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어수선한 시기에 청백리의 표상으로 회자되시는 하기의
세분이 없었다면 세종과 같은 성군도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여기 세분의 삶을 살펴 보자면...
먼저, 황희 정승께서는 아들 셋 중에 한명의 아들이 주색잡기로 방탕한 짓을
많이 해서 골치거리였을 때
몇 번이나 좋게 타일렀지만 고치려 하지 않자
하루는 밤늦은 시간까지 관복을 차려입고 대문 앞에서 기다리다,
고주망태가 돼서 들어오는 아들에게
“이제 들어오시는 중입니까?” 그러자 아들은 깜짝 놀라며 “아버님 왜 이러십니까?”
그러자 황희 정승께서,
“무릇 자식이 애비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내 집안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식이 아니니 내 집에 들어오시는 손님이나 마찬가지지요.”
“내 집에 찾아오신 손님을 정중하게 맞이하는 것은 예의인즉,
저는 지금 손님을 예의로 맞이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은 무릎을 꿇고 통곡하더니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다시는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두번째,고불 맹사성 선생께서는 세종 초기에 이조판서였습니다.
그의 복장은 늘 허름하고 낡은 차림이었습니다.
하루는 내를 건너려고 짚신을 벗고, 옷을 걷어 올리는데,
한 젊은이가 맹사성에게
“제가 이 내를 건너야 하는데 제 옷이 물에 젖으면 안돼서 그러니
저를 업어 건너편에 내려 주시면 10전을 드리겠습니다.” 하였답니다.
맹사성은 그 젊은이를 업어다 내려 준 후 “어디를 가는데 그리 좋은 옷을 입고 가는가?”
“제 부친이 맹사성 이조판서와 친구이신데 저의 관직을 부탁하러 부친의
서찰을 가지고 맹사성 어른을 뵈러가는 길입니다.”
“내가 맹사성이다. 자네같은 사람이 행여 관직에 오를
생각은 꿈도 꾸지 말고 부친에게 가서 ‘자식 인성교육이나 똑 바로 시켜
관직에 보내도록 하라 ’ 했다고 전해라.” 하고서는, 호되게 야단을 쳐서 보냈다 합니다.
비록 벗의 자식이지만 잘못을 지적하여 야단을 쳤기에, 그 청년은 몇 년을 자숙하며
겸손을 깨달은 후 말단 관직부터 시작했다고 합니다.
세 번째로, 세종 초기 대사헌(검찰총장)과판서를 역임한 정갑손 선생의 아들 정오는
효성이 지극했고 학문도 빼어났습니다.
정갑손이 함길도(함경도의 옛 이름) 관찰사로 있을 때, 아들 오도는
어느덧 훤칠한 대장부로 자라 있었습니다.관찰사 재임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한양에서
한 달 가량 머물다 함경도로 돌아와, 밀린 서류를 점검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사이 치러진 향시 합격자 명단에 자신의 아들 '오'의 이름이 ‘장원 급제자’로 뽑혀 있었던 것입니다.
향시는 지금의 도청격인 각 도의 관찰부에서 치르는 지방과거로, 향시에 합격하면
초시나 생원이 되어 한양에서 치르는 본 고사인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정갑손은 즉각 향시 출제위원들을 불러서 "정오의 합격을 취소하라." 명령했습니다.
출제와 채점을 했던 위원들은“채점은 공정했고 장원 자격이 충분하다”며
거세게 항변했지만, 정갑손의 태도는 꿈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내가 이곳 관찰사로 있는 한, 정오를 장원으로 합격시킬 수 없다.”
그날 밤, 정갑손은 아들을 조용히 불러서 “오야, 나는 네가 함길도 향시쯤이야
장원을 하고도 남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들 ‘오’ 역시 “네, 아버님 말씀이 어떤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경상도 외가로 잠시 내려갔고,그곳 향시에서 장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한양에서 치러진 과거에서 장원급제하여 어사화를 꽂고
아버지가 계신 함길도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청렴했던 정갑손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초가집에서 평생토록
무명 이불에 부들자리를 깔았고 비단 이불 한번 덮어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몰염치가 오히려 당당하게 호도되며 즉물적 가치관이 당연지사로 횡행하는
혼란의 극치인 요즈음,선현들의 검소했던 청백리 표상,세 분의 올곧은 삶이
새삼 가슴에 와닫아 올려 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