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차대전이후의 유럽 개관
( 1920-1930년대 베르사이유체제를 중심으로)
*일반적 특징(2차대전의 역사적 배경)1. 국제적, 국내적, 정신문화적 대립양상이 뚜렷해 짐
A, 국제적
대전후 국제정치 특징*자유주의와 반자유주의: 전체주의와의 대립
1. 안전보장과 유럽적 질서유지로 인한 위험요소에 대한 보장 및 베르사이유체제를 강화하려는세력 (특히 프랑스)과 이를 타파 또는 수정하려는 세력 (즉 새로운 전후질서를 원하는 세력 (독과 소련)과의 대립 -(특히 국제연맹이 중심무대: 민족 국경 영토 군비축소 소수민족문제):-독오통합론, 독소협력관계 개선, 국제연맹무용론 -파리회담의 불참으로 인한 민족적 자존심, 독일인의사 존중 없이 연합국의 결정, 철저한 배상: 히틀러의 급진적 민족주의가 대두(독오통합론)
2. 미국의 고립주의적으로 전환. 영연방 자치국 및 일본의 유럽문제 관여; 상대적으로 유럽세력의 약화(워싱턴체제는 고립주의를 완전포기하지 않음을 자인: 1923년 불의 루르점령이후 미국은 경제적 외교적으로 독일을 후원: 영미세력의 도움으로 로카르노체제가 성사
3. 소련 볼세비즘의 확장(코민테른을 통한): 위협적 세계혁명론 원칙 4. 일본의 극동에서의 권력팽창 (워싱턴체제를 무시) 5. 이, 독의 파시스트당의 출현
B. 국내적
베르사이유 체제에 따른 제국의 해체, 공화정수립(신생국포함)의 영향-급진혁명적 운동을 방어하려는 세력 및 혁명이후의 새로운 헌법과 생존권 확장을 위한 투쟁세력의 대립 ( 보수 및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및 민족주의자 세력간의 대립과 갈등)-점진적으로 전체주의의 대두와 자유민주주의 세력과의 갈등이 심화 *현존하는 체제의위기: 독, 오 및 러시아 제정의 해체에 따른 결과는 구정치 사회세력의 구조적 대변화를 가능케함, 또한 이와 관련 시민적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정립과정에 적지 않은 변화를 야기함- 특히 독, 불 및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 폴란드, 체코에서는 신체제의 위기를 경험 함
C. 정신문화적
1. 대전과 혁명을 통한 인간의 정신적 방황과 물적인 손실을 치유키위한 시민의식의 고양2. 전후의 후유증을 가능한 빨리 회복하려는 행동방식이 중시되는 경향 속에서 모든 인간 존재의 변질에 대항하려는 정신적인 움직임과 이에 반한 대립양상이 심화/위기감의 일반적 성향:지식인은 서구인과 서구적 문화와 문명의 위기감을 감지, -유럽의 몰락과 신대륙 특히 미국의 부각을 인식하고 -기존의 개인주의적 보편주의는 신세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판단, -즉 지식은 충고부재, 몰락 및 의심과 충격에 휩싸이는 분위기
2. 기술과 응용과학의 발전: 합리화에 기여 -20년대 인간의 생활양식의 대변혁을 가능케 함 (러시아 포함)-기술과 의학을 포함한 과학의 영향은 인간생활의 구조를 변화케 함: -농공분야의 발전과 산업화의 새로운 단계에 따른 인간의 이성주의적 합리화에 기여: 예). 출산율감소, 물질주의에 따른 새로운 개인적 생활방식의 다양화, 예술창조에 있어서 형식파괴
3. 정치사회적 합리화 경향: 대중화, 전체화에 성공:정치사회적으로 합리화는 대중화에 기여 a. 새로운 조직의 필요성 즉 대중의 중앙으로의 집중현상과 b. 새로운 집단 지도 이념 및 체계를 필요로 함-대중화에 따른 선전 및 선거, 대중조작으로 인한 전체주의 경향화: -모든 국민과 인민이 조직화 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됨: 자유민주주의 체계의 총체적위기를 맞게 됨-영미의 모범적 체제와 상이한 사회경제적 기반과 풍토 하에 형성된 자민세력은 약화됨 (독, 중부 및 발칸지역의 국가)-대중화의 세계는 새로운 차원의 영구혁명론을 요구 (공산주의의 세계혁명)
*대중의 세속화과정은 급진적 변화, 발전하여 전체주의로 전환이 가능케 한 결정적 요인 -이때 종교의 역할론은 다양한 방향에서 대립: 기독교신앙의 새로운 이해를 필요로 함
1차대전과 영국
파리회담이 성사되기 전 1918년 총선에서 보수당과 자유당이 압승하여 연립내각이 탄생하였고 1900년 창당한 노동당은 참패하였다. 선거는 소위 카나키선거로 선전선동에 의한 흑색선거였다. 예 독일황제를 단두대에서 공개 처형하여야 하며 독일이 전쟁 배상금 전액을 부담해야 한다라고 선전하였다. 사실상 세계대전으로 인해 영국은 전쟁비용의 과다지출과 미국에 대한 막대한 부채로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상실하였다.
그 주요 원인을 살펴보면 가. 최대의 해운국의 면모는 독일 잠수함공격으로인한 선박을 대량상실로 상실되었다. ( 영국 선박의 4/1이 침몰) 나.전쟁시 군수품과 식량구입등으로 해외투자기업을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3/2를 인수) 다. 전쟁이전 러시아(1억만 파운드)와 터어키(2400만 파운드)에 투자한 돈은 받지 못하게 되었다. 특히 레닌은 모든 부체의 상환을 거부하였다. 라. 영국의 해외시장은 급격히 축소되었다. 미국은 이미 영국의 자치령에 농공산물을 덤핑하고 있었고, 특히 영국의 거의 모든 산업시설 전시군수 산업체제로 전환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속에서 전후 영국은 미국과 정반대로 특히 노동운동이 격화되고 자본주의가 쇠토하였다. 영국 노동자들은 총파업과 노동쟁이를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이러한 세력은 급진적으로 정치화 되었다. 사회주의 세력은 특히 1920년 발생한 소련과 폴란드와의 전쟁(1920)에 영국이 개입하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다. 영국의 실업율은 전쟁이전에 비해 1920/1921년 5.8%에서 무려 17.8%로 급격히 상승하여 최악의 위기에 처하였다. 따라서 제1차 노동당 내각의 성립되고 최초로 선거에서 노동당이 승리하였다. 볼드윈 수상과 후계자 멕도날드는 실업문제 타개에 주력하여 사회정책으로 주택법, 최저임금제, 실업보험제의 실시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전후의 대량실업과 대불황으로 국내문제의 근본적 타결은 결코 쉽지 않았고 모든 정치, 경제와 사회분야는 불안의 악순환에 빠지고 말았고, 영국 노동당정부는 9개월의 단명으로 끝났다. 이후 보수당이 1929 년 대공황 까지 재집권하였다. 또한 영연방의 성립으로 영국은 카나다, 오세아니아등 식민지 제국의 자치권 인정하여 해지지 않는 나라의 면모는 찾기어려웠다. 아일랜드는 전쟁시 독일측의 후원으로 무장봉기하여 독립을 요구하였고, 대전이후 게릴라 양상의 내전이 계속되었다. 결국 영국은 1927년 아일랜드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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