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계용묵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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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치 아다다로 유명한 작가 계용묵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
계용묵(桂鎔默, 1904.9.9~1961.8.9)의 본관은 수안(遂安). 평안북도 선천 사람이며, 아버지는 항교(恒敎)이고 어머니는 죽산박씨(竹山朴氏)이다. 1남3녀 중 장남이다.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신학문을 반대하는 할아버지 밑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향리의 공립보통학교에 다닐 때 순흥안씨(順興安氏) 정옥과 혼인하였다. 졸업 후 몰래 상경하여 1921년 중동학교,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잠깐씩 다녔으나, 그때마다 할아버지에 의하여 귀향하여야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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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번 전봇대를 조금 지나서 내려다 본 소나무 군락지 하단에 작가 계용묵 묘역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
약 4년 동안 고향에서 홀로 외국 문학 서적을 탐독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대학(東洋大學)에서 수학하였으나, 가산의 파산으로 1931년 귀국하였으며, 그뒤 조선일보사 등에서 근무하였다. 1945년 정비석(鄭飛石)과 함께 잡지 《대조 大潮》를 발행하였고, 1948년 김억(金億)과 함께 출판사 수선사(首善社)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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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번 전봇대를 지나면 바로 우측으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서 소나무 군락이 있는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
1925년 5월 《조선문단》 제8호에 단편 〈상환 相換〉으로 등단한 이래 40 여 편의 단편을 남겼다. 그의 문학은 발표 시기에 따라 대체로 3기로 구별된다. 〈최서방〉(1927)·〈인두지주 人頭蜘蛛〉(1928)로 대표되는 첫 시기는,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을 그렸다는 점에서 대체로 경향파적이라고 평가되기도 하지만, 적극적인 투쟁의식이 없다는 점과 이후의 다른 작품들과 결부하여볼 때 다만 고통받는 서민에 대한 따뜻한 관심이 반영된 작품들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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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무 군락 주변에서 헤메이다 실패, 두 번째 다시 가서 헤메이다 포기하고 마을 방향으로 내려가자 마자 바로 그 곳에 묘역이... |
두 번째 시기는 몇 년의 침묵 끝에 1935년 《조선문단》 제4권 제3호에 〈백치 아다다〉를 발표하면서 시작된다. 이 시기가 그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데, 초기의 미숙함에서 벗어난 세련된 문장기교로써 그의 문학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장벽 障壁〉(1936)·〈병풍에 그린 닭이〉(1936)·〈청춘도 靑春圖〉(1938)·〈신기루 蜃氣樓〉(1940) 등이 이에 해당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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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계용묵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
▲ 묘역 뒷편 측면으로 내려와서 바라 본 모습 |
여기서의 주인공들은 선량한 사람이지만, 주위의 편견이나 억압, 자신의 무지로 인하여 불행 속을 헤매거나 패배자적인 처지에 처할 뿐, 아무런 해결책도 가지지 못하는 소극적인 인물이기 일쑤인데, 이러한 경향은 작중 세계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고 관조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계용묵 문학의 특징이자 한계점이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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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계용묵 묘역 전경 |
광복 후 격동과 혼란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별을 헨다〉(1946)·〈바람은 그냥 불고〉(1947) 등 세 번째 시기의 작품에서도 그는 현실 인식의 소극성을 크게 뛰어 넘지는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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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우측에서 바라 본 작가 계용묵 묘역 |
결국, 그의 소설은 1930년대 한국 문학의 언어적 미감을 세련시키고 단편 양식에 대한 관심을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니지만, 적극적인 현실 감각 및 역사 의식의 부재, 서민에 대한 관조적 시선이 빚은 현실감 결여라는 문제점이 지적된다. 그는 생전에 단편집 《병풍에 그린 닭이》·《별을 헨다》 외에 한권의 수필집 《상아탑 象牙塔》 등을 남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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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계용묵 묘비 앞뒷면 모습 |
계용묵의 묘소에는 1962년 8월 9일 現代文學社와 文友 일동이 세운 묘비가 쓸쓸히 세워져 있으며, 후손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나 어찌된 일인지 전혀 관리되지 못하고 있었다. 묘비에는 “중요 작품으로 백치아다다, 屛風에 그린 닭이, 별을 헨다 이 밖에 60여편을 남겼다.”라는 문구와 함께 유족인 부인과 자녀, 손자, 손녀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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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는 현대문학사와 문우들이 세웠다고... |
▲ 작가 계용묵 묘지 관리 번호(105,383번) |
[황석영이 뽑은 한국 명단편](13) 계용묵 ‘별을 헨다’
입력 : 2012-03-02 19:52:45
ㆍ정처를 잃고 헤매다
외할아버지는 3·1운동 때는 지역 대표로, 일제말에는 신사참배 반대로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목사였고 개화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분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비롯한 자식들에게 신식교육을 받도록 했고 일곱 남매 중에 일본 유학을 했던 이가 넷이나 되었다. 그들 중에는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형제도 있었다. 큰이모는 학생운동 중 만주로 도피하여 항일연군에 들었다가 군복 차림으로 귀국했고, 넷째 이모는 메이지 법대를 나와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사람과 결혼했는데 그는 군간부였다. 일본 유학을 했던 막내 외삼촌도 북측 정부에 참여했다. |
망우리 공원 묘역 안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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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중랑구 망우동
지하철 7호선 상봉역 2번 출구로 나와서 구리 방향 버스를 타고 망우리 고개 조금 지난 정류장에서 내리게 됩니다.
지나온 고개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산으로 올라가는 도로가 있습니다.
이 도로를 따라서 쭉 올라가면 망우리 공원 묘지가 나옵니다.
※ 소설가 계용묵 묘는 하단의 안내도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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