습격하자고 선동하지 이에
적극 가담하였다. 이 때 그도 일경에게 체포되었으나 실형을 선고받지는 않고 석방되었다.
柳志浩
고종 29년(1892)-? 독립유공자. 시흥군 서면 소하리 출신이다.
1919년 3월27일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 이정석을 탈환하는 운동에 최호천,윤의병,
이종원등과 함께 적극 가담했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崔正成
광무2년(1898)-? 독립유공자 시흥군 서면 소하리 출신이다.
1919년 3월28일 밤 최호천,윤의병,이종원등과 함께 전날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된 이정석을 탈환하는 계획에 적극 가담하였다. 그는 이 사건으로 대구
복심법원에서 30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崔浩天
광무 3년(1899)-? 독립유공자. 시흥군 서면 소하리 출신이다.
3.1운동 당시 21세로 배제고보의 재학중에 있었고, 윤의병과 함께 1919년 3월28일 밤에
이정석 탈환사건을 주도했다. 그는 전날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노온사리 경찰 주재소에 체포
구금된 이정석의 아버지 이종원의 부탁을 받고 소하리와 가리대리를 중심으로 주민 200여명을
모아 인솔하고 주재소로 향하였다. 그는 시위 군중 앞에서 "우리가 주재소를 습격하면
경찰들이 발포할지 모르오. 각각 곤봉과 돌을 준비해 가지고 가서 경찰이 발포하면 때려
부숴야 하오" 라고 역설하면서 돌과 곤봉으로 무장시켰다.
시위 군중은 이정석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외쳤고-주재소의 게시판을 넘어뜨리고
뒷벽을 파괴하는 등 폭력행사도 불사하였다. 그러나 주재소 내에서 별다른 반응이 없자 군중을
두패로 나누어 한 패를 인솔하고 이정석을 체포한 노온사리 순사보를 찾아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주재소 순사에게 이정석의 석방을 강청하고 "만일 돌려보내지 않으며 다시 내습하여 불
태우고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이정석은 이미 본서에 송부된 후였으므로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었다. 그는 경성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金仁漢
광무3년(1899)-? 독립유공자. 일명 거봉으로 시흥군 서면 소하리 출신이다.
1919년 3월28일 밤 이정석이 노온사리 경찰주재소에 강제 구금된 사건에 적극 항의하다가
체포되었다.
尹宜炳 광무4년91900)-1960. 독립유공자. 시흥군 서면 소하리 출신이다.
3.1.운동때 최호천과 함께 배재고보에 재학중이었는데 서울에서 만세시위가 격렬하여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에 돌아와 청년들과 독립운동을 계획 주도하였다. 그리하여 소하리
가리대리의 주민 200여명의 군중을 지휘하며 1919년 3월28일 밤 이정석 탈환사건을 주도하였다.
그는 최호천과 함께 소하리 주민 100여명을 규합하여 노온사리 경찰 주재소를 향하던 중
가리대리 주민 100여명이 가세하자 모두 200여명의 군중을 지휘하였다.시위군중은 곤봉과
돌로 무장한채 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이정석의 석방을 요구했고, 이때
시위군중은 주재소의 게시판을 넘어뜨리는 등 물리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평양 복심법원에서 소요 혐의로 징역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전선에 투신하여 활동했고, 해방후 귀국하여 독립국가의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3년 대통령 표창을 하였다.
슬하에 세중과 홍중 두 아들을 두었다. 묘는 광명시 소하동에 있다.
李載伉
고종 24년(1887)-1965 독립유공자. 시흥군 수암면 논곡리 출신이다. 3.1운동 당시 처가인
화성군 서신면에 머물고 있다가 3월28일 사강장날에 수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이원행,
홍성유 등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헌병대장 노구치를 죽이자
이에 앙심을 품은 일경은 집을 불사르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무차별 학살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이어 주모자를 체포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자 이재항은 중으로 변장하고
금강산을 비롯하여 묘향산,지리산 등으로 피신하면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해방이 되자 많은 곳에서 정계에 투신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끝내 사양하고 후진들을
교육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1965년 2월26잏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화성군 서신면 전곡리에 3.1독립기념비를 세웠다.
그는 슬하에 채용,시용,세용의 세 아들이 있다. 묘는 시흥군 서면 가학리(현 광명시 학온동)에 있다.
◆ (4)광명시의 지명 변경 과정
광명시 연표광명시는 경기도의 남서부중앙에 위치한 수도서울의 인접도시로 서울시와 동일한 생활권에
속하고 광주산맥의 끝부분에 위치하여 구름산을 중심으로 풍화침식된 토양이 완만한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전체면적 38.515㎢중 40%가 낮은 야산으로 되어있어 다른
도시지역에 비해 쾌적한 생활 환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광명” 이라는 명칭은 다른 곳보다
해와 달이 잘 비추이는 곳이라는 뜻으로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광명시의 유래를 살펴보면,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잉벌노현에 속해 있다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율진군의 곡양현으로, 고려
태조23년(940)에는 금주현으로 불리우다가,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 금천현으로 개칭
되었으며, 1981년 7월 1일 광명시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시대 년도 변천사
삼국시대 고구려 : 잉벌노현
통일신라시대 경덕왕16년(757년) : 곡양현
고려시대 태조23년(940년) : 금주현
조선시대 태종16년(1416년) : 금천현
고종32년(1895년) : 시흥군
근대 1914.03.01 : 시흥군 서면
현대 1970.06.10 : 서면광명출장소
1974.06.01 : 시흥군출장소
1979.05.01 : 서면이 소하읍으로 승격
1981.07.01 : 소하읍이 광명시로 승격(7개 법정동,15개 행정동)
1983.02.15 : 시흥군 소래읍 옥길리 일부 광명시로 편입(8개 법정동, 15개 행정동)
1987.01.01 : 소하동 일부 안양시로 편입
1990.05.07 : 하안동이 하안 1,2동으로 분동(8개 법정동, 16개 행정동)
1992.01.03 : 하안2동이 하안2,3동으로 분동(8개 법정동, 17개 행정동)
1995.03.01 : 철산3동, 하안3동, 소하1동) 일부.서울시 금천천구로 편입 (광명3동, 광명5동) 일부.
서울시 구로구로 편입 서울시 구로구 일부. 광명3동, 광명5동으로 편입
1995.03.06 : 하안2동이 하안 2,4동으로 분동(8개 법정동, 18개 행정동)
첫댓글 90년대 초반이면 나도 막 광명시민이었을 듯.
귀한 자료를 보니 옛날 생각이 밀려 오네요. 고맙게 잘 보았어요~ ^^
막~~ 밀려 오나요??^^
저는 1989년도 부터.....ㅋ
정말 ! 사진을보니 그런때가 있었구나란 , 생각이......77년도에 광명시민 !!!꼬방동네도 있었답니다 . 30년쯤지나고 보니 , ㅋㅋㅋ
지금의 어디가 꼬방동네였나요??^^
궁금해요..... 꼬방동네사람들 이란 제목의 영화두 있었던거 같은데,,,,,,^^
귀한 자료를 접하니 기쁘네요. 훌륭한 석학들이 많이 배출된 지역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대단히 자랑스럽네요.
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수정하고 추가한것두 잇는데 보셧음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