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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호가 가까운,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바닷가를 찾아갔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커피 하우스 '스위트 번스'. 원두커피 1.0, 아메리카노 1. 5 카페 라테 2.5 등등. 관광지 전망 좋은 곳의 카페라서 커피값 한 번 대단하다 하면서 원두커피 시켰더니, 회장님 왈, 좀 더 비싼 것으로, 그래서 아메리카노를 시켰습니다.
그런데......계산할 때 보니 원두커피 1천원, 아메리카노 1천 5백원 등등...... 차 한잔에 보통 5천원 씩은 넘지 않나요, 우리 고향 동네 카페에서도 그러한데....... 그런데 그 1/10의 가격이라니.........
바닷가로 나갔습니다.
머리카락 바람에 날리며 '해변의 여인'이 되어 보았습니다.
해당화 곱게 핀 바닷가에서 붉은 머플러를 목에 맨 여인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최고의 여성시인 허난설헌과 그의 아우 허균 기념 공원을 찾아갔습니다.
허난설헌(1563~1589)은 초희, 경번으로도 불렸습니다. 아버지인 초당 허엽( 許曄 1517~1580)은 동인의 영수로 30 여 년간 관직생활을 한 청백리였습니다. 남편 김성립은 안동 김씨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난설헌과는 여러 면에서 서로 맞지 않았습니다. 허엽은 4남매를 두었는데 허성( 許筬1548~1612), 허봉( 許篈1551~1588),) 허난설헌 (許蘭雪軒 1563~1589), 허균(許筠 1569~1618)이 이들입니다. 이들 중 허성은 전실의 아들이고 허봉 이하 삼남매는 후실의 소생입니다. 허엽을 필두로 그의 4남매는 모두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난설헌은 이미 8세 때 <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8살난 계집아이는 시 속에서 봉황을 타고 궁궐로 들어가고 옥룡을 만나 희롱하며 서왕모를 만나 수작합니다. 봉황새, 난새, 서왕모는 모두 신화 전설 속의 존재들입니다.
난설헌은 15세때 김성립에게 시집갔습니다. 처음에는 새댁으로서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반달 노리개>
곱게 다듬은 황금으로 만든 /반달 노리개는
시집 올 때 시부모님이 주신 거라서 /다홍치마에 달아 두었지요.//
오늘 길 떠나시는 님에게 드리오니/먼 길에 정표로 달아 주세요
길가에 버리셔도 아깝지 않지만/새 여인에게는 달아주지 마세요
그러나 그녀의 시집살이는 녹녹치 않았습니다. 난설헌은 남매를 낳았으나 모두 어려서 사망하고 뱃속에 든 아기마저도 죽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27세에 요절하며 자신이 쓴 시작품들을 모두 불살라 달라고 했습니다만, 누나의 높은 문학적 재능을 알고 있는 아우 허균이 유작 가운데 200여편을 보관, 이것을 명나라 장수 오명제에게 주었고 난설헌의 작품은 곧 중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도 난설헌의 작품을 널리 애독되었다고 하며 현재 213수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다음은 허균이 그의 부친 허엽, 백형 허성, 중형 허봉, 누나 난설헌, 그리고 허균 자신에 대해 평한 것입니다.
양천 허씨 가계도입니다.
허난설헌 허균 문학공원의 중심지대에 있는 허난설헌의 좌상입니다.
아래 왼쪽은 난설헌 좌상 앞에 있는, 난설헌이 자식들을 잃고서 쓴 시입니다. 오른쪽에 있는 것은 '허씨 5문장가'들이 고향마을을 소재로 하여 쓴 시비(詩碑) 입니다.
허난설헌이 살던 400여년 전의 고택터, 우리가 가서 본 것은 1910대 초계정씨 후손인 정호경의 가옥을 증축 보수한 것으로 사실상 허난설헌 고택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그 집터가 허난설헌이 살았던 집터일 뿐입니다. 정호경의 가옥도 증축과 보수를 통해서 본 모습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난설헌 생가터의 어느 한구석에 지어진 정호경 고택, 수학여행온 고교생들, 이 집을 난설헌이 살던 집이라고 오해하지나 않을지요........그래도 앞뒷마당에 '꽃나무'들을 많이 심어서 보기에 좋았습니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허난설헌은 가고, 그의 시문은 남아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푸른 하늘 아래 하얗고 탐스러운 불두화 와 여린 꽃잎을 활짝 터뜨린 작약
400 여년 전에 연꽃 되어 떠난 난설헌, 사람은 갔어도 그의 시문은 남아 오늘도 가슴을 저리게 합니다.
난설헌의 <채련곡>을 소개합니다.
<채련곡>
가을날 깨끗한 긴 호수는 푸른 옥이 흐르는 듯
연꽃 수북한 곳에 작은 배를 매어두었네
임을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
남에게 들켜 반나절 동안 부끄러웠네
한양이 까마득해 애가 타는 나에게
두 마리 잉어에 소식을 넣어 한강 가에 전해왔어요
꾀꼬리는 새벽부터 울고 시름 속에 비까지 내려는데
푸르러지는 버들은 봄볕 속에 하늘거려요
섬돌가에 푸른 풀이 엉켜 자라고
처량해라 거문고에 보얀 먼지 쓰고 있어요
그 누가 작은배 타고 오는 이를 기다리랴
광릉나루에는 마름꽃만 새하얗게 피어 있어요.
우리들이 살아가는 날들 가운데 오늘이,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운 때, 바로 그 절정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는 두 여인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마음속 감동의 물결을 언어로 바꾸어 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문우들, 우리는 모두 난설헌의 후예입니다.
<봄날의 초당>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길목
선들바람과 따가운 햇살로
담금질 하는 날씨
꽃망울들 움추리고 벙글기
그 몇 번
바닷가 초당 마을
바람에 두릿거리는 소나무
담장 안에는
불두화 탐스럽고
작약이 벙글다
서왕모와 수작하던 선녀
하계로 내려와
서러운 삶 시로 토해내더니
그 마저 불살라 버리라고...
초당의 솔밭 떠올렸을까
‘許氏五文章家’* 중에서도 으뜸이었던 허난설헌
달빛 따라 떠났지만
문장은 남아
사람들, 작약화 불두화 보며
귀 기울인다.
* 허엽, 그의 아들 허봉, 허성, 허균, 딸인 난설헌까지 모두 5인은 뛰어난 문장가로 '허씨오문장가'로 불리었다.
안녕,
오월 어느 하루,
강릉 초당에서 만났던 아름다운 빛과 향기들이여
가슴으로 파고드는 난설헌의 그윽한 詩文들이여
아쉬움 남기고 솔밭 우거진 초당, 작약이 곱게 핀 초당을 떠났습니다(14:31 출발). 전용버스에 올라 속초 방면으로 가면서 흔들리다 보니 잠이 들었고, 문득 깨어나 보니 미시령으로 오르는 길, 울산바위가 코앞에 보였습니다. 언제 보아도 울산바위는 우람하고 참 잘 생겼습니다.
먼저 만해마을에 있는 만해 문학박물관을 찾아갔습니다.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승려이며 시인, 그리고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속명은 정옥, 법호는 만해, 용운은 법명으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1925년 8월 29일에 인제 백담사에서 시집 <<님의 침묵>>을 탈고, 다음해에 회동서관에서 시집을 출간하였습니다.
1920년대 우리 시단을 이끌어간 대표적인 두 시인으로 김소월과 한용운을 꼽고 있습니다. 김소월이 여성적인 톤으로 부재하는 님을 노래하는 애상적인 시세계를 펼쳤다면 한용운은 여성적인 톤이기는 하되 이별한 님을 기다리는 형이상학적인 시세계를 펼쳐나갔습니다.
<<님의 침묵>>의 구성은 앞에 '군말'과 뒤에 '독자에게' 그리고 본시 88편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88편의 시는 이별의 시편, 슬픔과 고통의 시편, 희망으로의 전화, 만남 이라는 전개과정을 보여줍니다.
시 <님의 침묵>은 시집 <<님의 침묵>>에서 제 1번에 해당하는, 이른 바 서시입니다.
제1시
<님의 침묵>
님은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갔습니다.
황금(黃金)의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제 88시
<사랑의 끝판>
네 네 가요 지금 곧 가요.
에그 등불을 켜랴다가 초를 거꾸로 꽂었습니다 그려. 저를 어쩌나 저 사람들이 숭보겄네.
님이여 나는 이렇게 바쁩니다. 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꾸짖습니다. 에그 저것 좀 보아.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하시네.
내가 님의 꾸지람을 듣기로 무엇이 싫겠습니까. 다만 님의 고문고줄이 완급을 잃을까 저퍼헙니다.
님이여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릅나무 그늘을 지어버리는 것이 달빛이 아니라 새는 빛입니다.
홰를 탄 닭은 날개를 움직입니다.
마구에 매인 말은 굽을 칩니다.
네 네 가요. 이제 곧 가요.
한용운 선사의 글씨입니다.
<<님의 침묵>>초간본 만해선사 입상
1919년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 한용운 선사가 읽었습니다.
3.1 만세운동 사건으로 만해선생은 3년여 투옥살이를 했습니다. 아래에 수형자 사진입니다.
한용운 문학박물관 바깥 정경
북, 종, 목어와 운판
박인환 문학관을 찾아갔습니다.
박인환(1926~1956)은 인제 출신으로 서울 덕수공립소학교 졸업,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41년 자퇴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그 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8·15광복으로 학업을 중단, 서울로 와서 서점 마리서사(茉莉書肆)를 경영하면서 김광균(金光均)·이한직(李漢稷)·김수영(金洙暎)·김경린(金璟麟)·오장환(吳章煥) 등과 친교를 맺었습니다.
1948년 이후, 자유신문사, 이듬해에 경향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근무, 같은 해에 김병욱(金秉旭)·김경린 등과 동인지 『신시론(新詩論)』을 발간하였으며, 1950년에는 김차영(金次榮)·김규동(金奎東)·이봉래(李奉來) 등과 피난지 부산에서 동인 ‘후반기(後半紀)’를 결성하여 모더니즘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박인환의 시작 활동은 1946년에 시 「거리」를 『국제신보(國際新報)』에 발표하면서부터 시작, 1948년에는 시 「지하실(地下室)」을 『민성(民聲)』에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하였습니다.
박인환은 1950년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도시문명의 우울과 불안을 감상적인 시풍으로 노래했고 1955년에 발간된 『박인환선시집』에 그의 시작품이 망라, 「목마와 숙녀」는 우울과 고독 등 도시적 서정과 시대적 고뇌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1956년 작고 1주일 전에 쓰여진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지금까지도 애창되고 있습니다.
서른한 살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시인, 구멍 뚫린 가슴, 텅 빈 가슴, 그러나 일면 참으로 관능적인 시인의 가슴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죽은 아포롱> 1956.3.17. 동아일보에 게재
당신은 나에게
환상과 흥분과
열병과 착각을 알려주고
그 빈사의 구렁텅이에서
우리 문학에
따뜻한 손을 빌려 준
정신의 황제
(......시인이며 소설가이고 수필가인 李箱에게 바친 시, 박인환 죽기 3일전 발표된 시)
*아포롱은 '아폴론'의 일본식 발음으로 사료됨
유명옥은 시인 김수영의 모친이 운영하던 빈대떡집 위스키 시음장 '포엠'
<검은 神(신)이여>
저 묘지에서 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저 파괴된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검은 바다에서 연기처럼 꺼진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내부에서 사멸된 것은 무엇입니까.
一年(일년)이 끝나고 그 다음에 시작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쟁이 뺏아간 나의 친우는 어데서 만날 수 있읍니까.
슬픔 대신에 나에게 죽음을 주시오.
인간을 대신하여 세상을 風雪(풍설)로 뒤덮어 주시오.
건물과 창백한 묘지 있던 자리에
꽃이 피지 않도록
하루의 一年(일년)의 전쟁의 처참한 추억은
검은 神(신)이여
그것은 당신의 주제일 것입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박인환 시인이 있고, 그 아래 그대가 있고.......
주점 은성은 탈렌트 최불암씨 어머니가 운영하던 곳이라지요.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 목마와 숙녀-에서 한 대목
술은 여럿이 마셔도 좋고, 혼자 마셔도 좋고.......
한 잔 드시지요~ 주점 은성에서는 '막걸리'를 '막걸이'라고 했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떠나야 한다 한 잔 드세그녀, 또 한 잔 드세그녀, 꽃꺾어 산하면서 .......
'하루가 저믈면 밤이 오듯이', 우리들의 문학기행도 마쳐야 할 때
석양녘의 태양빛이 가장 곱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 다 함께 주어진 날들, 아름답게 살아갑시다.
서울에서 강릉으로, 인제로,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
돌아갈 곳이 있기에 더욱 감사로운 날들
만나야 할 사람들, 기다려주는 이들 있기에 우리는 웃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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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와
정리 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교수님,
이렇게 자세하게
글과 사진을 올리시느라
너무 수고 많으셨네요.
그날의 추억을 다시
들추어 봅니다.
오래도록 남길 글과 사진을 정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래도록 남길 글과 사진을 정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교수님
덕분에 다시 다녀온 듯 그 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두고 두고 꺼내 보며 그리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