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사당 유감
다시 관우 이야기입니다. 금년 1월 26일 시작한 글인데 마치지 못했습니다. 쓰던 걸 버리기 아까워 계륵(鷄肋)같이 가지고 있었더니 계속 마음에 걸리더군요.
작년 11월 22일 문리대 마로니에 친구들이 길라잡이 이우용 형의 안내로 청계천 변을 걸었습니다. 동아일보에서 동대문을 거쳐 관왕묘까지 갔습니다. 아주 옛날 대학 시절 한번 본 이후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당시 인상이 별로였는데 이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 외국인, 별로 명예스럽지도 않은 중국인의 사당을 4백 년 넘게 받들며 제사를 지내온 게 한심스러웠지요. 이제는 제사를 지내지는 않겠지요?
전해오는 이야기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평양에서 승리한 기분에 들떠 남으로 일본군을 추격하다가 백제관에서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위기에 처했을 때 관우가 현신(顯信)하여 명군을 구해주었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여러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마도 내가 어렸을 때 들은 이 버전이 오리지널이 아닐까 합니다. 전쟁이 끝난 뒤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관우를 숭상하는 사당이 생겼다고 하더군요. 서울에도 동서남북 4개의 사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동대문 부근 동묘만 남아 있습니다. 구청에서 방치해서인지 들어가는 입구에 잡상인들이 진을 치고 있어 길을 찾기 어렵더군요.
아마도 중국에서 확대 재생산된 관우에 관한 신화 같은 이야기가 조선에도 펴져 우리의 민간신앙으로 되어버린 게 아닌가 합니다. 중국에서 관우는 충의의 신만이 아니라 그의 행적과는 관련이 없는 재물의 신 등 온갖 잡신의 왕초격이라 하더군요. 그러니 아직도 버젓이 서울 한가운데 있는 것이겠지요.
그가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은 복합적인 이유에서 일 겁니다. 우선 선조 등 조선 조정의 입장입니다. 임란 때 선조는 압록강변 의주 구석에서 왜군이 들이닥치면 강을 건너 중국으로 도망칠 궁리만 하면서 명나라의 지원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지요. 스스로 나라를 지키지 못했으니 전후 곽재우, 고경명, 정문부 등 의병장들이나 이순신, 권율 등 우리 명장들의 공을 추켜세우는 것은 단순히 체면만 깎는 것이 아니지요. 군왕이 체면을 잃는 것은 정권의 정통성 상실과 연결되어 왕조 자체가 위험하게 되겠지요. 정통성은 한번 인정되면, 즉 왕조의 수립이나 현대 민주주의에서 투표로 통치자로 확정되면 영구불변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정치학에서도 정치권력이 국민의 눈에 정통성을 상실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지나친 혼란을 막기 위해 임기제를 두고 있지요, 임진왜란과 같은 대변란을 겪은 뒤 무능한 왕조가 살아남은 곳은 아마도 조선밖에 없을 겁니다. 선조는 명나라가 조선 왕실을 다시 세워주었다는 소위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내세우는 것은 외부로부터 정통성 얻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겠지요. 관우 사당도 이 편승하여 전국에 세워졌구요.
관우 사당과 비슷한 것으로 임진왜란 이후 지은 만동묘가 있지요. 2019년 10월 괴산 여행 때 송시열의 화양구곡(華陽九曲)과 화양서원 터를 지나면 우리 역사에서 정신사적으로 가장 치욕적인 장소로 꼽힐 만동묘가 있습니다. 만동묘는 송시열이 1689년 제주도로 귀양 가는 길에 화양동에 만동묘를 세우고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명의 신종 만력제(神宗 萬曆帝)와 마지막 황제인 의종 숭정제(毅宗 崇禎帝)의 제사를 지내라고 제자에게 부탁합니다. 이 두 황제는 명나라 역대 황제 중 가장 못난이들이죠. 이후 조선은 명이 망한 뒤에도 ‘오랑캐’ 청의 연호가 아니라 이미 사라진 명의 연호를 쓰기도 했습니다. 송시열은 유서에 청의 연호나 숙종 15년(1689)이라 표기하지 않고 40년 전에 멸망한 명의 연호를 사용하여 ‘숭정 기사년’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하기야 조선 선비 중 명이 망한 지 100년, 200년이 지나도 ‘숭정’ 연호를 사용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못난 중국 황제 둘을 배향한 건물로 올라가는 계단의 폭을 엄청 좁게 하여 정상적인 걸음으로 앞을 보고 바로 올라갈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정면으로 올라가다가는 발의 길이가 계단의 폭보다 길어, 뒤로 넘어져 뇌진탕 일으키기 십상일 겁니다. 신하들이 임금 앞에서 게걸음으로 옆으로 비스듬히 걷듯이 올라가라는 말입니다.
만동묘는 조정에서 특혜를 받아 그 기세가 하늘을 찔러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걸 전에 쓴 적이 있습니다.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상(삼정승), 삼상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가 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관우묘도 ‘아마도’ 초기에는 비슷한 행패를 부렸다는 걸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습니다.
관우 사당의 건립에는 중국의 조선 지배 야욕도 한몫했겠지요. 중국은 전통적으로 중국과 주변지역을 화이(華夷)라는 개념으로, 즉 문명국인 중국과 야만인 변두리 지역으로 분리했습니다. 그리고 주변 지역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지배, 관리하려 하지요. 직접적인 점령이나 무력 지배는 비용이 많이 들고 또 지역민들의 반발을 초래하기 때문에 장기적인 정책이 되지 못했지요. 최고의 방법은 유교라는 무기를 내세워 야만인들을 ‘교화’함으로써 이들이 중국의 문화적 우월성을 인정하고 숭배하면서 동화되어 자발적으로 중국에 복속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기이하게도 미국의 초기 중국 전문가 John Fairbank 교수는 이 정책이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된 지역이 조선이라 평가합니다. 그토록 상무적이고 당당한 선조들은 통일중국의 수와 당을 물리쳤는데 조선이 들어서면서 왜 이토록 중국에 굽신거리게 되었는지 한심할 따름입니다. 중국 황제가 보내온 칙서를 걸상 위에 두고 왕이 신하들을 이끌고 그 앞에 절을 올리는 광경을 상상해 보세요. 관우 사당도 이러한 중국의 대외정책의 일환입니다. 관우를 제사 지내는 것은 곧 ‘중국화’의 길로 가는 것이지요. 이같이 조선의 필요성과 중국의 강권에 못이겨 세운 것이 관우묘입니다. 오늘날에도 중국이라면 꾸벅 죽는시늉하는 족속들은 이들의 정신적 후손입니다.
이같은 상념을 뒤로하고 동대문에서 황학동 주방거리와 주변의 벼룩시장을 지나 동묘에 닿았습니다. 건물 양식은 우리식이네요. 안으로 들어가니 어두컴컴한데 황금색 옷을 입은 관우의 좌상이 보이군요. 처음엔 관우의 좌상을 황금색으로 칠한 것인가 했는데 옷이더군요. 사실 관우는 죽을 때까지 한수정후, 즉 후작이었습니다. 그 뒤 그의 충절을 기리어 왕으로 추존되고, 이어 ‘제(帝)’ 그리고 성인의 반열에 오릅니다. 문인으로는 공자, 무장으로서는 관우가 같은 급이지요. 송 시기 간신의 모함으로 죽은 악비(岳飛)도 관우와 등급으로 추존된다는데 인기 면에서는 관우가 훨씬 앞서지요.
그러나 관우는 유능한 행정가는 아니었습니다. 문신들을 우습게 보고 전략적 요충이며 풍요로운 형주를 잘 다스리지 못해 동오에 빼앗겠는데 이때 주민들의 반발이 없었다고 합니다. 한가지 부언한다면, 촉에 남아 있던 관우의 자손 즉 2남 관흥의 후손은 촉이 멸망할 때 관우에게 죽은 방덕의 아들에게 몰살당했으나 형주에 남아 있던 자손들은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사당 안을 들여다보니 드라마나 그림 등에서 보는 ‘적토마에 앉아 청룡언월도를 들고 수염을 쓰다듬는’ 늠름한 관우의 모습과는 너무 판이하군요. 사실 적토마도 관우의 말이 아니라 여포의 말이고 사서에 관우와 관련하여 언급한 건 없다고 하지요. 청룡언월도도 나관중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당시에는 청룡언월도, 장팔사모, 방천화극과 같은 무기 이름은 없었다고 하지요. 입구에 언월도를 항아리 같은데 세워두었군요. 그런데 걸상에 앉은 관우의 모습이 장군이라기보다 서당 선생 같네요. 관우 옆에는 아들 관평과 일찍부터 그를 따른 주창을 항상 시립하는데 이들의 모습은 산 도적놈같이 험상궂습니다. 언월도는 주창이 들고 있어야 하구요.
사당 밖에 있는 벼룩시장이 볼 게 더 많아 시간이 쫓기지 않았다면 여기에서 노닐다가 주변 주방거리에서 명물 곱창이나 먹을 걸 그랬나 싶더군요. 오히려 이 일대를 명물 거리로 잘 육성했으면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2024.2.26.)
사진 1. 정면에서 본 관우. 청룡도가 옆에보인다.
사진 2. 3, 관우의 인품을 묘사한 각종 글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