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들이 왜 고난을 받습니까?
(욥 1:1~5) 사단이 욥을 시험하다 “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2.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3.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 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4.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서론 : 사람들은 욥기 주제를 ‘고난’으로 생각합니다. 오해지요! 한국교회가 요셉의 꿈을 총리성공으로 해석하고 멈춘 것처럼 많은 신학자들, 설교자들이 욥기 주제를 고난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욥기를 문학 중의 문학이라고 치켜세웁니다. 고난처럼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문학 주제는 없기 때문입니다. 영문학 교수들은 신자이건 비신자이건 영어로 된 욥기를 읽으라고 합니다. 그만큼 욥기는 고난을 표현하고 묘사하는데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욥기 주제를 고난이라 정해버리면 핵심에서 벗어납니다.
요셉의 꿈을 신분성공으로 아버지도 형들도 오해하고 요셉자신도 오해합니다. 그래서 인생이 꼬이고 콩가루집안이 되어버립니다. 처음부터 요셉의 꿈이 총리라는 신분성공이 아니라 형제들의 입(入)애굽, 애굽에서 대민족을 이루고 네 어머니 아들들이 한 아버지 혈통으로 통합되고 언약전승의 망(輞), 즉 언약 인프라를 깔아놓은 것이 요셉에게 주신 사명,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배신하고 아우를 죽이려 하고 은(銀) 20에 팔아버리는 비정한 가족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의 꿈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니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욥기도 욥의 고난을 잘못 해석하는 것으로 꼬입니다. 처음부터 욥에게 일어난 고난을 제대로 해석했다면 친구들이 ‘웬수’가 되지 않았고 42장까지 갈 내용도 아닙니다.
욥기 주제는 고난이 아닙니다. 고난은 주제를 밝혀주는 소재입니다. 그럼에도 고난을 욥기 주제로 삼다보니 쓸데없는 논쟁에 휘말리고 욥은 상처 위에 또 상처를 당하는 것입니다. 물론 욥기는 고난으로 시작됩니다. 욥은 재벌로서는 드물게 깨끗한 사람입니다.
1절, 욥은… 온전은 인격이요 정직은 행동이요 하나님 경외는 신앙입니다.
이만하면 1등품입니다.
5절 마지막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했더라”
자식들을 위한 제사만 아니라 온전함과 정직함과 경외함에 항상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랬던 사람에게 최악의 불행이 닥칩니다. 13절 이하, 재산의 중심 가축들을 다 빼앗기고 종들은 죽임을 당합니다.
18절, 장남 집에서 식사하던 열 명 자식들이 지붕이 무너지면서 모두 죽습니다. 나중에는 2:7 종기가 나서 온 몸이 한센병 환자처럼 되었습니다. 오죽했으면 9절, 부인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죽으라고 합니다.
여기에 문학, 철학, 신학의 주제가 나옵니다. 욥이 왜! 고난을 당하느냐는 것입니다. 욥과 같은 사람이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느냐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들이 왜 고통을 당하는가? 문학가들과 철학가들은 의인이 당하는 애꿎은 문제를 놓고 오랜 세월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다윗 왕 시대 아삽이 그런 의문을 표합니다.
“…나는 악인의 형통함을 질투한다. 그들은 죽을 때도 고통이 없고 힘이 강건하다,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 없다…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다… 악인들임에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 난다… 내가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헛되도다…”(시 73편)
그래요! 목회하면서 보고들은 착한 신자들이 당하는 고통스토리는 그야말로 책 한 권을 쓰고도 남습니다. 우리교회에 중병에서 투병하고 신체적인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만 해도 20여명 가까이 됩니다. 매일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하니 용기를 잃지 마세요!
우리교회가 선교 협력하던 쿠르드족의 오 선교사님! 한국전력(韓國電力)을 다니다 소명 받고 선교사로 나섰습니다. 모범적으로 선교하던 중에 속이 쓰려 귀국해서 진찰 받았더니 위암입니다. 얼마 못 살고 별세했어요! 남편을 떠나보내고 사모님이 안암(眼癌)에 걸렸어요! 아들만 세 명인데 초등학생 중학생이던 아들들이 그랬답니다. 엄마까지 돌아가시면 하나님이건 교회건 없다! 그런 하나님을 안 믿겠다! 다행히 사모님은 생명을 구했지만 눈 하나를 살로 덮었습니다. 검은 안경이나 안대를 하고 다닙니다. 너무하다 싶지 않아요?
용인에서 목회하는 친구목사가 자기교회 여전도사님 주례를 토요일에 섰어요. 신랑도 전도사님입니다. 신혼여행은 월요일로 잡았는데 신랑이 주일에 용인에서 일산의 교회까지 승용차로 자유로를 달리다 졸음운전으로 즉사했습니다. 친구목사는 한 사람을 놓고 3일 만에 결혼식과 장례식 주례를 섰습니다. 같은 사람을 대상으로 빨간 넥타이 검은 넥타이 바꿔 맨 것입니다. 드레스를 입은 신부에게 축하한다던 입술이 상복을 입은 미망인에게 위로를 전하는데… 기가 막힐 노릇이었답니다.
미국 보스턴에서 2,500명 유대인을 상대로 목회하는 랍비 쿠시너는 장례식을 집례 하며, 병자들을 방문하며, 사별의 아픔, 사업의 실패, 자녀들로 오는 불행을 위로하며 사역하는 평범한 성직자였습니다. 그러다 세 살짜리 아들 아론이 희귀한 병에 조로증(早老症)에 걸렸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됩니다. 평생 키가 1미터 이상 자라지 못하고 출생하면서 늙어 가는 조로증. 그때부터 쿠시너는 평범한 성직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호소했고 원망했고 아이를 살려내기 위해 성직자라는 체통을 벗어던집니다.
아론은 할아버지 얼굴모습으로 15년을 늙어가다 죽습니다. 아들이 죽었을 때 쿠시너는 망연자실, 목회를 포기하려 합니다. 살면서 고난의 이유를 묻는 불행한 신자들에게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하나님으로 위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나는 삶의 상처를 입은 한 사람의 종교인이다!”고 말합니다. 쿠시너 랍비는 기도를 통해 고통의 의미를 물었고 다시 일어섭니다. 그리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책 한 권을 썼습니다.
<착한 사람들이 왜 고통을 받습니까?>
나쁜 사람들이 왜 잘 되는가? 에 대한 반대의 의문부호입니다. 이것이 문학이 시작된 이래 가장 관심 있는 주제였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해답은 없습니다.
어떤 이는, 인생에서 폭풍을 당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평을 내놓았습니다. 인생이 당하는 폭풍! 해당자가 나쁜 사람이라면 얼추 이해가 갑니다. 악하게 살았으니 벌도 받아야지요! 문제는 착한 사람들, 욥처럼 인격자들에게 인생의 마(魔)가 닥쳤을 때는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착한 사람들이 왜 고통을 받습니까? 내 문제라면 눈물 나지요!
"하필이면 왜 나입니까?"
처음부터 답은 없는 질문입니다. 의문부호임 알지만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못 견디는 것입니다. 그럴 때, 특히 남의 고통에 쉽게 해답을 내놓는 사람들을 위한 경고가 욥기입니다.
욥이 폭풍 같은 고통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묻습니다. 인격이 온전했던 욥이 왜 고통 받습니까? 정직한 사람 욥이 왜 고통 받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심으로 살던 욥이 왜 고통을 받습니까? 욥처럼 착한 사람이 왜 고통을 받습니까?
여기에 대한 질문에 요셉의 꿈을 아버지, 형제들, 요셉조차 마음대로 해석했다가 관계들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던 것처럼 욥기의 등장인물도 고통의 문제를 잘못 해석해 버립니다. 고통의 원인, 불행의 원인을 각자 입장에서 해석해버린 것입니다. 잘못된 해석서입니다.
고통의 원인에 대한 잘못된 해설방식이 대략 네 가지입니다.
㈀ 모든 고통에는 원인이 있다! 소위 권선징악입니다.
욥의 친구들 엘리바스, 빌닷 소발 같은 자기의(義)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이들 주장은 한마디로 권선징악론입니다. 착한 사람 상(賞) 받고 나쁜 사람 벌 받는다! 그래서 착한 내가 왜 징벌을 당하느냐? 는 욥의 주장에 네가 벌을 받는 것을 보니 =(equal) 너는 악인이다! 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지금도 이런 사람들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무조건 회개하라는 사람들! 무책임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믿음으로 무장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더욱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 나는 100% 의인인데 왜 내게 불행한 일이 생기느냐? 이건 옳지 않다, 나는 억울하다는 주장입니다.
친구들의 정죄에 대해 욥이 내놓은 논리입니다. 인생에서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세 친구들이 정죄하자 욥은 끝까지 나는 억울하다, 나는 죄가 없다! 를 반복합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해… 우리 아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해… 이건 불공평해….
㈂ 불가지론(不可知論)입니다.
하나님은 무한 영역이기에 존재를 모르겠다, 주장입니다. 그러니 불행의 원인도 모르겠다, 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운명론 내 팔자론으로 귀결됩니다. 내게 왜 이런 불행이… 내 팔자지 뭐… 팔자가 펴질 때를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 유대교 랍비 퀴시너는 하나님 동정론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세상의 고통이 불공평하게 분배되고 있음에 분노합니다. 불행은 나쁜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좋은 일은 좋은 사람들에게 일어나야 하는데… 불공평해…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이해하자고 합니다. 하나님도 인간들에게 잘 하고 싶은데 안 되는 일도 있지 않냐는 것입니다. 내 불행은 하나님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일어나기에 내 불행에 가슴 아파하니, 우리도 하나님에게 너무 불행의 이유를 알려달라고 밀어붙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장 그럴듯하지요? 이게 사실인가요?
어느 쪽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불행의 원인에 ㈀ 내가 죄인이지… ㈁ 내가 왜 죄인이냐, 죄 없는 나를 불행하게 하는 하나님이 나쁘지… ㈂ 뭔가 뭔지 모르겠다… 내 팔자다… ㈃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는데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도 가슴 아파하면서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를 하자… 어느 쪽입니까?
불행의 원인을 해석하는 방법을 갖고 친구들은 오래 쌓아온 우정을 망치면서 31장까지 싸웁니다. 그러다가 32장에는 엘리후라는 사람까지 링 위에 끼어들어 5파전을 합니다. 그러나 해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게 고통을 주제로 다루는 문학과 철학의 한계입니다. 고통의 원인을 밤새도록 논쟁해봐야 답이 없습니다. 설령 답을 내놓아도 당사자는 수용을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래요, 하나님께서는 욥이 너무도 잘 믿으니까 아주 귀해서 엄청난 축복을 주기위해 고통을 주셨다! 그래서 욥은 훨씬 더 많은 축복을 받았다! 옛날 욥은 친구들 해석에 자기주장을 하면서 참았지만 요즘 그랬다간 그렇잖아도 악이 받쳐있는데 몰매 맞습니다.
사람이 짐승입니까? 열 명 자식이 죽고 그보다 훨씬 더 잘 생기고 똑똑한 아이들을 주셨다고 그걸 고통의 결과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내 입장에서 생각해봐요! 시시한 대학 나온 남매가 교통사고로 죽고 서울대학교에 들어갈 남매가 출생했다! 이건 하나님의 축복이다! 이런 해석에 제 정신으로 할렐루야! 할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도 욥의 고통을 나중에는 잘 살았대요~ 라는 말로 너무 쉽게 설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 무책임한 것입니다.
요셉의 꿈을 오해하는 사람들처럼 욥의 고난도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두 번 성공을 이룬 사람입니다. 1차성공은 애굽 총리! 업적과 명예와 신분성공입니다. 2차성공은 용서와 언약교육이라는 인품성공입니다. 요셉이 1차 성공-총리신분에서 끝났다면 자수성가지 신수성가는 아닙니다. 요셉이 신수성가가 된 것은 2차 성공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인데 꿈을 오해하므로 고난과 갈등을 한 것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우리도 요셉의 1차성공에서 멈춥니다. 기도 뒷바라지 잘하고 성경교육 을 시켜 총리, 장관, 사장으로 성공하면 신수성가로 오해입니다. 진짜 성공은 성공 이후입니다. 왜 성공의 신분을 주셨나? 성공 이후의 기대가 큐티하는 부모들에게조차 없어요! 그래서 간증을 들어보면 주일성수 하고 교회생활 잘 하고 엄마가 새벽기도를 잘 해서 성공했다… 거기서 끝납니다. 이런 잘못된 번영신학을 깨고자 했던 것이 신수성가 설교입니다.
욥기를 오해하는 것도 같아요. 욥기의 주제를 단순히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욥기는 고통을 주제로 하는 책이 아닙니다! 욥의 고통은 더 큰 것을 보여주는 소재일 뿐이지 주제가 아닙니다. 이걸 모르니 고통의 이유를 놓고 마음대로 해석합니다. 이것이. 문학의 한계 철학의 한계입니다.
▲강정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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