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고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지은 "부활"에 첫 내용이 생각납니다.
인간이 비좁은 곳에 모여서, 서로 밀치락 달치락하며 그 땅을 못쓰게 만들려고 아무리 파헤쳐도 아
무것도 돋아나지 못하게 하려고 돌을 깔아도, 조그마한 틈바구니 사이로 트는 싹은 말릴 수 없어봄
은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세상 이치겠지요 단양우씨 가족 모둔 분들에게도 마음
의 봄, 생활의 봄이 활짝 왔으면 좋겠습니다.
단양우씨 어르신네 및 가족 친지분들 모두 겨우내 두루두루 평안 하셨는지요? 전 어제 우연찮게 이
가페에 가입을 했습니다. 저도 물론 단양 우씨이구요 문희공파 31세손입니다. 오늘 등업을 해주셔서
카페 여기저기를 둘러보니 카페지기님께서 참 훌륭한 일을 하셨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다른 지식을
그리고 뿌리를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퇴계 이황" 선생님은 대한민국 1000원권 지폐에도 나오는 성리학을 체계화하고
집대성한 훌륭한 업적을 이룩하신 분이라는 것은 익히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역동 우탁"
할아버님께선 어떤 분이십니까? 이땅에 역학을 전파하시고 정주(程朱)의 의리(義理)학을 정연하여
통달한 학문적 바탕을 가지고 천도와 인륜을 밝히고 사회적 폐풍을 개혁하고자 여러 차례 상소를 올
렸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아서 벼슬을 버리고 낙향 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일반 대중들은" 우탁" 할아버님은 과연 몇 명이나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중
3 시절에 국어 참고서에 나오는 고려최초 시조 "탄로가"를 접했을 땐 참 뿌듯했습니다.
제가 왜 이황 선생님을 왜 들먹이냐면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황 선생님은 우탁 할아버님을 굉장히
높게 평가 하시고 어느정도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 되어집니다. 이황선생님께서 우탁 할아버
님 사후 200년 후 할아버님을 동방성리학의 祖라 극찬하고 은거지 예안에 역동서원을 세우고 할아버
님의 위업을 기렸는것에서도 알수 있는 것이지요
선대왕의 후궁을 농락 하는 그런 위정자들이 그 시대의 우탁 할아버님의 학문의 깊이를 제대로 평가
했겠습니까? 여기에 오신 많으신 분들의 참여와 관심이 나중에 한 알의 밀알이 되리라 믿습니다.
저는 아직 단양우씨 뿌리의 깊이에 대해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모쪼록 자료도 공유하고 궁금
하신 사항들은 토의하는 것도 좋겠지요?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