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에 관한 시모음 24)
갈대의 마음 /書娥 서현숙
당신은 누구시길래
깊은 밤잠 못 이루고
숱한 생각으로
뒤척이게 하나요?
깊은 곳 숨어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망설이게 하고
오늘도
당신 때문에
너무 힘이 들어
지쳐 있는데
또다시
일어나라, 앉으라
명령만 하고
내 가슴 아프게 하나요.
슬픈 일 흘러가고
기쁘고 행복한 일
떠올리게 하고
좋은 생각으로 채우소서
미소 짖는 갈대밭 /예송 석옥자
어서 오라! 잊을 뻔했던 얼굴들
갈대숲 사이에 꽃피우는 소리는
그대들의 웃음소리거늘
첫차가 마감되는 시간이
우리의고리를 만들었고
구름도 안 보이는 밤 막차를 타서
그대들을 만나서 이렇게 좋은 날이거늘
가을엔 변하는 나무들도 있고
빛바랜 옛 옷도 있지만
새 옷이 얼마나 곱고 질길 것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 수가 있으려니
파란 잎이 곱게도 물든 단풍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새 옷을 갈아입은 낙엽이 되어
아쉬움 뒤로하고 새싹이 돋는 봄날을 기다리세.
달빛 어린 갈대 밭길에 /신주연
달빛 어린 갈대 밭길에
봄은 오고 있는데,
오신다던 나의 님은
왜 아니 오실까?
하얀 목련화가 피고
노란 산수유가 활짝 피면
꽃 가마 타고 오시려나.
뻐꾸기가 노래하면 봄이 온다는데 이산 저산에서
뻐꾸기가 모여서 신나게 합창하는구나.
저 멀리 언덕 위의 하얀 집 하나
그곳엔 어느 누가 살고 있을까?
찾아가자 찾아가.
우리 님이 계시면, 머리카락
동여매고 어서 속히 달려가련다.
님이여! 기다려주오.
내가 그대를 만날 때까지...
나를 기다려주오.
갈대 섰는 풍경 /김춘수 (1922~2004)
이 한밤에
푸른 달빛을 이고
어찌하여 저 들판이
저리도 울고 있는가
낮 동안 그렇게도 쏘대던 바람이
어찌하여
저 들판에 와서는
또 저렇게도 슬피 우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
갈대와 여자와 바람의 시(詩) /정일남
생각하는 갈대가 있었나
갈대는 무엇을 생각하고 살았나
낙엽이 깔리고 풀벌레가 죽는 일이 자신의 곁에서 일어났고
여울이 노래하니 갈대가 흔들렸다
갈대를 여자라고 우길 수 있을까
갈대라는 이름의 여자를 찾아서 착한 생각을 안겨주고 싶다
여자의 마음이 갈대 같은지
중생 같은지
생각하는 갈대가 지금도 있는지
생각만 하면 뭘 하나
바람은 또 얼마나 다리가 아플까
갈대와 바람은 사촌지간일세
여자는 돌미나리를 캐고 씀바귀를 캐며 병을 앓고 병을 사랑했다
바람은 갈대가 없으면 올 수가 없고
나는 바람을 사랑한 죄로 바람에 묶이니
물결이 운율을 잡아주는 시(詩)
시(詩)도 울 때는 갈대와 여자가 곁에 있었다
나는 단 한번 여자에 대해 울어본 적이 있다
생각하는 갈대가 울 즈음
갈대가 우는 소리 /손인하
낭창 낭창
부러질듯 부러질듯
바람에 휘어지는 갈대위에
외로이 우는 새 한마리
어이해 저토록 목이 터저라
우는 걸까
외로움에 우는 걸까
짝을 잃은 슬픔 때문에 우는 걸까
아마 어딘가에 있을
짝을 부르는 울부짓음 인가보다
살랑 살랑 부는 바람에
내 마음 쓸쓸함이
갈대밭 저 홀로 우는 새와 같으니
바람에 나붓기는 갈대위에
내 마음을 얹혀 놓고
바람에 흔들 흔들 흔들리며
그리워 못 잊을 내 님을 향해서
가슴 아프게 울음을 토해내며
손짓도 해본다
내 통곡소리
그 누가 들을세라
흘러가는 바람 소리에
띄워 보내고
님을 향한 그리움도
갈대 숲속 깊은 곳에 감춰 두고
흘러가는 구름을 따라
부는 바람을 따라
소리 없이 가는 세월을 따라서
내 인생 그렇게 그렇게
말없이 흘러가리라...!
갈대의 속삭임 /풍운 소순갑
빨강 노랑 보랏빛으로
색칠해놓은 한 폭의 수채화가
산등성이 넘어 자취를 감추고
별빛 달빛이
고개를 내미는 밤
님아 마실이나 가세
님아 어디로 가나요
별빛 곱게 내려앉은 들녘
달빛에 반사되어
은은한 색을 자랑하는
갈대밭으로 마실이나 가세나
그 곁엔 달빛을 품에 안고
언제나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서는 우리를 기다리는
향기 품은 단풍도 있다네
바람 부는 벌판
깊고 깊은 갈대밭
우리들에 사랑이
녹아있는 그곳
바람 불어 흔들리나 했더니
갈대의 속삭임을 듣고
소풍 나온 연인들에
보금자리일세
갈대의 울음 /정상화(鄭相和)
순간 쏟아진 비로
태화강 불어나 휘돌아 흐르는 물결에
갈대 허우적 거리고 있다
바람에 흔들려 흐느끼더니
물속에 잠겨 꺼이꺼이 소리내서
억울함 쏟아 낸다
생존 위한 쓰러짐이었거늘
시류에 흔들린 지조 없는 낙인(烙印)
갈대에 순정 이라
겉만 보고 그렇게 말하지 말게나
육신은 흔들려 흙탕물에 찢기어
난도질 당했어도 속깊은 마음은
님 향한 깨끗함 그대로이니
비오면 비에 젖고
바람 불면 흔들리고
젖는 줄 모르고
흔들리는 줄 모르고
살았을 뿐이었네
갈대 울음 /전영금
중랑천 갈대밭에
가을바람이 아침을 연다
아무도 없는 산책 길
아침 바람 소리가 깊다
교만한 자여
머리 숙인 가을 앞에
오늘도 교만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머리마다
가늘게 흔들리는 갈대의 울음은
목이 곧은 자의
간절한 속죄의 몸짓인가 .
갈대밭 /古松 정종명
스산한 강변 갈대밭에 어둠이 깔리면
찬바람 불러들여 사락사락 밤의 정취를 노래하니
둥지 속에 잠든 작은 새들의 자장가 되어
지친 날개를 쉬게 하는 사랑을 베푼다
먼동이 몰고 온 햇살 온기에 어미는 품속 자식 다독이며
흐르는 강물 소리에 봄의 잰걸음 위치를 짐작하며
옷매무새를 다듬고 어린 자식을 키워 간다
고뇌한 긴 시간 어린 자식의 홀로서기를 살피며
밤낮없이 노심초사 울타리가 되어 잔 고비를 키워 놓고
스러져 누워 자식들이 자라는 밑거름이 된다
피 빠진 몸으로 시린 계절 묵묵히 지켜온
어미의 자리는 거룩한 사랑과 희생이 바탕 되어
갈대밭은 강물처럼 끊임없는 사랑이 흐른다.
갈대와 바람 /박광호
겨울 끝자락
꽃 샘 바람이 갈대숲을 휘젓고 있다
때로는 세차게
때로는 여리게
동한의 긴 세월
함께 울고 함께 춤추며
정 붙여 지나온 바람과 갈대
이별의 울음이 애절타
나는 함께 못 가지만 잘 가시오!
세월이 흘러 겨울 다시 오면
그대 반길 새로운 임 기다리니
순리로 길 떠나 오는
봄 곱게나 오게하시오 하며
굽은 허리 한들거리며 갈대가 손을 젓는다
그 와중에 봄바람은 몰래
버들 숲에 숨어들어
얼음 속 갯버들의 버들강아지 눈 틔우고
호드기 소리 잉태 시키며
푸른 꿈 피우고 있는데
햇살이 이도 저도 미워할 수 없어
측은하고 애틋한 듯 그들을 품어 안고
따뜻한 입을 맞추고 있네 !
동이 트는 강변 갈대숲에 /운봉 공재룡
유리처럼 맑은 잔잔한 강변에는
실바람은 갈대숲에 가을을 몰고
길게 드린 검은 산 그림자 따라
동그라미 하나둘 그리며 지난다.
지난여름 울면서 시집간 큰딸이
보고 싶은 손자 함께 온다 하여
물새 부부 마음 풍선처럼 설레어
초가을 하늘가를 오르고 내린다.
갈바람도 숨을 죽이며 쉬어가는
어둠이 내려앉은 아직 이른 새벽
오늘도 긴 목을 늘인 물새 부부
큰딸을 기다리며 강변을 맴돈다.
강변의 갈대는 모여도 한없이 약하다 /이기영
갈대를 흔드는 건바람 만 아니였다
꽃에 찔린 밤이
상처마다 이슬을 떨구자
갈대는 맺힐 때마다 줄기 쪽으로 흘러내린다.
강물에 수많은 너울을 만드는 건
보내줘야 할 인연이 많다는 것
풀씨를 다른 곳으로 보내려
달빛을 품어 무겁게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