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에 관한 시모음 22)
나는 갈대랍니다 /박고은
갈대로 섭니다
술에 취한 듯
이리저리
춤을 추는
은발을 뒤 쓴 갈대
갈대로 섭니다
떠도는
백광부 넋인 양
꺼이 꺼이
울부짖는 갈대
나는 가을 갈대입니다
갈대/갈 때 /이희영
오후 3시 지하철 내 옆자리 할머니 옆에서 다섯 살 정도 된 여자아이가 ‘어머나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 여자의 마음은 갈대랍니다’라는 요즈음 유행하는 노래를 부른다 할머니가 다음 구절을 가르쳐줘도 꼬마는 계속 ‘여자의 마음은 갈대 갈 때랍니다’라고 반복한다 지하철은 갈대가 되어 갈 때로 흐른다 오늘은 갈대/갈 때가 문제다 꼬마에게 갈대가 뭔지 알아 묻자 뭐냐면요 여자의 마음이 다른 남자한테 갈 때가 됐다는 뜻이에요 아줌마는 그것도 몰라요 꼬마의 입술에서 앵두꽃잎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 꽃잎을 줍다가 나는 목적지보다 한 정거장 더 가서 내렸다
갈대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이향지
바람에 허리 휘어 바람 끝에 섰을지라도
제 의지로 서 있는 것들은 저리도 아름답다.
갈대는 바람을 꺾지 않는다.
누군가의 옷자락에 쓸리며 꺾인
변두리의 슬픔에 내 길이 닿았을 때
겨울 갈대는 꽃으로 서 있는 게 아니었다.
먼지 속에서도 빛을 만나면 제 빛을 녹여
겨울 갈대의 뿌리에 연두빛 반란의 무리를 전하곤 하는
차디찬 눈구렁에 섰을지라도,
갈대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지리산 갈대 /이원규
해마다 가을이면 자꾸만 쓸쓸해지는 마음에 갈대들이
보드라운 비질을 해주고, 봄이면 어미 갈대들이 여린 마음의
뼈를 곧추세워 줍니다.
키 큰 갈대밭 속으로 5미터 정도만 들어가면 그 누구도
찾을수 없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숨바꼭질이 있을까요.
그러나 가릴수 있는 것은 내 몸일 뿐,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는
마음이야 어찌 하겠는지요. 서산의 붉은 노을 바람이 불어오면
갈꽃들이 쏠려도 자꾸 그대를 향하여 쏠립니다.
아무래도 나는 그대의 철새 도래지, 우리는 모두 철새처럼
한 철 머물다 떠나는 누군가의 여인숙입니다.
바람부는 날이면, 바람 불어 내 마음도 마구 그대에게도 쏠리는 날이면
순천만 갈대밭으로 달려 갑니다.
갈대 /노향림
강변 둔치에서 갈대들이 무슨 생각에 빠져들었는지
얕은 물속에 몸 거꾸로 박혀 섰다.
멀리 지나가는 자동차의 긴 행렬을 멍하니 바라본다.
고개를 외로 꼬고 허리를 비틀어 꺾다가
공연히 누웠다 일어서다가
쏴아 바람 소리 흘려보낸다.
풀물 빠진 가을이 그 뒤의 언덕에
멍이 든 채 앉아 있다
갈대는 바람에 흔들리고 싶어 한다 /문지숙
포도주처럼 향기로웠던 내 청춘도 가버리고
모든 것이 스산하게 저물어가는 황혼의 가을이 찾아오면
아주 작은 눈빛에도 갈대는 흔들리고 싶어 한다
이제 일몰의 시각은 점점 다가오고
아무리 체념의 체념을 거듭해도
두렵고 고독 한 것은 혼자만의 일이 아닌 것을 알아도
어딘가에 기대고 싶고, 안기고 싶은,
세월에 주름이 깊어 가면
아주 작은 바람에도 갈대는 흔들리고 싶어 한다
순천만 갈대밭에서 /안행덕
갈대숲을 가로지른 외길
나무다리 위에서 만난 인연
갈대 사이 뻘에 발발발 기어가는
작은 새끼 게 한 마리
빨간 등딱지에 쪼그만 발
하도 귀여워 가만히 만져보고 싶었지만
행여나 잡힐까 쪼그만 게 발은
어찌나 잽싸게 달아나는지
갈대숲에 숨어버린 손톱만 한 게 한 마리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고
기다림이 지쳐 그리움 되고
갈대숲 겨드랑이 사이를 훔쳐보는 이 마음
아쉬움 한 덩어리 내려놓고 돌아서는데
짱뚱어 한 마리 메롱 하며 꼬리를 흔든다
갈대 /안용민
몰 랐 었 네
가을마다 사르라니
잎 흩날리며
사레질하던 그 모습이
아픔 이었다는것을.
따가운 가을햇살
치마폭으로 스밀때
허리 틀던 그 모습
뿌리 내리고픈
몸 짓 이었다는것을
곱던머리
순백으로 흩날릴땐
바람을 좋아하는줄 알았다
흩어지는 낱 알
달래어 둥지 틀고
바람에 쓸어지지 않으려는
마지막 몸부림 이라는것을
진정 몰랐었네
갈대 /원영애
밤을 해이 던
그리움이
이슬에 젖어
그 눈물
가슴에 담았습니다
기다림에
눕지 못하고
하늘가를 맴돌다
하얀 외로움에 지쳐
흔들리는 아픔입니다
어디쯤에 계시 온지
바람에게 물어 보아도
알 수 없어
허공에 풀어 놓고
목 놓아 불러 보았습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오시려나
하늘 향해
밤마다
하얀 날개 피워 올립니다.
순천만 갈대 /박남희
안녕, 너를 어떤 바람에게 맡길 수 있겠니? 너무 쉽게 뒤집히는 계절, 뒤집혀서 또 뒤집히고 싶
어하는 바람의 계절, 강이 스스로 물든다고 누가 말했니? 울어서 저 혼자 붉어지는 저녁 강
꽃이 식어서 열매가 되는 것보다 열매 없이 떨어지는 뜨거운 꽃이 좋아, 제 형체를 공기에게 주
고도 끝끝내 뜨겁게 타오르는 꽃, 가벼운 재의 마음으로도 너를 뜨겁게 보낼 수 있어서 좋아
누가 함부로 계절을 정의할 수 있을까? 계절과 계절 사이에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계절이
들어와 끼어드는 이 수상한 저녁에, 비발디의 사계 속을 떠돌던 음표들이 어디론가 망명을 떠나
는데,
아직 나는 너를 놓을 수 없어, 구름이 비를 선뜻 버리지 못하고 어디론가 떠도는 것처럼, 목이
쉬어 무성하게 자라는, 꿈꾸는 소리의 무덤을 버릴 순 없어
온전한 꽃도 되지 못하고, 일탈을 꿈꾸는 바람이나 안개도 되지 못하고, 끝없는 허기에 제 몸의
소리를 갉아먹는,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이 갈대를 또 누구에게 맡길 수 있겠니?
트로이 갈대 /조성심
하늘이 차다
회오리바람이 트로이 전역을 침입한다
갈대와 하룻밤 몸을 섞은 저 들국화
흔들린다는 것에만 충실할 뿐
몸 안과 밖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눈이 멀었구나
그렇게 숨어 있으면 모를 줄 알았지
둘은 그렇게 이른 아침 은빛 차 한 잔을 들고 서서
마주보지도 못하고 서 있다
트로이의 모래를 밟고 웃는 저 여인
머릿속에 갈대 바람 하얗게 차 있다
갈대의 그림자 속에서
하루만 살아도 그렇게 환해지는 것을
너무 오래 기다렸구나
소리 내지 못하고 한쪽으로만 기우는 갈대
사랑은 그런 건가보다
한쪽으로 기우는 마음을 자꾸 일으켜 세워도
다시 쓰러지는 그런 건가보다
가까운 거리에서도 닿을 수 없는 손
한 계절 이렇게 그늘에서 살다보면
낮게 떨어지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가슴에 두른 갈색빛 띠를 풀며
상처는 자꾸만 밖으로 나오고야 만다
가슴이 한쪽으로 쓰러지면 아프게 마련이다
그대로 서서 아파해라 트로이의 갈대여
갈대 /김재덕
그대는 아시는가
갈대가 은빛으로 보이는 까닭을
그대는 아시는가
갈대가 바람만 불면 왜 우는지를
세찬 비바람에도
꺾이지 아니할 갈대를
그대는 아시는가
갈대 /김춘수 (1922~2004)
1
너는 슬픔의 따님인가부다.
너의 두 눈은 눈물에 어리어 너의 시야는 흐리고 어둡다.
너는 맹목이다. 면할 수 없는 이 영겁의 박모를 전후좌우로 몸을
흔들어 천치처럼 울고 섰는 너.
고개 다수굿이 오직 느낄 수 있는 것, 저 가슴에 파고 드는 바람과
바다의 흐느낌이 있을 뿐
느낀다는 것. 그것은 또 하나 다른 눈.
눈물겨운 일이다.
2
어둡고 답답한 혼돈을 열고 네가 탄생하던 처음인 그날
우러러 한눈은 하늘의 무한을 느끼고 굽어 한눈은
끝없는 대지의 풍요를 보았다.
푸른 하늘의 무한.
헤아릴 수 없는 대지의 풍요.
그때부터였다. 하늘과 땅의 영원히 잇닿을 수 없는 상극의
그 들판에서 조그만한 바람에도 전후좌우로 흔들리는
운명을 너는 지녔다.
황홀히 즐거운 창공에의 비약.
끝없는 낭비의 대지에의 못박힘.
그러한 위치에서 면할 수 없는 너는 하나의 자세를 가졌다.
오! 자세- 기도.
우리에게 영원한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갈대 /양봉선
가냘픈 흰머리
바람에 무동 태우는
외로움의 꽃
광활한 세상
솜털처럼 부드러운
대자연의 꽃
하얀 꿈 나풀대며
젊은 날 추억 떠올리는
그리움의 꽃
갈대 /최재길
수렁 속에
손톱만한 새끼들
줄줄이 먹이고 있었던 게야
한여름 모진 땡볕
때론 바람처럼 울기도 하고
하늘 바라 손 비비다가
꼬챙이가 된 빛바랜 몸뚱이
엄동설한 황사바람
온몸으로 막아내며
남은 기력마저 다
자식에게 주고 간
어머니!
우리 어머니
갈대밭 /권온자
가을바람
스산한 한낮의 풍광
갈대밭 너머로 해돋이
무지갯빛 사연
얼싸안아
보듬어 본다
겨울로 접어드는
세월 냄새련가
아무런 소리없이
바람부는 대로 철따라
갈대숲 습지에 총달새
놀이 동산 만든다
그 누굴
반기려 하는건지
갈대밭의 가을 풍경 /임재화
화창한 가을 햇볕에
반짝반짝 빛나는 강물 따라서
금강 하구의 신성리 갈대밭에
사람 키보다 더 큰 갈대가
너무나 멋지게 서 있다.
끝없이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답답하던 마음이 활짝 열리고
금강 물 흐르는 모습은
마치 잔잔한 바닷물 흐르는 것만 같다.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오면
다소곳이 고개 숙인 갈대꽃은
부는 바람 앞에 살며시 몸을 맡기고
바람따라 흔들흔들 춤을 춥니다.
착한 갈대 /강민경
탄탈로스 전망대 언덕길에
키 큰 갈대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당깁니다
머리 위
성난 바람과 싸우다가도
사람과 만나면
고개 숙여 나긋나긋 인사를 합니다
백발 성성한 갈대의 머리가 민망하여
나도 얼른 고개를 숙입니다.
세상인심이 고약하여
보고도 못 본체, 알고도 모르는체하며
제 이득 챙기기에 바쁘고
나 같이 늙은 사람은 꼰대다 할멈이다 하며
내박치기에 급급한데
저 갈대는 참 착합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람 차별하지 않고
꾸벅꾸벅 인사를 합니다
생긴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게 사는
저 갈대의 세상이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