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와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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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쩨 사원
차가 험준한 산줄기 사이로 난 협곡을 빠져 나가자 길가에 좁지만 평지의 들이 작은 하천 옆에 형성되어 있다. 주변의 산들이 완만하고 그 기슭에는 집들이 흩어져 있다. 겨울이라서 가을걷이를 한 무채색 논에는 벼의 그루터기만 보이고, 물이 고여 있기도 하다. 어릴 적 축구도 하고 야구도 하며 뛰놀던 고향의 논과 논두렁과 많이 닮은 풍경이다. 길가의 어느 집 벽에는 빨래를 볕에 말리고 있고 마당에는 키가 크고 우람한 사이프러스 나무가 서 있다. 파로가 가까워지자 도로가에는 군부대 막사들이 보이고 절벽 위에는 오래된 절이 있고 흙담이 보이는 절터에는 바람에 룽다가 나부낀다.
파추(Pa Chhu)강 가의 평지에는 부탄 유일의 공항 활주로가 달리는 버스 속에서 보인다. 공항 건물들과 주차장, 관제탑이 보이고 이륙을 준비하는 비행기도 있다. 히말라야의 산 속에 이만한 규모의 공항을 만들 만한 평지가 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차가 산기슭 길을 몇 번 돌아가니 경사진 논이 굽어보이고 건너편 산 아래에 웅장한 건물이 보인다. 중앙의 첨탑 지붕은 황금색이고 그 아래의 지붕들은 붉은 색이며 외벽은 백색이다. 1995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제작한 영화 ‘리틀 붓다’의 촬영지가 되었던 파로종(Parodzong)이다. 이 영화를 통해 은둔의 왕국인 부탄이 외부 세계에 소개되었다.
‘보석더미 위의 요새’라는 의미의 린풍(Rinpung)이라는 이름을 가진 파로종은 1644년 티벹 군의 침공으로 일어난 전쟁 중에 국조 샵둥 나왕 남걀의 지시로 건축된 요새이다. 1897년의 지진을 견뎌냈지만 1907년의 대화재로 크게 파손되었다. 이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버스는 전통 건축 양식의 웅장한 이층 상가 건물들이 도열한 파로 시가지를 지나간다. 여기 파로는 1962년에 수도를 팀푸로 옮기기 전까지 부탄의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이고 지금도 장날에는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이다.
둥쩨 사원으로 갔다. 길가의 산 아래에 자리 잡은 이 절은 탑처럼 생겼다. 첨탑의 상륜부 아래에는 둥근 지붕 아래에 3층, 8각형의 2층이 있고 1층은 네모를 겹쳐 4방, 4유가 있어서 역시 8각형의 법당이다. 울도 담도 없고 작은 이 사원의 겉모습은 대수롭지 않지만 그 안에는 오백년이 넘는 벽화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불화의 보고이다. 철교를 놓은 엔지니어인 탕돈걀뽀 린포체가 건축한 보배로운 불교 유적이다. 사원에는 탕돈걀뽀상이 모셔져 있다.
마니차가 걸린 외벽의 감실에는 노란 물을 들이거나 백색의 어른 주먹 크기의 작은 탑들이 가득 놓여 있다. 그 모양이 마치 아이스크림을 닮았다. 죽은 사람을 화장하고 남은 유골을 갈아 흙에 이겨 만든 소탑들로 ‘참’이라고 한다. 망자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신앙의 산물이다. 어디를 가든 부탄의 절들은 관광지가 아니고 입장료가 없으며 불상은 미적 감상의 대상이 아니다. 절과 불상은 모두가 신앙의 대상이고 현재 삶의 일부이다.
일주문과 커다란 마니차를 걸어놓은 정자 옆에는 작은 귤이 노랗게 익어가고 날씨는 훈훈하고 공기는 맑으며 사위는 고요하고 햇살은 밝다. 우리를 위해 금당거사님이 정성껏 설명을 해준다. 나는 슬며시 절에서 빠져나와 주변 풍경에 취하였다. 그루터기만 남은 넓은 논바닥을 걸어서 멀리서 절을 촬영하고 논두렁 끝 산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의 집들도 바라보았다. 절 앞의 어느 집 담장 안에는 녹색의 잎사귀들 속에서 감귤이 샛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잠간의 이탈로 히말라야의 이상향으로 다가오는 부탄의 흙냄새를 맡으며 이국의 정취에 젖어 보았다.
절로 돌아오니 일행이 보이지 않는다. 법당 안으로 들어가니 조명이 전혀 없고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과 휴대폰 불빛으로 벽화들을 볼 수 있었다.
1층에는 참고 견디며 우리가 살아가는 사바세계의 보살인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을 중심으로 현교의 부처님들이 모셔져 있다. 2층에는 바르도(중음)에서 나타나는 104위의 적정존과 분노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3층에는 밀교의 최상 무상부 요가의 본존인 차크라삼바라, 바즈라요기니, 칼라차크라 등의 본존이 모셔져 있다. 둥쩨 사원은 부탄 불교 미술과 벽화 미술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한다.
1층에서 버터 등잔불이 켜진 관세음보살님을 참배하고 중앙 기둥과 벽체 사이의 복도를 돌며 좌우에 가득 그려진 벽화들을 보았다. 어둠에서 점차로 눈이 적응하자 적색, 녹색, 백색 등의 원색 물감으로 그려낸 불상들과 티벹불교의 조사들이 가득 그려져 있는 것이 보인다.
목조 사다리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바르도의 존상들이 그려져 있다. 다시 목조 가파른 목조 계단을 타고 3층으로 올라갔다. 지금강불(持金剛佛), 마르빠, 밀라래빠, 감뽀빠 등 84위의 성취자들이 벽면 가득 그려져 있다. 3층에는 이 사원을 지은 탕돈걀뽀 린포체의 상이 모셔져 있다. 그 앞의 남쪽으로 큰 창이 나 있어서 햇빛이 들어왔다. 창틀에 티벹 문자로 된 글이 써져 있었다. 금당거사님께 물으니 ‘금강지존기원문’이라고 하였다.
오백 년 세월 동안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된 벽화를 두 눈으로 볼 수가 있다는 것은 정말 복 받은 일이었다. 티벹과 한국의 전통 불화 제작 기법을 전수 받은 금당거사님은 많은 문양 중에서 우리나라 고려시대 감지금니변상도(紺紙金泥變相圖)에 보이는 것과 닮은 연꽃문양을 지적해준다. 인도후기 밀교문화를 계승한 티벹불교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벽화의 도상들을 보아도 이해할 수는 없었다. 불교미술사 연구자들이 반드시 와서 탐구해 볼만한 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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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탄박물관
둥쩨사원에서 나와 파로의 상가에 있는 2층 식당으로 갔다. 많은 음식 가운데서 기름에 튀긴 담백한 빵을 커피와 함께 먹을 수가 있어서 좋았다. 야채와 야크 고기를 넣고 끓인 수프, 붉은 색이 도는 쌀밥, 기름에 데친 파슬리를 접시에 담아와 일행이 한국에서 가져온 깻잎, 멸치, 가루 김, 내가 가지고 온 포장 김치를 곁들여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식당에 장식용 물건으로 놓인 부탄 전통의 부엌 물품 중에 돌절구가 인상적이었다. 축구공 크기의 검은 돌 가운데를 파내고 돌공이로 음식 재료를 찧는 작은 절구이다.
벽에 걸린 포스터는 범, 여우, 게, 원숭이, 나비, 쇠똥구리, 오목눈이, 독수리, 호반새, 부엉이, 타킨, 개구리, 외뿔이 난 코뿔소, 악어, 코끼리, 청설모, 눈표범 등 동물 종의 다양성이 보존된 부탄의 자연을 잘 보여준다.
점심을 먹고 버스를 타려고 상가가 있는 길거리로 내려왔다. 지붕은 없지만 외관은 모두 부탄 전통의 건축에 쓰이는 상서로운 문양을 그려놓은 3층의 직사각형 상가 건물들이 열 지어 있다. 가게 앞에 두 여인이 서 있다. 한 사람은 장바구니를 들고 아기를 안고 있고, 또 한 사람은 포대기로 업은 아기가 잠들어 있는데 담요를 사서 바닥에 두고서 누군가에게 휴대폰을 하고 있다. 길가에는 우리나라의 현대 자동차를 비롯하여 승용차와 지프차들이 주차되어 있다.
버스를 타고 간 곳은 파로종 위쪽에 새로 지은 부탄국립박물관이다. 박물관 앞에서 굽어보니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의 가운데로 청람색 터키석 빛깔의 물이 흐르는 파추(Pa Chhu)강이 흐르고 그 양쪽으로 많은 논들이 논두렁을 사이에 두고 붙어 있는 풍경이 한 눈에 굽어보인다. 좁은 분지이지만 들판 가운데에 상가 건물과 집들이 작은 시가를 형성하고 강에는 다리가 놓여 있다. 솔숲이 우거진 험준한 산줄기 아래의 기슭과 들판에는 하늘의 별처럼 많은 민가가 흩어져 있다.
박물관을 짓기 전에는 소라 모양의 7층 망루, 파로 따 종(Paro Ta Dzong)이 박물관이었다. 파로따종은 1649년에 파로 지역의 제2대 데시(Desi)인 라 응왼빠 뗀진(La Ngoenpa Tenzin Drugdra)이 지었다. 1968년에 제3대 국왕 직메 도르지 왕축의 명령으로 박물관으로 변경되었다. 이 7층 건물은 부탄에 건축의 웅장함과 우아함을 불어 넣는 건물의 하나였지만 2009년의 지진으로 심하게 파괴되고 아직도 복구되지 못하고 있었다.
옛 박물관 위쪽에 새로 지은 박물관은 외벽을 돌을 벽돌처럼 정교하게 다듬어 쌓았고 창문이나 입구의 기둥이나 외관은 전통 사원 건축 양식이다. 돌을 벽돌처럼 쪼아서 쌓아올린 분황사의 석전탑(石塼塔)이 생각난다. 모전 석탑이라고 하지만, 나는 분황사탑은 돌을 쪼아 만든 벽돌탑으로 생각한다.
가방과 외투를 입구에서 맡겨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불상, 탕카, 감지금니경전(紺紙金泥經典)과 변상도(變相圖), 불교 축제인 체추(Tshechus) 때 사용된 다양한 종류의 탈, 갑옷과 투구, 활과 화살, 대포 등의 많은 문화유산 중에서 신라의 의상대사 영정을 닮은 가사와 얼굴을 하고 있는 바쿠라 아라한(Arahat Bakula)의 모습을 그린 탕카가 나에게는 인상적이었다.
불교문화재 다음에는 부탄의 자연사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눈표범(Snow Leopard), 악어, 물소, 붉은꿩(Blood Pheasant), 들소(Gaur), 타킨(Takin), 검은 목 두루미(Black Necked Crane), 동충하초, 흰배왜가리(White Bellied Heron), 소나무 등의 박제품과 전시물이 있었다. 제1대 국왕의 아버지가 사용한 화살, 물시계, 탕돈걀뽀 린포체가 만든 철교의 쇠사슬 등도 전시되어 있다. 부탄국립박물관의 문화역사 및 자연사 전시관은 덴마크의 국제 개발 협력국의 지원으로 설치되었다.
8세기에 히말라야 지역에 금강승불교를 전파한 파드마삼바바 이래로 히말라야 지역은 티벹불교문화권이다. 17세기에 티벹의 지배에서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종카말을 표기하는 종카문자를 발명하여 부탄 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고 하여도 여전히 티벹불교문화권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이 각기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도 같은 한문불교문화권에 속하는 일과 비슷한 일이다.
동부 히말라야의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부탄은 북위 26~29도, 동경 88~93도 사이에 있다. 북쪽으로 티벹과 중국, 동쪽으로 인도의 아루나찰 프라데쉬(Arunachal Pradesh), 서쪽으로 시킴(Sillim) 주, 남쪽으로 서부 벵갈(West Bengal), 아삼(Assam)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부탄은 남부의 해발 200미터 기슭에서 북부의 해발 7,000미터 이상이 되는 지역, 여름 몬순 기후 시기에는 폭우가 내리기도 하는 남부지대가 있다.
지리와 기후의 다양함과 60% 이상의 자연 환경을 보존하도록 하는 부탄의 독특한 환경 보존 정책은 지엔에이치의 9개 영역의 하나인 자연 보존과 함께 부탄이 동식물의 다양성을 확보하도록 하였다. 부탄에는 현재 770종의 새와 매년 새로 발견되는 것 외에 5,400종의 식물이 있다.
부탄은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의 양을 감축시키며 야생 동물의 피난처가 되고 있다. 동물들은 인간과의 다툼으로 서식지 밖으로 내몰려 새 서식지를 찾아서 부탄의 원시림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해발 3,000미터 지점에 있는 부탄 동부의 트룸싱라(Thrumshingla) 국립공원에 벵갈 범이, 본래 서식지가 아닌 곳에서 조류나 포유류가 목격된다.
이러한 것은 인간과 자연의 공존과 화합, 불살생을 중시하는 불교의 가치관과 일치하는 일이다. 부탄은 금주, 금연은 물론이고 도축과 낚시를 금지하고 있다. 심지어 부처님께 공양 올리기 위하여 쓰는 꽃도 꺾지 않고 조화를 쓴다고 한다.
대승의 보살은 네 가지 고정관념을 벗어야 한다고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누누이 설법하지 않는가. 나는 나 아닌 것으로, 인간은 인간 아닌 것으로, 생명체는 생명체가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라만상은 인드라신의 그물코에 달린 구슬이 서로를 비추는 것처럼 무한하게 얽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파로 종은 7세기에 처음 세워졌으나 대부분 불에 타고, 1839년에 중건하였고 1968년 부탄 3대 국왕의 왕비 아쉬 케상 왕축의 후원으로 현재의 모습처럼 증축하였다.
영국 유학 중 영화, ‘리틀 부다(Little Buddha)의 고문을 맡으며 영화계에 입문한 종사르 켄체 린포체는 켄체 놀부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잠양 켄체 왕포 린포체(1820-1892)의 3대 재생자이다. 그의 첫 영화인 ’더 컵(The Cup)’(1999)은 칸 영화제에 초청 받았다.
나는 전국교사불자연합회의 회보, <<교등(敎燈)>>에 그의 두 번째 영화인 ‘나그네와 마술사(Travelers and Magicians)(2003)’를 소개하며 디브이디를 사서 재미있게 보았다. 세 번째 영화 ‘바라: 축복’은 2013년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국립박물관을 둘러보고 버스로 돌아왔다. 그런데 사람들의 손에 박물관 안내 팜플렛이 들려 있다. 가이드에게 부탁하여 나도 2종류의 팜플릿을 챙겼다. 문화재로 보호되고 있는 사원의 내부나 박물관 안에서 일절 카메라 촬영을 하지 못하게 하여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