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이 넘쳐 신록의 융단이 천지를 뒤덮고 있는 7월 초, 과거에는 봉화와 더불어 오지였던 영앙을 답사해 보다.
학교 친구 중 한 명의 고향이 영양이었던 관계로 35년 전쯤 영양을 가 본 적이 있다.
오래 된 기억이지만 한여름의 더운 날씨였는데도 계곡물은 한낮에도 얼음같이 차가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농로 비슷한 좁은 길을 차를 몰고 가다 농로 옆의 관개수로용 개울에 차바퀴가 빠져 버렸는데 이를 어찌 빼나 고민했는데 의외로 간단하게 궁지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바로 지나가는 경운기에 도움을 요청했고 경운기에 상비품인 밧줄을 연결하여 난관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아득한 추억의 영양을 35년만에 다시 가보게 되었다.
도로사정이 좋아져서 영양으로 접근하기는 쉬워졌으나 아직도 영양은 선뜻 가지지 않는 내륙의 땅같은 인상이 있다.
그 영양의 매력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청송 소헌공원
영양 가기 전 예상보다 빨리 청송에 도착하게 되어 이동 동선에서 가까운 소헌공원에 잠시 들렀다.
복원된 청송객사와 찬경루, 소헌왕후 비석이 정비되어 있다.
소헌왕후가 세종의 왕비가 되면서 청송은 1895년 갑오개혁 때까지 청송도호부가 되었다
찬경루는 소헌왕후 심씨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청송 심씨의 시조묘를 바라보는 곳에 누각을 지어 조상을 우러러 찬미한다는 의미에서 찬경루(讚慶樓)라 이름지었다.
청송 심씨 시조묘를 향하여 선 누각 찬경루
2) 청송 군립 야송미술관
야송(野松) 이원좌(李元佐)의 청량대운도를 전시하고 있다. 이 그림은 46m X 6.7m의 대작이다.
야송 이원좌가 1989년부터 청량산의 골과 봉우리늘 답사하며 스케치를 해서 1992년10월에 그림을 완성했다.
그림의 가운데쯤 청량사와 탑이 조그맣게 보인다.
청량대운도
3) 영양 두들마을
두들마을이라 함은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며 화매천을 끼고 깎아지른 절벽이 마을을 떠받치고 있는 지형이다.
이곳은 재령 이씨의 집성촌이며 고택이 산재해 있다.
입향조는 석계 이시명이며 그는 사마시에 급제했으나 임진왜란 후 광해군 시대의 혼탁한 세상에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어지러워 영해에서 이곳으로 은거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석계초당을 열고 후학을 가르쳤으머 후에 후손들이 석천서당으노 중건했다.
이시명은 스스로 청빈한 삶을 실천하여 물려받은 노비 20명을 돌려보내고 그의 집인 석계고택은 양반집 형태인 "ㅁ"자가 아닌 " 二"자형으로 안채와 사랑채를 짓고 곶간채를 짓지 않았다.
지금의 석계고택은 관리가 잘 안 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또한 부인과 함께 도토리나무를 일찌기 심어 구휼식량으로 활용하였으며 그의 학문의 소문을 듣고 온 접빈객으로 도토리죽을 끓였다 한다.
석계 이시명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사람이 부인 인동 장씨 계향이다.
이시명이 퇴계학파 학통을 이은 장흥효의 문인으로 있을 때 그의 사람됨을 알이본 장흥효가 19세 딸을 이시명에게 시집 보냈다.
이시명에게는 사별한 본처와의 사이에 1남 1녀가 있었는데 외동딸인 그녀는 영해 인량리 충효당에 시집 와서 6남 2녀를 출산하고 전처 소생을 합하어 7남3녀를 훌륭히 키워내고 3남 갈암 이현일은 이조판서에 오른다. 이런 연유로 그녀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이라는 호칭이 붙는다.
그녀가 시집 오기 전 영해 인량리 시댁에서는 두 아들과 두 며느리가 잇달아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는 시집 와서 다산의 기쁨을 시댁에 안겼다.
그러고 보니 영해 인랑리 충효당은 높다란 석축 위에 큰 안채가 얹혔고 안채 뒤로 사당이 있고 그 입구에 큰 회화나무가 있었던 모습이 기억난다.
자식을 잘 키워 일곱 아들을 "7현자"로 불리게 했으며 남편과 네 아들, 두 명의 손자가 나라의 부름을 받은 "7산림"으로도 불리웠다.
그녀는 학문, 예술, 음식에도 조예가 깊어 조선 최초의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이라는 뜻의 음식디미방의 "디"는
한자 지(知)의 한글 표기다.
문경새재길에 산불조심이 "산불됴심"이라 표식에 새겨져 있듯이.
"음식디미방"이라는 책은 근 40년 전에 알게 되었는데 집안에 어르신이 식품과학 관련 책을 여러 권 저술하셨는데 초벌 인쇄의 오탈자나 국문법적인 오류를 교정하는 일을 도와 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 특이한 책이름을 알게 되었으며 "음식지미방"으로 때로 표기되기도 했었다.
음식의 조리법과 발효보관법 등 146가지가 소개되어 있다 한다.
두들마을에는 "음식디미방 체험관", "여중군자 장계향 예절관", "장계향 유물전시관"이 독립된 건물로 자리하고 있다.
또한 "정부인 안동 장씨 유적비"가 3면에 빼곡하게 일생을 기술한 내용으로 채워져 1989년 높다랗게 세워졌다.
7남3녀의 자식교육, 남편을 따라 청빈한 삶, 음식디미방 저술, 시도 썼다는 그녀는 조선시대 슈퍼 우먼일 것이다.
소설가 이문열은 석계 이시명/음식디미방의 저자 정부인 장씨(장계향)의 13대손이다.
작가 이문열은 고향 두들마을에 광산문학연구소를 지어 집필실과 문학도 양성을 계획하였는데 2022. 6 30 밤에 누전화재로 전통 목조한옥기와 두 채가 전소되었다.
영양군의 예산지원으로 2001년 5월 지어진 연구소는 화재의 잔해만 남은 채 폐허로 방치되어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이문열은 다시 집을 짓지 않으리라 한다.
두들마을 석간고택. 소설가 이문열의 5대조 이수영의 고택. 이문열이 유년시절을 보낸 집이다. 드물게 박공지붕을 취하고 있다.
두들마을에 핀 접시꽃
화재로 폐허가 된 이문열의 광산문학연구소
4) 영양 두곡산방(杜哭山房) 육잠스님
육잠(六岑)스님은 거창 덕동에 두곡산빙을 짓고 은거하다가 주위가 난개발 되면서 영양 산골로 옮긴 지 10년이 되었다고 한다.
비가 약간씩 내리는 가운데 스님을 만나 뵐 수 있을지 확신이 없는 가운데 암자에 다다르니 스님이 거기 계셨다.
사람은 말로써 소통하지만 스님의 평온한 표정에서 이미 마음을 읽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부드럽고 천진한 것 같은 표정에서 힌없이 유약한 듯 하면서도 강렬한 평화의 힘이 느껴지는 얼굴이다.
얼굴살이 적고 노동으로 낯빛은 짙으며 목소리는 저음이 아닌 채 전해 들은 젊은 시절의 강건한 풍채는 조신한 몸동작이 몸에 배어 있다.
TV에 나왔던 모습보다 몸은 가늘어지고 얼굴살은 줄었는데 눈빛은 더 선해지고 표정은 더 평온해지셨다.
스님은 출가해서 해광(海光)이라는 법명을 받은 지 어언 41년째, 손수 지은 오두막 산거에 낮에는 지게 지고 밭일을 하고 빔에는 묵으로 그림도 그리고 침선도 힌다.
일찌기 물질의 유혹에 초탈하고 성과에 급급한 세속을 떠나 자연에 귀의하여 자연 속의 은둔 수행자로 살면서 어느듯 부처가 되어버린 스님, 정검(靜儉:고요하고 검소함))이라 쓴 편액 아래에서 짧은 말씀을 하신다.
정검은 욕심 부리지 않고 소박하게 사는 것이며 이를 실천하면 청빈의 삶이 될 수 있다.
그러면 덜 힘들게 살 수 있고 돈도 덜 벌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세속적인 계산된 삶을 따져보는 눈빛은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맑은 눈동자의 육잠스님.
스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해 본다.
가난한 사람은 덜 가진 사람이 아니라 더 가지려고 하는 사람이다
무소유란 어떤 경지인가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에서 평화를 얻을 수 있는가
스님은 서화집을 잠시 보여주신다.
인사동에서 전시회도 히셨다는데.
비 오는 닐은 밖으로 나오지 않는 뱀을 생각하며 행복해 하는 개구리의 선화는 화두와도 같은 신선함을 준다.
스님의 표정은 참 선하고 평화롭다.
인상은 가공될 수 있지만 관상은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해 본다.
서양에도 관상에 해당하는 physiognomy라는 단어가 있어 관상은 인류 공통의 관심이듯이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감출 수 없는 내면의 깊이가 스님의 얼굴에서 느껴진다.
육잠스님의 평화로운 얼굴에서 언뜻 베트남스님 탁낫한의 표정을 발견한다.
육잠스님은 살아있는 것은 쉬지 않고 움직인다 (생명불식.,生命不息)라고 설파히시면서 신성한 노동을 통하여 뿌린대로 거두리라를 실천하고 계실 것이다.
이것은 성경(As you sow, so shall you reap)에 나오는 말이지만 진리에 종교의 경계가 어디 있겠는가.
스님은 자연 속에 스승을 두고 살아서 얼굴이 그렇게 사무치도록 평화로우신가요.
법당의 근엄한 부처님보다 경주 남산의 부드럽게 웃음 띤 돌부처를 닮은 스님.
1km의 오체투지길도 만들어 놓았다.
오체투지는 내가 아닌 남을 위해 하는 것이라면서.
스님의 수행을 다룬 (단순하게 소박히게),( 그 겨울의 산사)등의 TV 방영분은 You Tube에서 조회할 수 있다.
https://youtu.be/FyvgC0Xwp3A
https://youtu.be/u7FsfrXJ-I0
스님을 만나뵙고 웃는 얼굴이 아니면 육잠이 아니다라고 표현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육잠(六岑)스님은 원래 지잠(之岑, 갈 之, 물가언덕 岑))이었는데 한학자인 청명선생에게 보낸 편지의 답장에 육잠(六岑)으로 씌여져 있어서 육잠으로 바꿨다고 한다.
갈 지(之)자가 여섯 육(六)으로 읽혔나 보다.
밁은 눈빛과 선한 표정의 평화로운 얼굴의 육잠스님
두곡산방 앞에서 스님과
5) 영양 서석지
서석지는 민간정원이면서 국가민속문화재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광해군 때 성리학자요 시인이었던 정영방이 만들었다.
60여개의 서석이 연못물에 잠기거나 수면에 드러나 있어 울창한 연잎과 수면과 어우러져 서석지의 분위기를 상승시키고 있다.
연못의 주위에는 매화, 국화, 소나무, 대나무를 심어 조경을 완성한다.
연못 옆 정자에 앉으면 아무 말 없이도 오래도록 앉아 있을 것 같다.
연잎은 잎에 고인 물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받아들이고 넘치는 물은 흘려 보내는 지혜를 배우라고 정자에 앉은 사람에게 이르는 것 같다.
빗방울을 머금은 연꽃
감당할 만큼의 물만 보듬는 연잎
원추리가 운치를 더한다
연지 앞에서 하염없이 앉아서
6) 죽파리 자작나무숲
수비면 죽파리 자작나무숲은 1993년 조성되어 인제 원대리보다 19년이 늦었으나 자작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있으며 면적은 30헥타르(9만 평)라고 한다.
밤새 내리던 비가그친 후의 청명한 아침에 죽파리로 향한다.
주차장에서 자작나무숲까지는 넓게 조성된 평지 흙길로 5km 정도 된다.
이 길로 올 7월부터 전기차 셔틀이 예정되었으나 9월로 미뤄졌다고 한다.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산길을 걷는데 숲속에 간간이 세찬 바람이 불고 키 큰 자작나무는 춤을 춘다.
자작나무는 자라면서 가지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 가지흔을 남겨 하얀색 수피와 선명하게 구분되는 짙은 색깔로 줄기를 에워싸고 있다.
사람도 살면서 수없이 많은 상처를 받지만 그 상처의 흔적으로 나의 내공이 깊어질지 까칠한 생채기만 드러내고 살지 각자의 몫이 아니겠는가.
더위를 느끼지 못하고 왕복 10km를 도보로 내려와 늦은 점심을 먹는다.
반주로 마시는 막걸리, 테이블마다 막걸리가 남는데 마음 약한 나는 막걸리병들을 다 빈 병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다짐한다.
오후에는 봉화읍에 있는 도암정을 들르다.
이 정자 앞에도 긴 연못에 연잎이 울창하게 자라 있고 연꽃은 아직 피지는 않았다.
영양에는 국제밤하늘보호공원, 반딧불이생태원도 있는데 어떤 매력이 숨어 있을까 궁금하다.
가지흔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자작나무
연꽃이 필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기
첫댓글 숲속 나무들 흔들림이 마치 태풍이라도 맞은 듯하네요.
순례기 고맙게 잘 읽고 갑니다.
이번 일정에서
외진 산속에서 청빈한 삶을 사시고 계시는
두곡산방 육잠스님을 뵙고 싶었지요.
사진으로나마 가까히 보니 참 눈빛이 맑습니다.
죽피리 자작나무숲^^
9월에 전기차 셔틀이 다닌다면 가야 할 곳으로 찜해 둡니다.
잎들이 서로 부비는 바람소리 들으러...
1박2일 일정을 상세한 후기로 마무리 해주신 덕에
감사히 봅니다!!
육잠스님의 맑은 표정과 깊고 선한 눈의 밑바닥 정신세계의 끝자락이라도 흉내 낼 자격이 있을까 자문해 보았습니다.
인공으로는 연출할 수 없는 그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었던 순간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인간은 어찌 하여 때로 사무치도록 절실한 그 무엇을 위해 허공을 자맥질 하고 있을까요.
죽파리 자작나무숲 입구까지 5km는 경사가 없는 평탄한 흙길이어서 편했습니다.
전기차 운행을 위해 도로폭도 널찍하고요.
보리님이 가시면 환영하는 횃불이 자작자작 타오를 것 같습니다.
돌아와서는 강천식당에서 매콤한 돼지주물럭(두루치기 같은)으로 요기도 하시고~
아시아권 최고의 요리서를 쓰신
'음식디미방'의 정부인 안동 장씨(貞夫人 安東 張氏)를 다시 떠올려봅니다.
지난 5월에 그분의 친정인
안동 경당고택(敬堂古宅)을 방문하고,
장흥효의 11대 종손이신
장석진 선생님과 종부 권순 여사님께 인사를 드린 일이 있지요.
그곳 종택을 둘러보고
말씀 나누는 중에,
그분께서 직접 차리셨다는
제례상차림 사진을 보여주셨는데,
사진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대대로 이어지는 종가의 가풍을 느낄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상과 덕목들이 잊혀져가는 것만 같아
많이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자연의 철학자들'에서 만나뵌
풍외암(風外庵) 육잠(六岑) 스님을 뵈니...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지!
새삼 다시 느껴집니다.
조금이라도 실천할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정검(靜儉)을 저도 마음 속에 들여놓아 봅니다.
후기 글을 사진과 함께
이토록 자세하게 올려주시니
읽어내려가는 동안
제게 큰 공부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문명이 디지털화될수록 단순하게 살기는 더욱 요원해지는 것 같습니다.
작음 속에 아름다움이 있고 적음 속에 풍요가 있음에도 탐욕의 노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생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오늘도 답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상을 우러러 찬미한다는 찬경루~부터
연꽃과 연밭을 마주하는 여행자들의 앉음의 자리까지
답사기의 후기답게 절절거리며 훑어보았습니다.
청량사를 에둘러 그 곳 풍경을 즈려밟게하고픈 이원좌 님의 대작~
정말 품격 높은 그림작품입니다.
직접 못봐서 아쉽지만 언젠가 볼 수 있는 여지를 주셨네요.
청송, 봉화, 영양 등 곳곳의 이야기와
자작나무의 바람결까지, 심금을 울려줍니다.
그리고
두곡산방 육잠스님의 검정고무신까지도
청빈한 삶과 맑아진 영혼에 대한 울림들이
잔잔하게 한편으론 고요함으로 다가옵니다.
제가 좋아하는 연꽃과 자연들의 스며듦,
연잎이 담을 수 있는 물의 양으로
사람의 욕심에 대한 깨우침.
살짜기 들여다보고 갑니다~^^감사드려요
육잠스님의 청빈에 대한 말씀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난하였으므로 불행하지 아니 하였노라."
나직히 그러나 힘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하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