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애니메이션 백과 - 체코의 애니메이션
hanjy9713
2023.09.09. 22:26조회 32
체코의 애니메이션
요약 체코는 18세기 이후 전통적 공연 예술로 이어져온 인형극의 영향을 받아 인형 애니메이션이 발달했다. 이리 트른카(Jiří Trnka)와 카렐 제만(Karel Zeman) 등의 작가들은 독창적 예술성과 기술적 효과를 선보이며 애니메이션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러나 공산권의 몰락 이후 관(官) 주도의 제작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 인형 애니메이션, 인형극과 카메라의 만남
체코의 첫 애니메이션은 1920년 보후밀 술라(Bohumil Šula)가 만든 <딱정벌레(Broučci, Beetles)>다. 얀 카라피아트(Jan Karafiát)의 동명 작품이 원작이며, 그림으로만 이루어진 애니메이션이다. 한편, 체코의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인형 애니메이션은 1935년 카렐 도달(Karel Dodal)과 헤르미나 틸로바(Hermína Týrlová)가 함께 만든 <환등기의 비밀(The Lantern’s Secret)>이 시초다. 도달과 틸로바는 1928년 그림으로 만든 애니메이션 <사랑에 떨어진 물의 요정(Zamilovaný vodník, Enamored vodník)>에서 이미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체코 최초의 애니메이션 <딱정벌레>
도달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 체코를 떠나지만, 체코에 남은 틸로바는 인형 애니메이션 <페르다 개미(Ferda Mravenec, Ferda the Ant)>(1944)를 제작한다. 도달과 틸로바는 인형극의 전통 위에 인형 애니메이션이라는 예술 형식을 새로이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인형 애니메이션은 스톱모션(stop motion) 기법의 애니메이션으로, 입체 인형의 동작에 조금씩 변화를 주며 한 프레임씩 연속으로 촬영해 움직임의 환영을 만든다. 인형 애니메이션은 셀 애니메이션에 비해 입체감과 실재감의 표현이 뛰어나지만, 섬세한 촬영과 오랜 제작 기간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인형 애니메이션은 인형극의 전통과 영화의 기술적 발전이 접목해 나타난 결과이다. 현재 3000여 개의 인형 극단을 보유하고 있는 체코는, 18세기 이래 인형만 등장하는 인형 극장이 세워져, 인형극이 민속 오락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에 체코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편입되어 체코어 대신 독일어 사용을 강요당하게 되는데, 인형극은 가난한 농민들 사이에서 체코어로 공연되었으므로 체코의 민속 문화와 체코어의 전승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공연 예술로 이어져온 인형극은 19세기에 카메라가 발명된 이후 20세기에 들어와 인형 애니메이션이라는 영상 예술로 탈바꿈하게 된다. 인형 애니메이션은 인형극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인형을 통해 시공간을 조율하는 방식에서 큰 차이를 드러낸다. 우선, 인형극의 인형은 인간이 조종하는 대상, 즉 인간의 욕망이 투사되는 객체로서 무대 위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인형 애니메이션에서는 인형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카메라 메커니즘에 의해 은폐된다. 둘째, 인형극의 움직임은 연속적이고 현실의 시공간 속에서 실재하지만, 인형 애니메이션의 움직임은 분절적이고 허구적이어서 움직임의 환영 속에서만 존재한다. 셋째, 인형극은 공연 예술인 만큼 일회적이지만, 인형 애니메이션은 반복 재생이 가능하다.
체코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인형극과 인형 애니메이션이라는 예술 장르의 간극을 독창적으로 극복하며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를 주도한 두 집단이 프라하의 트릭브라더스(Bratři v triku, Trick Brothers) 스튜디오와 즐린의 고트발도프(Gottwaldov) 영화 스튜디오이다.
■ 트릭브라더스 스튜디오와 이리 트른카
1935년, 프라하에 트리쿠 영화사(Atelier Filmovych Triku: ATIF)가 설립된다. 트리쿠 영화사는 본래 주류 영화의 특수 효과(Triku, Trick)를 담당하는 회사였다. 그러나 체코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면서 트리쿠 영화사는 1941년 독일군에 접수되어, 미국 디즈니사에 필적할 작품을 만들기 위한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로 개편된다.
당시 예술 부문 담당자인 리하르트 딜렌츠(Richard Dillenz)는 장편 애니메이션 오페라를 제작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독일군이 폐쇄한 프라하 대학교에서 미술과 학생 120여 명을 강제로 ATIF에 동원했다. 이들 중에는 후에 체코 애니메이션의 핵심 인력이 되는 이리 브르덱카(Jiří Brdečka), 브레티슬라브 포야르(Bretislav Pojar), 스타니슬라브 라탈(Stanislav Látal), 에두아르트 호프만(Eduard Hofman)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부족한 기술과 인력으로 인해 제작은 실패로 돌아가고, 담당자는 호르스트 폰 몰렌도르프(Horst von Möllendorff)로 교체되었다. 몰렌도르프의 지도하에 1944년 완성된 단편 애니메이션 <산호 바다에서의 결혼식(Hochzeit im Korallenmeer, Wedding in the Coral Sea)>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자장 안에 있으면서도 그 나름의 독창적인 정취를 선보이고 있다.
<산호 바다에서의 결혼식>에서 문어에게 납치당했던 신부가 신랑과 재회하는 장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AFIT의 젊은 작가들은 체코 최초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트릭브라더스’를 설립하고 30대 초반의 이리 트른카를 미술감독으로 영입한다. 트른카는 11살 때부터 인형극의 대가인 요세프 스쿠파(Joseph Skupa)의 문하에서 인형극의 연출과 인형 제작법을 배웠다. 이후 프라하의 산업 예술 아카데미에서 회화, 조각, 디자인을 공부했고 인형극 제작 경험까지 두루 갖춘, 이른바 준비된 작가였다.
트른카는 <할아버지가 사탕무를 심었다(Zasadil dědek rěpu, Grandfather Planted a Beet)>(1945)를 시작으로 <선물(Dárek, The Gift)>(1946), <동물들과 노상강도(Zvířátka a Petrovští, Animals and Bandits>(1946) 등의 2D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특히 <동물들과 노상강도>는 1946년 칸 영화제에서 디즈니사의 <젖은 페인트>를 제치고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트른카는 전통적 방식의 애니메이션으로는 자신의 상상력을 펼치는 데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인형 애니메이션을 시도하게 된다.
그 결과가 체코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체코의 일 년(Špalíček, The Czech year)>(1947)이다. 체코의 전설과 풍속을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한 일종의 다큐멘터리로, 트른카 특유의 서정성과 자연에 대한 사랑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이후, 트른카는 안데르센 동화를 원작으로 한 <황제의 나이팅게일 (Cisaruv Slavik, The Emperor's Nightingale>(1949), 체코의 전설을 다룬 <바야야 왕자(Bajaja, The Prince Bayaya)>(1950)를 통해 섬세한 미적 감각과 인형 애니메이션의 기술적 정수를 선보인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장편 애니메이션 <한여름 밤의 꿈(Sen noci svatojánské, A Midsummer Night's Dream)>(1959)은 정교한 미장센과 광학적 특수 효과, 인형들의 양식화된 연기가 자아내는 시적 표현을 통해 원작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수작이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시적 영상으로 담아낸 <한여름 밤의 꿈>
트른카는 장편 애니메이션 이외에도 <열정(Vášeň, The Passion)>(1962), <사이버네틱 할머니(Kybernetická babička, The Cybernetic Grandma)>(1962) 등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꾸준히 발표했다. 트른카의 마지막 작품인 <손(Ruka)>(1965)은 예술의 자유와 이를 억압하려는 전체주의적 억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걸작이다. <손>은 체코 공산당이 상영을 금지했지만,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세계적 찬사를 받았다.
전체주의적 권력과 예술가의 갈등을 표현한 <손>의 한 장면
인형을 바라보는 트른카
트른카 사후에 트릭브라더스 스튜디오는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이리 트른카 스튜디오’로 불리게 된다. 이 스튜디오에서 에두아르트 호프만, 즈데넥 밀레르(Zdeněk Miler), 프란티셰크 비스트르실(František Vystrčil), 이리 브르데카 등이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트른카의 예술적 유산을 이어받은 브레티슬라브 포야르는 1958년 인형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설립해 1959년작 <사자와 음악(Lev a pisnicka, The Lion and the Song)>으로 명성을 얻었다.
트른카가 전설과 동화를 서정적 영상에 담아낸 반면, 포야르는 동시대의 사회 현실을 사실주의적으로 표현했다. 포야르는 1968년 소련의 프라하 침공 전후로 캐나다로 이주해 캐나다 국립영화위원회(NFBC)에서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 고트발도프 영화 스튜디오와 카렐 제만
카렐 도달이 인형극의 전통 위에서 인형 애니메이션을 창조했고, 이리 트른카가 뒤를 이어 인형 애니메이션의 예술적 지위를 확고히 했다면, 카렐 제만(Karel Zeman)은 인형 애니메이션의 기술적 차원을 끌어올린 인물이다. 제만은 최초의 인형 애니메이션을 만든 틸로바의 조수로 일하며 애니메이션 제작에 입문한 후, 1943년 즐린에 고트발도프 영화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제만은 데뷔작인 <크리스마스의 꿈(Vánoční sen, A Christmas Dream)>(1945)에서 인형 애니메이션과 실사 촬영의 결합을 선보였고, <영감(Inspirace, Inspiration)>(1948)에서는 유리를 가공해 섬세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등 일찍이 새로운 기술에 관심을 보였다. 제만은 이후 <쥘 베른의 멋진 세계(Vynález zkázy(원제: 가공할 발명), The Fabulous World of Jules Verne)>(1958),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Baron Prášil, Baron Munchausen)>(1961)에서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절묘하게 결합하고 다양한 카메라 기술을 동원해 완성도 높은 특수 효과를 구현해냈다.
제만은 영화사 초기에 수많은 특수 효과와 촬영기법을 만들어낸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éliès)에 비교되어 ‘체코의 멜리에스’로 불린다.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의 일본 DVD 표지
<쥘 베른의 멋진 세계>의 체코 포스터
■ 새로운 모색
1970년대와 1980년대는 TV 방송사의 어린이 시리즈물 수요가 증가한 시기이다. 이에 부응해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와 같은 특별 스튜디오가 오스트라바(Ostrava)에 설립되어 어린이용 시리즈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한편, 예술적 침체에 빠져있던 이리 트른카 스튜디오는 얀 슈반크마예르(Jan Švankmajer)와 이리 바르타(Jiří Barta)와 같은 뛰어난 작가들을 배출하며 부흥기를 맞이한다. 슈반크마예르는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영화, 연극, 미술 등 다양한 예술 형식을 넘나들며 독특하고 몽상적인 초현실주의적 작품들을 선보였다.
대표작인 <대화의 차원(Možnosti dialogu, Dimensions of Dialogue)>(1982)은 음식물과 금속, 진흙 등 다양한 조형적 소재로 인간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독창적으로 표현해, 1983년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바르타는 독일의 민담을 다룬 <피리 부는 사나이(Krysař, The Pied Piper)>(1986년)에서 독일 표현주의와 중세 고딕풍의 세트 디자인, 가상 언어의 사용, 목각 인형과 실제 쥐를 혼용한 초현실주의적 효과를 통해 암울한 종말론적 세계관을 선보였다.
찰흙의 질감으로 남녀의 교감을 표현한 <대화의 차원>
종말론적 세계관이 암울한 분위기로 구현된 <피리 부는 사나이>
공산주의 체제에서 관 주도의 제작 시스템을 답습하던 체코의 애니메이션 산업은 1990년대 이후 세계적 시장 경쟁 체제의 높은 파고를 맞이해 침체기를 겪게 된다. 체코 애니메이션은 상업적 시리즈물을 제외하면 극장과 TV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위탁 제작만을 하는 소규모 스튜디오들이 생겨났다. 공산권의 몰락 이후 정부 보조가 감소하고 제작비 확보가 어려워진 상황에서도 아우렐 클림트(Aurel Klimt), 미하엘라 파블라토바(Michaela Pavlátová)와 같은 작가들은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했다.
2000년대에 들어 세계시장에서 3D 컴퓨터 그래픽이 대세가 되면서, 체코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수작업 인형 애니메이션은 보기 힘들어졌다. 인형과 3D 컴퓨터 그래픽을 결합한 장편 애니메이션 <핌파룸: 세 번째 행운(Fimfárum do tretice vseho dobrého, Fimfarum Third Time Lucky)>(2011)은 체코 애니메이션의 재건을 향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및 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체코의 애니메이션 (세계 애니메이션 백과, 신홍주, 한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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