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동네에 이웃인 두 집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집은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대가족이었고 한 집은 젊은 부부만 사는 단촐한 가정이었습니다. 대가족을 이룬 가정은 항상 화목하여 웃음꽃이 피었는데 부부만 사는 가정은 거의 매일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고 큰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젊은 부부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왜 우리는 둘만 사는데도 매일 싸움이 끊이지 않고 이웃집은 가족이 많은데 왜 저토록 화목한 것일까?” 어느 날 젊은 부부는 과일 한 상자를 사 들고 이웃집을 찾아갔습니다. 다과를 나누며 그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댁의 가정은 대가족인데도 웃음이 떠날 줄 모르고 우리는 둘이 사는데도 매일 말다툼이 생깁니다. 선생님 댁이 그렇게 화목하게 지내시는 비결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그러자 대가족이 사는 집주인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 네! 그것은 당신네 두 분은 모두 훌륭하시고 우리 가족은 모두 바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들은 젊은 부부는 되물었습니다. “아니 그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그러자 그 집 주인은 말하기를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입니다. 내가 출근하다가 물을 엎질렀습니다. 그 때 나는 내 아내에게 ‘내 부주의로 물을 엎질러 미안하다’고 하며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내 아내는 ‘아닙니다. 내가 생각이 모자라 물그릇을 그곳에 놓아두었으니 자신의 잘못이다’라며 오히려 나에게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계시던 저의 어머니께서는 ‘아니다, 나잇살이나 먹은 내가 그것을 보고도 그대로 두었으니 내가 잘못했다’라며 자신을 탓하셨습니다. 이렇게 서로가 자신이 잘못했다고 자신을 탓하며 바보가 되어버리니 싸움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화목한 가정들은 대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일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려 하기보다는 자신 잘못으로 돌리려 하는 것입니다. 그 후 젊은 부부는 이웃집의 그런 이야기를 듣고 크게 깨달아 그 후로 서로 이해하며 서로 자신을 먼저 탓하며 화목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지난 말씀에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시기 위한 지침을 오늘 말씀부터 한 가지씩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이 어떤 의미가 있는 지를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살인에 대한 계명을 설명하며 죄인의 습성과 참 율법적용으로 오늘 말씀을 풀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이 발생하기 전에 가장 기본적인 토대에 화목이 사라진 인생에 대해 오늘 본문에서 설명해주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화목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마저도 드리지 말고 화목을 이룬 이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는 말씀도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통해 참된 예물, 화목의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며 거룩한 예배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화목의 예물인 삶, 첫째는 다툼을 일으키지 않는 삶입니다.
마태복음 5장 22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최종적인 해석자로 오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살인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입니다. 구약의 기준으로 율법을 적용한다면 아무리 타인을 괴롭혀도 생명을 빼앗지만 않았으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에서도 내가 실제로 어느 사람의 목숨을 해하지 않았다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생활속에 누구를 죽이지 않았다면 “살인”이라는 단어와 나는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살인죄는 살인을 저지른 사람만 해당되는 것이지 일반인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일반인들, 지금 이 시간 이 말씀을 보고 듣는 우리들도 고민하게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게 방금 읽었던 마태복음 5장 22절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백성에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십계명 중 제 여섯 번째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의 참 의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사람을 죽인 자뿐 아니라 형제에게 노하는 자도 심판받을 살인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쓰여진 헬라어 “라가(ῥακά)”는 히브리어로 ‘흐라카’와 동일한 뜻의 단어인데 아람어 단어 “레카”에서 온 것으로 추측되는 단어입니다. 그 뜻은 “빈 깡통”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표현으로 “돌대가리”,“꼴통”등의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 당시 일반 가정에서 형제에 대해서나 자녀에 대해서 일상적으로 쓰면서 큰 의미없이 쓰는 표현이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나온 “미련한 놈”에 해당하는 원어인 헬라어는 “모레(μωρέ)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우둔한’이라는 뜻의 ‘모로스’(μωρός)의 호격표현입니다. ‘멍청이’ ‘제정신이 아닌 놈’등의 표현에 쓰이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라가”보다는 강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지만 이 또한 당시에는 그리 심한 욕이 아니라 일상적인 단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하늘나라에서 제하여 버릴 영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를 향해 ‘라가’ 즉 ‘돌대가리’ ‘깡통머리’ ‘꼴통’이라고 말하는 자는 지옥에 떨어질 살인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실제 사람을 죽이는 것과 이런 모욕적 언어 폭행을 하는 것이 동일할 수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야 어떻든 실제로 ‘살인’만 하지 않으면 살인죄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 ‘노를 발하는 것’도 살인, ‘모욕하는 것’까지도 엄연한 살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십계명의 의도를 정확히 알게 된다면 “살인하지 말라”는 단순히 생명을 빼앗지 말라는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해치지 말라는 계명 오히려 지키고 보존하라는 계명인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외적인 부분뿐 아니라 내적인 부분까지도 온전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셨습니다. 이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계명입니다. 왜냐면 실제 살인한 적이 없는 사람은 많다 할지라도 삶속에서 남을 미워해 보지 않은 사람, 남을 정죄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인격을 무시하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이 지옥불에 던져질 만큼의 심각한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지옥’이라고 번역된 곳에 쓰인 신약성경 원어 헬라어는 ‘게헨나’라고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총 12회 등장합니다. 헬라어는 ‘게헨나’를 히브리어로 옮길 때 ‘힌놈 골짜기’를 뜻하는 ‘골짜기’라는 단어를 쓴다고 합니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지옥에 대해 물으면 땅아래 어느 곳에 용암처럼 활활타는 지옥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지옥’ 헬라어 ‘게헨나’라는 단어를 들으면 예루살렘 남쪽 비탈에 위치한 ‘힌놈의 골짜기’라는 계곡을 상상하게 된다고 합니다. 여기 ‘지옥’ ‘게헨나’를 뜻하는 힌놈의 골짜기에서는 구약시대 이방신을 섬기며 우상숭배할 때 인신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 이곳에서 끊임없이 쓰레기를 태우며 불과 연기가 끊임없이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땅에서 불연못의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었던 곳이 바로 이 힌놈의 골짜기였습니다. 결국 형제들에게 노하고 형제들에게 화를 내고 형제들의 악한 말을 하는 사람들은 지옥불에 던져지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에수님의 기준을 따르면 우리는 모두 다 살인자입니다. 그것도 매일 같이 형제를 죽이고 또 죽이는 연쇄 살인마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기준이 터무니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게 말이나 되냐?”라고 하면서 ‘나는 인정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참 신앙인이라면 성경에서 주시는 예수님 말씀을 하나님 권위로 받아들이고 예수님 말씀앞에 무릎꿇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 28, 29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마태복음 5장부터 마태복음 7장까지는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산상수훈이라는 제목의 내용입니다. 이 부분에 기록된 모든 말씀의 주체는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을 들으면서 그 권위앞에 대단히 놀랄 수밖에 없었고 그 권위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말씀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본체이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율법의 입법자이시며 율법의 완성자이십니다. 그런 분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만드신 분이 율법을 어떻게 적용해야하는 지 가르쳐주시고 율법의 참 의미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산상수훈은 율법 저자직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을 세우신 율법의 입법자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율법의 의미를 우리에게 직강하신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제 3자의 입장이 아닌 저자의 입장에서 율법의 온전한 의미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저자가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누가 왈가왈부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 날에 예수님은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던 이 산상수훈을 기준으로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마지막 날에 우리 “주님, 저는 그 계명의 의미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주신 산상수훈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뭐라 말하든지 철저히 예수님이 확증하신 이 기준으로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게 산상수훈의 결론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율법의 저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께서 “형제를 향해 노하는 자마다 심판 받게 되리라” 말씀하셨다면 그 기준이 우리 삶의 심판잣대가 될 것입니다. “형제를 향해 ‘골빈 놈’, ‘미련한 놈’ ‘무식한 놈’ ‘꼴통’이라고 욕하는 자마다 지옥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면 그 기준으로 지옥 불에 들어갈 것입니다. 형제에게 노하고 미워하는 말을 하는 것도 형제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고 영혼을 죽이는 살인행위라고 했습니다. 이런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는 노하거나 성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율법의 입법자, 집행자, 완성자이신 예수님께서 율법의 참 의미를 가르쳐진 것을 들으면서 우리의 삶에 대해 심각히 고려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이 기준으로 정말 천국갈 수 있는 영혼인지를 우리의 삶을 통해 살펴봐야 합니다. 정말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기준을 생각하며 그 기준을 어떻게 이뤄드릴 수 있을 지를 고민하며 불가능한 삶을 가능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앞에 나와 회개하고 돌이키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화목의 예물인 삶, 둘째는 원망의 마음이 사라진 삶입니다.
마태복음 5장 23,24절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선순위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는 것보다 먼저 우리 형제와 화해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보시겠다는 뜻입니다. 제단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것이므로 이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성전까지 가는 데 일주일이 걸린다고 생각해볼 때 예물을 드리러 가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다고 생각났을 때 다시 갈릴리로 돌아와서 화해하고 가라는 것은 정말 그 만큼 예수님께서 형제와 화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하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주일에 모였을 때 그 마음속에서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생각나면 그 문제부터 해결하려고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원망을 지닌 채 예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우선 화해부터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입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자신이 타인에게 피해를 입힌 사실을 알고도 자신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앞에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으니 이젠 괜찮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전히 내가 행한 잘못으로 인해 타인이 고통을 당하고 있음에도 내가 하나님앞에 예배하고 있으면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의를 드러내며 사람들을 비판하며 욕을 했던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자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 빨리 가서 먼저 용서를 구하거나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을 행할 때가 많습니다. 또 본의 아니게 형제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말다툼하기도 합니다. 형제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물질적인 손해를 입힐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다가 이런 일이 생각나면 즉시 가서 용서를 빌고 화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와서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형제와의 관계 가운데 생긴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고 태연하게 자신이 거룩한 척 의로운 척 가식적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습은 하나님께서 절대 경배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관계의 온전함을 위해서는 그저 내적인 고민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내적인 고민을 넘어, 관계의 회복을 위한 실제적인 액션을 취해야 합니다. 중심의 고민을 밖으로 드러내야만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5~27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우리가 주변의 사람들과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분을 품고 살아가는 것은 사탄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분이 생겼을 때 그 분을 속히 해결해야 할 것을 에베소서에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형제와 화해를 이룰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가 형제와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피해자’일 때가 아니라 ‘가해자’일 경우를 위주로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 경우에는 관계 회복의 열쇠가 바로 우리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가 관계에 있어 피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하게 미움받고 부당하게 박해를 받습니다. 이 경우에는 오늘 본문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관계 회복의 열쇠가 피해자인 우리 손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가 ‘가해자’가 된 때에는 관계를 회복할 여지가 우리에게 있기에 빨리 화해할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난 경우”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우리 형제에게 해를 입힌 경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전에 먼저 네가 범한 잘못에 용서를 구하고 형제와 화해하기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형제에게 화목하고 그 후에 예물을 드리면 이전보다 더욱 깊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은 살인도 하지 말아야하겠지만 더 실제적으로 형제, 그리고 이웃과 적극적으로 화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혹 형제와 가족, 동료들이나 주변의 이웃들에게 원망받을 일을 했다든지 아니면 주변 사람에 대해 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 시간 예배만 드리면 내가 해결받을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배보다 먼저 마음을 해결하고 예배보다 먼저 화목하고 평화로운 관계로 하나님을 높이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화목의 예물인 삶, 셋째는 원수인 사람과도 화해하는 삶입니다.
마태복음 5장 25절입니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이 본문에 등장하는 단어 ‘사화’란 ‘고발사건의 당사자끼리 서로 좋게 해결하며 마음을 푸는 일’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송사하기 전에 급히 화해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미 송사에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우리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길에서라도 서로 용서를 빌고 화해를 이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우리가 어떤 법정에 가는 상황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화해에 대해 그 시급성과 긴급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형제와 화목하는 것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이렇듯 빨리 화해하지 않으면 고발에서 재판으로, 재판에서 감옥으로 인생이 더 꼬여버릴 수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우물쭈물하다가는 형제를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존심을 버리고, 즉시 사과하고 화해해야 합니다. 말로써 하는 살인과 행동으로써 하는 살인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고발하는 자가 그를 재판관에게 넘겨주고 재판관이 옥에 가둘까 염려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지칭하는 ‘재판관’은 우리의 모든 삶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인생은 모두 마지막 날의 심판대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형제들과 함께 최후의 법정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의 형제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며 우리를 고발한다면 우리가 얼마나 부끄럽고 낯 뜨거울까요? 물론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지옥에 던져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가 되면 우리는 땅에서 용서를 구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그 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용서를 구해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제대로 용서를 구하지 않았던 만큼 천국에서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이어 영적으로 변화된 인생이 잘못된 행위에 대해 부끄러운 고백을 잇게 된다면 얼마나 창피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는 항상 화평을 찾아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화평을 추구하며 사람들사이에서 화해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사람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려는 자기 부인의 마음을 갖고 먼저 나아가 관계의 온전함을 회복하는 화평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은 내가 잘못했어도 저 사람이 먼저 내게 용서를 구하기 전에는 단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완고한 마음을 가집니다. 세상에서는 굽히고 들어가는 사람은 패배자로 봅니다. 괜히 내가 먼저 저 자세를 보이면 사람들이 나를 우습게 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완고한 마음 때문에 세상은 아주 작고 사소한 관계의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할 때가 의외로 많습니다. 먼저 사과하기만 하면 될 일이지만 사과하지 않고 “미안하다”는 한 마디 말을 못해 아주 작고 사소한 문제가 결국 나락에 떨어질 관계의 끝을 보게 만듭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고 사소했던 관계의 틈이 나중에는 더 이상 회복의 여지가 없는 깊은 계곡이 되고 맙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세상에서는 관계가 깨어지고, 갈라지고, 파괴되는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딱 한 번이라도 실천한다면 지금도 우리 관계 중에는 회복될 수 있는 관계가 굉장히 많습니다. 아직은 틈이 그렇게 많이 벌어지지 않은, 아직은 회복의 여지가 충분히 있는, 그런 관계가 우리에게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회복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용납하고 사랑하고 화목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44, 45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누가복음 6장 35절입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같은 고발하는 사람과도 빨리 화해하라”고 말씀하고 “우리의 원수되었던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먼저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구한다면 우리의 관계는 회복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자신의 잘못을 먼저 고백할 때 상대방이 “아니야, 나도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 이 한 마디를 듣게 된다면 우리의 관계는 얼마나 아름다워질까요? 서로의 마음속에 있던 앙금이, 서로에게 생긴 마음의 벽이 다 무너지고 참 사랑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서로의 관계속에서 천국이 이뤄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삶가운데 원수같이 느껴지는 사람들과 속히 화해하며 서로 용납하고 이해해주는 참 사랑을 보여주는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구약의 율법을 해석할 때 예수님께서 새롭게 적용하시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들에게 화를 내는 것, 원망하는 마음이 내면에 생기는 것, 자신을 고발하며 원수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한 것 마저도 살인과 똑같은 죄”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서 결론적인 말씀을 주십니다.
마태복음 5장 26절입니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지옥에 떨어졌다가도 처벌을 받고 나면 해방될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지옥불에 가기 전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해야 지옥불에 떨어지는 영혼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25절과 26절에 이런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25,26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원망과 악한 시기심과 질투의 감정속에서 형제들에게 노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살인에 해당하는 죄이고 그 죄를 지은 사람을 재판관이 가둔다고 말씀하십니다. 형벌을 받게 하는 것, 형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모두 재판관에게 권한이 있습니다. 이 권한을 가진 재판관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지옥과 천국을 나누시며 지옥과 천국에 합당한 자들을 구분하시는 분도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에게 우리의 삶을 완전히 보여드리며 그 분앞에서 죄 값을 다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이미 살인자입니다. “어떤 사람을 내가 죽였냐?, 죽이지 않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사람들에 대해 시기, 원망, 질투, 분노의 감정으로 타인을 욕하고 타인이 가진 것에 대해 욕심을 부리고 결국은 그들을 죽이고 싶은 감정이 생겼다면 나는 살인을 저지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죄를 가지고 태어나 항상 죄를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 결국 지옥불에 던져질 우리들을 위해 이 죄의 값을 해결하고 화목의 예물을 드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절대 이런 의로운 삶을 살 수 없는데 그 분이 오셔서 원수를 용서하시며 완전한 화목을 보여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속에 임하여서 예수님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셔야 우리는 살인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저와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깨닫고 살인으로 지옥에 떨어질 우리를 건져주시고 살인의 감정을 다 물리쳐 주시고 화목의 예물을 드릴 수 있는 화목의 인간으로 우리를 회복시켜주신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되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닮은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