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심장부에 태극기를 휘날리며 심재덕의 미국 MMT 100마일 산악마라톤 우승기
꿈꾸는 자의 세계 2부 - 복장과 장비의 선택
마라톤도 헝그리 정신에만 의지해서는 안 되고, 과학을 접목시켜야 좋은 기록과 경기력 향상을 가져올 수 있다. 두말하면 잔소리다. 잘 먹어야 잘 달리고 충분한 연습도 할 수 있고 연습을 통하여 실전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나의 경우는 어떤가? 먹는 것은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편이고 물은 주로 오가피 달인 물을 매일 가지고 다니며 마셨고 한약은 이번 대회를 위해 보름치 3회를 먹었다. 주중의 반은 소고기와 해물탕 장어를 구워 먹고 주중의 반은 된장국 위주로 식사를 했다. 간식은 주로 떡과 빵을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매일 먹음으로써 조금씩 작게 자주 먹는 습관을 들였다. 이것도 벌써 오랜 세월을 그렇게 해오고 있다.
복장과 장비의 선택
무엇을 착용하고 달릴 것인가? 주로의 상황은 짧은 시간이 아니고 긴 시간이고 날씨 또한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에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여 만반의 준비를 다 하기로 했다. 여러 가지 테스트를 거치고 구입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어갔다. 선택된 리스트를 보면 트레일화는 신어보지 않아서 배제하고 쿠션이 발 형태에 잘 맞는 아식스 타사 저팬으로 정했다. 중간 지점에 교환 하게 된다고 가정해 뉴발란스 653도 준비했다. 양말은 인진지, 쿨맥스 삼각팬티, 그 위에 블랙야크의 여성용 사각 팬티를 입게 되었다. 이 제품은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고 기능으로 보아선 전천후로 손색이 없는 탁월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실전에서도 놀라운 편의를 제공해주었고 배꼽아래로 주머니를 4개 만들어 여러 가지 비상품들을 담고 달릴 수 있게 하였다. (비상품 : 사혈침 1개, 챕스틱 1개, 비타민 영양제 1개, 영양 보충제 6알, 진통제 2알, 정제염 1알) 종아리와 무릎은 테이핑하고 왼쪽 허벅지에는 잌투스 물고기 그림을 매직으로 그려넣어 신앙의 표식을 하고 유두의 2곳은 대일 밴드로 열십자로 2개씩 붙이고 상의는 긴 티셔츠 위에 짝 달라붙는 유니폼을 입고(유니폼 가운데는 작은 태극기와 영문자로 코리아를 넣었고) 흰 장갑착용, 겨울용 빵모자(출발시 착용), 시계, 허리에 묶은 귤주머니로 만든 영양젤 주머니, 물을 담을 수 있는 허리벨트, 양파자루로 만든 배낭, 물을 빨아먹을 수 있는 물호스, 1회용 비닐은 출발 후 몸이 데워지면 버리기로 하고 복장과 장비 준비를 마쳤다.
비자 발급 받기 MMT 대회 등록은 2005년 12월경에 소나무님이 해주셨고 비자 발급 받는 일이 중요한 과제였다. 결격사유가 없으면 별 문제가 안되지만 911테러이후 미국에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는 얘기를 종종 들은 터였다.
조금 편하게 하려고 여행사를 통하여 신청을 했고 몇 가지 작성을 해야 하는데 번거로웠다. 비자가 이상 없이 제 날짜에 발급 받게 되기를 원했다. 신청한지 한 달 만에 인터뷰 날짜가 나왔다. 추운 겨울날 비자 인터뷰를 위하여 회사도 하루 쉬고 서울 미 대사관에 들어갔다. 인터뷰는 2분이 안 걸렸다. 많은 서류의 준비와 버스타고 5시간을 달려왔는데 야속한 느낌이다. 다행히 한국 직원창구에 걸려 캔설되지 않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미처 확인을 못하여 여권의 첫 장을 꿰멘 실밥이 회손 되어있어 만약 이대로 미국에 가게 되면 위조된 것이라고 입국이 취소 된다고 하여 여권을 재발급하여 다시 본인에게로 보내주면 비자를 발급해 준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왔다. 그 후 여권의 재갱신과 비자발급까지 한 달 이상이 걸렸고 비자가 나오던 날 무슨 장원급제라도 한 것처럼 많이 기뻐했다.
드디어 신대륙 꿈의 무대에 설수 있겠구나 지금까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견뎌낸 보상이라도 받은 듯이 마음은 벌써 MMT로 달려가고 있었다.
드디어 출국 출발 일주일 전 회사의 안전 담당 임원의 배려로 종합 검진을 받게 되었다. 먼 길 간다고 하여 혹시 건강상태가 어떤지 확인해 보자는 배려였다. 지금까지 달리기만 했지 내 몸이 어떤 상태인지는 확인해 보지않은 터여서 혹시 무릎의 관절은 종이짝처럼 얇아져 있지는 않을까? 가장 걱정이 되는 부분이었다. 무릎은 MRI촬영을 해보니 선명한 십자 인대와 연골도 두툼했고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다니 안심이었다. 14년 동안 달려오면서 누구보다 험한 장소에서 많은 대회를 참가했고 연습 또한 많이 했었는데 많은 연습을 하는 것이 연골의 손상되는 등식은 아니라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몸에 무리가 되지 않도록 순리대로 풀어간다면 몸은 더 강하게 다듬어진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심장은 CT촬영을 하여 여러 각도에서 각 기능을 보여줬는데 역시 막힘이 없고 심장에서 나가는 굵고 선명한 세 갈래의 동맥을 확인할 수 있어 마라토너들의 심장은 다 이렇게 튼튼하고 깨끗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심장 초음파도 이상 무, 심전도 검사에서 맥박은 1분당 40회로 서맥이었고 역시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중요부위 건강검진에서 모든 것은 달리기에 적합한 상태라는 결과에 대해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출국에 앞서 자신감을 하나 더 갖기에 충분했다.
대회 참가일정은 2006년 5월 10일부터 17일 까지 7박 8일이었다. 9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일단 서울로 향했다. 긴 여정은 버스를 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요즈음 고속도로가 잘 되어있어 4시간 조금 더하면 서울에 닿을 수 있다. 이전에는 7시간이 걸렸었는데 세상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 누님 집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10일) 아침 8시에 인천공항에서 함께 동행할 소나무님을 만났다. 오늘이 세번째 만남이지만 아주 오래된 벗처럼 포근한 친구같이 느껴졌다. 이제는 사나 죽으나 난 소나무님을 잘 모시고 잘 따라다녀야 한다. 사실 언어의 장벽이 원정길엔 큰 부담이다. 혼자서는 이렇게 나가는 것이 쉽지않기 때문이다. 먼저 미리 신청해 놓은 로밍폰을 찾고 UA항공사에서 체크인을 하였다. 머무를 호텔 이름을 기입해야 하는데 우리가 머무를 장소를 정확히 모르지만 대회가 열리는 리조트의 주소를 기입했다. 무사히 출국 심사를 받고 나갔는데 중국으로 4인조 5종경기에 참가하는 수원분들을 만나게되었다. 이것도 인연인지라 서로 인사를 하고 선전을 기원하였다.
출국은 10시5분 일본 나라타를 거쳐 환승후 4시 30분에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비와 안개가 진하게 끼였으므로 비행기가 이륙하지 않으면 어찌하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가시 거리가 좀 더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신대륙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아름다웠다. 해안가를 활용한 도시구획과 숲과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려 물과 나무의 조화로운 풍경은 여유로웠다. 해를 따라 신대륙에 안착한 시간이 한국시간으로 11일 새벽 01시였고 샌프란시스코는 10일 09시였다. 입국 심사와 검색은 우려만큼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문 검색을 하고 얼굴 사진을 촬영하고 빠져 나온 시간은 10분 정도 소요됐다. 영어로 질문을 한다기에 가상의 문제를 만들어 정답을 공부했는데 그런 것은 한마디도 묻지 않고 무사통과를 하고 나니 두려움은 가셨는데 이젠 어떻게든 대회 출발라인에 서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뿐이었다. 미국 입국은 까다롭게 한다. 익히 얘기로 들은 터라 불필요한 것은 가져오지 않는 게 상책이다. 검색대를 통과하려면 허리벨트도 풀어야 하고 신발도 벗어 맨발로 검색라인을 통과해야 한다.
현지시간 아침 11시에 LA행 탑승 전까지 40분이 남았다. 점심은 샌드위치를 맛보기로 했다. 딱딱했지만 씹을수록 단백한 맛이 났다. 본토의 콜라 맛은 한국과 차이가 없었다. 이렇게 몇 일을 햄버거와 살아야 하는 첫 번째 만남이었다. 공항의 날씨는 엷은 구름이 긴 따뜻한 한국의 초여름 날씨와 흡사했다.
LA행 국내선 항공기는 총6석의 소형 항공기로 평일이라서 그런지 승객은 절반정도 탑승했고 한시간 반 만에 도착했다. 이제 워싱턴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시간은 다음날 6시여서 공항을 빠져 나와 잠을 자고 다시 들어오기가 어정쩡한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공항에 죽치고 앉아 있기는 아쉬웠다. 오후시간은 3시간 코스의 관광을 다녀오기로 하고 청색 버스를 타고 5분 거리의 정류소에 하차 후 바다로 가는 버스를 기다려도 도무지 나타나지 않아 택시를 붙들어 세웠다. 미국에서 택시 잡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주로 자가용과 콜택시 문화여서 불편한 동네였다. 10분 거리의 ‘피싱맨스빌리지’까지 20불을 지불하고 항구에 내렸다. LA를 한바퀴 유람하는 크루즈요트를 타고 싶었지만 마침 휴일이어서 해안선 구경은 물건너 갔다. 20kg이나 나가는 여행용 가방을 끌고 작은 배낭하나 짊어지고 다니는 길에 힘이 쭉 빠졌다. 겨우 4/1을 걸었을까? 요트 정박시설은 끝이 안보일 만큼 많았다.
저녁을 조금 일찍 해결하고 공항에 어둡기 전에 들어가기로 했다. 마침 내가 태어나던 해에 오픈 했다는 오랜 전통을 가진 ‘WERA’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역시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건축양식에서 숱한 세월을 이겨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지역에서 아주 유명한 레스토랑이었다. 카운터 맞은편의 기념 사진첩에는 미국의 유명 배우와 정계인사가 다녀갔다는 사진 전시를 볼 수 있었다. 이곳엘 오면 당연히 이 레스토랑을 찾았나 보다. 야외 테이블을 차지하여 해안가의 요트를 감상하며 해물 스파게티와 소고기 스테이크, 샐러드로 저녁식사를 했다. 팁까지 합쳐 77달러를 지불했다. 마침 바람이 불어 출항을 준비하는 5척의 요트에 3명씩 타고 유유히 해안을 벗어나던 낭만적인 풍경은 이곳에서는 매일 목격할 수 있는 바다와 더불어 살아가는 휴양지임을 느낄 수 있었다.
LA공항으로 돌아와 다음날 6시에 비행기를 타기까지 시간을 보낼 마땅한 휴식처가 없었다. 우리나라 같은 편의 시설은 하나도 없고 오픈 된 카페는 10시가 되니 문을 닫았다. 공항에서 가방을 소홀히 하면 누군가 가져간다는 안내원의 주의사항을 들은 터라 행여 잊어버리지나 않을까 그놈을 꼭 붙들고 항상 같이 다니자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쉴만한 공간을 찾아보니 건물의 모퉁이에 사람의 왕래가 드문 곳이 있었다. 커다란 쓰레기통을 가로막고 청소용 비닐을 2장 바닥에 깔고 옷가지를 펴서 드러누웠다. 바닥이 시멘트라 냉기와 불안감으로 도무지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왜 이 고생을 해야 되지? 의문을 가지며 다음부터는 항공권 예매시 여러모로 고민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긴 밤을 그렇게 서럽게 뒤척이다 보니 시간은 지나 아침으로 이어졌고 시차의 변화와 뜬눈으로 지샌 밤으로 인해 눈이 따갑기 시작했다. 피로의 징후였다.
아침은 기내에서 주겠지 하고 기대했었는데 그냥 건너뛰고 말았다. 피로와 배고픔을 뭐라 표현하리랴마는 난 지금 워싱턴행 비행기를 탔고 점점 출발선 라인에 가까이 가고 있음을 기뻐했다. 안개 자욱한 LA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고도 1만 미터로 비행하며 동쪽으로 동쪽으로 날아가고 있었고 온몸의 뼈마디가 으스러지듯 피곤이 몰려와도 지금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함이 우러나왔다. 미국은 큰 나라다 보니 자국에서도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을 날아가야하고 시간도 틀리고 내가 살던 방식으로는 불편한 곳이었다. LA에서 5시간이 걸려 미국의 심장부 워싱턴DC에 도착했다. 한국과의 시차는 섬머타임제로 인해 13시간이 있어 밤 12시이며 이곳은 오전 11시였다.
이제 우리를 픽업해 줄 대회 관계자를 만나는 일인데 버스를 타고 짐 찾는 곳으로 이동하여 여행가방을 찾았지만 나가는 출입문이 여러 곳이니 어떻게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소나무님이 우리의 도착시간을 알려줬기에 마침 첫 번째 나가는 입구에서 그분이 먼저 A4용지에 영문자로 SO NA MOO라고 쓴 글자를 지적하기에 ‘으메 반가운 것! 휴 인제 살았다’는 안심을 하게 되었다. 공항을 빠져 나와 대회장 근처의 우리가 묵을 모텔로 가게 되었다.
고속도로 서남방향으로 달려가는 길은 높은 산이 보이지 않는 거의 평지와 다름이 없는 지형을 볼 수 있었고 조금씩 도심에서 멀어질수록 작은 동산이 나타났다. 조금씩 내리는 빗물에 젖은 숲은 짙은 녹음이었고 주택은 숲속에 쌓여 너무 시원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를 안내해 주시는 분은 70대는 되어보이는 분으로 전 대회장으로 이름은 앤드 디머니라는 분으로 이번대회에 제8, 10, 12 체크포인트인 피크닉 지대에서 자원봉사를 하신단다.
노란 스쿨버스를 앞에 두고 양쪽차선 차량은 일제히 정지였다. 한적한 4차로의 도로에서도 어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좋은 제도란 생각이 들었다. 봄비는 계속 내렸고 차창 밖의 풍경을 감상하며 1시간 40분을 달려 우리가 머물 ‘파이오니어 모텔’에 도착했다. 이분에게는 미리 준비한 넥타이와 전통 부채를 선물로 드렸다. 사실 우리 때문에 이분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100km를 가야 한다니 고마움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이곳에 오기 전에 신세진 분들에게 어떤 선물이 좋을까 고민하던 중에 한국을 알리고 기념하기에 는 전통부채와 태극문양의과 신라왕관 문양의 책갈피가 좋을 것 같았다.
모텔은 숲속의 별장이다. 이곳은 조오지 워싱턴 국립공원이 시작되는 곳으로 시내에서 많이 떨어진 변두리 지역이지만 대형 마트와 패스트푸드점이 들어선 곳으로 숙소는 잘 잡은 것 같았다. 마침 주인이 한국인이었다. 예약한 스텐스(대회장)도 한국인이 주인인 줄 모르고 했다고 하니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미리 예비해 놓으심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원래는 인도인이 주인이었으나 한국인이 하루 전에 모텔을 인수해 운영하게 되었고 우리가 첫 손님이라며 일을 배우고 있는 한국인 지배인이 반가워했다. 이곳에는 한국인이 전혀 살고있지 않고 한국인 여행객들도 거의 찾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들어왔던 길을 계속 직진하면 영화나 노래에 많이 나오는 ‘세나돈’ 드라이브코스로 유명한 곳이 바로 이곳이라 했다. 모텔은 50년 정도 된 옛날 건물이었으나 우리가 묵기엔 그리 불편함은 없었다. 먼저 짐을 풀기 전에 아침 겸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근처의 식당은 보이질 않고 이곳에서 한국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꿈이요, 햄버거라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할 것 같다. 맥도널드에서 세 겹의 고기가 들어있는 햄버거와 야채는 민생고를 해결하기에 충분했다. 싱싱한 사라다는 느끼한 기름기를 제거하는데 제격이었다.
오후 4시가 되어 대회장 스텐스의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키 큰 아저씨가 들어오기에 그분이 대회장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전통부채와 전통문양의 책갈피를 드리며 ‘당신들이 만든 MMT 대회에 참가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고 했더니, ‘지난해 본 대회 우승자와 2, 3, 5, 6위 그리고 다른 지역(늦게 안 사실이지만) 우승자 2명이 참가하게 되어 레이스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코스 설명회가 내일 오후 3시에 있으니 다시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하고 그는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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