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베이너스 건국일기. ---> 용병 가입
새하얀 바탕의 종이에 371이란 아라비아 숫자가 적혀 있었다.
허어, 이 숫자는 이만큼의 사람들이 응시했다는 뜻이겠지?
"그러니까, 이 번호표를 갖고 저기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으로 가면 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차례는 지켜야 난동도 없을 테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불평도 없을 테고, 저희도 약간의 시간이 들어 갈 뿐이니 서로 그리 큰 손해는 없을 것 아니겠어요?"
그렇군.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여 안내원의 말에 긍정을 표한 나는 천천히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 갔다. 그리고는 그들틈에 껴서 내 순서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으랏차!!!"
...탱.
"우하앗!!!"
.... 팍!
으음. 실력도 그렇지만, 기합 소리도 천차만별이구만. 사람들이 잔뜩 모인 곳은 '용병모집위원'인가에서 내걸었던 조건, 관문을 치르는 곳이었다.
연무장의 끝부분에는 커다란 나무가 세 그루 서 있었는데, 대략 5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그 나무까지 창을 던져 나무에 창을 박히게 하는 것이 관문이라는 것이란다.
그러니까 전투경험이 전무하거나 힘이 없는 사람들은 아예 처음부터 뽑지도 않겠다, 이 뜻인가 보군.
그 생각에는 동의한다. 사실 그런 사람들을 전투에 참가시켜봤자, 제대로 전투를 할 리도 없고, 도리어 아군의 사기를 떨어트릴 우려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훈련을 할 시간 따위가 없을 것은 당연지사. 저런 방법으로 골라내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하하하하! 저렇게 시시한 거에서 떨어지다니! 역시 애는 애잖아! 꼬마야, 어서 비켜라! 푸핫핫핫!"
"저런 꼬마를 참가시킨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크핫핫!"
하지만 저런 야유를 퍼붓는 것에는 찬성하고 싶지 않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니 키가 작은 한 소년이 창을 던지는 곳에 선 채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의 체구가 너무 작았다.
키는 대략.. 150? 야리야리하게 마른 체구에 위에는 낡고 낡은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무진장하게 얇은, 몸을 보호해야 할 갑옷의 사명을 다할 것인지조차도 의심스러운 가죽 갑옷을.
보통은 저렇게 갑옷을 입으면 그 위에 옷을 덧대어 입는다. 갑옷 때문에 폼이 안 나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일단은 상대에게 '난 갑옷을 입고 있으니까, 빈 곳을 잘 골라 찔러!'라고 말해주는 경우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소년은 그런 것도 없이 그저 갑옷을 입고 있었다. 물론 속에 평범한 면티를 입은 것도 같았지만, 그건 갑옷으로 몸이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입은 듯이 보일 뿐이었다. 하긴 저런 옷은 겉에 덧대어봐야 찢어질 뿐이겠다.
아무래도 가난한 평민 집 아들인 모양이다. 일단은 50길, 그러니까 은화 반 개라는 돈에 귀가 솔깃해서 온 것 같은데... 하지만 저렇게 말라 보이는 소년이 성인들이 사용하는 저 거대한 창을 제대로 던질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제대로 던졌다면 저 나무에 가서 꽂혀 있어야할 창이, 저렇게 땅에 떨어져 있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푸하하핫! 꼬마야, 어서 꺼져라! 너 같은 꼬마가 나올 자리가 아니란다! 크하하핫!"
"아가야! 가서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 쿠하하핫! 그리고 웬만하면 총각 딱지도 떼고 오라고! 그럼 남자로 인정해주지! 크하핫!!"
.... 이보라고. 저렇게 어려보이는 소년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심어 주려고 그럴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하여간에 남들 못 뜯어먹어서 안달이라니까. 이런 놈들은.
소년은 사람들의 재촉을 못이긴 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눈을 매섭게 뜬 채로 자신을 놀리는 사람들의 눈을 하나하나 일일이 직시했다. 그런 소년의 태도 때문일까, 놀리던 사람들이 하나, 둘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소년이 뒷문으로 나갈 때까지 떠드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 와중에도 난 그 소년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호오... 당당한 녀석이군.
그렇게 소년이 나가고 나서, 대략 30분이나 흘렀을까?
"369번! 370번! 371번! 나와 주십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는 내 번호가 포함되어 있었다.
벌써 내 차례구나.
음음. 사람들의 틈을 뚫고 사람들이 창을 던지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내 자리가 끝자리일까? 물론 내 번호가 끝에 불려졌다는 것은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지금 나와서 던지는 순서가 번호대로이냐고!
"먼저 369번!"
"예이, 예이."
맨 오른쪽, 그러니까 뭔가를 체크하는 듯한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 서있던, 보통 체격의 남자는 유들유들하게 대답하고는 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나무와 일직선상에 있는 지름 2미터의 원 안에 섰다.
저 원에서 벗어나면... 아마도 실격이었지?
"으음.. 저 체격으로 과연 할 수 있을까?"
"글쎄 말일세. 아무리 봐도 보통 밖에는 안 되는 것 같은데."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소근거렸지만, 너무나도 청력이 좋은 내 귀에는 다 들렸다. 하긴, 딴에는 그렇다. 저 사람은 고작해야 170cm를 겨우 넘을 것 같은 키에, 그리 단단한 체격도 아니다. 그러니 저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는 되지만, 겉만 봐서는 사람의 전부를 판단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아마 저들은 잠시 후에 그걸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후우....."
오른손에 창을 들고 가볍게 숨을 쉬던 그는 옆으로 섰다. 그러니까, 마치 야구에서 투수가 공을 던질 때, 포수를 향해 자신의 옆 모습을 보여주는 듯한 모습으로 말이다.
그리고는 최대한 오른쪽 손을 뒤로 뺐다. 그 손에 들린 창의 창날에 햇살이 반사되어 반짝였다. 그의 왼발이... 떴다.
팍!
땅을 왼발이 내딛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허리가 회전을 시작했고, 어깨를 넘어 최대한 뒤로 빠져있던 그의 손이 앞으로 휘둘러졌다.
"핫!!"
그의 손을 떠난 창이 나무를 향해 날았다.
텅! .....부르르르르.
".... 오옷~!!.."
사람들이 그의 창을 보고 탄성을 내질렀다. 흐음.. 창날이 전부 박혀 버린 걸 보니, 역시 꽤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군. 창날의 길이는 대략 잡아도 20cm는 되었다.
그런데 그 창날이 전부 박혀버리고도 힘이 남아서 부르르 떨리고 있으니, 꽤 대단한 실력을 가진 사람인 것은 확실한 것이다. 물론 보통 사람의 기준에서 말이다.
"합격! 당신은 저기가서 기다리시오."
"알았수다."
다시 유들유들하게 말한 그 남자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검술 관문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저 남자는 아까부터 저렇게 웃는 얼굴이었지?
"370번!"
아아.. 아직도 내 앞에 한 명이나 있다니!! 그렇게 절망감에 빠진(?) 나는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내 자신을 다독였다.
"쩝.. 저런 여자까지 여기에 나서다니, 돈이 급하긴 급한 모양이군."
"아닐 걸? 저 여자, 아무래도 어디서 본 여자같단 말씀이야."
"크하핫! 자네가 무슨 팔자로 저 여자를 봐! 아무래도 술집에서 본 모양이지?!"
"그게 아니라니까. 정말로 어디서 봤단 말이야."
내 앞 순서의 사람은... 알고 보니 여자였다. 지금까지는 신경도 쏟지 않아서 잘 몰랐는데, 여자였군.
음음. 주변에서 내게 간단한 정보를 여전히 제공하고 있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난 고개를 들었다.
여자치고는 키가 꽤 큰 그녀는 체크맨(?)이 내어주는 창을 받아들고는 방금 남자가 창을 던졌던 원의 옆에 있는 원으로 들어갔다. 즉, 그러니까 가운데에 있는 원으로. 그리고는 아까 남자가 던졌던 포즈와 거의 엇비슷한 모습으로 창을 내던졌다. 그 여인이 던진 창이 앞의 남자가 던졌던 창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던져진 창의 속력이 무척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아까 남자가 던진 창이 고양이라면, 지금 이건 완전 치타다! 치타!
퍼걱!!
나무에게 날아든 창은 그대로 나무의 복부-맞는지는 모르겠지만-를 꿰뚫어 박혔다. 나무에서는 진득한 수액이 천천히 흘러나왔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창을 던진 여인에게만 신경이 쏠려있을 뿐이었다. 엘프가 인간을 싫어하는 이유를 대충은 알 것 같군.
".... 우오옷!!"
"이야.. 저게 여자야?"
"... 아앗!! 전쟁터의 홍일점! 특 S급 용병, 킬즈 플라워(Kill's flower : 죽음의 꽃) '레지나'다! 역시 어디서 봤다 했더니만!!"
"뭐라고? 레지나?!"
"레지나가 여기를?!"
뭔 소란이냐.. 특.. 뭐시기 용병? 갑작스런 사람들의 동요에 그 여인, 특 'S'급 용병 레지나 -라고 불린- 는 당황한 듯 차갑게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귀엽게도 눈을 껌뻑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 정말 특 S급 용병 레지나이십니까?"
사람들의 반응에 잠시 어리벙벙해하던 그 여인은 확인하듯 물어보는 체크맨의 물음에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예. 그, 특 S급이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이름이 레지나 인 것은 맞습니다만."
그녀의 반응에 실망의 표정을 짓는 체크맨. 아마도 동명이인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저 정도 실력이면, 특 S급으로 불려도 손색은 없다. 더군다나 아직 숨겨놓은 여력이 있는 모양이니...
"역시!!"
아까 전까지 레지나라는 여인을 봤네, 어쩌네 하던 남자가 다시금 '역시!'라는 말을 내뱉자, 그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순간 적으로 당황하던 것 같던 그 사람은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레지나는 딱 한 번, 길드의 실수로 특 S급 일을 받고는 그 일을 수행해내 특 S급에 올랐다고 들었어. 사실 그녀가 떠나갈 때까지 그녀에게 그 사실을 전해주지 못해서 그녀가 그런 사실을 모를 것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었지만, 정말로 그걸 모를 줄이야!"
"오오.. 그런 일이!"
.. 그런 바보 천치같은 사람들이 정말로 있을 줄이야...
가볍게 한숨을 내쉰 나는, 문득 왜 내 번호는 안 부르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곧 사건의 원흉(?)인 그 여자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체크맨은 다른 이들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입을 열었다.
공손해졌다고 해야 할까? 아니, 상냥하다고 해야겠군.
"정말 레지나님이시군요. 그럼 이제 저리로 가시면 됩니다."
"에? 시험은요?"
저런... 지금까지 말을 들어놓고는, 저렇게 되묻다니... 정말 둔한 여자군.
"감히 특 S급 용병을 시험할 정도로 저는 배짱이 좋지 못하거든요."
싱긋 웃으며 그렇게 말한 체크맨은 시종을 불렀다. 그리고는 그에게 그 여인을 데려다주라고 말하고는, 다시 처음과도 같은 태도로 입을 열었다.
흐음.. 귀빈 대접인가?
"자아! 371번!"
아, 나로군. 그제야 내 차례를 맞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받아들었다.
대략 250cm에 달하는 길이를 가진 창의 무게는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생각 외로 묵직하다고 해야 하나?
아아, 이럴 때가 아니군. 그제야 내가 해야 할 일을 깨달은 나는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원에 섰다. 뒤에서 사람들이 수군댔지만, 그들의 관심은 내가 아닌, 저기서 마치 사람들이 던지는 것을 지켜 보겠다는 듯이 서있는 여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뭐, 내게는 아무 래도 좋지만.
오른손으로 창을 들었다. 그냥 머리 위로 치켜든 것이다. 뒤에서 사람들이 그런 날 보고 기본도 모르는 청년이라고 놀려들 댔지만, 난 별 상관없었다.
아아, 역시 난 인생사에 초연하다니까. 쿠하핫!
잡생각 속에서도 내 몸은 움직였다. 가볍게 허리를 돌리며, 오른 손의 창을 내던졌다.
훙!
창이 빠른 속력으로 회전하며 날아갔다, 마치 드릴처럼. 그리고 곧 창은 나무에 다다랐다.
콰가가가가가가.... 쿵!!
스핀을 잔뜩 머금고 있던 창은 나무를 꿰뚫어버렸고, 곧 나무에는 창보다도 약간 큰 구멍이 생겨났다. 창은 나무 뒤에 있던 담벼락에 완전히 박혀 들어갔다. 끝부분도 보이질 않으니, 저 속으로 파묻힌 모양이군.
젠장, 너무 기본기가 충실해도 안 좋다니까. 저렇게 나무를 꿰뚫어 버리니, 원.
나무의 뚫어진 구멍은 마치 돌로 긁은 것 같았다. 맨들맨들하지 않고 꺼끌꺼끌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저렇게 상처를 내놨으니, 나중에 엘프 만나면 무조건 피해야겠다. 그런데... 왜 이렇게 뒤통수가 따갑지?
문득 뒤를 돌아본 나는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뒤에 서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아아.. 왠지 엄청 귀찮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것은 왜일까?
우아앗!! 젠장! 왜 나쁜 예감은 전혀 안 틀리냐고!! 싫단 말이다앗!!
난 속으로 절규했다. 하지만 이 둔한 여자는 내 속도 모르고, 자꾸만...
"한 판 붙자니까요! 한 수 가르쳐줘요! 네?!"
.. 이라면서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닌다. 젠장!! 낮에 그 용병 선발에서 눈에 띄는 게 아닌데.. 아니, 좀 더 나중에 찾아가는 건데.. 크흑..
그런데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냐고!! 난 걷던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뒤를 바라보며 살의를 뭉실뭉실 풍겼다.
"얼른 한 판 붙자니까요!"
.. 아아, 빌어먹을!! 하늘이여! 왜 저 여자에게 저런 둔함을 내려주셨나이까!! 아니, 가이아디크!! 저딴 여자를 왜 내게 붙여준 거야!! 난 아무런 짓도 안 했단 말이다앗!!
하지만 이런 내 내부의 외침도 아랑곳없이, 세상은 흘러가는 법인가보다.
"왜 멍하게 있어요? 이봐요!! 한 판 붙자구요!!"
크앗!! 이 여자가 정말!
"좋아, 한판 붙어주지."
.. 화가 난다고 무심결에 말해버렸다. 이런, 젠장.. 결국 난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은 다행스럽게도(?) 마법의 빛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연무장의 양 끝에 그녀와 난 마주섰다. 그런 나와 그녀를 보고, 백작이 거주하는 성과 그 성의 앞에 있는 연무장에서 내일 전투를 준비하고 있던 용병들과 기사, 병사들은 모여 들기 시작했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에엣! 그렇겐 안되지!! 나를 향해 달려들려는 그녀를 향해 손을 들며 외쳤다.
"잠깐!!"
"뭐예요?"
"이 대련에서 이기는 사람은 군말 없이 자기 승리를 인정하는 거야! 알았지?"
뭔가 말이 좀 이상했다고 느낀 모양이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고, 내 앞에 서있던 레지나도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큭! 위험하다! 이대론 안돼!!
쉴 새 없이 몰아붙이자!!
"할 거야, 말 거야?! 빨리 결정해!"
".. 하, 할게요!!"
쿠쿡, 역시 약간의 짜증을 동반한 물음에는 다급하게 대답하는구나. 좋아! 이제 떼어놓을 수 있겠다!
"자, 그럼 시작한다."
"얼마든지."
호쾌하게 대답한 그녀는 검을 곧추세웠다. 그 자세에서 그녀에게는 빈틈이라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실전에서, 틈이란 것은 '만드는 것'이다.
타탁!!
땅을 박차고 그녀를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보통 사람보다 조금 빠른 정도밖에는 안되어서, 내게는 너무나도 느리게 느껴졌다. 저기서 입 쩍 벌리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은 무시하자.
레지나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검은 내가 달려가는 경로를 향해 있었다. 그녀의 검을 코앞에 두고 난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하지만 그녀는 용케 나를 놓치지 않았고, 그녀의 검은 나를 따라 왼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난 그 순간, 오른발을 들어 그녀의 팔꿈치를 툭 쳤다.
순간 뻗는 검! 발꿈치를 굽히고 검을 들고 있던 그녀의 팔이었기에, 거리에는 여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원하고 있던 것이고.
제자리에 멈춰서며 고개를 뒤로 힘껏 빼면서 그녀의 검을 눈 앞에 두었다. 다른 이들은 내가 검을 피하느라 그런 걸로 생각할 테지.
좋아! 일단 성공이닷!!
".... 우와아앗!! 레지나가 이겼다! 역시 대단해!!"
"특 S급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
사람들의 환호를 뒤로하고, 난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졌습니다."
".....에?"
뭔가 어리둥절한 듯이 그렇게 말하는 레지나. 하지만 난 지금 이 상황을 얼른 빠져나가야 한다.
"제가 졌다고요. 그럼 이만."
난 그렇게 두리뭉실하게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내게 배정된 방으로 향했다. 휴우.. 이제 저 여자도 떼어놓았고, 그럼 이제 진짜 볼 일을 보러 가보실까?
성안에 있는 내게 배정된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난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쫓아옴을 느꼈다.
"저기..... 리온님?"
참고로 말해두지만 지금 내 이름은 리온이다. 리오스라는 이름을 쓰려고 했지만, 왠지 귀찮은 일을 겪을 것도 같았고, 더군다나 지금 내가 하려는 일에 무척이나 걸리적거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이름이 '리온 세크리안'이었다. 굳이 뜻을 해석하자면 '검은 눈의 소유자'. 으음. 하여튼 멋지단 말야.
....그건 그렇고, 왜 날 부르는 거지?
뒤를 돌아보니, 쭉 빠진 8등신의 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히도 주위에는 지나가는 용병이나 사람들이 없어서인지 대화에 방해가 될 만한 사항은 없어 보였다.
"왜 그러십니까?"
"백작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백작이? 나를? 왜 보자는 거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난 지체없이 대답했다. 어차피 백작을 만나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제발로 굴러 들어온 기회를 차버리는 바보짓은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나자고 하십니까?"
"예. 약속 같은 것이 없으시다면, 지금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만."
흐음. 그런가? 뭐, 괜찮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대답한 나는, 백작의 비서 같아 보이는 쭉 빠진 8등신의 미녀를 따라 성안을 걷기 시작했다.
에? 저 아저씨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낮에 맨 처음 여기와서 당황하던 내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준 아저씨가 어딘가의 백작이 앉을 법한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더군다나 이 자리가 백작의 집무실로 미루어보면, 이 방에서 저런 의자에 앉아 있을 법한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 백작이셨습니까?"
"그랬다네. 리온군."
으음. 그래서 이곳의 상황을 잘 아는 것이었군.
"그런데, 왜 저를 보자고 하셨는지요?"
".... 운명이란 것을 믿는가?"
운명? 갑자기 그게 무슨 헛소리야?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의도를 모르겠습니다만."
"가타부타 말고, 묻는 말에만 대답해주게나."
.. 흠, 좋아. 내 생각을 말하라고 한다면, 해주지.
"믿지 않습니다. 운명 따위, 현실을 헤쳐 나갈 자신이 없는 자들이 흔히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하는 말일 뿐이니까요."
난 약간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운명이란 것이 희망을 줄 수도 있는 노릇 아니겠는가?"
"자기 좋을대로 해석해서 바보처럼 살아가겠다면,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럼 신이란 존재가 내려준다는 신탁이란 것은 어떻게 설명하겠나?"
"운명을 알고 그것을 알려준다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인간들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 신탁을 내리는 것이지요."
"...."
"...."
한동안 우리 둘 사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그런데 이따위 것을 묻기 위해서 날 부른 건가?
"알았네. 서로 생각이 다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자네를 보고 운명이란 것을 직감했다네."
...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날 보고 뭘 직감해?
"꼭 자네를 다시 만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말일세."
흠. 그거야 내 기세를 읽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검사로서의 능력이 출중한 당신이라면, 그 정도는 가능하리라고 보는데? 난 그런 뜻을 가득 담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자네가 내게 뭔가를 요구할 것 같다는 느낌도 들더군. 그건 이제는 옛날이 되어버린 크레이드 제국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이 될 것 같다는 느낌도 함께 말일세."
흐음. 그러신가? 그렇다면, 당신은 점쟁이일지도 모르겠군. 난 그렇게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그런 나를 보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생각이... 틀린 것인가?"
"아뇨, 아뇨. 틀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확하게 맞춰서 섬뜩한 걸요?"
"그런가? 역시 자네는 내게 뭔가를 원하는 것이군. 그래, 뭘 원하는가? 내 능력이 된다면, 그리고 평민들에게 손해가 가는 일이 아니라면 돕고 싶네만."
뭐, 뭐야? 왜 갑자기 이렇게 -사실 갑자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호의적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