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192/200610]농촌지역 '초딩(초등학교) 동창모임'이라는 것
전대미문의 전염병 코로나19로 인해 연기된 전라도지역 초등학교 동창모임을 어제 저녁 가졌다. 20명이 채 못되는 17명이지만, 그나마 100% 참석하기가 쉽지 않다. 3개월에 한번씩 만나고, 연례행사로 1박2일 나들이를 해온 게 십 수년이 되었다한다. 지난해 귀향한 나로선 무척 반갑고 소중한 모임이다. 모두 그리운 얼굴들이 아닌가.
1939년 임실군 오수면 봉천리(봉산·냉천마을)·군평리(종동·평당마을)·오암리와 성수면 대판리, 여섯 개 마을(거리라 해봤자 3km 안팎이다)의 어른들이 힘을 모아 들판 한 가운데에 세운 ‘봉천간이학교’. 44년 초등학교로 승격되어 98년 49회 졸업을 끝으로 폐교가 되었다. 96년까지 졸업생 수가 1554명. 아깝다. 얼마나 정다운 학교인데, 환갑인 60회 졸업생조차 내지 못하고 폐교가 되다니. 학교부지가 지금껏 활용도 되지 못하고 흉물처럼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어, 볼 때마다 속이 상하는 우리의 모교母校. 1965년 코흘리개로 입학하여 70년제법 의젓해져 21회로 교문을 나섰다. 기껏해야 한 반班 40여명.
거기에 비해 대처의 초등학교는 학생들이 넘치고 넘쳤다. 한 반에 60명이 꽉꽉 찼고, 한 학년이 10반도 넘었으니, 시골 학교 10개를 합쳐놓아도 쨉도 안될 때였다. 나는 5학년 2학기에 전주로 대망의 전학을 갔다. 하지만 내 마음의 영원한 모교는 당연히 이곳일 수밖에 없는 일. 내가 전학한 사실을 모르는 친구도 태반, 당연히 모두 함께 졸업한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나도 이곳이 내가 졸업한 국민핵교로 알고 있다.
이 모임은 정말로 특별하다. 우선, 거의 대부분 친구들의 아버지 이름과 형제관계를 줄줄이 꿰고 있다는 것이다. 농촌이니까 가능한 일이니, 대도시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하여, 아주 오랜만에 만나도 서로 놀리느라고, 지금은 거개 돌아가셨지만, 친구 아버지 함자銜字를 함부로 부르며 ‘잘 있느냐’고 묻는다. 어쩌다 친구 아버지 함자를 모르는 경우는 놀릴 게 없기에 약이 올라 ‘죽을맛’이다. 그리고 별명들로 불리며, 말들이 거칠다는 것이 특징이다. 육두문자가 날아다니지만 허물이 안된다. 둘째, 모두 환갑이 넘었지만, 여자·남자 경계가 없을 정도로 허물이 없다. 머리가 희든, 나이가 더 먹든,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무슨 상관이랴. 셋째. 그때는 농촌에서 중등학교 진학하기가 모두 가난했으므로 어려웠다. 하여 ‘가방끈’들이 모두 들쭉날쭉이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모두 ‘꿰복쟁이’ 친구들인걸. 여기에서 ‘꿰’는 ‘옷’을 뜻한다. 학교 옆 제법 큰 냇가에서 공부만 끝나면 옷을 홀라당 벗고 개헤엄을 쳤던 사이라는 것이다. 고상하고 유식한 말로는 ‘죽마고우竹馬故友’라 한다지만, 우리는 ‘죽마’를 알지 못하고, 그렇게 놀아본 적이 없는,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사자성어다.
아버지 이름하니까 아주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있다. 아버지 함자가 ‘세상 세(世) 태평할 태(泰)’자인데, 초딩시절 아버지 이름으로 놀려대는 친구들이 많았다. 전라도말로 열쇠를 ‘쇳때’라고 하지 않던가. “야, 쇳때어른 잘 계시냐?”가 놀리는 인사말이었다. 그때마다 뛰다 죽을 노릇이었다. 또한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 ‘세태世態’이지 않는가. “야, 요즘 세태 어떠냐?” 참으로 무례하기가 짝이 없는 농지꺼리였다.
아무튼, 12명이 만나 오리백숙과 닭볶음탕으로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희한한 것은 여섯 마을마다 제 고향을 지키는 고향지킴이가 한 명씩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한 후 이제껏 농사꾼으로 살아온 것이다. 동네 이장里長을 20년도 넘게 한, 현재도 하고 있는 친구도 있다. 농사에 관한한 박사 博士들이고, 대부분 과수원이나 축사를 운영하며 부농富農이 되었지만, 동네에선 아직도 청년靑年이어서 막내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복숭아농장을 하는 친구들은 한참 바쁠 때이어서 뒤늦게 참석한 것만도 고마운 일이다. 문제는 다들 ‘몸들이 갔다’는 것이다. 평생을 고된 일만 한지라 서로 척추관협착증 등을 호소하며, 술 마시는 친구들이 없다. 12명(할머니 3명) 중 주류酒類가 딱 2명. 10여년 전만 해도 만나기만 하면 소주 한짝은 거뜬했거늘, 아 무심한 게 세월이고, 늘어나는 게 주름살뿐이란 말인가. 전북지역 YMCA 이사장인 회장친구의 인사말처럼 “이제 남은 것은 건강健康”이라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것인가? 시골에 살면서 농사일 줄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어려운 일. 그저 우리 농촌의 무지렁이들은 땅을 놀리면 죄받는 것으로 알고,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어찌 하랴.
여느 때같으면 2차는 당연히 노래방 직행이지만, 이번에는 고향집에서 94세 아버지를 모시고(사실은 모심을 받고 있지만) 사는 우리집 사랑채(게스트하우스이자 게스트룸이다)에서 그동안 못다 나눈 얘기를 하자, 더 시간이 되면 ‘국민오락’도 하자는 쪽으로 대세가 기울었다. 불감청고소원, 얼마나 좋은 일인가? 오랜 친구들이 우리 사랑방에서 왁자지껄, 흔쾌하게 두어 시간 노는 일인 걸. 8시 반쯤, 우르르 몰려온 친구들을 소개하는게 재밌다. 어느 동네 누구양반 몇 째 아들, 어느 동네 목수의 딸내미, 둘째 사위와 육촌누이라고 하면 총기 여전하신 아버지, 다 알아들으신다. “그렁가? 반갑고 고맙네. 내가 자네 아버지하고 참 친했지” 이런 식이다. 꾀복쟁이 친구들은 이래서 언제나 정겹고 좋다. 할머니들의(특히 오씨 성의 여장부) 음담패설에 일동은 배꼽을 뺀다. 흉허물이 결코 흉허물이 되지 않는 사이. 흔치 않은 모임이어서 좋다.
주류가 많지 않고, 고된 농사일에 조는 친구도, 내일 할 일이 태산같은 친구들도 있어 고스톱 한번 못하고 찢어져야 할 판. 8월말 1박2일 소풍을 기약하며, 전주로 광양으로 임실로, 또 각자 제 동네로 헤어지는데, 개구리는 쉴새없이 합창을 해댄다. 개구리와 새는 우는cry 것인가? 노래sing하는 것인가? 깊어가는, 아름다운 여름밤의 일기.
첫댓글 자신을 높이려 내세우려 하지않고
어린시절 추억에만 몰두하는 깨복쟁이 친구들이 부담없이 젤 좋드라.
우리도 초딩모임을 겁나게 오래하고있는데
언제나 육두문자를 써가며 만나도 웃으며 기분이 좋다
30여년 전 쯤,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딱 한번 나갔었는데
그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잘 모르는 친구였는데도 허물없이 대화를 나눈 기억....
그런 시간이 또 있을까.
나이들면서 자꾸 옛날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