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시에 독보적인 당(唐)시인 이상은(李商隱), 낭만적인 시를 구사하다.1편>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사랑에 빠진 남녀의 애타는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여 독특한 문학세계를 구축한 만당(晩唐)의 대표 시인이 있었다. 그가 바로 두보(杜甫)의 전통을 이어받아, 낭만적인 시풍(詩風)과 애정시(愛情詩)에 독보적인 경지에 올랐던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 813~858)이다.
당(唐)나라 말기의 대표적 시인이었던 이상은(李商隱)은 당나라의 관료 정치가이자, 두목(杜牧 803~852)과 함께 만당(晩唐)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는 두목(杜牧)과 함께 '만당의 이(李)·두(杜)'로 불리며, 온정균(溫庭筠 812~870)과 더불어 '온(溫)·이(李)'라고 병칭되었던 인물로 유명하다. 자는 의산(義山), 호는 옥계생(玉谿生) 또는 달제어(獺祭魚)이다. 후세에 그의 시파(詩泒)는 송나라 초기에 유행하였는데, 그 한시체를 '서곤체(西崑體)'라 불렀다.
게다가 낭만적인 시를 구사한 이상은의 시는 화려하고 때로는 관능적(官能的)이고, 때로는 상징적이며 시 전반에 걸쳐 우수(憂愁)가 어려있다. 특히 연애시(戀愛詩)에서 이상은 시의 특색이 발휘된다. 그는 애정시(愛情詩) 방면에서 독보적인 경지에 올랐고 사랑에 빠진 남녀의 심리를 섬세하게 읽어냈다는 평을 받는다.
○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무제(無題)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작품을 포함해서, 이상은은 아예 제목을 짓지 않거나 혹은 간단히 시구에서 빌리는 정도로 제목을 붙였는데, 만당(晩唐)시의 경향인 유미주의(唯美主義)를 보다 더 추구하고자,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수법을 구사하였고, 몽롱하며 환상적이고 관능적인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였다. 그 주제는 대개 '파국'으로 끝나버린 '불륜'의 연애의 회상, 감미로운 꿈 같은 청춘의 기억의 서술이다. 당연히 그 내용은 몹시 애수(哀愁)를 띠지만 그것을 우아한 시구나 댓구, 고전의 인용으로 장식하여 탐미주의(耽美主義)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여인의 입장에서 쓴 규방(閨房)문학에 버금가는 섬세하고도 아름답고 슬픈, 몹시 사적인 기억과 감회를 시로 승화시키는 것이 이상은의 독특한 시풍(詩風)이었다.
○ 예로부터 이상은의 시는 난삽(難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의 원호문(元好問)은 그의 시에 주석이 없음을 유감으로 여겼으며, 두보(杜甫 712~770)·이하(李賀 791~817)·왕건(王建 761~831)·이상은(李商隱 813~858)은 주가 필요하다는 것도 그 난해함 때문이다. 전고(典故)를 시 속에 넣은 것은 육조시대 이래의 상투적인 수법이지만, 이상은은 그 기술을 극단으로 추구하여 흔히 쓰지 않는 전고도 서슴지 않았으며, 나아가 그 전고에 대해 자신의 상상력을 섞어 넣었다. 또 율시에서 성취가 크며, 영사(詠史) 특히 연애시에 뛰어났다. 두보를 존경하고 이하의 영향을 받았다.
◉ 이제부터는 저자 이상은(李商隱)의 이력을 간략히 살펴보겠다. 그는 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친양 현(沁陽縣) 하내(河內)사람으로, 스스로 옥계생(玉谿生)이라고도 불렀는데, 이것은 고향 가까이에 옥계라는 계곡이 있었고, 어렸을 때 거기에 있는 도교사원에서 학문을 닦은 것과 관계가 있다. 어린 시절 말단 관리였던 아버지를 여의고, 829년 18세 무렵 당시의 천평군절도사(天平軍節度使) 영호초(令狐楚, 765~837)에게 문재를 인정받아 그의 막료가 되었다. 그때까지 한유(韓愈, 768~824)·유종원(柳宗元, 773~819)의 고문을 신봉하고 있던 이상은은 영호초가 당시 변려문의 대가였던 까닭에, 곧 그의 작문법을 배우게 되었다. 영호초의 아들 영호도(令狐綯)의 도움으로 예부시랑(禮部侍郞) 고개(高鍇)의 수하직에 간신히 합격했다. 그러나 곧 그의 은인인 영호초가 죽었다. 이후 경원절도사(涇原節度使) 왕무원(王茂元)의 사위가 되었다. 그러나 2번째 비호자가 된 왕무원도 843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 이후 이상은은 더 곤궁해지고, 당쟁을 일삼던 우·이 두 당 사이를 오갔다. 이덕유파의 정아(鄭亞) 아래서 장서기(掌書記)의 직책을 겨우 얻었다가 곧 좌천되어 소꿉친구인 반대당의 영호도에게 애원하여 은혜를 잊은 자로 매도당하면서도, 태학박사(太學博士)의 직책을 맡았다. 858년에 병으로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이상은(李商隱 813~858)의 <무제(無題)>와 〈봄비(春雨)〉 2편의 칠언율시는 모두 이상은이 추구하는 탐미주의적인 연애시이자, 낭만적인 시풍을 구사한 관능적인 시풍을 느낄 수 있는 명작들이다. 특히 우수(憂愁) 어린 연애시에서 이상은 시의 특색이 발휘된다. 그는 애정시 방면에서 독보적인 경지에 올랐고 사랑에 빠진 남녀의 심리를 섬세하게 읽어냈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한편 그의 시가 대부분 그러하지만, 특히 이 2편의 시는 해석에 있어 의견이 분분한데, 인생의 불우함을 읊은 것으로 보기도 하고, 늙음을 탄식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또는 영호도(令狐綯)에게 충성을 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문면(文面)에 나타난 그리움의 정감을 근거로, 애정시로 보기도 한다. 또한 이 2편의 시는 봄바람(東風)과 봄비(春雨)를 소재로 하여, 그리운 이를 생각하며 쓴 회인시(懷人詩) 또는 염정시(艶情詩)라 할 수 있다.
● 다음 ‘寒’운의 칠언율시 <무제(無題)>는 변려문의 대가이자 당대 말기를 대표하는 시인 옥계생(玉谿生) 이상은(李商隱 812~858)의 작품이다. 세월은 붙잡기 어렵고 우리의 삶은 장차 끝날 것이라는 탄식이 있다. 인정은 쉽게 만나면 반드시 쉽게 헤어지지만, 만남이 어려우면 이별 역시 어려우니, 정인(情人)이 박정한 것과는 다르다.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싶었으면, 또 처절하리만큼 얼마나 애가 탔으면 제목이 없을까?
1·2구(句)는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노래한 것으로, 어렵게 만났는데 또 헤어져야 하는 괴로운 심정을 표현하였고 3·4구(句)는 이별 후 맹세한 말로, 봄누에와 밀랍 초(蠟燭)에 기탁해 자신의 애정이 죽어도 변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진실됨을 회화적으로 그려내었다. 5·6구(句)는 수심에 잠겨 외롭고 처량한 상대의 처지를 상상하여 쓸쓸함과 때를 잃는 것을 근심하였고, 마지막 7·8(句)구는 파랑새에게 대신 소식을 전해달라고 하여 절망 속에 희망이 담겨져 있는데, 한편으로는 이들의 사랑에 어려움을 보여준다.
어렵게 만났으니 헤어지기가 더욱 어렵고, 동풍이 힘을 잃은 늦봄이라 온갖 꽃들도 다 시들었다. 봄누에가 죽어서야 실잣기를 그만두듯, 초가 다 타서 재가 돼야 촛농이 마르듯, 나의 사랑도 죽음이 아닌 한 가로막을 수 없다. 그대는 새벽에 거울을 마주하고는 검은 머리칼이 세는 것을 걱정하고, 달빛이 차가운 밤에 그리운 정을 읊조리다 처량함을 느끼겠지. 그대가 있는 봉래산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파랑새에게 조용히 찾아가서 보고 그대 소식 전해주기를 부탁한다.
--이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