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은 1899년 대한제국의 자주적 결정으로 근대적 국제항으로 개항한 도시이다. 개항100주년 기념으로 월명공원에 세워진 조각품들중에서 '바다의 요정' 임석윤 1998년 작품을 골랐다. 작품해설을 보자 "파도위에서 피리를 부는 요정의 모습으로 군산의 풍요로움을 상징한 작품"이란다. 월명공원에는 군산이 자랑하는 채만식선생의 기념비도있다.
월명산은 공원으로 잘 개발되어 있어서 시민들이 즐겨 찾는 쉼터이다. 월명산을 넘어 호수로 향했다. 스처지나가는 사람들 마다 운동하러 나온 시민들이다. 호수가 어디쯤에 있느냐고 물으면 가르처 주면서 한술 더 떠 저쪽으로 가면 무슨호수 얼마를 더가면 또 호수 자랑이 대단하다. 벗꽃 피는 봄에 와 보면 정말 죽여 준단다. 하긴 군산이라고 하는 도시에는 호수가 많다. 줄잡아 여섯군데나 된다. 우리나라에서 산위에 이렇게 많은 호수를 품고있는 도시는 군산밖에없을 것이다.
월명산을 가로질러 뚤러놓은 해망굴이다. 해망굴, 바다가 보이는 굴이란 이름처럼 굴을 빠저 나갔더니 정말 바다가 보인다. 내항으로 쉽게 드나들기 위하여 일제가 뚤러놓은 굴이란다. 6.25때에는 인민군사령부로 쓰여젔었단다.
내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해망동이있다. 해방후 피난민들이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서 하나 둘 집을 짓고, 덧 이어 짓고, 또 짓고 하면서 조성된 동네이다. 미로와 같은 골목길을 따라 지붕들의 선이 하늘과 맏닿아 이어진다. 바다가 보이는 동네 해망동은 산업화시절 활황이던 수산업과 합판산업의 열기속에 전성기를 누리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낡고 쇠락한 달동네로 시간이 멈추워 있지만 좁은 길을 따리 올라가다 보면 선창가가 내려다 보이는 뛰어난 전망이 살아있고 기억을 더듬게하는 매력있는 동네이다.
해망동 함석지붕위로 장항제련소가 보인다. 금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바라보고 있지만 군산은 전라북도 북쪽 끝이고 장항은 충청남도 남쪽 끝이다. 해망동이 그러하드시 1936년 우뚝 세워진 장항제련소도 화려했던 시절을 다 보내고 지금은 초라한 박물관으로 변신되었다.
녹쓴 담배간판이 산해이용원의 전성기를 대변하고 있다.
꿈을 잃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말해주는 점쟁이. 누구였을가 제일 처음 점집에 깃발을 달기 시작한 사람은.
해망로를 따라가면서 일제시대건물들이 남아 있는데 위의 사진은 '나가사키18은행'건물이다. 인천항에 일본은행들이 여럿있드시 군산항도 그렇다. '나가사키18'은행은 일본으로 미곡을 반출하고 토지를 강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금융기관이었다.
'구 군산세관 본관' 군산항을 통해 드나들던 물품에 대해 세금을 거두던 세관이다. 1908년에 준공한 이 건물은 독일인이 설계하였고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을 수입해다 지은 유롭양식의 건축물이다. 한국은행 본점과 같은 양식으로 슬레트와 동판으로 지붕을 올리고 그 위에 세개의 뾰족한 탑을 세웠다. 이 건물은 건축사적 의미 외에 호남지방에서 쌀을 빼앗아 가던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적 건물이다.
1930년대에 군산세관 본관앞에 쌀가마가 높게 쌓여있다.
군산내항에 멀리 일본화물선이 정박해 있고 부두에는 쌀가마가 산처럼 쌓여있다. 일꾼들은 대부분 흰옷을 입은 조선 노동자들이다.
조선은행 군산지점. 군산에는 일본은행지점들이 많이있었다. 일제가 일년에 쌀 2백만섬을 실어가던 항구였으니 얼마나 많은 돈이 흥청거렸겠는가. 일본인들은 헐값에 토지를 강제로 매입해서 대지주가 되고 조선농민들에게 소작을 준다. 일본 본토에서는 별 볼일없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대지주로 변신하는 것이다. 한 예로 일본에서 경찰시험에 9번이나 낙방한 사람이 경성(서울)에 와서 경찰주임을 했다고 한다. 일본인 대지주들은 거대한 호화주택을 짓고 하인들을 여럿 거닐고 거드름을 피웠을 것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지금도 일본인 지주들이 살았던 거대한 주택은 그대로 남아있다.
'히로쓰 가옥' 이 가옥은 일제강점기 군산에서 포목상으로 부자가 된 히로쓰 게이사브로가 건축한 전형적인 일식 가옥이다. 대지주가 많았던 군산에서 유일하게 상업으로 부를 이룬 인물이다. 건물의 형태는 근세 일본무가의 고급주택인 야시키 형식의 대규모 목조주택이다. 이층으로 된 본채 옆에는 금고건물과 단층 객실이 비스듬하게 붙어 있으며 두 건물 사이에는 일본식 정원이 꾸며저 있다.
현관 안쪽의 중복도 양편에 온돌방과 부엌, 식당, 화장실등이 배열되어있다. 복도 중간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이층에는 일식 다다미방 2칸이 있다. 방들도 넓직넓직하고 집 규모가 엄청 커서 복도를 이리저리 한참 다녀도 다 볼수 없을 정도의 집이었다. 개인집이 이렇게 거대해서 무엇에 쓰려고 했는가? 이 거대한 집을 꾸려 나가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해야 정리정돈이 되겠는가? 그나마 히로쓰는 포목상을 해서 부를 이루웠다니 그냥 봐 주겠지만 군산에 많은 거대한 일본가옥들은 대지주들 소유였었다니 이게 다 날도둑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시인 고은선생이 출가한 절 동국사를 가 보았다. 1909년에 금강사라는 명칭으로 창건하였고 1913년 현위치에 신축한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이다. 자재 일체를 일본에서 들여와 지은 절이다.
범종은 1919년 일본 경도에서 주조하였으며 창건주 및 개산, 시주자, 축원문이 음각되어있다. 당시 군산에서 일본인들의 경제력이 얼마나 막강했었는가를 이 사찰이 말해주고 있다.
신문다발 위의 별처럼 생긴 열매가 말린 마름이라고 하는 열매이다. 마름은 연못가에서 자라는 일년살이 줄기식물에 달리는 열매로서 따다가 삶아 먹는다. 일제때 주린배를 채우기 위하여 마름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삶아 쪼개면 흰 살이 나오는데 맛이 밤맛이다. 채만식선생의 호 '백릉'은 흰백자 마름릉자를 쓰는데 이것은 '마름'열매를 의미하는 것이다.
채만식선생의 소설 탁류에 1930년대 식민지 군산의 사회상이 잘 그려저있다. 식민지 시대의 혼돈과 혼탁 그리고 무질서의 격류 속에 휩쓸려가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린 대표작 탁류는 1937년 조선일보에 연재되었었단다.
멀리 금강하구가 보이고 더 멀리 장항제련소가 보인다. 빛바랜 역사를 찾아, 일제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는 군산을 하루에 둘러보기에는 너무나 긴 역사를 지닌 항구이다. 고군산군도에 가 보지도 않고 군산의 아름다움을 어찌 알랴. 어느날 다시 찾아와 느긋한 마음으로 묵어가면서 살펴보리라. 그때 선유도도 밟아 보리라. 선유봉도 올라가 보고 선유도의 황홀한 일몰도 보리라. 군산은 아름답고 볼거리 많은 항구이고, 그리움만 남기고 떠나온 항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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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군산은 몇번 가보질 않아서 사진을 봐도 아는 곳이 한곳도 없군요.
볼거리 많고 아름다운 항구라는데...언제 시간내어 가온님의 공간도 구경하고 군산도
가 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언제 시간이 생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