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본 오늘 2-27
"우표에서 얻은 지식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많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2006 - 노무현 대통령, 정동영 의장등 與 지도부와 만찬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 등 새 지도부가 27일 청와대에서 만찬을 함께 했다. 2시간 30분가량의 이날 만찬은 주로 노 대통령이 얘기하고, 정 의장이 당의 의견을 전달하는 식으로 대화가 오갔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먼저 여당 새 지도부를 가리켜 “그동안 당이 활력이 없어 보였다. 차기에 대한 전망과 실질적 힘이 있는 분들이 전면에 배치되지 않아서 전망없는 정당으로 보인 측면이 있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정권의 대안이랄까, 구심이 돼 이끌어갈 분들이 전면에 포진한 게 우리당의 활력”이라며 “오늘 보니 임신해서 배가 불룩하고 건강한 부인을 본 것 같은 푸짐한 느낌이 든다”고도 했다. 노 대통령은 그간 여당이 제기한 정무수석 부활 문제에 대해선 다시 한 번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노 대통령은 “당·정·청(黨政靑) 소통에 큰 문제가 있다는데 동의하지 않는다”며 “이전에 정무수석이 있었지만 주로 원내전략에 대해 대통령 생각을 지시·전달하는 창구였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정무적 판단은 홍보수석과 비서실장이, 정책 문제는 정책실장이 당과 직접 협의하는 게 좋다”며 “정 무수석이 있다면 바로 갈 수 있는 길을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지방선거에 대해선 낙관적 전망이 나왔다. 정 의장이 “새 지도부 구성 이후 당 지지도가 높아지는 기미가 있다”고 하자, 노 대통령은“낙관적 태도로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노 대통령은 “앞으로 남은 2년간 양극화 해소와 자유무역협정(FTA) 문제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했다. 김한길 원내대표가 “민방위 교육을 8년에서 4년으로 줄이겠다”고 하자, 노 대통령은 “좋은 착상”이라고 했다. 조선
- Election of V. Putin as
President, 2000 May 7
2001 - 푸틴 러시아 대통령 방한, 한-러 정상회담 개최( ~28일)
지난 92년의 옐친대통령의 방한 이후 9년만에 푸틴 대통령이 방한했다. 경제적으로 볼 때 이번 푸틴 대통령의 방한은 최근 2~3년 동안 다소 부진했던 양국간 교역, 투자가 빠르게 정상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지난 97~98년에 발생한 양국의 경제,금융위기로 인해 양국의 교역은 현격한 감소를 경험했으나 러시아의 점진적인 경제성장과 이로인한 수입수요 회복으로 지난해 대러 수출은 3년만에 최초로 플러스 성장을 기록함으로써 다시금 대러 수출 붐이 일 수도 있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더욱이 최근 한반도 철도의 TSR(시베리아 횡단철도) 연결 프로젝트 사업이 양국간 최대 현안 프로젝트의 하나로 부상하고 있어 이번 푸틴 대통령의 방한은 양국간 교역확대는 물론 TSR 프로젝트 등 한러간 주요 투자 협력 프로젝트의 추진을 가속화함으로써 양국간 경제협력 수준을 한단계 발전시키는 획기적인 계기가 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도 크다.
지난 90년대초 들어 본격적인 한러 교역이 추진된 이래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러 수출은 연평균 상승률이 무려 50%에 이를 정도로 승승장구했으나, 우리나라의 IMF 경제위기, 그리고 98년의 러시아 금융위기로 인한 수입수요 격감으로 양국간 교역은 갑자기 50% 이하 수준으로 곤두박질했다.
교역시장으로서의 매력상실과 이로 인한 현지 진출 기업들의 철수, 그리고 업친데 덥친 격으로 외교관 맞추방 사태 등 여러 악재가 겹치게 되면서 지난 2~3년 동안 우리정부 및 기업인들의 대러 교역 및 투자진출에 대한 관심과 의지는 크게 떨어졌다.
이번에 방한한 푸틴 대통령은 방한시 구체적인 양국간 경협분야 및 증진 방안에 대한 중요한 협의 및 타결을 이끌어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남북한 종단 철도의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연결 프로젝트 가 핵심 논의사항이 될 것으로 보이며, 다음에는 시베리아 가스전 개발 프로젝트, 그리고 나호트카 한러 공단 건설 프로젝트 추진과 여타 시베리아, 극동 지역에 대한 투자 협력 프로젝트 추진을 가속화하는 여러 조치가 잇따를 가능성도 클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나라와 러시아는 지정학적으로 인접국이라는 특성과 상호보완적인 경제구조에 비해 지금까지의 양국간 교역 및 투자 규모는 아주 실망스러운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4따라서 경제 실용주의자로 불리우고 있는 푸틴 대통령의 이번 방한은 교역, 투자 등 여러 부문에서 양국간 실질적인 상호 협력과 프로젝트 추진을 이끌어내는 효과를 가져옴으로써 상호 관심과 이해도 제고는 물론 본격적인 양국간 경제 교류를 확대하는 신호탄이 될 가능성도 크다.
무엇보다도 양국 정상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상호 신뢰도를 높이는 계기가 됨으로써 양국간 한층 성숙한 경제협력 관계 구축에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보인다. KOTRA 2001-02-27 /Google
1993 - 김영삼 대통령 재산 공개
보다 근본적인 변화는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일어났다. 32년만에 군사정권의 종지부를 찍고 ‘문민(文民) 정부’를 출범시킨 김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개혁의 첫째 과제가 부정부패 척결”이라고 단호히 천명했다.
그 말을 입증하려는 듯 2월 27일 재산공개 선언, 3월 4일 정치자금 수수거부 선언 등을 했다. 정국은 일거에 재산공개 파문에 빠졌다. 4월 들면서부터 감사원·검찰 등 사정기관을 동원한 ‘성역없는 사정(司正) 작업’이 착수됐다.
이어 건국 후 무풍 지대였던 군(軍)의 고질적인 인사비리와 율곡사업(군전력 현대화사업) 비리도 파헤쳐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회의장·장관·참모총장·검사장 등 이 사회 기라성 같은 실세들이 감옥에 가거나 옷을 벗었다. 이런 조치는 군사 정권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고삐는 늦춰지지 않았다. 드디어 그 해 8월 12일에는 ‘단군 이래 최대 개혁’으로 일컬어지는 금융실명제(金融實名制)가 전격 도입됐다. 이 제도는 결국 2년 뒤 진가를 발휘했다. 소위 노태우(盧泰愚)·전두환(全斗煥) 비자금 사건이 드러나 헌정 사상 초유로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시켰다. (아시아경제)
1991 - 쿠웨이트 탈환, 걸프전 종료
1991년 오늘!
미군과 영국군 등 다국적군이 쿠웨이트를 탈환했다.
이라크군은 쿠웨이트의 유전을 파괴하고 불을 지른 뒤 퇴각했다.
이로써 한 달 열흘 전 다국적군의 공습으로 시작된 걸프전쟁이 막을 내렸다.
1990년 8월 초 이라크군에 침공당한 쿠웨이트는 거의 7개월 만에 해방의 감격을 맞게 됐다.
다국적군은 1월 17일부터 10만회 이상 출격해 공중폭격을 퍼부음으로써 이라크의 도로, 항만, 군수시설 등을 파괴했다.
사흘 전인 24일부터는 2차 대전 이후 최대의 전면지상전을 개시해 이라크 42개 사단 가운데 41개 사단을 궤멸시켰다.
부시 대통령은 27일 밤 9시 백악관에서 쿠웨이트 해방과 종전을 발표했다.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도 이라크군에게 전투를 중지할 것을 명령하고 다국적군 포로 석방 등 유엔 안보리의 12개 결의안을 모두 수락한다고 밝혔다. 걸프전에서 이라크병사와 민간인 등 이라크인 15만여 명이 사망했고
다국적군의 인명피해는 사망 126명, 실종 56명으로 집계됐다. YTN
1990 - 울진 원자력발전소 1,2호기 준공
울진원자력발전소 - 울진 1, 2호기는 가압경수로형으로, 1982년 10월에 기공식을, 1990년 2월에 준공식을 가졌다.
핵증기공급계통은 프랑스의 프라마톰사가 공급했고, 터빈 발전기계통은 프랑스의 알스톰사가 공급했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프랑스와 원전기술교류를 하게 되어 국내 원전의 표준화에 기여했다.
국산화율이 영광 1, 2호기의 34.9%에서 40.15%로 대폭 향상되었다. /국가기록포털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0108
1990 - 소련최고회의, 고르비에 막강권력 부여 미국식 대통령제 승인
고르바초프(Gorbachyov, Mikhail, 1931~ )는 1980년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어 권력의 핵심권에 접근, Y.V.안드로포프가 집권하자 그의 후계자로 지목되었고, K.U.체르넨코의 집권기간 중에도 제2인자의 위치를 굳혔다. 1985년 3월 체르넨코의 사망으로 당서기장에 선출되자,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추진하여 소련 국내에서의 개혁과 개방뿐만 아니라, 동유럽의 민주화 개혁 등 세계질서에도 큰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1988년 연방최고회의 간부회의장을 겸하고, 1990년 3월 소련 최초의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naver
1968 - 브라질 리우 카니발 개막
1968년 오늘 !
세계 3대 미항의 하나인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
해마다 열리는 세계최대의 축제 리우카니발이 개막됩니다.
나흘 동안 계속되는 화려하고 정열적인 리우축제에는 모든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삼바리듬에 몸을 맡깁니다.
세계각지에서 몰려든 수십만명의 관광객도 축제 분위기에 젖습니다.
거리에는 가장행렬과 춤 콩쿠르가 펼쳐지고 고급클럽에서는 가장 무도회가 펼쳐집니다. /이충석
1953 - 정부, 독도영유권 성명
1945년 한국의 광복과 함께 독도는 한국 영토로 귀속되었고, 따라서 1952년 1월 18일에 포고된 '인접해양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에서 한국 정부는 독도를 포함한 한국 영토의 한계를 명백히 하였고, 또 1954년 8월 독도에 등대를 세워 세계 각국에 통고하는 한편 독도 주변 영해 내의 수자원을 확보하였다. 이와 같은 한국 정부의 조치에 대하여 일본이 1952년 1월 28일 한국에 항의하며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옴으로써 독도문제가 일어났다. /naver
1939 - 러시아의 혁명가, 교육학자 크룹스카야(Krupskaya, Nadezhda) 사망
크룹스카야 [Krupskaya, Nadezhda Konstantinovna, 1869.2.26~1939.2.27]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의 부인 크룹스카야가 1939년 2월 27일 눈을 감았다. 남편 레닌이 세상을 뜬지 15년 뒤였다. 구소련의 신과도 같은 존재였던 레닌이 세차례나 뇌졸증으로 쓰러졌을 때마다 그의 병상을 지킨 이가 다름아닌 바로 그녀였다. 레닌은 혁명가답게 사랑에 있어서도 시원시원하고 단도직입적이었다. 그녀를 향한 사랑이 그랬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으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녀는 여자 전문학교 재학 중에 마르크스주의 혁명운동에 참가했다가 퇴학을 당한다. 그후 성인의 야간 일요학교에서 노동자 교육활동에 종사하다가 1896년 체포돼 레닌과 함께 시베리아로 유배된 후 유형지에서 식을 올렸다. 유배와 망명생활 끝에 1917년 러시아로 돌아온 그녀는 11월혁명 이후 교육인민위원부에서 소련 교육정책의 기초를 마련,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한 교육의 이론화와 실천에 힘썼다.
그러던 1922년 5월 레닌이 뇌졸증 증세로 쓰러졌다. 그의 첫번째 건강에의 적신호였다. 그녀는 기꺼이 그의 손과 발이 되어주었다. 왼손으로 글씨 쓰는 법과 한 마디씩 끊어서 또렷하게 발음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결국 그녀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레닌은 제4회 코민테른 회의장에 나타나 무사히 연설을 마친다. 레닌을 죽음에 이르게 한 세번째 뇌졸증이 발작을 일으키기 며칠 전, 그가 스탈린에게 보낸 서신에 이렇게 적혀있었다고 한다. “나의 부인을 모욕한 것에 대해 즉시 사과하지 않으면 당신과의 모든 관계를 끊겠다” 고... /조선
1964 -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수상, 미국과 화해용의 표명
1954년의 저우언라이[周恩來]-네루의 ‘평화 5원칙’은 평화공존을 현대 국제관계의 한 원칙으로서 정식화하였다. 1960년대에는 미·소간의 냉전도 긴장완화로 향하게 되자 평화공존의 관념은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러한 평화공존의 관념은 침략의 부정, 내정불간섭, 주권존중 등과 결합되어 있는 데 실제로는 대국에 대한 협조외교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naver
1849년 9월 26일 랴잔에서 출생하였다. 1879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 의학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육군 군의학교의 내과연구실에서 심장의 신경지배를 주로 연구하였다. 1884년부터 2년간 라이프치히대학교와 브레슬라우대학교에 유학하고 귀국한 후, 육군 군의학교에서 소화의 생리학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1890년 약리학 교수가 되었으며, 1891년 실험의학 연구소의 생리학 주임이 되었다. 여기서는 소화샘의 실험생리학적 연구를 15년간 계속하였다. 그는 외과수술을 장기로 하고 있었으므로, 가능한 정상상태로 동물실험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새로운 실험법을 창안해 냈다. 특히 소화에 관한 연구에서는 소위법(小胃法)·췌영구루법(膵永久瘻法)·위사양법(僞飼養法)을 고안하고, 소화액의 분비메커니즘을 실험적으로 밝혀 냈다. 특히 신경지배의 연구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일련의 연구의 업적을 인정받아 1904년 노벨생리 ·의학상을 수상하였다.
이 소화샘을 연구하는 사이에, 침은 단지 음식을 먹거나 시큼한 것을 입에 넣었을 때에만 분비되는 것이 아니라, 실험용의 개가 주인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침을 분비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은 대뇌의 작용에 의한 것임을 통찰하였다. 그 후 실험적으로 연구를 진행하여 대뇌의 고차적인 작용이 침을 분비시키는 것으로 보아 동물에 대해서도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것이 바로 ‘조건반사(條件反射)’로서 뇌의 작용에 대해서도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연구할 수 있음을 제시해 준 것이다. 조건반사의 연구는 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의 코르투시에 있는 파블로프생리학 연구소에서 30년간 계속되었으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주요저서에 《대뇌 양 반구의 작용에 관한 강의》(1927), 《조건반사학 강의》(1928), 《조건반사 연구의 20년》(1932) 등이 있다. /naver
1933 - 나치, 베를린 제국의회 의사당 방화
1933년 2월 27일 밤 베를린에 있는 제국의회 의사당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1933년 1월 독일공화국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지명했다. 히틀러는 취임 후 국가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나치당 세력을 확립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는데, 나치당이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내각의 동의를 얻어 새로운 선거를 치러야만 했다. 이와 관련해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카를 에른스트가 이끄는 10명의 행동대원을 의사당으로 침투시켜 방화를 저지르고 그 책임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돌릴 것을 계획했다. 방화 배경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지만 히틀러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법령을 제정함으로써 독재정치의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수권법(授權法)을 통과시켜 의회와 대통령에 구애받지 않는 나치당 정권의 독자적인 법령 선포를 가능하게 했다. 1933년 7월 히틀러의 주도하에 보수파와 군부의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한 제3제국 정부는 나치당을 독일 내 유일정당으로 선포했다. /브리태니커
1932 - 미국의 영화배우 테일러(Taylor, Elizabeth) 출생
테일러 [Taylor, Elizabeth (Rosemond), 1932.2.27~ ]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0세 때 영화 《귀로(歸路)》에 첫 출연하였고, 소녀시절 《녹원(綠園)의 천사》《신부의 아버지 Father of the Bride》(1950) 등을 거쳐 《젊은이의 양지(陽地) A Place in the Sun》(1951)에서부터 수려한 미모와 연기력이 돋보여 《자이언트 Giant》(1956), 《클레오파트라 Cleopatra》(1963) 등에 출연하였다. 《버터필드 8 Butterfield 8》(1960),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Who’s Afraid of Virginia Woolf?》(1966)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naver
온타리오주 윈저 출생. 존스홉킨스대학교 등에서 연구하고, 1959년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옮겨 뇌의 표피(表皮)가 눈의 망막으로부터 전달되는 정보를 분석하는 메커니즘을 연구하였다. 이 연구로 R.W.스페리, 스웨덴의 T.N.비셀과 공동으로 1981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naver
호 수화(樹話). 전남 신안 출생. 1936년 니혼[日本]대학 미술과를 졸업하고, 1940년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아방가르드 연구소를 조직하는 한편 이과회(二科會)와 자유전(自由展) 등에 출품, 신미술(新美術:아르누보) 운동에 참여하였고, 8 ·15광복 후에는 신사실파(新寫實派)를 조직,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65년 이후 미국에 정착하여 작품활동을 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구체적인 이미지 대신 연속적인 사각 공간 속에 점묘(點描)를 배열하였으며, 한국 근대회화의 추상적 방향을 여는 데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초기 수업시대는 미술학교 재학시와 연구과 시절, 귀국하기까지의 몇 년 간으로 볼 수 있는데, 이과회 ·백만회(白蠻會)를 조직하여 당시 일본 신감각파 대열에서 활발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광복 이후부터 프랑스로 건너가기까지의 청년시절은 한국적 모티프 발견으로 일관했다고 할 수 있다. 운학(雲鶴) ·달 ·산 ·나목(裸木) ·꽃 ·여인을 통해 한국적 풍류의 정서를 표출하려는 것이 이 시기의 지배적 경향이다. 한국적 모티프에 대한 탐닉은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1959년 귀국하기까지의 파리시절에서도 농도를 더하였다. 약 10년간 미국에 있을 때에는 외견상 지금까지의 경향에 비해 많이 변모하였는데, 우선 모티프 해소, 순화된 색감, 공간의 심화와 확대라는 특징으로 묶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실지로 작품상에는 어떠한 변모도 초래하지 않았으며, 작가 내면의 발전으로 여과시킨 심화현상일 뿐이다. 대표작으로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론도》《해와 달》 등이 있다. 한편 그의 예술정신을 기리는 환기미술관이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세워져 1992년 개관되었다. 안좌면(安佐面) 읍동리(邑洞里)의 그의 생가는 지방기념물 제146호로 지정되었다. /naver
1907 - 미국의 재즈 가수 베일리(Bailey, Mildred) 출생
베일리 [Bailey, Mildred, 1907.2.27~1951.12.12]
1902 - 미국의 소설가 스타인벡(Steinbeck, John) 출생
스타인벡 [Steinbeck, John, 1902.2.27~1968.12.20]
스타인벡은 미국의 대공황을 배경으로 농지를 잃고 캘리포니아로 이주해온 빈농들의 참담한 생활상을 그려낸 소설 <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1939)로 큰 명성을 얻은 소설가이다. 그밖에 캘리포니아의 한 농부와 두 아들 사이의 도덕적 관계를 다룬 작품 <에덴의 동쪽 East of Eden>(1952)이 1955년 영화화(제임스 딘 주연)되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크게 목가적 작품, 사회비판적 작품, 해학이 풍부한 작품으로 구분되는데, 그의 명성은 주로 프롤레타리아를 다룬 1930년대의 자연주의 소설들에서 비롯되었다. 196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브리태니커
"작가의 오랜 임무는 바뀌지 않았다. 작가는 모름지기 개선을 목적으로 우리의 많은 중대한 과실과 잘못들, 그리고 어둡고 위험한 꿈들을 드러낼 의무가 있다."
- 존 스타인벡
1899 - 캐나다의 생리학자 베스트(Best, Charles H.) 출생
1888 - 독일 출생의 미국 소프라노 가수 레만(Lehmann, Lotte) 출생
1886 - 미국의 변호사, 정치가, 연방대법원 판사 블랙(Black, Hugo L.) 출생
1881 - 아이슬란드의 정치가, 외교관 비외손(Bjornsson, Sveinn) 출생
1873 - 이탈리아 테너 가수 카루소(Caruso, Enrico) 출생
1869 - 미국의 병리학자 해밀턴(Hamilton, Alice) 출생
1846 - 독일의 역사가, 문예평론가, 사회주의자 메링(Mehring, Franz) 출생
1807 - 미국의 시인 롱펠로(Longfellow, Henry Wadsworth) 출생
1622 - 네덜란드의 화가 파브리티우스(Fabritius, Carel)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