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희 李丙禧 (1918 ~2012)】 "의열단 활동 이육사와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 협의"
1918년 1월 14일 서울 종로구(鐘路區) 봉익동(鳳翼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眞城)이다. 조부(祖父)는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망명하여 환런현(桓仁縣)에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한 뒤 독립군 양성을 비롯한 교육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동하(李東廈)이다. 부친(父親) 역시 대구에서 장진홍(張鎭弘)을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 암살단의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의거를 일으킨 이경식(李京植)이다.
경성동덕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여자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조부와 부친의 뜻을 이어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1933년 5월에 종연방직주식회사(種淵紡織株式會社)의 여공으로 위장 취업하였다. 종연방직은 일본 미쓰이(三井) 그룹의 계열사로, 경성에 제사공장을 세우면서 조선에 진출한 일본 거대자본이 운영하는 기업이었다. 이 공장은 여성노동자들의 비율이 높았는데, 이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고통 받았다.
종연방직주식회사의 여공인 이효정(李孝貞)·변홍대(卞洪大)와 교류하면서 일본 자본의 폭압으로부터 고통받는 여성들을 돕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1935년 9월 여성 노동자 500여 명을 설득하여 노동 조직을 결성하였고, 회사 측에 노동자의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면서 총파업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일본 자본을 비호하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파업에 가담한 사람들이 경찰에 대거 체포되었다. 이때 총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1936년에 동대문경찰서에 붙잡혔고,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1939년 4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풀려났다.
194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박시목(朴時穆)·박봉필(朴鳳弼) 등에게 문서를 전달하는 연락책을 맡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의열단 활동을 통해 만난 이육사(李陸史)와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협의하던 중 이들의 활동을 탐지한 일제 경찰에 1943년 9월 붙잡혀 베이징감옥에 다시 갇혔다. 이육사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에 붙잡혔고, 베이징감옥에 함께 갇히게 되었다. 그곳에서 이육사는 “너는 목숨을 건져 더 큰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말하며, 위장결혼을 통해 출옥할 수 있는 방법을 권유하였다. 이육사의 부탁을 수락하여 1944년 1월 11일 선을 통해 만난 필부(匹夫)와의 결혼을 조건으로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이육사는 1944년 1월 16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이육사의 사망 소식을 듣고 유품과 유해를 수습하여 국내로 가져와 유족에게 전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