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성경적 실천의 현장과 클레로스(212) – 사도들의 실천과 클레로스(191) – 갈라디아서 강론(2)
갈라디아서 강론(2) – 2장
유대교는 모세 오경의 성서를 기반해서 만들어진 종교가 아니고 미쉬나를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 종교이다
탈무드는 유대교 경전으로서 장로들의 전통인 미쉬나와, 미쉬나에 대한 랍비들의 주석인 게마라로 이루어져 있다.(A4 size x 5,600 page) 장로들의 전통인 미쉬나는 모세의 토라 해석의 전승이라는 구전 율법이다. 사도 바울이 받았던 교육도 사실은 미쉬나 교육, 즉 탈무드 교육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랍비들이 전승해 온 가르침인 미쉬나를 집대성해서 탈무드라고 나중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따라서 유대교라는 종교는 모세 오경이나 선지서 등의 구약 성서를 기반한 것이 아니라 미쉬나를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 종교이며, 사람의 계명에 의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복음은 미쉬나가 아니다.(1:11-12) 그리고 예수님의 지적이나 사도 바울의 지적, 그리고 예수님이 전하는 길과 사도 바울의 증언은 미쉬나 와는 다른 복음인 것이다.
전에 사도 바울은 모세 오경과 선지서가 아닌 조상들의 전통(미쉬나)에 열심을 낸 것이다.(1:13-14) 그러나 지금의 사도 바울은 구약 성경에 예언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처음 만나서 15일 동안 함께 있었던 이유도 구약 성경에 예언되었고 자기에게 일어났던 성령의 역사와 변화, 그리고 능력과 권세가 베드로의 체험과 일치하는지,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였던 것이다.
몰래 들어온 거짓 형제들의 정체
그리고 14년 후에 사도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행15:1-4) 에클레시아가 사도 바울을 보냈지만 사도 바울도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로기온을 받고 올라간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을 사도들에게 알리고, 사도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혹시 문제점이 있으면 사도들에게서 지적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고집이나 권위 같은 것은 사도 바울과 다른 사도들에게는 없었다. 그리고 함께 간 헬라인 디도 또한 할례를 강요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행15:5-20)
사도바울이 처음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공의회에서는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는다는 베드로의 증언과,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말고 네 가지만 지키게 하자는 야고보 사도의 결정이 있었다.(행15:5-20)
그러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유대인들의 혈통적, 민족적 정체성은 미쉬나를 지키는 것이었다. 진리의 문제는 구약 성경에 있는 복음, 즉 아브라함 언약과 예레미아 언약인데, 유대교는 그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사도 공동체는 진리가 온 것이고, 유대인 공동체에게는 민족적 정통성으로 미쉬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도들의 복음과 전혀 다른 것이다. 미쉬나는 복음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미쉬나는 혈통적 관습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포지션은 율법에서 복음으로의 구도가 아니라, 진정한 율법과 미쉬나가 충돌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할례나 무할례를 가지고는 논쟁할 것이 없고, 진리와는 무관하다고 선언했던 것이다.(6:15)
사도 바울이 다른 복음(미쉬나)을 전하는 자들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이유도 종교주의의 유혹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종교주의의 유혹에 빠지면 마음에 할례를 위한 회개와 간구를 안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안디옥 에클레시아를 당으로 쪼개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광분했던 것이다.
이는 조상들의 전통인 미쉬나를 지키고자 하면서 종교주의로 유혹을 하는 거짓 형제들이 안디옥의 에클레시아에 찾아왔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저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소유한 자유(미쉬나로부터의 자유, 세상 원리로 부터의 자유)를 정탐하고, 우리를 노예(미쉬나의 노예, 유대교라는 종교 놀이의 노예)로 삼으려고 몰래 들어온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한 순간도 저들에게 복종하지 않은 것은 복음의 진리가 안디옥 에클레시아 가운데 항상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예루살렘의 명성이 높은 자들은 사도 바울이 무할례자를 위해 복음 전파를 맡게 된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를 위해 맡게 된 것과 같음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셔서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분이 또한 사도 바울에게 역사하셔서 사도 바울을 이방인들의 사도로 삼으신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도 사도 바울과 바나바에게 교제의 오른손을 내밀었고, 우리는 이방인들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향하기로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들로 비롯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부터 비롯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형제들에게 안디옥에서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 그가 비판 받을 행동을 하기에 자기가 그 앞에서 반발했던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야고보에게서 온 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그들이 도착하자 움츠러들어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하며 자리를 떠났다는 것이다. 그러자 다른 유대인들도 함께 위선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고, 바나바조차도 그 위선에 함께 이끌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올바르게 행하지 않음을 보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에게, “그대가 조금 전까지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처럼 살고 유대인처럼 살지 않더니, 이제는 어찌하여 이방인들을 유대인처럼 살라고 강요하는 것입니까”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원래 율법에는 이방인들과 식사하지 말라는 조항이 없다. 그러나 계명이 늘어나면서 그들은 미쉬나를 따라 행한 것이다. 하나님이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가려 놓았으니, 이방인들과는 식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미쉬나가 생긴 것이다.
베드로에게 미쉬나의 전통을 깨뜨려 버리시고 복음 안에 안착하게 해 주신 것이 베드로가 본 보자기 환상의 의미였을 텐데, 미쉬나에서 해방된 그대가 왜 반대로 행동을 하느냐고 사도 바울은 지적했던 것이다. 어린 자들의 본이 사도들인데, 왜 이방인을 유대인처럼 살라고 강요하느냐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보면(21장), 미쉬나에 열심인 수만 명이 사도 바울을 헤칠 줄 모르니, 대책을 강구하자고 야고보가 권하고 있다. 사도 바울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 형제들을 타이르거나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야고보에게 서운해 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당시 사도 바울과 다른 사도들은 지도자가 아니었다. 어린 형제를 제어할 권위나 권력이 없었으며 너희는 다 형제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그 말씀(마23:8-10) 그대로 삶이 된 자들이었다. 누구를 통제하거나 명령할 수 없었다.)
베드로는 왜 그런 판단을 했을까? 베드로에게는 유대인 출신의 어린 형제들이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 이방인 출신 형제들이 목숨처럼 소중한 것처럼, 베드로 사도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 출신 어린 형제들이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이유는, 미쉬나와 진리가 충돌할 이유가 없는데, 그 현장에서는 오류가 발생해서 충돌했기 때문이다.
그 어린 유대인 출신 형제들이 시비를 걸 수도 있지만, 미쉬나를 고집하는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왜 그런 기회를 놓치냐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우리는 유대인으로 태어났고, 이방 죄인들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지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들로 비롯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신뢰를 가져온 것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들이 아닌,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부터 비롯되어 의롭게 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모든 인간의 본성은 율법의 행위들로부터 비롯되어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가 이방인들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헐어버렸던 것을 다시 세우는 것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명을 어긴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은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함이며, 나는 그리스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더 이상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며,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살고 있는 이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신심하심 안에서 사는 삶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자기는 하나님의 그 은혜를 버릴 수가 없는데, 만약 사람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되고 만다고 베드로 사도에게 설명하고 있다.
이런 설명을 지금 미쉬나의 유혹에 빠진 갈라디아 형제들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들은 미쉬나와 진리 사이에 서 있는 것이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정진호 집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