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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훼란파 (巢毁卵破)
조선 역사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흐르게 했던 왕은 태종(太宗, 1367~1422) 이방원이었다.
방번, 방석 어린 형제는 물론 개국공신 정도전부터 처가 민씨 집안까지 완전히 도륙을 냈던 이방원이었다.
필자(筆者)는 지금도 그 잔인함에 차마 경어(敬語)를 쓸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왜 태종이라는 시호(諡號)가 붙었는지, 시호에 클 태(太)자가 붙는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를 이어 그 자식 이방원에게도 클 태(太)자가 붙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식이 아버지와 같은 반열에 오른 이유는 무엇인가를 알고 싶었다.
시호는 왕의 붕어(崩御) 이후, 후인(後人)들이 붙인다. 그러니까 후세의 인물, 즉 세종과 그 신하들은 이방원이 태조 이성계와 같은 동급의 왕이었다는 평가를 한 것이 분명하다.
이방원은 정도전과 사림세력들이 추구했던 신권정치(臣權政治)에 맞서 왕권정치(王權政治)를 정립하고 수호했던 인물이다.
이에 반대하거나 왕의 권위에 위협이 될 기미가 보이는 자들은 모두 주살(誅殺)하였다.
신하는 물론 친가와 외가, 처가의 처남까지 예외가 없었다. 태종은 왕권이 확고해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모른다.
이 피비린내 속에서 왕의 자리에 환멸을 느낀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물러나고, 훗날 세종대왕이 된 충녕대군에게 이방원은 모든 걸림돌을 제거해 줄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에도, 군사에 관한 일을 보고하지 않았다 하여 죽임을 멈추지 않는다.
왕권에 맞서거나, 장애가 될 모든 인물을 제거한 이방원. 그리하여 아들 세종은 부친이 닦아놓은 탄탄대로(坦坦大路)의 길에서 5000년 민족역사에 남는 최고의 치적을 이룬다.
훈민정음 창제부터 6진개척, 대마도 정벌, 장영실의 과학까지, 참으로 눈부신 날을 이룬 것이다. 필자(筆者)가 이방원에 태종이라 붙인 이유에 함구(緘口)하고 미움을 푼 것은, 태종의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10명의 신하가 있다고 치자. 그 중의 한 명은 틀림없는 충신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한 명은
반역을 꿈꾸는 역적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8명은 누구일까.“ 필자(筆者)는 태종의 다음 말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리고 왜 그가 클 태(太)자를 쓰는 임금인가에 대한 의문을 풀었다.
"나머지 8명은, 내가 강하면 충신(忠臣)이 되고, 내가 약해지면 역적(逆賊)이 된다.“
태종 이방원의 고뇌(苦惱)와 처갓집까지 멸문(滅門)을 시킨 그 번뇌(煩惱)를 이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국가를 경영하는 자가 맞이해야 할 슬픔이요, 고독이 아니겠는가.
박근혜의 몰락 속에서 발견한 것은 돌아선 8명이었다. 김무성이 그랬고 이정현이 그랬고 유승민, 이준석이 그랬다. 평소엔 입이 닳도록 충성을 약속하던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돌아섰다.
그들은 비박과 친박이란 이름으로 당쟁싸움에 골몰했을 뿐, 주군의 위기엔 무기력한 존재였고 배신자들이었다.
지금 윤석열 정부에도 1명의 충신과 1명의 역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8명의 기회주의자가 있으리라.
현재를 미루어 판단컨대, 아직까지 대통령은 쓸만한 사람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없으니, 사람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 또한 사람을 바꾸지 못하니, 정부조직을 완성할 수 없다. 보다 널리 사람을 구해야 하지만, 참모진과 여당은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성의(誠意)와 집념을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이 약한 모습을 보이면, 언제든 등을 돌릴 8명 속엔 참모진도 포함된다고 본다.
그들은 부림을 받을 사람들이지, 목숨을 바쳐 대통령을 옹호(擁護)할 사람들은 아니다.
그러므로 박근혜의 김기춘 비서실장 같은 절대의 충성을 보일 사람은 누구일까.
믿음을 속단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윤석열 대통령께서 그 8명을 끝까지 믿고 싶어 한다면, 당신은 지금 누구보다 강해져야 한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5년을 맡아야 하는 그 위대함은, 한마디로 고독(孤獨)이다. 위대한 고독. 밥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숨쉬는 것조차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고독이다. 600여 년 전의 태종 이방원의 고독(孤獨)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에겐, 오직 역사의 벌판에 홀로 선 고독만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으리라. 윤석열 대통령의 성공과 실패는 우리 대한민국의 실패와 성공으로 직결된다.
우리네 삶의 행복과 불행은 국가의 행불행과 직결된다는 의미다.
소훼란파(巢毁卵破). 둥지가 무너지면, 그 안의 알들도 무사하지 못한다. 우리네 삶의 둥지를 책임지는 대통령, 그래서 우리는 대통령을 존중하고, 대통령을 사랑하고, 대통령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아무리 어렵더라도, 대통령께선 가는 길을 멈춰선 안 된다. 걸어가는 고독한 그 길에는 청사(靑史)에 기록될 민족의 역사와 국민들의 뜨거운 눈빛이 함께 하고 있음을 잊지 마시길 바란다.
구국의 길에서 퍼옴. ♧ 늘 건강 하세요.
***<격한 감동실화>
🍎 모정의 뱃길’ 40년후 🍎
육영수 여사는 남부지방으로 시찰을 떠나는 남편에게 전남 여수에 가시거든 한 어머니를 만나 전달해 달라며 한통의 편지를 건네었다. 여수 앞바다 외딴섬에 사는 한 소녀의 어머니였다.
외딴섬에서 목포까지 20리 바닷길을 나룻배에 딸을 태워 통학을 시킨 어머니였다. 노 젓는 어머니와 단발머리의 초등학생 소녀. 눈비가 오고 풍랑이 와도 모녀의 나룻배는 6년 동안 단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었다.
졸업식 날, 학교에서는 6년 개근상을 탄 소녀의 어머니에게 ‘장한 어머니상’을 드렸다. 친구와 아우들과 선생님과 정든 교실과 한꺼번에 헤어지는 마지막 날은 나룻배 모녀의 사연으로 더욱 숙연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졸업식의 노래’ 첫 구절처럼 소녀의 졸업장이 빛나는 것은 그 어머니의 지극정성과 그것도 학교 문턱을 넘어본 사람이 없는 외딴섬에서 처음 생긴 남다름에 있었다.
섬에 집이라곤 세 가구에 스무 명 안 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작은 통통배조차 오지 않는 곳이라 섬사람들은 장을 보거나 다른 볼일을 보러 나룻배로 육지를 건너다니곤 해서 아이들이 커도 학교에 보내는 것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 어머니는 비록 딸자식이지만 가르쳐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버지는 펄쩍 뛰며 반대했다. 딸을 학교에 넣어본들 20리나 되는 바닷길을 무슨 수로 왕래하느냐는 것이었지만 모진 결심으로 딸을 입학시키고야 말았다.
전기도 시계도 없는 섬마을에서 새벽어둠에 딸을 깨워 밥을 먹이고 나룻배를 저어 학교에 보내고, 공부가 끝날 때면 다시 가서 데려오곤 했다.
어머니의 나룻배는 강풍이 불어도 눈보라가 몰아쳐도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어머니의 일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병든 몸이라서 농사를 도맡아 했다. 농번기에는 소를 빌려 논 밭일을 하고, 장이 서는 날에는 채소를 팔아 생필품을 사고 아버지의 약도 사왔다.
그래도 어머니는 공부하는 딸이 대견스럽기만 해서 육신의 고달픔을 모르고 6년 세월을 훌쩍 넘겼고, 그 세월 동안 모정의 뱃길을 손꼽아 보니 3만4천리를 헤아렸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그렇지 않아도 눈물 나는 졸업식에 소녀도 울고 어머니도 울고, 모녀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1962년 매서운 추위가 가시지 않은 2월, 목포의 한 초등학교 졸업식은 신문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다(한국일보 2월14일). 육영수 여사는 신문기사를 읽고 그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던 것이다.
박정희 의장은 여수에 가서 이 가난한 섬의 모녀(어머니 박승이, 딸 정숙현)를 만났다. 육여사의 편지를 전하고, 그 어머니의 굳은살 배긴 손을 잡아주며 위로와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로부터 40년 후 한국일보는 딸 정숙현씨의 글을 게재하면서 모녀의 뒷 소식을 전해 다시 한 번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다음은 2004년 7월8일자 한국일보에 게재된 정숙현씨의 글이다. 모정의 뱃길’ 주인공 정숙현씨 나는 모른다, 물결 위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몇 억겁이 지난 후의 이 파도 위에도 한 오라기 주름살이 굽이칠까.
살을 에이는 어머니의 뱃길 따라 왜 오고 갔는지를 나는 모른다. 깊고 또 깊은 곳에 남아 있거라. 물보라가 그리는 한 장의 초상화 아, 나의 어머니 모정의 뱃길.
굳이 거창하게 시(詩)라고 말하지 않아도 좋다. 단지 물길처럼 마음 또한 이렇게 흐르는 것을.
1956년, 모두가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 초등학교 6년을 졸업한다는 것은 지금의 대학을 졸업한다는 것보다 더욱 귀한 일이었다. 그것도 스무 명이 채 못 사는 자그마한 섬마을 출신의 여자아이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말이 좋아 섬마을이지, 내 가족을 포함해 겨우 세 가구가 살았던 그 섬에서는 생계를 위해 약간의 채소와 나물을 육지에 팔러 나가기 위해 이용했던 나룻배 한 척만이 외부를 잇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어머니는 남들이 다 자는 깊은 밤, 달빛에 의지해 혼자 노 젓는 방법을 익히셨다. 병중인 아버지와 늙은 시어머니를 모시며 오랜 세월 동안 배우지 못한 것을 원통하게 여기신 어머니는 절대로 딸에게 문맹을 대물림할 수 없다고 결심하셨다.
내 어머니 박승이는 그렇게 6년간 전남 여천군(현재 여수시) 가정도에서 목포까지 20리 바닷길 노를 저었다. 시계는커녕 수탉도 없던 새벽, 어머니는 오직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로 그날의 날씨를 가늠하며 조각배를 띄웠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태풍 사라호로 산산조각이 난 배의 파편을 안고 통곡했던 어머니, 한겨울 추위에 갈라진 손등으로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파도를 헤쳐 나가던 어머니였다.
말로는 표현 못할 6년의 세월. 마침내 졸업식 날이었다. 어머니는 박수갈채와 울음바다 속에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 우리의 사연을 취재했던 한국일보 이문희 기자로 인해 ‘모정의 뱃길 3만4천리’는 전국 방방곡곡에 알려지며 우리 모녀는 한국일보와 인연을 맺게 됐다. 1962년 2월14일자로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그때 받은 격려 편지는 국내외에서 하루 200여 통 이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정의 뱃길’이란 이름으로 영화가 만들어졌고 어머니를 소재로 한 노래(필자 주 : 이미자의 ‘꽃피는 여수바다’)도 불려졌다. 라디오 연속극까지 만들어졌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여수에 내려와 어머니와 나를 격려하며 장학금을 주던 일을 잊을 수 없다. 그 후 나는 여수에서 중⸳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대학(성균관대 국문학과)을 나왔다.
이제 아이 세 명을 키우는 나는 당시의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다. 딸 가족을 위해 새벽 기도를 다녀온 후 낮은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는 어머니의 얼굴은 마냥 평화롭다.
내가 한석봉이나 이율곡이나 맹자처럼 훌륭하지 못한 탓으로 내 어머니가 그들의 어머니처럼 길이길이 기억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나 이젠 거의 잊혀져 가고 있는 어머니를 기억해 이런 지면을 통해 어머니에게 감사와 사랑의 글을 올릴 수 있게 해 준 한국일보에 감사한다.
나 또한 어머니의 발끝에도 전혀 미치지 못하나마 당신의 모습을 닮으려 한다. 이제 57세가 된 정숙현씨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서 아직도 정정한 80세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1986년부터 공생복지재단 산하 서울특별시립 한남직업전문학교 미용과 교사로 일하고 있다. 육영수 여사의 편지 내용은 알 길이 없으나, 어머니의 지극정성에 감사를 전하며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이었으리라. 어머니들끼리만 아는 이야기도 있으리라.
무정세월 40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그 세월이 네 번 굽이쳐 흘렀어도 주인공 정숙현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여수에 내려와 어머니와 나를 격려하며 장학금을 주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지도자의 이런 보살핌으로 이 땅의 고난을 다 감당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외딴섬의 고립과 가난을 숙명이라 여기지 않고 바다를 건넌 그 어머니의 결연한 ‘도전’에 뜨겁게 악수하는 것이 고난을 딛고 일어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의미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세계 최빈국의 신세를 면치 못하던 60년대 초, 어떻게든 궁핍을 딛고 몸부림쳐 일어나야 한다는 의지가 절박했던 그 시기였음 에랴.
이 땅에 수많은 지도자들이 거쳐가고 지금도 내로라하고들 있지만 거의 서민의 삶과 무관한 ‘나으리’들 뿐, 서민을 가슴으로 만나고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 애환을 나누고 함께 꿈을 꾼 지도자가 박정희 외에 누가 있는가를 돌아보게 된다.
‘박정희 매도’가 극성을 부리던 때에 이런 댓글이 올라온 적이 있다. “이놈들아, 난 그 분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한마디 설명이 필요치 않은 말이다. 역사적 평가를 차치하고도 그가 존경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일거수일투족 꾸밀래도 꾸밀 수 없는 그의 서민 기질에 있다.
그는 대통령이었지만 갈데없는 한국의 전형적인 평민이었다. 이 땅의 서민들, 수많은 사람들이 대통령 박정희를 인간 박정희로, 그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지도자가 박정희 말고 또 누가 있던가?
어제를 돌아보는 것은, 어제가 내일을 비춰주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어제의 고난과 꿈은 내일도 새롭게 이어지기를....(하트)
***자다가도 놀라 자빠질 김대중 아방궁!
이 엄청난 비용은 도대체 어디에서 충당되었나?
국민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01. 전남도 신안군 김대중 생가
02. 전남도 광주시 김대중 컨벤션센타
03. 전남도 목포시 노벨평화상기념관
04. 전남도청 김대중홀
05.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06. 경기북부도청 김대중홀
07. 전남도 광주시 김대중문화궁전 (건립비 5조원, 년 관리비 8천억원, 김무성ㆍ유승민이 국회통과시켜줌)
08. 강원도 양구군 평화댐 김대중동상 (평화댐 전두환 대통령이 건설)
09. 사이버 김대중도서관
10. 서울 김대중 평화재단
11. 서울 마포구 김대중아방궁 (똥시깐9, 목욕탕9, 실내 에스컬레이터)
12. 전남도 신안군 김대중다리
13. 서울 마포구 신촌 김대중도서관
14. 서울 김대중재단
15.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
16. 5.18 망월동묘지
17. 5.18 민주화운동기록관
18. 5.18 도서관
19. 5.18 자유공원
20. 5.18 기념문화센타
21. 5.18 학생도서관
22. 5.18 버스
23. 서울동작동 국립묘지 김대중묘지
모친 장노도가 시숙 제갈성조와 불륜으로 잉태된 김대중은 20살 때 남노당가입
김대중. 김영삼은 고교졸업자가 명예박사 19개 (김영삼 11개)
5천년역사 한민족 불멸의 영웅 박정희 대통령 각하 단 한 개도 없음
***(글: 허정구)
<박주현 윤용진 변호사, 대통령 비서실에서 부정선거 브리핑>
부정선거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줄기차게 법률투쟁을 벌이고 있는 박주현 윤용진 변호사가 1월10일 용산 대통령비서실에서 4.15부정선거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는 브리핑을 했다고 “박주현 변호사 TV”와 “윤용진 페이스북”이 밝혔다.
이 자리엔 수석비서관 등 3명이 참석, 박변호사가 준비해간 상세한 자료와 설명을 경청했다고 한다. 이들은 특히 접힌 흔적이 없는 빳빳한 신권다발 투표지가 대거 발견된 대목과 사전 투표지에 투표관리관의 도장이 직접 날인된 것이 아니라 프린트 되었다는 점에 충격과 함께 놀라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부정선거에 관한 자세한 진상이 대통령비서실에 전달된 만큼 이제 비서실장 또는 대통령 주재 회의에서 공식 논의될 것이고 진상파악과 함께 그 처리 문제는 올해 제1 의 국정 어젠다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늦고도 늦었지만 천만다행한 일이다.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다. 대통령 비서실에 근무하는 수석이 이제사 부정선거의 진상을 접하게 됐다는 것은 그동안 대통령실에선 부정선거에 대한 논의나 회의가 한 번도 없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검찰과 경찰과 감사원과 국정원 등에서 녹을 먹는 수많은 공직자들은 쏟아지는 부정선거 의혹에 대해 일제히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단 한 장의 보고서도 올리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닌가. 게 중엔 부정선거에 대한 논의나 공론화를 막는 자까지 있었을 것이다.
기가 막히는 일이다. 문재인 정권 5년 동안 치러진 4번의 선거, 즉 2차례의 지방선거와 1차례의 총선과 대선이 모두 부정선거 의혹에 휩싸였고, 무수한 증거가 쏟아졌건만 공직자들이 의혹을 밝히는데 노력하기는커녕 의혹을 덮거나 수수방관하는 쪽에 줄을 선다는 말이 아닌가.
어디 공직자 뿐 인가. 건강한 사회를 지켜야 하는 언론, 부정선거의 직접적 피해자인 국힘당까지 한통속이 되어 국민의 주권이 침탈당한 부정선거 의혹에 철저히 눈을 감고 있단 말인가.
그런 점에서 박주현 윤용진 두 변호사는 수많은 공직자와 국가기관과 언론과 정당이 해내지 못한, 국정의 물줄기를 싹 바꾸는 큰일을 해냈다. 큰 박수를 보낸다. 짝짝짝.
윤석열 대통령은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지시하여 국가 전복을 기도하고 국민주권을 유린한 자들을 모조리 발본색원해야 한다. 동시에 부정선거에 대한 공론화와 수사를 가로막은 자들도 모조리 색출하여 엉망진창이 돼 버린 국가 시스템과 기강을 똑바로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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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구 페북 글(2023.1.11)]
●박주현 윤용진 변호사, 용산 대통령실 방문 부정선거 보고(23.1.10)
-보고 후 나오면서 찍은 영상
[박주현 변호사TV, 2023.1.10(8분)]
#4.15불법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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