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cafe/992B513D5EC6B15C18)
서울광진지회에서는 9월중 변씨종친회 행사에서 불굴가 시조창을 시창합니다.
변안열 장군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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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안열 邉安烈 (1334 ~ 1390)
중국 원나라 瀋陽출신으로
고려 말기의 文臣, 武臣, 詩人이다.
본관은 原州이고 字는 忠可이며 號는 大隱이다.
고려 공민왕이 원나라에 볼모로 있다가 충정왕이 죽자
노국대장공주와 혼인하여 귀국할 적에
노국대장공주의 배행 3장6학사 중에 수장으로 환국하였다.
부친은 아버지 변순(邊順)의 대를 이어 심양천호후의 직책을 가지고
부친은 고려 판삼사사(高麗 判三司事)로 추증된 변량(邉諒)이다.
1351년 원나라 호방(虎榜)에 장원급제하였다.
변안열 장군은 최영, 이성계 등 여러 고려 장군들과 더불어
홍건적을 물리치고 왜구를 토멸하였으며
당파 싸움에 휘말리지 않은 고려 말기의 무신(武臣)이었다.
김저(金佇)의 분명치 않은 자백에 의한 누명으로 억울하게 순절하였다.
조선 태조(이성계는
충신 대은 변안렬을 조선 개국 이등공신에 책록을 추증하는 교지를 내리었다.
변안열은 1351년에 공민왕을 따라 고려에 와서 귀화한 장수로
무공을 많이 세운 인물이다.
그러나 정몽주(鄭夢周)보다 2년 먼저 이성계(李成桂)의 혁명세력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는데, 그 이유는 「충의가」의 창작동기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이성계가 그의 생일날 대신들의 의중을 살피고자 잔치를 베풀고
포은과 대은을 초대하여 이방원으로 하여금 하여가를 부르게 하자
포은은 정몽주는 단심가로 대은 변안열은 이 작품으로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굽힐 수 없다는 뜻을 드러냈다고 한다.
불굴가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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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기에 변안열(邊安烈)이 지었다고 전하는 단가.
일명 ‘충의가’라고도 한다.
원가는 원본 청구영언에 작자미상으로 전해지다가
1970년 단국대 황패강 교수에 의해
변안열 장군의 불굴가라는 것이 논증되었고
한역가(漢譯歌)와 창작경위는
『원주변씨세보(原州邊氏世譜)』 경신보(庚申譜) 권1 잡록부(雜錄附)에
수록되어 있다.
전하는 한역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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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는 작품이
조선 후기의 여러 가집(20종류)에 사설시조의 형태로 전하는데,
그 중 진본 『청구영언』이 만횡청류(蔓橫淸類)에 전하는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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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설시조 양식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이를 근거로 사설시조 장르의 발생을 고려 말기로 소급하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이 가요는 변안열 지은 원가 그대로는 아닐 것이라든가,
조선 중기까지 내려오는 동안 상당한 변모를 거쳤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위의 견해를 부정하는 주장이 있기도 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F56B3E5EC473101B)
“가슴팍 구멍 뚫어 동아줄로 무주 꿰어,
앞뒤로 끌고 당겨 감켜지고 쏠릴망정,
임 향한 그 굳은 뜻을 내 뉘라고 굽히랴.“
관련 자료(변씨종친회 카페에서)
고려의 국운이 기울던 1389년(공양왕 원년) 10월,
이성계는 생일을 자축하는 연회를 마련했다.
이 자리엔 이방원이 배석했고,
정몽주와 변안열(邊安烈·1334~1390)을 초대했다.
아버지 이성계와 함께 역성(易姓)혁명을 꿈꾸던 이방원은
‘하여가(何如歌)’로 두 사람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라.”
그러자 정몽주가 ‘단심가(丹心歌)’로 응수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塵土)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어 변안열이 ‘불굴가(不屈歌)’로 강도를 높였다.
“내 가슴 구멍 뚫여 동아줄 길게 꿰어/
앞뒤로 끌어 당겨 이 한 몸 가루된들/
임향한 이 굳은 뜻을 내 뉘라고 굽히랴”
대은(大隱) 변안열.
그는 중국 원나라 선양(瀋陽) 출신이다
1351년 원의 무과에 장원급제한 뒤
선양에 가있던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시종(侍從)하여 고려로 들어왔다.
고려에 온 후 원주 원씨와 혼인하고 원주를 관향(貫鄕)으로 받아
원주 변씨(邊氏)의 시조가 되었다.
변안열은 용맹한 무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1362년 홍건적이 개경까지 쳐들어오자
안우와 함께 홍건적을 격퇴하고 개경을 수복해 1등 공훈을 세웠다.
1374년엔 최영과 함께 탐라(제주)의 왜구를 정벌하고
1376년엔 부령에서 왜구를 크게 격파하는 등 수차례 공을 세웠다.
1380년엔 이성계와 함께 출정하여 황산에서 왜구를 물리치는 대첩을 거두었다.
계속되는 승전에 힘입어 변안열은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에 봉해지고
지위가 판삼사사(判三司事), 영삼사사(領三司社)에 이르렀다.
고려말 개경 수복, 황산대첩 1등공신
변안열은
1388년 이성계와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했다.
회군 이후, 이성계의 군사적 정치적 힘이 급성장하자
변안열은 이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고려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변안열의 사병(私兵)이 2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변안열의 사병은 이성계를 견제할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이었고
이성계로서는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남양주 진건읍에 위치한 변안열 부부묘와 묘역 전경[사진=이광표]
1389년 드디어 일이 터졌다.
이성계 생일 연회에서 이방원은 변안열의 속내를 짚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변안열은 불굴가를 통해 역성혁명 반대의 뜻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변안열은 곧바로 우왕의 복위를 모의한 김저의 옥사에 연루되어
12월에 논핵을 당했고
1390년 1월에 관직을 삭탈 당하고 한양으로 유배된 뒤
정월 16일 경진시에 조속하게 처형당하였다.
이성계 생일 때 역모 반대했다 처형
변안열은 고려말 이성계와 쌍벽을 이뤘던 명장이다.
그러나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다 끝내 화를 당해 순절했다.
그것은 절개를 지킨 죽음이었다.
그리고 2년 뒤.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등 고려 3은(三隱)이
모두 변안열을 기렸다.
정몽주의 제문(祭文) 가운데 이런 문구가 있다.
“늠름하기가 추상(秋霜) 같음은 공의 충렬(忠烈)이요,
열렬하기가 백일(白日) 같음은 공의 의절(義絶)이었습니다.
이 밤을 소리 내어 크게 울건대 어느 날이든 감히 잊겠습니까.”
이색은 제문에서 이렇게 읊었다.
“강산과 더불어 사라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것은
공의 충렬이 아니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길재의 마음 또한 마찬가지였다.
“모든 관료들이 산처럼 우러러 보았으나
하루 아침에 와열(瓦裂)되었으니,
슬프고 애통함을 따를 데가 없습니다.”
하지만 변안열은 ‘고려사’에 간신으로 기록되었다.
절개를 지키다 살해당했던 정몽주가 충신으로 추앙받은 것과는
상황이 너무 다르다.
‘고려사’는 조선 초에 편찬되었다.
승자의 시각으로 구성하다보니
이성계와 맞섰던 변안열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이로 인해 변안열의 충정은 역사의 저편으로 잊혀져갔고
간신의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다.
변안열은 남양주 진건읍에 묻혀 있다.
순절 후 경기도 양주 주엽산에 묻혔으나 광릉과 가깝다고 해서
1468년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바로 변안열 묘역(경기도 문화재자료 116호)이다.
변안열 묘는 부인 묘와 쌍분으로 되어 있고,
주변 곳곳에 후손들의 무덤도 함께 조성되어 있다.
묘역은 널찍하고 탁 트여있다.
대은 시조 묘표비, 신도비, 공적비 등 다양한 기념물을 만날 수 있다.
여기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불굴가’의 내용과 의미를 설명한 석비와
‘불굴가’를 발굴하고 선양한 황일영을 추모하는
‘패강 황일영 선생 학술비’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156E455EC4A28708)
기개·비장미 넘치는 시조 '불굴가'
불굴가를 읽어보면 불굴가에는 충절과 기개, 비장함이 넘친다.
그런데 이 불굴가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고전문학자 황일영(황패강)이
1968년 원주 변씨 집안에 전해오는 세보(世譜) 속에서
변안열의 행적과 한문으로 기록된 불굴가를 발견함으로써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원문은
“穴吾之胸洞如斗 貫以藁索長又長
前牽後引磨且戛 任汝之爲吾不辭
有慾奪吾主 此事吾不屈
혈오지흉통여두 관이고삭장우장
전견후인마차알 임여지위오불사
유욕탈오주 차사오불굴”으로 되어 있다.
황일영은 시가집 ‘청구영언(靑丘永言)’에도
우리말로 풀어 쓴 불굴가가 수록되어 있음을 추가로 확인했다.
불굴가의 작자를 두고 이론을 제기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당시의 길재, 이방번 등의 제문에 ‘불굴지가(不屈之歌)’
‘불굴유가(不屈遺歌)’ 등의 표현으로
불굴가를 직접 거론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변안열의 작품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다만 1389년 이성계 연회에 변안열이 참석했는지를 두고
의문을 표하는 경우는 있다.
그럼에도 불굴가의 존재 의미와 변안열의 충절에는 변함이 없다.
후손 노력 끝에 호국인물 선정
불굴가의 발견은
변안열에 대한 기존의 왜곡된 시각을 교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누군가는 불굴가를 두고
“500년 동안 역사의 음지에 가려 있던 절절한 노래”라고 평한다.
변안열의 불굴가는
정몽주의 단심가와 함께 고려 말 충정을 상징하는 절창의 하나다.
황일영은
“단심가와 불굴가는 문무 충절가의 쌍벽”으로 규정하고
“단심가에는 문반(文班)의 곡직하고도 매운 뜻이 깃들어 있고
불굴가에는 무반(武班)의 씩씩하고 흔들림 없는
송죽 같은 절개가 깃들어 있다”고 평한다.
단심가가 간절하고 지극하다면
불굴가는 더 강단이 있고 극적이라는 말이다.
불굴가에는 비장미와 숭고미가 잘 담겨 있어 읽는 이에게 진한 감동을 준다.
그런데도 단심가가 널리 인구에 회자되어온 것과 달리
불굴가는 아직도 대중에게 낯선 편이다.
세상에 알려진 역사가 짧기 때문이다.
그동안 후손들이 남양주의 변안열 묘역을 가꾸고
그의 정신을 기렸는데 대중에게 알려지지 시작한 것은
역시 불굴가 덕분이다.
이에 힘입어 다양한 연구와 숭앙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2000년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오백년의 침묵
그리고 환생:원주 변씨 출토유물 기증전’이 열렸다.
변안열과 관련된 유물이 아니라 후손들의 유물이었지만
이를 통해 원주 변씨 시조인 변안열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013년 4월 국방부 전쟁기념사업회는
변안열을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이것은 억울하게 간신의 누명을 썼던 변안열에 대한 일종의 신원(伸冤)이었다.
무려 623년 만의 일이다.
이어 이듬해 5월엔 ‘이달의 호국인물’ 로 선정되었고
서울 전쟁기념관에서 변안열을 추모하는 현양 행사가 거행되었다.
시조문학계에서는
불굴가를 우리나라 사설시조의 효시로 평가한다.
그래서 한국시조협회는
2014년부터 대은시조문학상을 제정해 운영하고 있으며
동시에 매년 변안열 묘역에서 대은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
원나라에서 고려로 건너와 원주 변씨를 창시하고,
홍건적과 왜구 등을 물리치는 데 일생을 바친 호국 무인 변안열.
그는 진정한 고려 충절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에 대은 변안열을 더해
“고려 4은(四隱)”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0586415EC479AC1F)
관련 자료(아래의 글씨를 클릭하면 영상으로 갑니다.)
原川府院君 邊安烈
大隱 邊安烈 實記
원주변씨중앙화수회(카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