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에 관한 시모음 24)
꽃자리 /구 상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꽃 /김수영 (1921~1968)
정말 내 이름을 부르지 마시고
나를 찾지 마세요
모-든 작의(作意)와 의지가 수포로 돌아가는 속에 나는 삽니다
나의 허탈하고 황막한 생활에도 한 떨기 꽃이 있다면
어머니
나에게도 정말 꽃이 있습니까
손을 대어서는 아니되는 꽃
결코 아무나 손을 대어서는 아니되는
이 꽃
확실한 현실이여
내가 대결하고 있는 것은 나의 그림자
인생의 해탈을 하지 못하고도
맑게만 살려는 데에 나의 오해와
비극과 희극과
타락 이상의 질식이 있습니다
꽃 아닌 꽃이여
잔혹한 진행이여
벌써 나의 고장이 없어진 지 오래인
내가 다시 내 고장을 찾아야 할 때
나의 이성(理性)은 나의 피부와도 같은 것입니다
이름을 버리고 몸을 떠난 지
오래인 나의 흔적을 다시는 찾지 마세요
이즈러진 진리여,
어머니시여.
꽃이 아름다운 것은 /신성호
무수히 지나가는 시간속에
풍수의 짖궂은 장난에도 굴하지 않고
싹이나고 잎이나고 꽃뭉우리를 맺고서야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으니
정녕 너는 아름답고 사랑받는 것들 중에
가장 기뻐하고 미소짓고 좋아라 하는것이
그냥 쳐다봐도 무심히 향기에 취해봐도
너만큼 마음을 끌어안는 것이 없으니
세상에서 모든사람들이 너를 닮기를
너처럼 사랑받기를 애원하지 않아도
하나같이 너를 찾는 것이 참 좋구나
꽃이 피었다고 너무나 자만하지 말고
향기가 좋다고 건방지지 않아야 함은
꽃잎은 언젠가 반드시 떨어져 없어지면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음을 항상 기억할지라
피는 꽃 /서정주
사발에 냉수도
부셔 버리고
빈 그릇만 남겨요.
아주 엷은 구름하고도 이별 해 버려요.
햇볕에 새 붉은 꽃 피어 나지만
이것은 그저 한낱 당신 눈의 그늘일 뿐,
두번짼가 세번째로 접히는 그늘일뿐,
당신 눈의 작디 작은 그늘일 뿐이어니......
상처도 꽃이다 /이만섭
늦도록 피어 있는 꽃 있네
근심처럼 세월 얻어
어둑어둑 쓸쓸해진 저 붉은 꽃
색을 잃은 지 오래되었네
살갗 같은 대공도 뼈 같은 뿌리도
가슴으로 뻗어 가
헤지고 헤져 멍든 청동색이 되었네
저렇듯 완고하게 오금 붙어
맹렬하게 피어 있는 꽃이라네
얼룩처럼 번진 꽃의 나중을 위해
저 꽃 울게 할 수 없을까,
악기처럼 상처를 연주할 수 없을까,
벽오동나무 속 비워져 만든 북이
소리 아름답듯이 팽팽해진 거죽의 울림 소에서
둥- 하고 응어리진 가슴 터트리며
상처를 달래는 꽃의 환유법으로
아픔의 경계를 허물고 들리는 소리
어둠 속에서 달 뜨듯 피는
그런 꽃으로
향기로운 꽃 /오세영
하늘 맑은
햇빛 밝은 가을입니다.
가을에 피는 꽃은
향기롭습니다.
드러냄에 서두르지 않고
때의 유혹에 삼갈 줄 알아
겨울, 봄, 여름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농염하게 익혔기 때문이지요.
하늘 높고
햇빛 푸른 가을입니다.
숨어서 피는 꽃은 더
향기롭습니다.
세속의 욕망을 다스릴 줄 알고
때의 부름을 기다릴 줄 알아
스스로 자신을 낮춰 오히려
더 높고 푸른 세계를
껴 안는 꽃.
관악 준봉의
그 변함없는 바위틈에
홀로
난 한그루 꽃을 피웠습니다.
숨어서 더 향기로운
가을 꽃이 피었습니다.
꽃으로 와서 /김미선
우리가 꽃으로
이승의 강을 건너와서
꽃을 들여다보며 사는 한 세상
내가 꽃이 되면 꽃이 나를 보고
꽃과 내가 하나 되는 조화의 세계
서로 얼굴을 잊지 않고
종신하듯 마주하여
꽃으로 살다 꽃답게 낙하하면
꽃잎 휘날리는 길을 따라
이 세상 끝까지 함께 갈 때
나도 지고 너도 꽃 되어 지고 말면
세상은 참으로 맑고 고요해지겠다.
푸른꽃 /고은강
1.
점자처럼 두둘두둘, 지문으로 만져줄게요
서투른 척 해드릴까요
깨물어드릴까요
도시 냄새, 하얗게 질리겠어요
내일은 당신 아버지와 이 숨막히는 통사를 써볼까 해요
통사는 밤으로 흐르고 우리는 고독하니까
참을 수 없는 불면의 생 어딘가에서 멋지게 뒹굴어봐요
질척거리는 입술, 말라죽을 때까지
당신만 모르죠
우리가 함께 저지른 아름다운 불경죄,
난 선생님 곁에 누워 선생님의 아내를 가졌어요
우리가 낳은 불순한 아이를
당신은 목숨 바쳐 섬기게 될 거예요
그게 평등이랍니다
또,
침 뱉으시게요?
가슴을 까발릴까요
뒤통수에 달린 음부를 보여드릴게요
별로 가진 것도 없는데
침 뱉으시오, 라고
이름을 개명할까봐요
일수쟁이처럼 꼬박꼬박 잘도 처먹는 당신,
연민의 면죄부나 드리게요
확,
미끄러질까요?
절박했었다고 말할까봐요
덜렁덜렁 한쪽 어깨를 다 드러내놓고 더 열심히,
주둥이로 죄짓자고 꼬드길까봐요
내 애증을 지불해서
한 생의 치부를 조용히 덮어줄 수 있다면,
거리에서 제일 잘 팔리는 절망이 되어
여기저기 평등하게 열어줄까봐요
백성 없는 나라의 주인처럼
고독한 수염이나 무럭무럭 길러
그 밀림국의 첫 번째 거짓말로
열망보다 가볍게
사랑한다니까요, 자기
2.
나는 밤의 서식자,
당신의 오만한 지붕 위에서
보들레르의 고양이처럼 갸릉갸릉, 울겠어요
당신이 애완동물처럼 기르고 있는 독설의 여인과 함께
티끌처럼 뒹굴겠어요
썩은 비늘을 털며
전염병처럼 이 남자 저 남자 옮아다니겠어요
아이를 낳을 거예요
탄탈로스의 사생아 같은 아이를 낳아 통째로 잡아먹고
또 아이를 낳아 또 잡아먹고,
당신의 비루한 주머니를 털어
내 모반의 냉장고 속 꽉꽉 채우면서,
더럽게 뚱뚱해지겠어요
내 허구의 눈시울이 자꾸 가려워요 파랗게,
꽃잎이 지네요
꽃구경 /임보
그제는 김제의 청련사 백련을
어제는 전주 덕진호의 홍련을
오늘은 시흥 관곡의 가시연을
며칠 연꽃에 묻혀 해롱이다가
문득 바다 생각이 나
오이도 갯가로 달려갔네
술집 다락에 올라앉아
물을 보는 맛도 괜찮아라
난초 향기 나는 친구와 더불어
연변 아지매가 구워준
조갯살에 소주 씹으면서
두고 온 연꽃봉오리 생각하며
한나절 보내는 것도 삼삼해라
꽃 한 송이 드리리다 /황금찬
꽃 한 송이 드리리다.
복된 당신의 가정
평화의 축복이 내리는
밝은 마음 그 자리 위에
눈이 내려 쌓이듯 그렇게 -.
꽃 한 송이 드리리다.
지금까지 누구도
피워본 일이 없고
또한 가져본 일도 없고
맑은 향기 색깔 고운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마음의 문을 밀고
계절이 놓고 가는 선물처럼
잎이 살고
줄기가 살아나며
죽어가는 뿌리,
그리고 기후도 살게 하는
신기한 꽃
그 한 송이르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이여.
어린 행복 위에
성장한 정신 위에
가난한 금고 안에
땅 흘리는 운영 위에
꽃이여, 피어나라.
임술년
새날 아침부터
이 해가 다하는 끝날까지
피기만 하고
언제나 지는 날이 없는 꽃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향기 또한 높아
하늘의 천사등도 부러워하는
그 꽃 한 송이를
축원의 선물로
드리렵니다.
피는 꽃 함부로 꺾지 마라 /풍류 시인 민만규
봄바람에 피는 꽃을
함부로 꺾지 마라
한번 꺾인 꽃은
다시 피기 어려우나니
진정 좋아한다면
봄 햇살을 가슴으로 품어라
벌 나비가 꽃피우고
까막까치가 오작교로
연을 맺어 줄 것이니
꽃의 일생 /박희홍
제 마음대로 피더니
한들한들한 봄바람에
이 가슴 저 가슴을
흔들어 놓고서
사람 사는
알콩달콩 달큼한 이야기
듣지 못하고 날개 꺾인 꽃
아쉽지만
가는 길 씁쓸하지 않도록
입이란 입은 칭찬 일색이니
보기 좋고 듣기 좋은 사랑
듬뿍 받아 행복하였네라
부르지 않아도 피는 꽃 /박명숙
꽃을 바라보면
메마른 가슴에 꽃망울이 터지듯
봄빛 같은 따뜻한 마음이
가득해집니다
꽃은 우리에게 편견 없이
좋은 향기로 반겨주고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뿌리내렸기에
예쁘고 신비롭지 않은
꽃은 없습니다
풀밭이 무성한 허름한 집터에
고운 미소로 반기는
접시꽃 당신, 분신 같은 꽃으로
본향을 그리워합니다
당신을 향한 그리움은
내 눈 속에 가득해 옛사랑으로
끝없이 피어오르고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와서 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