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6일(토)
년초부터 서울에 있는 동창 몇분들이 뜻을 모아 북유럽 여행을 하고저 추진해 왔었다. 동창생들의 해외여행은 수년전에 베트남, 캄보디아 등지를 비롯해서 일본, 동유럽 등을 여행한바 있다. 이번 여행은 필자를 비롯한 김풍구, 김형도, 박봉규, 박상진, 서홍수, 설응춘, 송풍길, 이상태, 탁재용 동창들과 가족 등 18명, 부산동창인 서윤석, 이병규, 조정래, 하병태 등 내외분들 8명 및 2년전에 동부유럽 여행시에 동반 했던 부산고 출신인 김승태 교수내외분 등 28명으로 구성 되었다. 인천국제공항 3층 A카운터에서 만나 여행사 김성연양의 안내로 순조롭게 출국수속을 마치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행 대한항공기에 탑승하였다. 항공기는 오후 4시40분 이륙하여 귀착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4,233마일로 무려 9시간20분을 비행하니 현지시간이 오후9시(16시40분+9시20분-시차5시간)가 되었지만 해가 지지 않고 훤하게 밝은 낮이였다. 이것이 백야 현상이며 백야체험 첫날이었다. 9시간 비행하는동안 기내식을 두 번이나 하고 중간에 영화 윗치 만운틴(Race to Witch mountain)과 신부들의 전쟁(Bride Wars)등을 관람 하였다. 동창생 가운데는 비행중에 한숨도 자지못한분도 있지만 필자는 숙면을 할수 있어서 피로하지 않았다. 5년전에는 모스크바 세레베데국제공항의 입국수속이 한시간 반 이상 걸렸었는데 비해 상트페테르부르크 불코바국제공항에서는 30분정도 걸렸으며 세관검사도 간단하여 일찍이 입국수속을 마칠수 있었다. 현지 안내자 박진원이 안내하여 호텔로 가는 도중에 넓은 도로 가운데는 녹지대가 조성되어 시원하게 보였으며 운하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3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유럽풍의 유서 깊은 도시로 우리들의 시선을 사로 잡는데 충분 하였다. 이 도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운하가 많아서 북유럽의 베네치아로 불려지고 있고, 러시아혁명 이전까지 러시아의 수도여서 국민들이 선망하는 곳이다. 호텔은 백야현상으로 밖이 훤해서 창문 커텐을 치고 밤 11시에 잠을 청했다.
6월7일(일)
새벽 3시반에 깨었는데 밖은 밝아 있고 해도 나와 있었다. 이것이 백야인 것이다. 일찍이 일어나서 기공수련을 하고 기행문도 정리하였으며 7시에 조식을 하고 불코바 국내선 공항 으로 갔다. 여행이 시작되는 첫날부터 백야를 체험한 일행들은 약간 어리둥절 하였으나 건강한 모습으로 기분이 좋았다 모스크바행 비행기는 아침 9시50분에 이륙하였다. 일찍이 일어난 탓에 비행중에 잠깐 자고나니 피로가 풀렸다. 모스크바 상공에서 착륙 할 준비중에 모스크바에서 28km 떨어져 있는 세레베데공항을 볼수 있었다. 넓게 펼쳐진 푸른 초지에 둘러싸여 있었다. 비행기는 11시에 도착하여 일행들이 밖으로 나가니 김형도 동창의 아들과 손녀가 마중 나왔고 현지 안내자 신찬호군이 우리일행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첫코스로 레닌그라드 언덕에 있는 모스크바 대학교로 안내하면서 러시아의 역사, 경제 등에 관하여 설명해 주었다. 공항에서 시내방향으로 가는 도중에 왼쪽에는 울창한 숲과 오른쪽은 끝없는 지평선으로 펼쳐진 들판을 가리키면서 러시아 횡단열차가 7박8일 횡단하는 동안 이런한 광경을 수없이 볼수 있다고 하니 러시아가 얼마나 넓은 나라인지 실감이 갔다. 울창한 숲은 주로 자작나무이고 러시아의 나라나무로 지정 될 정도로 산림의 60% 이상을 차지 하고 있으며 용도도 다양하다고 한다. 러시아는 옛 소련시대에 비하면 상당히 규모는 줄었지만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이다. 북쪽으로는 북해, 동쪽으로는 태평양에 연하고, 남쪽으로는 북한, 중국, 몽골,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라트비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핀란드, 노르웨이 등 14개 국가와 국경을 접하는 등 아시아와 유럽을 접하는 국가이다. 동서의 길이가 약 9천km, 남북 최대길이 약4천km, 최소길이 약 2,500km에 이르며, 총면적 1,707만5,400㎢로 세계 최대의 영토이다. 2위인 캐나다에 비하면 약1.7배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21개 공화국, 49개 주, 6개 변방주, 1개 자치구, 10개 자치관구, 2개의 연방특별시(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등 총 89개의 연방주체로 구성되어 있다. 러시아는 영토가 광활한 만큼 다양한 지질구조가 발달하여 거의 모든 종류의 자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완전한 의미의 자급자족에 가장 근접한 국가이며 전통적으로 러시아인들은 독자적인 발전 경로를 밟아 왔었다. 주어진 자연을 벗 삼아 그 속에서 생활해 온 사람은 당연히 자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워낙 광활한 나라여서 지역마다 인종과 종교가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광대함과 단조로움을 그 특징으로 말할 수있다. 러시아인들은 무뚝뚝하면서 완고한 성격에 다소 순진한 면이 있다. 러시아의 자연은 대동맥이라 할수 있는 우랄산맥을 축으로하여, 남동쪽으로 험준한 산악지대가 발달하였고 북서쪽으로는 광활한 평지가 펼쳐져 있다. 레닌그라드 대로는 시민들이 교외에 있는 주말농장에서 농사도 짓고 쉬고 있는 탓에 길은 한산하여 막힘 없이 레닌그라드 언덕에 있는 모스크바대학교를 들려 보면서 학교에 관하여 자세하게 설명을 들었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은 1755년에 철학, 법학, 의학 등 3개 학부로 설립 되었다. 그당시로서는 혁신적으로 “농노” 이외에 모든 사람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여 교육의 기회를 넓혔다. 1804년 대학법에 의해 윤리 및 정치학부, 물리수학부, 의학부, 언어문학부 등 4개 학부로 그 체제를 바꾸었다. 19세기에는 러시아 학문의 중심부를 이루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많은 학자가 활동하였으며, 20세기 초 사회적인 변혁기에는 학생운동으로 인하여 1911년 대학교를 폐쇄하기도 하였으나, 10월 혁명 후인 1918년에 국립대학교로 승격되어 노동자 계급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였다. 혁명후 학과와 강의실 및 연구실 등을 대폭 증설하였고, 전후에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현재의 본관이 있는 참새언덕쪽 120만평 위에 대규모 대학 켐퍼스를 지어 1953년부터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모스크바 대학은 본관 건물의 높이가 241m이며 32층 건물의 정면 길이는 420m이고, 4만5천개의 강의실이 있는 스탈린 건축양식의 대표적인 건물로서 아주 웅장한 느낌을 준다. 1992년 개혁후 대학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통과되어 모스크바국립대학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그 전까지는 학비가 무료였으나 공식적으로 15%의 학생범위에서 유료로 전환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대학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지금도 러시아 최고의 학부로서 노벨상 수상자를 12명이나 배출한 세계적인 대학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현재 모스크바국립대학에는 19개 학부, 7개 단과대학과 300여개의 전공분야가 있으며 4만여명의 학부학생, 7천여명의 박사과정, 그리고 1천여명의 정교수, 3천여명의 강사, 5천여명의 연구원이 있다. 대학도서관의 장서수는 800만권이 넘고 이중 300만권이 외국어 서적이다. 연구소는 450여개, 대학내 3개의 박물관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외 체육시설로 야구장, 축구장 등이 4군데가 있고 간이축구장, 농구장, 수영장 등을 갖추고 있다. 대학 주변을 가득 채운 사과나무는 가을에 접어들 무렵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사람들이 따서 먹기도 하며 사과나무길은 아름다운 명소가 된다고 한다. 정문주위의 라일락 꽃향기가 가득한 곳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인근에 있는 호텔내 한국식당 가야에서 한식으로 중식을 마치고 크레물린궁으로 향했다. 날씨가 좋아 무척 다행스러웠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러시아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2,400여만명의 무명용사 위령탑을 지키는 경비병들의 절도있는 교대식 광경을 구경하였고,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침략한 그당시에 그이가 출입한 문을 이용하여 크레물린 궁전 내부로 들어가서 대통령궁과 집무실, 비서관 사무실, 무기 저장고, 왕대포, 왕종, 정교회 사원 등을 관람하였다. 성모승천성당은 러시아국보 제1호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 되었으며, 1400년대 건립한 성당 내부에는 젖은 회벽에 색칠을 한 프레스코기법의 그림이 유명하다. 그외에 이반3세가 애용한 1500년대에 건조한 목재 옥좌, 1800년대의 샹드리에 등도 유명하며, 니콜라이 2세 황제가 대관식을 올린 성당이다. 러시아 정교회성당의 십자가는 항상 동쪽을 바라보는곳에 지정소가 있고, 예배시에는 악기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인간의 목소리로 성가를 부르는 것이 특징이며, 800년대부터 실시해온 러시아 정교 성화인 이콘화는 1단에 신의문, 2단에 기도, 3단에 예수일생, 4단에 예언, 5단에 구약성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십자가의 예수의 발에 2개의 못이 박혀 있다. 미카엘성당에 있는 58개의 무덤을 두루 살펴보고 우리나라 대통령들이 러시아를 방문 하였을때 산책한 공원, 아람드리 정원수에 기생한 차가버섯 등과 이어서 붉은광장, 아름답게 건축된 성바실리사원, 레닌 무덤, 굼백화점을 둘러 보았다. 붉은광장에는 이벤트를 하기 위한 무대장치를 설치하고 있었다. 이어서 외무부 인근에 있는 아르바트 거리로 갔다. 이거리는 예전에 귀족들의 저택이 한적하게 들어서 있던 곳으로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들인 푸쉬킨, 레르몬토프, 게르첸, 고골리, 투르게네프 등이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기도 한 곳이다. 벌써 200년이 지났지만 아르바트거리는 예전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며 각종 장인들이 모여 물건을 만들어내고 장사하던 곳이라 골목마다 목공골목, 대장간골목, 음식점골목 등의 이름이 붙어졌다.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인 푸쉬킨 부부동상이 있는데 푸쉬킨 탄생 200주년을 맞아 1999년에 세운 것으로 맞은편 청록색 건물이 그가 한달간 신혼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푸쉬킨은 아내의 연인과 권총결투를 하다 사망하였다. 허름한 골목에서 자유를 갈망하는락‘음악으로 고르바초프와 함께 페레스트로이카의 한축으로 우뚝 섰던 고려인 3세 빅토르최가 무명시절에 노래불렀던 장소 등을 보았다. 모사화를 그리는 사람들이 관광객의 초상화를 그리는 모습들을 보고 나서 중식을 한 동일호텔에서 석식을 하고나니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이곳 날씨는 변덕이 심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행 비행 시간이 너무 여유가 있어 비 내리는 레닌그라드 언덕에서 운무로 잘 보이지 않은 모스크바 시내의 원경을 관광하고 건물들을 소개하는 안내인의 설명을 듣고 나서 현지 안내인과 헤어져 공항으로 향했다. 그래도 여유가 있어 공항가는 도중에 레닌그라드 대로에서 잠깐 쉬었는데 주말농장에 갔다가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차량행렬이 과관 이었다. 공항에 도착한 일행들은 대기실에서 오래동안 기다리다 밤 11시에 상트페테르부르크행 항공기에 탑승하였는데 새벽에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잠을 청했다. 이른 새벽이였지만 밖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
6월8일(월)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즉시 호텔에서 준비한 아침도시락을 휴대하고 버스편으로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로 향했다. 늦게 자고 일찍이 일어난 탓에 머리가 띵하였으나 맑게 개인 날씨와 신선한 공기로 기분이 좋았다. 가는 길목은 온통 삼림으로 푸르게 둘러 싸여 있어서 기분이 상쾌 하였다. 도시락으로 가져온 빵과 오이, 삶은 계란을 맛있게 먹었다. 버스좌석은 미리 정해진 조별로 바꾸어 가면서 앉기로 하고 매일 앞좌석에 앉은조가 즐거운 여행을 위한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하고 1조 김형도, 박상진, 송풍길 동창가족분들이 준비해 온 음식들을 제공하여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송풍길동창의 사회로 탁재용동창이 이번 여행에 참여하여 주신 동창내외분들과 특히 부산에서 참여한 동창생 내외분들, 김승택교수 내외분에게 감사를 표하고 이번여행이 즐겁고 유익하며 동창애와 더욱 돈독한 우정을 다질 수 있는 기회가 되고 건강한 모습으로 귀국 하시기를 바란다는 인사가 있었다. 이어서 부산대표로 서윤석동창은 이번 여행에 참여 할수 있는 기회를 준 서울동창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부산에서 참여하는 동창들을 심사숙고하여 선발 하였다는 말에 웃음꽃을 피었다. 김승태 교수내외분은 2년전에 동부유럽 여행시 동행 한바 있어 이미 진고의 팬이 되었으며 이번에도 함께 여행하게 되어 깊이 고마운 마음을 전하였다. 필자도 인사말에 이번 여행에 참여 할수 있었던 것은 진고를 졸업 하고, 40여년을 변함없이 보살펴 준 아내의 지극한 사랑의 덕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동창생들과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김형도동창은 김승태교수에 관하여 부산고 동창회에 조회하니 동창회 명부에서 삭제 되었는데 알고보니 진고동창회로 편입 되어 있었다고 하여 한바탕 웃는 등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국경지역에 도착하였다. 러시아지역에서 첫번째 검열을 받고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여권에 사증을 받고 최종검열에 이어서 핀란드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입국수속을 받는 등 불과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김성연양에 의하면 어떤때는 몇시간이 걸린다고 하였다. 인근에 있는 휴게소에서 잠깐 휴식하고 헬싱키로 향했다. 핀란드의 고속도로는 러시아의 도로보다 훨씬 좋았으며 유럽공동(EU)국가가 지정한 고속도로 E-20(EU에 가입한 국가의 고속도로, 일반도로를 관리하고 이용자가 쉽게 알수 있도록 도로에 번호를 정함)으로 편안하게 달렸고 고속도로 주변은 푸른숲으로 둘러 싸였으며 빙하에 의한 호수들을 볼수 있었다. 아침 6시에 출발한지 7시간반만에 헬싱키에 도착하였다. 깨끗한 시가지 와 호수같은 잔잔한 바다에 즐비하게 정박한 요트와 숲의 조화는 한폭의 그림을 감상하는 느낌이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기념사진도 촬영하고 곡차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니 행복한 마음이 가득하였다. 한식집에서 육개장과 친구들이 가져온 밑반찬 등으로 중식을 마치고 현지의 김범현 안내인은 핀란드의 유명한 음악가 시벨리우수를 기리기 위해 1967년에 아일라 힐튜넨(Eila Hiltunen)조경사가 설계한 공원으로 안내하면서 핀란드에는 3개월은 밤이 없고, 3개월은 낮이 없는 지루한 기후탓으로 우울증 등 정신질환자가 많이 생기며 총기사건이 자주 발생한다고 하였다. 시벨리우스공원은 핀란드가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얀 시벨리우스(Jan Sibelius : 1865-1957)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은색 철관 파이프 오르간 조형물과 시벨리우스 두상을 설치 하였으며 푸른숲과 호수같은 바다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곳이다. 바다이지만 겨울에는 얼어서 쇄빙선으로 얼음을 깨어야 실자 라인과 같은 유람선 운항이 가능 하다고 했으며 이곳 사람들은 바다가 보이는 숲속에 사는것이 소원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석산을 개발한 뎀펠리아우커오교회 일명 암석교회로 갔다. 이 교회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었으며 암석을 파고 건축되었다. 교회내에서 파이프 오르간의 음색이 아주 훌륭하여 음악연주장으로도 유명하며 결혼식장으로도 자주 이용되어 유명해진 교회이다. 이어서 헬싱키 대성당과 원로원광장, 언덕 위에 있는 우스펜스키 정교회 사원을 관람하고 항구에 정박중인 거대한 유람선 실자 라인선을 볼수 있었다. 항구에 개설된 시장에서 첼리를 사기도 하고 항구에 접해있는 대통령궁을 배경하여 기념사진을 촬영 하기도 하였다. 핀란드 대통령은 여성이며 대통령궁에서 집무를 본후에는 출퇴근을 한다고 하였다. 여성들이 정치에 60%이상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현지 안내인과 헤어지고 투르크항으로 향했다. 잘 뚫린 고속도로 E-20호로 편안하게 쉬면서 갔지만 필자는 자지 않고 도로를 살펴보니 터널이 많이 있고 터널시공방법이 특이 하였다. 완전히 라인 콘크리트를 하지 않고 측벽 1m 정도만 시공하고 그 외는 숏 콘크리트 한 상태로 되어 있고 조명은 상부중앙에 설치된 것을 보고 암석만 단단하면 공사비를 절감 할수 있는 공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한지 14시간만에 투르크항에 도착하고 실자 유럽호에 탑승하여 잔잔한 호수같은 바다를 항해 하니 장시간 버스여행의 피로가 싹 풀리고 기분이 너무나 좋아서 낙원을 느꼈다. 전망이 잘 보이는 만찬장에서 일행들은 와인과 맛있는 음식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저녁 늦게 아름다운 일몰을 구경하고 단 꿈을 꾸면서 선상의 하룻밤을 지냈다.
6월9일(화)
새벽 3시40분경에 일출을 볼려고 선상 으로 갔으나 날씨가 흐려서 똑똑하게 볼수가 없었지만 붉게 물들인 동쪽 하늘을 볼수 있었다. 서윤석동창 내외분도 일출을 보러 선상으로 올라 갔는데 그분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5시에 조식을 마치고 스웨덴 스톡홀름항에 입국수속 없이 하선하니 비가 내렸다. 일행들은 버스로 옮겨타고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향했다. 스톡홀름관광은 13일에 다시 와서 하기로 하고 E-18호 고속도로로 달리다보니 날씨가 맑게 개어서 주변을 잘 볼수 있었다. 휴게소에서 잠깐 쉬기도 하고 오늘 서비스 담당인 2조 서홍수, 설응춘, 필자 등 친구가족들이 준비한 술과 안주로 일행들을 즐겁게도 하고 서홍수동창은 스웨덴에 관하여 간단히 소개하였다. 스웨덴의 국민성은 강한 인내심, 근면, 검소한 생활, 시간을 아껴쓰고 약속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습관과 바이킹의 유래 등을 재미있게 이야기 하였다. 설응춘동창은 어제 저녁에 선상에서 있었던 사건으로 방 열쇠가 맞지 않아서 정복을 입고 있는 승무원에게 교정 요청을 하고 승무원과 동행하면서 마침 주위에 있던 박봉규, 이상태동창과 김승태교수들에게 내가 잡혀 간다고 농담한것을 심각하게 받아준 박봉규동창 일행들이 어떻게 수습 할것인지를 고민하다가 나중에 농담인것을 알고 한바탕 웃었다. 가는 길이 멀고 중식 할만한 적당한 장소가 없어서 10시반에 존 코핑에 들러서 중국집에서 일찍이 중식을 하고 그곳 숲속에서 1,2조 교대식을 러시아 경비병식으로 하고 코펜하겐으로 계속 향했다. 도중에 휴게소에 들러서 잠깐 쉬기도 하고 필자가 산 아이스크림으로 피로를 풀기도 하였다. 여행을 주선한 팀이 요구했던 영화 및 음악 CD를 준비해 온 김성연양은 긴 여행에 걸맞게 명곡, 봉짝을 틀어 주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차창밖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 할수 있었고, 농담으로 혈액형에 따른 성격을 음식물에 비교하여 알수 있는 것으로 O형은 단순하고 무식하며 지랄같은 성격을 줄인 단무지, B형은 오만하고 이기적이며 지랄같은 성격인 오이지, A형은 소심하고 세심하며 지랄같은 소세지, AB형은 지지하게 지랄하는 지지지이며, 또한 얄미운 여자 시리즈와 여자 화장하는것을 연대별로 10대는 치장, 20대는 화장으로 정품, 명품이고, 30대는 분장으로 기획상품, 40대는 별장으로 바겐세일, 50대는 포장으로 창고방출, 60대는 환장으로 재고정리, 70대는 끝장으로 폐기처분 이라는 비유로 재미있게 들려 주었다. 이러는 동안에 국경지역에 가까워졌다. 스웨덴과 덴마크를 연결하는 해상교량과 해저터널을 지나갈 수 있었는데 국경을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를 오레 산드 연결로 (Oresund Link)는 연장이 12km 이며, 연결로의 8km은 해상교량으로 상부는 고속도로 하부는 철도로 되어 있으며 4km는 해저터널로 3련 박스 침매터널로 시공되어 2련은 상하행선 고속도로로, 옆에 있는 통로는 철도로 사용 되고 있다. 톨게이트에서 통행료를 지불하고 출입국 수속없이 국경을 그냥 통과하니 바로 덴마크 코펜하겐 국제공항이 나오고 시내로 들어가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청부근에서 현지 손향량 안내인이 버스에 탑승하였다. 타자마자 덴마크에 관하여 따발총 같은 화술로 덴마크의 역사, 문화, 상품 등을 설명하여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덴마크는 일찍이 바이킹들이 거친 바다를 무대로 눈부신 활약을 펼쳐서 한때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통치했던 강한 나라답게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런 연유로 1996년 유럽문화 도시로 선정 되기도 하였다. 또한 세계적인 동화작가 안델센이 태어난것을 기념하여 곳곳에 동화의 나라를 만들고 지켜가고 있어, 미국 클린턴 전대통령의 해외 첫 방문국이 되기도 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시에 유엔군의 일원으로 병원선을 지원한 우호적인 나라이다. 덴마크는 유틀란드반도와 핀섬, 셰란섬, 톨란섬, 보른흘름섬 등 480개가 넘는 섬들로 이루어져 있고, 동쪽은 외례순 해협을 사이에 두고 스웨덴, 북쪽은 노르웨이와 접하고 있으며, 유틀란드반도 남부는 독일과 접하고 있다. 국토 대부분이 평야지대로서 해발 100m가 넘는 곳이 거의 없으며, 호수와 늪지대가 많다. 그밖에 덴마크령인 그린랜드(Green Land)와 페로스 제도 등이 있다.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계속하여 버스내에서 시청사, 국회의사당, 왕궁, 크리티안스보르섬(세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무대), 청동의 도시, 인어동상, 성공회, 안델센동상, 니스제독의 거북선, 여왕 전용선, 사회복지제도와 의약품인 인슈린, 코엔자임 큐텐, 부르진 등 유명한 의약품이 모두 덴마크인에 의하여 개발 되었음을 소개 하였다. 이건희 삼성회장이 큐텐을 복용하고 건강이 좋아져 고마움에 대한 표시로 연구소에 많은 연구비를 기부하고 시내 중앙에 삼성광고탑 을 설치한것 등을 설명하였다. 또한 손향량 안내인은 열심히 설명하면서 의약품을 선전하여 큐텐과 부르진을 구입한 동창들도 있었다. 비가 내리는 짧은 시간에 시내를 돌아보고 노르웨이 오슬로행 유람선 DFDS에 버스와 함께 탑승하였다. 비바람이 불어서 약간 배가 흔들리고 어지러웠으나 잠시후에는 좋아졌다. 화려한 선상 만찬장에서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들면서 아름다운 바다경치를 즐겼다. 1 1시간의 힘든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호화 유람선인 DFDS선상에서 즐겁게 지내다보니 피로가 싹 풀렸다. 오늘 저녁은 일찍이 잠을 청했다. 연속 두 번이나 선상에서 숙박 하였다.
6월10일(수)
어제 저녁에는 당초 일정에는 없었던 유람선으로 이동한 관계로 오늘 아침은 제법 시간 여유가 있어서 조식도 늦게 하고 선상에서 주변경치를 만끽 하였다. 코펜하겐에서 배를 탄지 16시간반이 걸려서 오슬로항에 도착, 하선하여 입국수속 없이 그낭 밖으로 나가니 현지 김형기 안내인이 일행들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버스도 하선하여 탑승 하기전에 여행진행 2조, 3조 인수 인계식을 하고 버스에 탑승하였다. 현지 안내인은 노르웨이가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서쪽으로 길게 늘어선 나라이며, 일찍이 세계 해상을 뒤흔든 바이킹이 출현하고 뒤에 기독교 국가로 형성 되었고, 특히 빙하가 만들어 낸 아름다운 피오르드와 호수, 폭포 등은 이 나라의 경관을 더욱 더 빛내 주고 있고, 북유럽 제1의 문화도시임을 자부하는 오슬로와 여름철에는 밤이 없는 백야가 연출 되는 매력을 가진나라임을 소개하였다. 면적은 약 32만4천㎢ 이며 국토의 30%가 북극권에 속해 있으나 그곳에서 엄청난 가스와 석유가 생산되어 국가경제에 큰도움을 주고 있다. 인구는 약 450만명이며 그중 오슬로는 약 100만명 이고 한국교포는 요즘 간호사가 늘고 있어 500여명에 이르고 있다. 노르웨이는 북유럽 국가중 비교적 국가 통일이 늦은편으로 872년에 통일국가로 형성 되었고 14세기경 “칼마르 연합”에 따라 덴마크 왕이 스웨덴, 노르웨이 왕을 겸하였다. 1523년 스웨덴은 덴마크로부터 독립했으나 노르웨이에 대한 덴마크의 지배는 19세기까지 계속 되었다. 1814년 킬 조약에 따라 스웨덴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노르웨이는 스웨덴 카를14세 밑에서 노르웨이 헌법을 제정하였고 1905년 국민투표로 독립을 선언하고 호곤7세를 노르웨이 국왕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침략을 받았으며, 현재는 서방 선진국의 일원으로 활발한 대외활동을 하고 있다. 비겔란 조각공원은 10만평 넓은 평지에 노르웨이의 세계적인 조각가 구스타프 비겔란(1889-1943)이 일생동안 조각한 청동상 650점, 화강암상 수백점 등을 전시한 곳으로 인생의 희․노․애․락의 삶의 진행과정과 인생윤회설을 표현한 조각들을 짜임새 있게 조성하여 한번쯤 각자의 삶을 되돌아 볼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언덕위 한가운데 세워진 석탑은 높이가 17m이며 무게가 무려 260톤 되는 화강암에 120명의 조각을 그의 제자 3명이 3년에 걸쳐서 작품을 만들었으며 운반, 설치 하는데 6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세계적인 조각가 비겔란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그가 비엔나, 파리 등에서 공부하고 귀국후 오슬로시와 맺은 계약조건에 조각한 작품 전체를 오슬로시청이 소유하게 되어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것이다. 이어서 노벨평화상 만찬장으로 이용되는 시청사 홀을 관람하였다. 시청사는 오슬로 피오르드가 돌출된 항구 주변부지에 건축된 2개의 탑을 갖고 있는 건물이며, 오슬로시 창립 900주년을 기념 하여 1931년에 착공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 되었다가 1950년에 완공하였다. 시청사 홀 벽에는 노르웨이의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장식되어 있다. 관람을 마치고 한국식당에서 김치찌개로 점심을 맛있게 먹고, 이어서 국립미술관에서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의 그림에 관하여 설명을 듣고 다른 그림등과 함께 감상 하였다. 국립미술관은 오슬로 대학 뒤쪽에 있으며 주로 노르웨이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19세기 노르웨이 사람들의 생활을 그린 크리스티안 크로그의 작품을 비롯하여 세잔, 마티스의 작품과 북유럽 예술가들의 작품도 다수 전시되어 있다. 이어서 면세점을 잠깐 구경하고 해발 412m 산기슭에 설치된 홀멘클렌스키 점프대로 향했다. 이곳은 1952년 동계올림픽때 스키점프 경기가 열렸던 곳으로 1892년 이후 매년 3월의 일요일마다 점프대회가 개최된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점프대를 개선공사 중이어서 관람을 못한것이 아쉬웠으나 전망대에서 오슬로 시내와 바다를 한눈에 볼수 있었다. 이어서 베르겐으로 향했다. 일반도로이지만 E-16호 도로를 달리면서 주위에 펼쳐지는 초지와 산림, 호수와 연해있는 강 등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 하였다. 강에 연한 도로를 따라 가다가 간이 휴게소에서 잠깐 쉬고 계속하여 가는 중에 3조 이상태 조장부부가 헌신적인 써빙을 하는것을 보고 같은 조원인 부산 이병규동창은 립서비스라도 해야겠다며 마이크를 잡았다. 70대에 접어든 우리가 외국관광을 하면서 건강을 유지 하려면 매일같이 바뀌는 잠자리를 편안하게 할수 있어야 하는데 잠을 청할 때 행복한 생각을 하면서 기분 좋은 일들을 머릿속에 그리는 습관을 가지도록 노력 해야 한다고 하였다. 빨래를 걷어 차곡차곡 개어서 방바닥에 높이 쌓아 놓은 것을 보고 5살 막내가 두팔을 벌리고 춤을 추듯이 방을 빙빙 돌면서 우리는 부자다 라고하며 웃음을 그치지 않는 것을 엄마가 듣고 왜 부자냐고 하니 빨래 말린 옷이 많아서 부자고, 빨래 집게가 많아서 부자고 우리집 창문도 많아서 부자라고 하는 아이로부터 행복지수를 배우던것을 떠올리기도 하였다. 미처 몰랐던 옛시조나 한시, 들어서 기억 할수록 좋은 시조, 반야심경, 주기도문 등 자신의 종교와 관계없이 암송하면서 잠을 청하면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이 든다고 하였다. 김삿갓이 평양기생을 만나 주고 받은 시, 금강산 암자에서 풍월을 지을 줄 알면 묵어가게 해 준다는 스님의 대답에 언문풍월은 할줄 알아도 한문은 잘 모른다고 능청을 떨기도 하다가 타 자운을 내어 3번 연속으로 받고 그 절과 중을 질타하는 시, 유생들과 스님들의 풍월놀이를 보고 있는데 김삿갓 자신을 거들떠 보지도 않자 욕을 넣어 풍월을 지어 놓고 사라졌다가 3년쯤 뒤에 다시 금강산 보광암에 나타났는데 당대(순조-철종) 한시의 대가 였던 경운스님 앞에서 전에 써놓은 시가 자신이 쓴것임을 확인 하였다. 경운스님은 말하기를 지금부터 내가 읊는시에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때마다 잇빨을 한개씩 뽑아 버리겠다며 장도리와 망치를 든 건장한 스님 두분을 대기 시키면서 시합이 벌어졌으나 결국은 경운스님이 감탄하여 이 암자에 있고 싶은대로 묵고 가도 좋다는 승낙을 받았다는 이야기 등을 재미있게 소개했다. 3타는 ①사면기둥 불것타, ②석양행객 시장타, ③이절 인심 고약타 의 내용이다. 이어서 서윤석동창은 위의 이야기를 약간 보충 하고, 더불어 같이 사귀지 못할 사람으로는 밥먹는 시간보다 잇쑤시는 시간이 더 긴사람, 밥보다 약을 더많이 복용하는 사람, 오즘 누는 시간보다 고추 터는 시간이 더 긴사람, 소변 보면서 옷에 싸는데 왜 그시기를 안붙들고 누느냐고하니 병원 의사가 무거운것을 들지 말라고 해서 그냥 소변보는 얼간이 이고, 갓시집 온 며느리에 관련한 구수한 이야기 등으로 웃음꽃을 피웠다. 김형도동창은 신 김삿갓에 관한 이야기로 故정주영회장은 울산 현대조선소가 아직 건설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지폐에 있는 거북선으로 해외에서 선박을 수주 한 기적같은 이야기와 김승태교수의 경제특강은 귀중한 내용이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미국발 금융위기로 시작된 세계적 경기 침체는 글로발 자본주의에 대한 많은 공격을 초래했다. 저명한 금융전문가 마틴 월프는 자본주의 이념은 실패했다고 말했고 텍사스대학의 제임스 겔브레이스교수는 프리드만 추종자들이 금번 금융시장에서 일어난 일을 보면 그들의 영향력은 이제 끝이다 라는 주장도 펴고 있다. 티어시 가이트너 미국 재무장관도 자본주의가 변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세계적인 자본주의의 기본틀은 변함이 없을 뿐 아니라 이번 위기가 극복되면 또 새로운 경제환경에 따라 개인적인 이윤추구와 욕망을 바탕으로하는 자본주의는 변화 하면서 더욱 효율적인 시장제도가 될 것으로 사료된다. 일단은 최근에 불거진 금융시스템의 붕괴와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정부의 개입이 당분간 이어질 것이며 1930년대 공황이후 나타난 케인즈 학파의 부활이 이루어지고 있다. 실제로 1930년대의 대공황 못지 않게 생산과 고용상태는 악화 되었지만 그동안 경제학이론과 경제정책에 많은 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돈을 헬리콥터로 뿌린듯이 유동성을 증가 시키고 정부의 고용과 생산을 지원하기 위한 재정적자는 이미 심각한 수준을 넘고 있으나 2009년 하반기부터는 세계경제가 회복기를 맞을 것으로 전망된다. 회복이 ‛V자인가 ‛U자 인가? 경제회복은 긴횡보와 ‛W자 모양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아직도 부실채권이 정리되지 않고 있고 각국 정부의 지나치게 많은 유동성 증대와 재정적자의 휴유증은 세계경제에 고실업, 고유가, 고인플레 등의 3고 현상을 대처하기 위한 복잡한 경제정책을 야기 할것이다. 우리들 개인은 어떻게 해야할까? 불안한 경제위기에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우리는 인프레와 싸우는 자산관리가 중요하고 가급적이면 병원이 가깝고 교통비 덜 드는 도심지에 살아야 할것 같다. 돈주머니는 꼭 쥐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라는 내용이다. 특강을 듣는 도중에 벌써 호텔에 도착하여 강의를 중도에 중지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아직도 녹지 않은 눈이 있는 산쪽으로 올라가 해발 846m 고원지대에 세워진 일종의 레져 시설인 Sanderstolen Hotel에 도착하였다. 이틀동안 비좁은 선상에서 숙박한지라 훨씬 넓고 아름다운 방에 여장을 풀고 목욕을 하니 한결 상쾌 하였다. 만찬장에서 맛있는 음식과 소주 한잔을 하였더니 아침에 일찍 일어난 탓에 잠이 쏟아져 일찍이 잠자리에서 들었다.
6월11일(목)
이른 새벽에 깨어서 창밖을 내다보니 훤하게 밝아 있었다. 넓은 고원지대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호수와 숲이 조화를 이루고 먼 산 정상에는 아직도 녹지 않은 눈, 크고 작은 폭포 등은 한폭의 그림이였다. 이러한 대자연의 파노라마를 마음껏 감상 하고 사진도 수없이 찍으며 숨가쁜 순간을 가지니 어느새 멘델라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페리에 버스와 함께 승선하고 피요르드의 풍경을 만끽하였다. 노르웨이의 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지도를 구하여 보니 더욱 잘 알수가 있었다. 건너편에 있는 선착장인 포드네스에서 하선하여 바로 바이야 빙하박물관으로 향하였다. 도중 3km의 터널을 지나는 짧은 순 간에 김형도동창이 버스에 타지 않은것을 알고 전희숙여사를 비롯하여 일행 모두는 크게 놀랐다. 터널을 지나자마자 버스를 되돌려서 포드네스 선착장으로 가서 김형도동창을 픽업 하였다. 김형도동창도 버스를 놓쳐버린 순간에 매우 황당하였는데 함께 승선했던 노르웨이 여행자의 승용차를 타고 뒷따라 와서 선착장에서 만날 수가 있었다. 그런 한 순간에 무척 애를태웠으나 김형도동창을 태워준 노르웨이 여행가족에게 진심으로 큰고마움을 느꼈다. 노르웨이는 산악지대가 많아서 터널도 많고 길이도 길었다. 이제까지 지난것중에 제일 긴터널이 6.57km 였는데 이것보다 길고, 도로터널로서는 세계에서 제일 긴 라르달 터널의 길이가 무려 24.5km나 된다. 일본의 간에쯔 터널이 10km이며 우리나라는 준령터널이 4km, 진주에서 반성까지 거리가 24km이니 비교 할 수가 있다. 도로터널보다 더 긴 철도터널은 53.8km의 일본 세이칸 해저터널이나, 50km의 영국과 프랑스를 연결 하는 유로터널이 있으며 만약에 한일해저터널이 완성 된다면 230km이상이 될 것이다. 24.5km의 라르달 터널을 소개하면 노르웨이는 인구가 적고 교통량이 적어서 2차선 도로지만 운전자의 인간공학적인 한계와 안전운전을 위하여 6km마다 큰 공간을 만들어서 잠깐 쉬어 갈수 있는 도로폭을 확보 하고 조명도 황색, 청색, 녹색 등으로 변화를 주어 지루함을 덜수 있는 간이 휴게 시설이 되어 있다. 두개의 고원지대와 수많는 터널을 지나고 피요르드를 건너서 송달을 지나 빙하 박물관에 도착하였다. 우선 대자연의 파노라마를 촬영한 빙하에 관한 영상을 관람했는데 인간은 대자연에 비하면 미약한 것이지만 인류를 위하여 무한한 도전과 연구로 황폐화 되는 지구를 보전 유지 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노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영상물은 헬리콥터에서 촬영한 것으로 입체적으로 아름다운 경관을 한눈에 볼수 있고 생동감이 넘치고 영상음악도 경쾌하여 피로가 풀렸다. 박물관에서 시민들을 위하여 빙하에 관한 포스터와 실제와 같이 만들어 놓은 모형을 전시도 하고 기념품을 판매하여 파노라마의 영상 DVD를 구입하였다. 이어서 빙하 현장에서 웅장한 광경을 볼수 있었다. 되돌아오는 도중의 송달에서 중식을 하고 포드네스 선착장으로 되돌아 가서 만헬러 선착장으로 건너서 도로터널로서 세계에서 제일 긴 라르달 터널(연장 : 24.5km)을 지나는데 약 20분정도가 소요 되었다. 6km 마다 훤하게 밝게 조명한 넓은 공간의 간이휴게소에서 잠깐 쉬면서 사진촬영도 하고 터널내 공기도 음미하였다. 터널을 빠져 나온후 일행들은 박수로 길고 어려운 터널공사에 대한 답례를 하고 등산열차를 타기 위해 프람역으로 향했다. 프람(Fram)은 피요르드의 작은 항구이며 쾌속선을 타고 베르겐으로 갈수도 있고 유람선으로 피요르드의 절경을 구경할수 있다. 또한 오슬로와 베르겐간 철도본선의 미르달을 연결하는 지선이며 관광열차로 이용되고 있어 관광객들에게 인기있는 아담한 도시이다. 일행들은 항구에 정박 되어 있는 쾌속선과 유람선을 구경하고 약간의 쇼핑을 하고나서 지정된 산악열차 10호에 탔다. 등산철도는 프람역에서 미르달역까지 20km이며 5.5% 이상의 급경사로 달릴 수 있도록 한 철도이며 실제로 프람역은 해발 2m인데 미르달역은 해발 866m가 되니 급한 경사임을 직접 볼수 있다. 열차가 서서히 달리는 도중에 높은 산위에서 가파른 절벽으로 흘려 내리는 수많은 폭포, 깊은 계곡으로 흘러 내리는 강과 푸른 초지, 멀리 있는 피요르드와 조화를 이룬 환상적인 절경이였다. 열차는 코스포젠(Kjos-Fossen)역에 5분정도 쉬었는데 힘차고 소용돌이치는 코스포젠 폭포(해발 699m,높이 98m)수의 바위 틈에서 전통의상을 한 요정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유혹하는 장면을 연출하여 관광객들에게 기쁨을 선사 하였다. 열차는 계속하여 가파른 산비탈과 루프터널을 통과하여 미르달(Myrdal)역 까지 갔다. 관광객들은 오슬로(Oslo)나 베르겐(Bergen)으로 갈수 있으며 우리 일행들이 도착 했을때 보스(Boss)행 열차가 막 출발하는 것을 보았다. 일행들은 프람역 까지 되돌아가는 도중에 춤추는 요정을 잠깐 보고 난후 내려오면서 가파른 절벽으로 흘러내리는 각양 각색의 폭포를 보았다. 일행들은 옵션으로 산악 열차관광을 한것에 만족하였으며 함께 관광한 외국인 관광객들도 절경에 감탄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대기 하고 있던 버스에 타고 라르달 터널을 두 번째 지나고 라르달에 있는 LINDSTORM HOTEL 에 도착하였다. 여장을 풀고 만찬장에서 맛있게 저녁을 들고 일부가족들은 노래방에서 우정이 넘치는 즐거운밤을 지냈으나 필자는 일찍이 잠을 청하였다. 밤 12시에 깨었으나 밖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
6월12일(금)
밤중에 일어나서 기행문을 정리 하였더니 시간이 꽤 지나 서둘러 가방을 챙겨 어제 간 프람항으로 향했다. 역시 프람으로 가는 길은 라르달 터널을 이용하는것이 빨랐으며 이로서 세계에서 제일 긴 터널을 세번 이나 지나게 되었다. 여유있게 구드방겐행 유람선을 탑승하고 피요르드의 아름다운 절경들을 두시간 이상 외국인 관광객들과 함께 마음껏 즐겼다. 이곳 피오르드는 세계에서 가장 긴 송내피오르드의 일부로써 수많은 폭포가 높고 가파른 산위에서 흘러 내리고 있었다. 송네 피요르드는 100만년전 빙하시대에 빙하의 압력으로 깍여진 U자형 계곡에 바다와 연하여 생긴곳을 말하며, 길이가 무려 204km이며 가장 깊은곳은 1,309m가 된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이 피요르드는 좁은 협곡만 주변으로 장엄한 대자연의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진다. 산 꼭대기에는 하얀 눈으로 덮여 있고 가파른 절벽에는 폭포수가 가느다란 은색의 리본처럼 피요르드의 잔잔한 해면으로 흘러내리는 절경 이다. 일행들은 구드방겐(Gudvangen)항에서 하선하고 면세점에 들러 품질이 좋다는 의약품 오메가-3를 구입하는 동창도 있고 주변의 아름다운 절경을 감상하기도 하였으며 먼저 와서 대기한 버스에 탑승하여 베르겐(Bergen)으로 향했다. 전날 산악열차를 타고 미르달(Myrdal)역에서 보스(Boss)행 열차를 본 지명을 지나 베르겐까지 터널이 43개나 된다고하였다. 필자가세어보니 그런 수가 안되는것 같지만 수많은 터널을 지나면서 비듸오 영화 한편을 볼 정도로 긴 시간을 지나 베르겐항구의 부두창고를 이용한 한식당에 도착하였다. 점심을 하는데 동창부인들이 준비한 밑반찬으로 맛있게 먹고 어시장이 있는 부둣가에서 베르겐의 일부를 볼수 있었다. 15-17세기 한자(HanSa)동맹 시절에 세운 목조건물들은 유네스코에 등록 되어 있는 곳으로 현재 의류, 공예품 등을 파는 쇼핑가로 오래된 목조건물 내부와 음악가 그리그(Edvard Hagerup Grieg : 1843-1907)의 생가등은 시간이 없어 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베르겐을 떠났다. 음악가 그리그의 생가는 시내에 있으며 그 자리에 그리그홀을 세우고, 살던 집, 작곡하던 집, 동상, 생의 일대기를 전시한 박물관과 무덤 등이 있는 유명한 곳이다. 그곳 주변은 아름다운 피요르드의 작은 섬들이 옹기종기 산재해 있고 자연과 잘 어울러져 있어 작곡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 아름다운 곳이다. 이러한 평화스럽고 조용한 자연환경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곡가를 탄생 시킬 수 있었다. 그리그는 1843년에 베르겐에서 태어나 트롤드 하우겐(Trold hougen)에서 1885년부터 살다가 1907년에 생을 마감하였는데, 유언에 따라 아름다운 해변가 산책길에서 피요르드가 잘보이는 절벽암벽에 유택을 마련 하였다. 그는 소프라노 가수이고 2살 아래인 이종사촌 여동생 나나(Nana)와 결혼하였으며 그녀는 그가 작곡한 곡을 불렀고, 작곡실을 작은 창고처럼 지어 주위 사람을 피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내조를 잘 하였으며, 90세(1845-1935)에 작고 하였다. 그후 그녀의 유언에 따라 정부에서 그리그와 합장하여 주었다고 한다. 그의 작품으로서 Solveig’s Song, Morning Mood, at the Wedding 등 주옥같은 명곡 수십편이 있다. 김풍구동창이 그리그 작품 CD를 마련하여 여행중에 음악을 감상 할수 있어 더욱 좋았다. 게일로로 향하는데 오전에 오던길로 보스(Boss)까지 약 2시간이 걸리는 동안 송풍길동창이 노래자랑을 진행하다가 운전기사로 부터 안전운전을 위하여 중단해 줄것을 요청받고 조용하게 음악감상으로 대처 하였다. 부르나비 선착장에 도착 한후 건너편 부르네스 선착장에서 하선하여 게일로로 향했다. 건너간 바다는 하르당에르(Hardanger)피요르드로서 노르웨이에서 두 번째로 긴 피요르드이며 총길이 170km로 베르겐의 남쪽에 위치하는 아름다운 곳이였다. 계속하여 하르당에르 고원지대로 올라가는 곳마다 장엄하게 펼쳐지는 절경과 가파른 절벽으로 흘러내리는 폭포는 수없이 많고 특히 폴린폭포는 높이가 무려 500m나 되고 수량도 많아서 장관 이었다. 1,200m 고원지대에서도 끝없는 평야가 펼쳐지고 아직도 하얀눈이 쌓인 광경과 수 많은 호수 등을 보았다. 1,500m고지에 댐을 설치하여 산속에 수력발전시설을 건설한 곳으로 올라가서 1,819m의 빙하를 멀리서 볼수가 있었으며 아직 녹지 않은 눈속에서 기념 촬영도 하면서 대자연의 신비스러움을 맛볼수가 있어서 우리들은 신선이 된 기분이였다. 황홀한 세계를 즐기는 사이에 해발 800m 고원지대에 유럽풍으로 지은 DR. HOLMS Hotel에 도착 하였다. 우아하고 분위기가 있는 만찬장에 준비된 음식을 즐겁고 맛있게 먹고나니 저녁 10시가 되었다. 밖은 훤하게 밝아 있었지만 잠을 청했다.
6월13일(토)
새벽에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니 기분이 상쾌하였다. 밖으로 나오니 구름 한점 없는 푸른 하늘이 드높았으며 일행들은 모두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우아한 분위기에서 조식을 마쳤다. 오늘 여정이 240km 떨어져 있는 오슬로로 되돌아가서 왕궁과 번화가 카를요한 거리를 관광 한 다음 스웨덴의 호반의 도시 칼스타드(Karlstad)까지 갈 예정이므로 아름다운 호텔의 아쉬움을 남겨 놓고 떠났다. 800m 고원지대에서 서서히 평지로 내려 오면서 푸른숲과 초지 그리고 수많는 호수들의 풍부한 자연환경을 보면서 ”워낭소리“ 영화를 감상하였다. 호숫가 Hallingporten 휴게소에 들러 신선한 공기를 마시니 상쾌하였다. 이어지는 호수와 강줄기를 따라 달리다보니 어느새 오슬로(Oslo)에 도착 하였다. 햇볕나는 토요일 오후이므로 칼스유한 거리에서 무슨행사를 하는지 정장을 한 악대들, 네오나치를 외치며 데모하는 젊은이들과 대치하고 있는 경찰관, 임시 매장으로 천막을 치고 각종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들로 가득 메운 번화가 거리에는 생기가 도는것 같다. 각양각색으로 복장을 한 사람, 머리를 물들이고 모양도 이상하게 하여 볼거리가 많아서 시간가는 줄 모르게 구경하고 기념 촬영을 하면서 번화한 거리를 자유롭게 돌아 다녔다. 번화가에서 보이는 황금색 왕궁은 1825~1848년까지 24년에 걸쳐서 만들어진 노르웨이 국왕의 거성이며 왕궁 앞에는 스웨덴왕으로 노르웨이를 통치 했던 카를요한의 청동 기마상이 서 있다. 건물 내부는 공개하지 않으나 주위의 정원은 일반인들에게 공개 하고 있어 여름이면 시민들이 일광욕을 즐기는 모습을 볼수 있다. 오페라하우스, 오슬로대성당, 바이킹 선박박물관 등 관람 할것이 많이 있으나 일정이 빠듯하여 스웨덴 칼스타드로 향하였다. 도중에 국경세관에서 부가세 환급도 받고, 탁재용동창이 산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으면서 잠깐 쉬었다. 출입국수속을 받지 않고 그냥 국경을 넘으니 편리 하였으며 일행들은 스웨덴에 입국 한것을 느끼지 못한채 칼스타드를 향해서 계속 달렸다. 달리는 E-18호 고속도로의 주변에도 역시 푸른숲과 초지 등 대자연의 파노라마에 매료 되어 시간가는 줄모르고 칼스타드 SCANDIC WINN HOTEL 에 도착하였다. 깨끗한 방에 여장을 풀고 외부에 있는 중국식당으로 가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내일 저녁에 탈린크 유람선에서 쫑파티를 개최하는 것으로 협의하고 스웨덴에서 제일 큰 호수를 보러 갔다. 폭이 그리 넓지 않고 물이 흐르는 강변에서 기념촬영도 하고 푸른 잔듸에서 쉬다가 호텔로 돌아와서 사우나로 땀을 빼니 기분이 상쾌 하였다. 밖은 여전히 훤하게 밝았으나 내일 여정을 위해 잠을 청했다.
6월14일 (일)
새벽 일찍 일어나 기행문 정리를 하였다. 오늘의 일정은 300km 떨어져 있는 스톡홀름으로 가서 노벨상 만찬장인 시청사홀, 세르엘광장, 구시가지에 있는 감라스탄, 왕궁, 대성당, 바사호 박물관 등을 관람 하고 저녁에 탈린크 선박을 타고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으로 가는 것이다. 일찍이 호텔을 떠나 스톡홀름으로 향하는 도중 주변에 펼쳐진 푸른숲과 초지 그리고 수많은 호수를 보면서 서홍수동창은 이번 북유럽을 통하여 느낀 소감을 간단히 소개하였다. 도로위에 보이는 승용차들은 대부분이 소형차이며 아름다운 숲과 풍부한 수자원 등 천혜의 자연환경을 잘 보존하려는 국민적인 노력이 돋보이고, 예를들면 친환경적인 생활실천으로 수년전 까지만 해도 호텔손님에게 제공하던 각종 일회용품인 비누, 샴푸, 린스, 빗, 칫솔, 치약 등을 모두 없애고 벽에 고정하여 계속 사용토록 설치된 비누와 샴푸, 수질오염을 막기 위하여 중성세제를 사용한 침구류 세탁, 화재시 유독가스를 발생 시키는 카페트 대신 목재를 사용한 복도와 방바닥 시공, 호텔 객실내에 쓰레기 분리수거통 설치(통의 입구를 3등분하여 음식쓰레기, 재활용쓰레기와 일반쓰레기로 분리함), 심지어 볼펜까지 플라스틱이 아닌 자작나무에 볼펜심을 넣어 사용하는 등 시회전체가 합심하여 에너지를 절약하고 자연환경을 보전하기 워하여 전방위적으로 노력하고 있음을 보고 명승고적 관광 이상으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어서 김형도동창은 문인 설창수선생의 촛불의미에 대한 뜻을 어럼풋이 알지만 깊은 뜻을 오랫동안 모르고 있었으나 이번 여행중에 호텔에서 촛불을 많이 사용 하는것 보고 촛불의 의미를 알았다. 그내용을 요약하면 문인 설창수선생은 고교졸업식에서 촛불을 소재로 축사가 있었다. 인간은 촛불을 통해서 하느님께 가까이 할수있다는 것으로 들렸는데, 그 깊은 뜻을 몰랐지만, 그분의 뛰어난 언변과 설득력으로 큰 감동을 받았다. 촛불은 촉화(燭火, Candle)이라고 하며 아름다운 촛불을 난촉(蘭燭)라고 하고, 그의 그림자를 촉영(燭影)이라고 한다. 그리스나 중국의 고분에서 청동촛대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기원전에 존재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결혼식에 켜는 촛불을 화촉(華燭)이라 하여 결혼을 “화촉을 밝힌다” 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촛불은 성당의 미사와 같은 성스러운 의식에서, 부처님의 자애가 넘치는 법당에서 필수적으로 쓰이는데 온세상을 밝히는것이 성현들이 세상을 밝히는 정신과 같기 때문이 이닐까? 그리고 우리의 전통적인 제사상에서도 영혼을 불러 들여서 대화하는 가교역활을 하는것, 즉 신과 통하는 그무엇이 있다고 생각 해왔다. 촛불은 자기몸을 태우면서 어둠을 밝혀 주고 신과 통하는 길을 인도하여 부처님과 하느님께 가까이 하게한다. 고교시절 문인 설창수선생께서 축사한 촛불이 신과 통하는 가교역활을 한다는 뜻을 두고 하신것일까. 법당을 내려오면서 저 촛불에 담겨진 심오한 뜻을 생각하며 ‘촛불의 의미’를 돠새겨본다. 차창밖에 펼쳐지는 자연을 보면서 경쾌하고 명랑한 음악영화맘마미아를 감상하니 어느새 중간지점에 있는 휴게소에 도착하였다. 잠깐 쉬고난후 계속 달려 정시에 스톡홀름에 도착 하여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고 현지 관광안내인 방혜정양을 만나서 우중에 시내관광을 나섰다. 스웨덴은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노르웨이와 양분하여 남동부를 차지하고 있고 동서로 600km, 남북으로 1,500km가 되는 길죽한 나라이며 총 면적이 약 450만㎢ 로 북유럽국가 중에서는 가장 넓고, 유럽에서 여섯 번째로 넓은 나라이며 인구는 약 900만명 이다. 지리적으로 북동쪽은 핀란드, 서쪽은 노르웨이와 접하고 있으며, 남서쪽에는 해협을 사이에 두고 덴마크, 독일과 마주보고 있다. 스웨덴인은 북부 게르만인의 일종인 고트인과 스비아인이 스웨덴에 정착해 융합되었다.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 한것은 9세기경부터 이며, 이때 바이킹 활동이 왕성 했으며 그후 11세기에 바이킹 활동은 막을 내리고,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통일국가가 탄생 되었다. 이후 스웨덴은 유럽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한때 핀란드와 노르웨이를 지배하는 등 스칸디나비아의 강국으로 군림 하기도 했다. 현재는 대외적으로 중립적인 정책을 견지하고 있으며, 이웃하는 북유럽국가들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 하고 있다. 스웨덴은 경제력과 사회복지에 있어서 세계 최고수준이라 할수 있다. 부유함을 바탕으로 한 안정감은 중부유럽과는 차별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수많은 호수, 울창한 숲, 피요르드 등 풍부하고 아름다운 자연과 여름에는 한밤에도 백야를 볼수 있는 나라중의 하나이다. 도시계획자들이 수세기에 걸쳐 건설한 수도 스톡홀름은 북유럽의 베네치아라 불려지고 있고 14개 섬과 52개의 다리로 연결된 물의 도시로 인구는 약 180만명 이고, 교민은 2,000여명, 입양자는 1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 도시는 세계인의 꿈인 노벨상(평화상은 오슬로) 수상식이 열리는 곳이다. 노벨상 설립자인 노벨은 1833년10월10일 스톡홀름에서 태어났으며 스웨덴 화학자이고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사람이다. 그는 1842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한 후에 주로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1850년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화학과 기계학을 2년 동안 배웠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1859년까지 아버지의 군수공장에서 일하면서 지뢰의 부설 등 실제적인 기술을 익혔다. 그후 스웨덴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충격이나 마찰에 의해 폭발하는 니트로글리세린을 연구했다. 1864년에는 기폭장치를 사용해서 밀폐된 니트로글리세린의 폭발에 성공하여 이른바 뇌관의 특허를 획득하였다. 그 당시의 기폭제는 흑색화약으로 후에는 플미산 수은(2) 뇌흠을 사용했다. 1866년 취급하기 어려운 니트로글리세린을 고체로 만들기 위해 이것을 흡착하는 고형물의 실험을 시작하여 1867년 규조토에 니트로글리세린을 배어들게 해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하였다. 니트로글리세린의 보급으로 폭발사고가 잇따라 일어나 노벨의 동생을 잃는 등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여 국제적 물의를 빚었으나 실험을 계속하여 1876년에는 보다 폭발력이 큰 다이너마이트를, 1887년 무연 니트로글리세린 화약을 개발했다. 다이너마이트 외에도 합성고무와 인조비단을 발명하여 특허를 받았는데 이 다이너마이트는 산업자본을 이룩한 구미 각국이 제국주의의 길로 접어드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노벨은 약 355종류의 특허와 세계 여러나라에서 경영한 15개의 화약공장을 기반으로 노벨 다이너마이트 트러스트를 창설했다. 원래 그는 평화주의자로 자신의 발명품이 전쟁을 종식시키는데 기여하기를 바랬다. 1896년 12월 노벨의 유언에 따라 유산을 스웨덴 과학아카데미에 기증하여 노벨상이 제정 되었다. 노벨상은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 경제학 등 6개 분야에서 시상되며 이 상은 과학분야의 경우는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으로써 매년 인류를 위해서 최대의 공헌을 한 사람에게 주어진다. 수상 대상자는 개인(최대 3명까지 공동수상 가능)이 되며, 평화상의 경우 기구나 협회도 수상할 수있다. 시상식은 매년 12월10일 오후 4시30분에 거행된다. 노벨상 만찬장으로 활용되는 시청사는 멜라렌 호수와 리다만이 겹치는 해안가에 건축 하였으며 시청사의 설계자는 랑나르 티스테르 베리이며 건립 전에는 항구에 접해 있는 그랜드 호텔에서 노벨상 만찬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비가 내리는데도 말름섬 언덕으로 올라가서 바다와 호수, 섬으로 아름답게 조화된 시내를 한눈에 바라볼 수있었다. 서쪽편에는 시청사, 중앙에 높이 보이는 북방박물관과 그옆이 바사(VASA)호 박물관, 항구에 접해 있는 그랜드호텔 등은 운무로 희미하게 볼수 있었으나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시가지를 내려와서 탑높이가 106m 되는 시청사를 들러서 1층에 있는 만찬장이 스웨덴에서는 제일 넓은 홀이며 2층에는 화려한 황금 모자이크 방이 무도회장으로 사용 되며 2층 복도 위에 설계자의 흉상이 걸려 있었다. 시청사는 잔잔한 멜라런 호숫가에 세워져 있고 건너편에 맥주공장건물 등 오래된 건축물이 보였으며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구시가지에 있는 왕궁에서 비가 오는데도 수비병들이 교대식을 하고 있었다. 궁전은 1697~1754년에 걸쳐 이탈리아 바로크풍으로 건축 되었으며, 현재는 외국 귀빈을 위한 만찬장으로 이용 되고 있다. 궁전 내부에는 약 600개의 방이 있으며 그중에서도 도자기와 유리그릇 등이 전시된 베르나르도의 방, 12명의 역대 국왕과 왕자의 왕관 등 보물이 전시 되어 있는 보물관 등이 있다. 궁전내부를 관람 할수 없어서 유감이다. 왕궁 옆에 있는 대성당은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며 1279년에 건축 되어 몇번의 개보수를 하였으며 이곳은 왕가와 귀족, 기사들의 문장이 장식 되어 있고, 특히 1489년에 제작 돤 약 4m 높이의 나무 조각상과 흑단, 은으로 제작 된 제단, 바록크 양식의 옥좌 등이 있다. 이곳에서 역대 국왕들의 대관식과 결혼식이 거행 되기도 했는데, 1979년에 구스타프 국왕과 실비아 왕비가 여기서 결혼식을 가졌다. 몇 년전에 국왕이 사고로 사망하고 이어서 아들이 국왕이 되었는데 그는 독일에서 유학 할적에 안내해준 여인과 사랑을 하여 이곳에서 결혼식을 갖을 예정이다. 스웨덴 왕가도 정통성을 잃어가는것 같다. 구시가지인 감라스탄 지역은 닳고 닳은 돌블록 포장과 계단, 벗겨진 외벽 등 옛날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구시가지의 오래된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현재는 레스토랑, 카페, 부티크 등으로 개조 되어 쇼핑과 관광지로 유명하여 세계각국의 관광객으로 활기가 넘친다. 일행들도 잠깐 쇼핑을 하니 재미가 있고 볼거리가 많았다. 이곳 중심이 되는 스토르토리에트(stortorget) 광장이 있으며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심사하는 스웨덴 아카데미 본부가 있다. 이어서 동물섬에 있는 바사(vasa)호 박물관으로 갔다. 이곳은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전함 바사호를 원형 그대로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바사호는 스웨덴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던 구스타프2세 시대에 건조되어, 1628년8월10일 처녀 항해를 위해 스톡홀름 항구에 들어서는 순간 무게중심을 잃어서 침몰한 왕실전함이다. 그후 바다 속에서 잠자고 있다가 1956년 해양 고고학자인 안데스 프란첸에 의해 발견돼 333년만인 1961년에 인양 되었다. 총길이 62m, 최대폭 11.7m, 높이 50m, 배수량 1,300톤으로 그당시 꽤 큰 전함에 속했다. 관내에는 1/10모형, 각종 전시물로 설명을 듣고 바사호의 보전유지, 사고 이유와 그당시 승선한 인원 중 귀족이 100여명이나 사망 했다는 사실 등을 알 수 있고 인양장면의 영상물을 관람하여 쉽게 이해 할수 있었다. 일행들은 북유럽 여행을 마치고 6일동안 함께한 스웨덴인 쿠르트 운전기사와 작별의아쉬움을 나누고 에스토니아 탈린행 유람선 탈린크호에 승선하였다. 탈린크 유람선은 2008년도에 건조한 4만8천톤의 호화 유람선이다. 탈린크가 유유히 스톡홀름항을 벗어나니 바다위에 떠있는 수많은 섬과 별장과 요트가 있는 풍경은 한폭의 그림과 같이 아름다웠다. 일행들은 선내에 있는 면세점이나 슈퍼마케트를 두루 쇼핑하고 만찬장에서 훌륭한 부페 음식을 즐기며 정담을 나누었다. 식후에는 선상극장에서 경쾌한 밴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기분 풀이를 하는 즐거운 밤이 되었으며 백야의 선상에서 잠을 청했다.
6월15일(월)
일찍이 일어나서 어제의 여행에 관한 정리를 하고 선상으로 나가니 망망 대해의 넓은 공간과 신선한 공기로 기분이 상쾌하였다. 아침 10시에 탈린항에 도착하여 시간 여유가 있어 선상에서 조식을 하면서 희미하게 보이는 육지를 볼수 있었다. 탈린항에는 이미 5척의 대형 호화유람선이 정박하고 있는것을 보니 이곳이 중세 도시로 형성된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재로 지정되여 관광객이 많다는 것을 직감 할수 있었다. 하선하여 입국수속 없이 복도로 한창 걸어서 나가니 현지 안내인 김정곤 선교사가 반갑게 맞이 하였다. 그는 성교회에서 13년전에 파견되어 탈린대학교에서 신학과를 졸업하고 이곳 젊은이를 상대로 선교활동을 하고 있으며 2남1녀를 둔 가장이며 아내는 탈린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개인소개와 아침에 비가 오지만 곧 개일것이라고 장담하고 비를 맞으면서 구시가지로 안내하였다. 에스토니아는 발틱 3개국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중 제일 적은나라이며 발트해의 핀란드만에 연해 있는 800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1918년까지 독립국 이었는데 1940년 소련에 합병 되었다가 1991년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로 독립을 되찾았다. 국토면적은 45,227㎢ 이며 3국의 인구 7백만중 1백36만명 이며 수도 탈린의 인구는 90여만명이다. 탈린은 14~15세기의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아름다운 중세도시 이다. 고풍스런 중세유럽의 분위기가 잘 남아 있는 구시가지는 13세~15세기에 걸쳐 가장 발전하였다. 특히 구시가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어 있어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탈린은 1216년에 덴마크왕이 정복하여 도시를 이루었으며, 1300년 중반에 독일상인을 중심으로 한 한자무역 동맹에 가입하여 도시가 크게 발전하였다. 1500년 중반에는 스웨덴이 지배하였으며 1730년에 재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1908년 레닌의 10월혁명에 의해 제정 러시아가 붕괴 되고 1918년에 독립 하였으나 1939년 세계 제2차대전이 발발하여 1943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합병 되어 소비에트연방에 귀속 되었다. 1991년 두 번째로 독립하였으며 2004년 투표에 의해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1800년 중반에 에스토니아 지식인층에 의한 민족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869년에 첫 민속노래로 축제가 지방도시인 타루투에서 시작했는데 현재는 5년마다 전국민적 행사로 확산되었다. 탈린에서도 노래동산에 모여 1백년 이상 부르는 합창곡을 부르면서 축제가 시작된다. 축제의 첫날에 구시가지 시청앞에 모여 가두행진으로 1960년에 지은 야외음악당까지 전통복장을 하고 행렬을 한다. 그곳은 15,000여명의 합창단이 합창 할수 있도록 설계 되어 있으며 잔디운동장에 30만명을 수용할 수 있어 축제합창 소리를 시내에서도 들을 수가 있다고 한다. 현재 국가는 내조국, 내축복 그리고 기쁨 이다. 경제는 2006년도 기준 1인당 소득액이 약 12,000달러 이며 경제성장율이 높아 가고 있고 2008년 1/4분기에 급료가 1,200달러이고 지하자원은 없지만 목재, 펄프 등이 총생산량의 45%를 차지 한다. 일행들은 탈린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툼페아(toompea) 언덕으로 갔다. 까드리오르그 궁전에서 에스토니아 건국신화(단군신화와 같음)에 칼렙의 아들 서사시 칼렙은 민족의 조상이고 그의 아내 린다가 칼렙을 이곳에 묻었다고 하며 공중사진을 보면 마치 한사람이 누워 있는 모양으로 되어 있고 우리 일행이 서 있는 자리가 그의 머리부분이 되었다. 통치자들은 이곳에 왕궁을 지었으며 현재는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중앙에 게양된 삼색 국기는 파랑색-검정색-하얀색으로 구성되어 있다. 검정색은 국가의 새가 제비이므로 검정색이 가운데에 들어갔다. 금도색된 국가 문장과 독수리 세 마리 문장은 덴마크에서 유래 되었고 나뭇잎은 상수리 나뭇잎이다. 국회의사당 맞은편 알렉산드러 넵스키 러시아 정교회는 1895년에 준공하였는데 10년이 걸렸으며 이 교회가 세워지기전에 이곳에는 마틴 루터의 두상이 있었던 유서 깊은 중세 건물이다. 짜르 알레산드러 3세의 명령에 의해 건물을 철거하고 정교회를 지었다. 천장에 수염난분이 알레산드러 렙스키 이며 전면에 제단과 예배당을 막는 벽이 있어 대주교만이 중앙문으로 출입하고 이울타리 내에는 회원만이 출입이 가능하고 비회원은 출입이 통제 되고 있다. 정교회 건너편에 있는 톰교회는 루터교회로 대주교가 시무하는 교회이며 정식명칭은 성모 마리아 톰교회이다. 이교회는 1200년경 로마교황청에서 파견되 도미니카 수도승이 이 자리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웠으며 1520년경에 마틴 루터의 수제자가 설교하기 시작한 이래 루터예배식으로 바뀌었다. 지금 모습의 카테드랄 형식의 교회를 건축하기 시작해서 200년 이상의 세월을 거쳤는데 그동안에 화재, 전쟁, 재정적 문제 등으로 오래세월이 지나서 마지막 종탑을 세운 년도가 꼭대기 깃발모양에 1779년이 표시된 해에 완공 되었다. 이교회 주교는 독일출신이였는데 에스토니아 태생의 주교가 1918년에 최초로 임명되었다. 정교회는 화려하지만 이곳은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이며 벽에 걸린 조각품은 이교회를 다니던 회원의 가문의 문장들이며 죽으면 그 가문의 상징을 조각하여 걸어 두고 시신은 교외에 묻는다. 루터교회의 중요한 특징은 제단에 예수님의 성화가 있으며 제단 중심으로 유아세례, 성직 임명식, 성찬식을 거행하는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두번째는 설교를 중요시하여 설교단 올라가는 양기둥 위에 베드로(열쇠)와 바올(칼)의 상이 있고 계단측면에 예수님의 12제자와 10계명을 들고 있는 모세의 조각 등이 있다. 세 번째 음악을 중요시 하여 파이프 오르간은 설치한지가 70년이 된 가장 오래된 독일 오르간이며 매주 토요일 오후 1시에 연주회를 가지고 있다. 전면에 있는 석관에는 발굴 당시 시신이 없었으며 종교개혁때 이교회가 반카톨릭 세력에 의해 전소 되었다. 중세시대 영주들의 취미가 성인의 뼈를 모아서 데코레이션을 하는 것이 있었는데 이런 뼈들이 밀거래로 팔렸다고 한다. 세 번째 석관은 1700년경 총독의 무덤이고 이 사람의 유언에 따라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형태로 비석이 만들어져 있고, 네 번째 석관은 1800년대 스웨덴 해군 함장으로써 세계일주를 했던 아담이라는 해군제독의 무덤이며, 당시는 이곳에 묻히려면 짜르황제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하였다. 노란색 건물의 총리 집무실 왼쪽벽 대리석에는 에스토니아어로 적힌 글귀에 공산테러로 희생된 정부 주요 인사들의 명단이 새겨저 있고 에스토니아인에게 공산화는 혁명이 아니라 불법 테러다라고 하였다. 대리석판에 새겨진 이름들은 1919~1939년 독립정부 당시의 대통령, 수상, 장관, 차관을 지낸분들 이며, 대개 사망년도가 1941~1943년간에 스탈린의 숙청으로 희생된 것이다. 초대 대통령 콘스탄틴 패즈(Konstantin Pats)는 소련 KGB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후 이름모를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1955년에 사망하였으며 1990년에 그 시신을 찾아 고국에 안치 시켰다. 1944년에는 1차로 정치계 인사 가족들을 시베리아에 유배 시키고, 1948년에는 2차로 지주 가족들을 유배시킨 불행한 시대가 있었다. 일행들은 전망대에서 구시가지에 망루가 있는 성곽과 중세기의 건물들이 원형 그대로 보존 된 지역을 조망할 수가 있었다. 적색기와 지붕에 고깔모양을 한 망루 46개, 성주변을 1500년 중반까지 타원형, 직사각형, 꼬마 망루 등이 50~120m 간격으로 세워져 있고, 12m의 높이의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고, 망루는 46개 중 26개만 남아 있었다. 중앙지역에 우뚝 솟은 159m의 첨탑이 있는 올라프 교회는 바이킹족 가운데 처음으로 개종한 노르웨이 왕의 이름을 땄으며 1300년경에 교회를 건축하고, 1500년 중반까지 종교적 목적과 함께 상업적 목적, 지나가는 상선들에게 길안내와 항구표시의 역활을 했다. 낙뢰로 3번이나 첨탑이 소실 되었고 소비에트 시절에는 모든 종교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활용했으나 지금은 침례 교단에 예속 되어 있다. 중세기 유럽풍의 성벽과 건물들의 아름답고 잘 어울려져 있는 풍경과 탈린항에 정박한 대형 호화 유람선들은 옛날과 현대와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툼페아 언덕과 구시가를 연결하는 인도와 화물을 나르는 마차길이 있는데 일행들은 돌블럭 포장의 마차길로 구 시청사가 있는 광장으로 가서 광장 주변에 있는 중세 건물들을 관광하였다. 구시청은 시장이 행정업무를 보던 곳으로 1404년에 세워졌으며 첨탑 꼭대기에 세워져 있는 토마스 할아버지는 1500년 초 실제 인물로 전형적인 에스토니아인이며, 430년 가까이 구시청 꼭대기에 있었는데 1944년 소련 폭격기에 의해 추락 된 일이 있었다. 구시청 정면에 계양된 두 깃발의 왼쪽은 국기이며, 오른쪽은 탈린시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고, 전면 물홈통과 용머리는 중국 문물의 영향이었다. 2층 길다란 창이 있는 방은 외국 국빈 방문시 만찬장으로 활용 하고 있다. 중세 건물의 특징은 급한 삼각형 지붕, 오른쪽 통나무와 도르레는 짐을 올릴수 있는 장치이고, 전면에 쇠붙이가 있는 건물이어야 한다. 구시청사 보다 오래된 약국건물은 1422년에 처음으로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일행들은 간단한 쇼핑도 하면서 짧은시간에 탈린의 정취를 맛볼수 있었다. 에스토니아의 현지식 스테이크로 점심을 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거리로는 365km로서 경주에서 서울 가는 거리이나 출입국수속, 시차와 도로사정이 좋은편이 아니였다. 러시아 입국 수속시 각자가 가방을 가지고 검색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으나 개당 1유로를 내면 버스에 실은채로 통과 할수 있어서 편리는 하였지만 아직도 이러한 부조리가 남아 있다는것은 수십년전 어느나라에 있었던 급행료가 생각이 났다. 우랄알타이 산맥 서쪽의 대부분이 평지로 되어 있어 도로는 거의 직선도로이며 도로 주변은 울창한 삼림과 초지로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의 넓은 광야를 볼수 있었다. 밤9시에 호텔에 도착하여 여정을 풀고 식당 이용시간이 끝난 뒤여서 몇명씩 그룹하여 준비된 도시락으로 방안에서 저녁을 먹었다. 밖은 여전히 훤한 아름다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지막 잠을 청했다.
6월16일(화)
아침에 일어나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니 광활한 지평선 위에 푸른 초지공원이 넓게 펼쳐져 있고 높이가 일정한 건물들이 세워져 있는 아름다운 도시의 모습에 기분이 상쾌 하였다. 11일 동안의 긴여정에 한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 건강하게 즐거운 여행이 되어서 매우 다행스러웠다. 오늘 일정은 오전 중에는 근교에 있는 여름궁전의 분수공원 관람이고 오후는 겨울궁전인 에르미타쥐 박물관과 그외 피터플 요새(표트르 대제), 네프스키대로 등을 파노라마식 관광을 하고 마지막으로 러시아의 전통 음악과 민속공연을 관람하는 것이다. 일행들은 아름다운 건물과 네바강에 정박한 호화유람선 등을 보면서 강변을 지나는 동안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대하여 궁금한것이 많아서 안내자에게 물어보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가 유럽으로 향하는문이란 모토아래 표트르대제가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늪지대에 세운 도시로 베드로의 도시, 반석의도시, 북유럽의 베네치아로 불려지는 아름다운 유럽풍의 도시이다. 현재 모스크바가 정치와 경제의 수도라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교육과 문화의 수도로서 러시아의 옛 모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모스크바와는 달리 유럽의 경관을 지니고 있는 이도시는 18, 19세기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이 수많은 격동의 세월들 속에서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703년 표트르대제에 의해 건설된 이래 200년간 로마노프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러시아 혁명 당시에는 페테르그라드, 소비에트시절에는 레닌그라드, 1991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개칭되는 등 명칭에서도 역사의 격동성을 느낄 수 있다. 북쪽의 베네치아라 불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모스크바에서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을 이 도시에서 찾아 볼수 있다. 상트페데르부르크는 지금으로부터 300년전인 1703년5월27일, 러시아의 달력으로는 5월16일에 탄생하였다. 이 도시는 네바강에서 시작 되었으며 당시 표트르대제는 스웨덴과 북방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네바강은 처음에는 군사적으로 전쟁의 요새, 해상무역항구 등으로 이용 되었으나 이곳은 점차 경제적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고 1710년 표트르대제는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겼다. 처음부터 이 도시는 표트르대제에 의해 암스데르담과 베네치야 를 본따 계획적으로 설계되었다. 이 도시는 모든 유럽의 방식과 유사하게 이루어 졌다. 이 도시의 건축은 1812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 기념으로 더욱 활발해졌다. 알렉산드린스키 극장과 여러궁전들이 세워지고, 이삭성당도 전쟁이후인 1818년부터 건축이 시작 되었다. 그 당시 러시아의 문화는 유럽의 전통을 이어 받아 발전했고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는 더 이상 문화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식인들, 시인, 미술가, 음악가들은 자신들이 18세기 베네치아인들이라 여겼고 끓임없는 문화적 행사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그러한 흐름은 끊어져 버리고 이후의 소비에트국가는 과거와 같은 문화도시로 되돌리는 데에 많은 시간을 들여야만 했다. 1924년 레닌의 사후도시의 이름은 레닌그라드로 개칭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이 도시의 역사상 가장 힘든 시기였다. 1941~1944년까지 900일간 도시에서는 혹한과 기아와 폭탄으로 인해 약 100만명이 사망하였다. 그러나 도시는 이러한 시련을 견뎌 냈고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점령 당하지 않았다. 1991년에 다시 원래의 이름대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를 되찾아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신비를 간직한 러시아의 제2중심지이며, 국제관계의 장으로서 그역할을 다하고 있다. 2003년은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탄생한지 300년이 되는 해로 성대한 기념행사를 가졌었다. 이 해를 기념하여 러시아 정부는 그전부터 도시의 경관을 꾸미고 깨끗이 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그당시 러시아 대통령 푸틴이 이곳 출신이기 때문에 남다른 공을 들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든다. 현재의 대통령 메데레프, 총리 푸틴 등 고위권력자들이 이곳 출신들이 많으므로 도시발전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것으로 예측이 된다. 5월27일 기념일 당일에는 네프스키 대로에서 각종행사와 행렬이 있었으며 각국 대통령들을 초대하고 네바강에 있는 초호화 범선들이 귀빈들의 숙소로 이용 되었다. 300주년을 기념하여 여러나라에서 선물을 보내 왔다. 스위스는 도시 곳곳에 시계를 설치 해 주었고, 일본은 행사기간 중 네바강에서 레이져 쇼를 보여 주었으며, 프랑스에서는 표트르 1세 동상을 보내 주었다. 그런데 이도시의 기념행사에 정작 시민들은 참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이유는 테러를 방지하기 위하여 철저한 사전봉쇄가 이루어졌고, 너무나 많은 인파가 몰려 들었기 때문이다. 한가지 우스운 사실은 네프스키 대로변 건물 창문이 대로를 향하는 건물에 사는 시민들은 각국 대통령의 행렬시에 창문으로 보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까닭은 창문을 통해 총을 발사 할 위험 때문 이었다. 특히 당시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미감정으로 부시대통령의 방문을 반대하는 시민들이 많았다. 그래서 테러를 방지하기 위한 명목하에 웃지 못할 해프닝이 많았다고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북위 60도에 위치해 있으며, 인구는 약 500만명, 이도시의 시발점이자 중심부를 가르는 네바강은 길이 74km, 평균 폭은 약 600m이며, 깊이는 24m에 이른다. 네바강은 65개의 지류와 운하로 이루어져 있으며 100여개의 섬들을 연결하는 다리는 365개나 된다고 한다. 도시가 발생된 토끼섬을 중심으로 4개의 큰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평균 기온은 여름에 섭씨 18도, 겨울은 영하 8도 이며, 가장 더울 때는 30도에 달하고 가장 추울때 영하 40도까지 내려간다. 강수량은 일년에 630mm 정도이지만 도시는 언제나 축축히 젖어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이 도시의 큰 특징 중의 하나는 백야(白夜) 현상이다. 백야는 5월25일에 시작되고 6월21일에 최고조에 이르며 7월16일에 끝난다고 볼수 있다. 이 시기에는 문자 그대로 하얀 밤 즉 해가 지지 않는 밤 을 맛볼수 있다. 일행들은 네바 강변에 있는 포트르 요색, 에미르타쥐 박물관 그리고 무수한 유럽풍의 건물, 개선문, 동상, 지상전차 등을 보고 대통령 별장을 지나 1시간반을 달려서 근교 페테르고프에있는 여름궁전의 분수공원을 관람하였다. 이궁전은 표트르 대제의 별궁으로 1714년에 건축하기 시작하였고 그후 여러 차례 재건축 되었다. 현재의 궁전은 라스토레리가 설계한 것으로 제2차세계대전에 독일군이 불태웠던것을 1958년에 복구한 것이다. 궁전의 공원 넓이가 1000ha 되는 광할한 지역에 펼쳐져 있으며, 원래 황제가 사냥을 즐기던 곳으로 지금은 공원으로 이용 되고 있다. 공원 중 분수공원은 유명한 조각가들의 조형물들이 전시 되어 있으며 아름드리 나무의 울창한 숲과 조각상, 수많은 분수들이 자연과 어울려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 분수공원은 핀란드만을 연결한 수로와 여러 조각상, 분수들이 조화를 이루며 화려한 전경을 그려내고 있다. 대폭포수 좌우로 나뉘어 7개의 계단이 흘러 내려 모인 곳은 반원형의 수영장이고, 한가운데에는 삼손분수가 있다. 삼손상(높이 3.3m, 무게 5톤)은 1802년 고즈톱스키가 만들었으며 금박이 입혀진 사자입에서 물이 20m 높이까지 뿜어져 솟는다. 표트르 대제가 성경속 영웅 삼손동상을 만들라고 한것은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러시아군이 승리한 날이 성 삼소니아 기념일 이었기 때문이다. 중앙의 분수 이외에도, 피라미드분수, 우산분수, 해분수, 아담분수, 이브분수, 넵튠분수 등 매우 많은 분수들이 있다. 이토록 크고 아름다운 정원을 불과 한시간 남직한 시간에 대충 관람하고 곧장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되돌아 오면서 휼륭한 지도자인 표트르 대제를 한번 더 생각해 보았다. 페테르 파블로프스크 요새를 시작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1672-1725)는 강력한 이미지를 가지고 러시아의 영토 확장과 유럽국가로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그덕분에 러시아는 당대에 유럽의 강국으로 발돋움을 하게 되었을 뿐만아니라 후대에는 아름다운 관광유산을 남겨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의 생애에 대한 서술은 책 한권으로도 모자랄 정도로 러시아 역사에 중요한 사건으로 채워진 삶을 살았다. 그는 유럽에서 신분을 숨기면서 조선소에서 일하면서 배의 필요성과 베네치아와 암스텔담을 견학하고 돌아와서 경험을 바탕으로 선진국의 제도나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대대적인 개혁사업에 착수 하였는데, 그내용은 당시로는 획기적인 것들이었다. 원로원의 설치, 세제개혁, 14등급의 관제 제정, 교회의 권리제한, 학교의 신설, 문자의 개발, 국영공장의 설치, 해군의 창설, 과학아카에미의 설립, 러시아 지도 작성과 천연자원에 대한 조사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표트르 대제는 이 개혁을 바탕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고, 그힘을 통해서 영토확장에도 열을 올렸다. 평화스러웠던 해는 단 일년밖에 없었을 정도로 주변국과 자주 전쟁을 치루었는데, 가장 큰전쟁은 스웨덴과의 21년간에 걸친 북방전쟁이며, 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난후 현재의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의 상당한 지역을 획득하며 발트해로의 출구를 확보하게 되었다. 또한 오늘날 외국 관광객과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여 수도로 정했으며, 이는 유럽으로의 창을 확보하여 후대에도 러시아가 유럽의 강국으로 남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우리나라에도 눈부신 경제발전에 밑거름이 된 故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생각 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되돌아와서 현지식으로 점심을 하고 겨울 궁전인 국립 에르미타쥐 박물관으로 갔다. 날씨가 개었다 흐렸다하는 쌀쌀한 오후에 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하여 장사진을 이루어 서 있었지만 좀처럼 줄지 않고 시간관계상 막연하게 기다릴수가 없어서 관람을 포기하고 대신 이삭성당을 관람하는것으로 계획을 변경 하였다. 국립 에미르타쥐 박물관을 관람 하지 못한것이 아쉬워서 몇 명은 관련책을 사기도 하였다. 박물관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소개를 하면. 이 박물관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영국의 대영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박물관으로 꼽힌다. 다시말하면 세계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닌 역사적, 예술적 전시품들을 모아 놓은 러시아의 최고의 박물관이다. 현재 박물관의 전시품들은 다섯개의 건물에 나누어 전시 되고 있다. 전시품 이외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들에 의해 이루어진 겨울 궁전의 실내는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식하였으며, 이곳에 소장된 300만점 이상의 작품 중에는 레오나르드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루벤스, 피카소등 유명한 예술가들의 작품이 포함 되어 있다. 러시아 황제들의 주거지였던 겨울궁전은 페트로1세에 의해 네바 강변에 세워졌으며 본격적인 미술품 수집은 예카데리나 2세때부터 시작되었다. 미술품 수집을 상당히 좋아했던 그녀는 자신이 수집한 미술품들을 따로 보관하기 위해 겨울궁전 옆에 별관을 세웠으며 이 건물의 이름을 에르미타쥐 라고 명명하였다. 그후 여러 황제들이 미술품 수집을 계속했고 전시공간을 넓히기 위해 건물을 증축하였다. 1852년 니콜라이 1세가 처음으로 대중에게 소장품을 공개하였고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자 에르미타쥐에 있던 황금사륜 마차 등 개인 소장품은 국유화 되었다. 중앙계단, 황금사륜 마차, 표트르 대제홀, 전쟁 갤러리(1812년), 쿠투조프 장군의 초상화(1829년), 황제홀, 공작새 시계(18세기 후반), 레오나르드 다빈치, 마돈나와 아기 그리스도(1430년대), 베누아의 마돈나(1478년), 리트의 마돈나(1480년대 초반), 램브란트의 돌아온 탕자(1660년말), 섬세한 모자이크 자기판, 그림 등 볼것이 너무나 많은 휼륭한 박물관을 보지 못해 모든 친구들이 아쉬워 했다. 만약에 다시 이곳에 온다면 좀더 여유있는 시간을 갖고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마음껏 감상 할수 있도록 계획을 세워야 하겠다. 웅장한 황금빛 지붕을 지니고 두 번째로 높은 이삭성당은 단순히 화려하다고만 하기엔 상당한 중후감을 지니고 있으며 그 모습은 유럽풍의 도시와 잘 어울린다. 성당의 높이 101m(제일 높은 표트르 요새의 높이 120m), 건물의 길이 111m, 폭 97m의 웅장한 성당은 1818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1858년에 완공 되었다. 40년 동안 공사에 참여한 인원만 50여만 명이 되고 100kg이상의 황금을 녹여 칠한 황금빛 돔은 페테르 파블로프스크 요새 사원과 구 해군성 첨탑과 더불어 이도시의 하늘을 새롭게 장식하는 데에 한몫을 하고 있다. 핀란드에서 가져온 125톤의 붉은 화강암 원주기둥이 사원 입구 벽면을 코린트식으로 장식하고 있으며 지붕에도 조각상을 세웠다. 본래 이도시는 늪지대(연약지반)이므로 대규모 성당의 공사를 위해서는 기초를 튼튼히 해야 했다. 이 성당 밑에도 이미 1만1천개의 말뚝이 박혀 있었고 세로 6m짜리 말뚝 1만3천 개를 박고 그위에 화강암이나 석회암을 깔았다. 그 거대한 기초공사의 모습은 성당내의 전시물을 통해서 볼수 있다. 육중한 기둥을 세웠던 모형을 보면 기둥높이보다 더 높게 비계를 만들어 큰 중량을 들수있는 도르레를 설치하여 기둥을 세운것이다. 사원안에는 1840-1850년대 러시아의 종교적, 역사적 회화작품들을 볼 수 있으며 103점의 벽화와 52점의 캔버스 그림이 있다. 여기에는 22명의 화가들이 참여 하였다. 성서의 내용과 성인을 묘사한 그림들로 이루어졌으며 그중에 돔에 그려진 카를 브르료프의 작품은 특히 유명 하다. 일행들은 이삭성당을 관람하고 나서, 이른시간이지만 저녁을 한식으로 하고 러시아 전통음악과 민속춤을 관람했는데 경쾌하고 빠른 음악에 맞추어 즐겁게 추는 춤을 보니 11일 동안의 여로에 겹친 피로가 싹 풀리는것 같았다. 공항으로 가는도중 네바강 건너편에 있는 오로라호를 멀리에서 볼수 있었다. 오로라 순양함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건조 되었고 1900년에 진수식을 가졌다. 이 순양함은 러일전쟁과 1차세계대전에 참전했고 1917년 소비에트 혁명의 신호탄이 된 포성을 올린 전함으로써 1949년부터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일행들은 터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물인 개선문과 레닌 동상, 승리기념탑 등을 뒤로 한채 긴여행의 아쉬움을 남겨 놓고 불코바국제공항으로 갔다. 출국수속을 순조롭게 마치고 대한항공기에 탑승한 시간이 저녁 11시, 아직도 해가 지지 않는 백야현상을 다시한번 볼수가 있었다. 다행히도 항공기내의 뒷좌석은 여유가 있어 누워서 쉴 수가 있었으며 기내식 두끼를 제외하고는 꿀맛같은 잠을 청하다보니 어느새 한국 영공에 들어섰다.
6월17일(수)
밤새도록 항공기에서 지내기도 괜찮았으며 창밖의 밝은 태양에 눈이 부셨다. 인천 앞바다가 보이는 순간 긴 북유럽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건강하게 귀국한다는 흐뭇한 안도감에 싸였다. 일행들은 인천공항에서 모두들 건강한 모습으로 아름다운 추억을 잔뜩 안고서 즐거운 마음으로 석별의 인사를 마치고 귀가 하였다. 되돌아보면 이번 여행을 통하여 동창가족들간의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하였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기회를 만들어서 함께 하는시간을 갖는 것이 좋을것 같다고 생각했다. 필자는 이번 북유럽여행을 집사람과는 세 번째 이지만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말에따라 집을 나섰고 친구들과 함께 여행하는 즐거움을 깊이 느꼈다. 함께 하신 동창내외분들과 특히 부산동창생 내외분들, 김승태교수 내외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즐거운 여행의 모든 장면들이 영상처럼 선명하게 되살아나서 흐뭇한 즐거움을 느끼곤 합니다. 먼 훗날, 이번 여행의 아름다운 추억을 되새기 위하여, 또한 여행에 함께 하지 못한 많은 친구들에게 다소의 정보를 드리고져 이 기행문을 작성하였다.
첨 부 : 북유럽 여행 일정표 1부 끝.
<북유럽 여행 일정표> (2009.6.6 - 6.17)
|
첫댓글 큰마음 먹어야 다 읽을수 있는 기행문, 작성하시느라고 수고 많았습니다. 여행할때의 즐거움도 있지만 이를 회상하며 기행문을 쓰는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 입니다. 해본 사람만이 알수 있지요. 잘 보았습니다.
여행기간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록하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대부분의 여행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노라면 마음속의 추억으로 남게 됩니다만 정성 가득한 기행문 덕분으로 여행의 모든 순간들을 영원히 접 할 수 있게 됨은 이 번 여행의 즐거움과 더불어 더욱 보람된 여행이 된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