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제주반석감리교회 문영걸 목사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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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이 처음 만난 중국 무슬림
19세기 초에 중국에 도착한 서양 선교사들은 예상 밖의 방대하고도 독특한 공동체를 만났다. 바로 ‘회교도’(回敎徒)라 불리는 무슬림이다. 중국 선교를 최대 사명으로 삼고 이역만리 중국 땅에 도착한 선교사들이 중국 무슬림의 존재를 어떻게 확인하였고, 또 그 첫인상이 어떠했는지는 훗날 전개될 중국 무슬림에 대한 선교 전략과 선교 사역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첫 선교사가 처음 만난 중국 무슬림
1807년 5월 12일, 영국 런던선교회(The London Missionary Society) 선교사 모리슨(馬禮遜, Robert Morrison, 1782-1834)이 광저우(廣州)에 도착하여 중국 선교의 기원을 열었다. 공식적으로 영국 동인도회사의 통역관 신분이었던 모리슨은 당시 청나라의 쇄국정책으로 광저우에만 머물러야 했으며, 그곳에서 중국어 성서 번역과 영화서원(Anglo-Chinese College, 英華書院) 설립에 매진하였다. 이후 1816년 7월 영국 정부의 특사 애머스트(William P. Amherst, 1868-1941)를 비롯한 영국 사절단이 청나라 정부를 방문했는데(베이징), 이때 통역을 맡은 모리슨은 처음으로 광저우를 떠나 중국 내륙을 여행할 수 있었다. 모리슨은 광저우에서 텐진(天津)까지 배로, 텐진에서 베이징까지 육로로 이동하여 8월 29일 베이징에 입성하였다.
모리슨은 그 여행에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담은 여행일지를 『1816년 영국 정부 주중대사관에 근무할 때 있었던 주요 사건에 대한 회고록』이라는 제목으로 정리하여 1819년 런던에서 출간하였다. 이 책 8장 “무슬림과 유대인에 관한 기록”은 세 쪽의 짧은 분량이지만, 중국 무슬림에 대한 선교사의 첫 기록으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1 8장을 시작하는 첫 두 문장은 다음과 같은 짧은 평을 담고 있다. “우리는 여행하면서 거의 가는 곳마다 무슬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들은 정부 관원인 경우가 많았다.” 기독교 불모지인 중국에서 무슬림이 발견되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무슬림의 숫자와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모리슨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8장에서 모리슨은 무슬림을 만난 두 사건을 연이어 기록했다. 첫 번째 사건을 살펴보자. 참고로, 아래 인용의 첫 번째 문장에서 언급된 ‘회회’(回回)는 무슬림을 가리키는 한자 표현이다.
[1816년] 9월 10일 저녁, 나는 텐진에서 약 50마일 떨어진 투러우(Too-leaou)라는 마을을 지나다가 ‘무슬림 가게’(Hwuy-Hwuy laou teen, 回回老店)라 적혀 있는 초롱불을 밝힌 허름한 가게를 만났다. 내가 주인 어르신에게 어디에서 오셨냐고 물으니 그 노인은 ‘서양’(Se-yang, 西洋)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서양 어느 나라냐고 더 물으니, 그건 모르지만 이미 중국에 와서 생활한 지 5대째 됐다고 대답했다.
노인은 그 부근에 많은 무슬림이 살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이들은 ‘예배사원’(Le-pae Sze, 禮拜寺)에서 매주 세 번째 날과 일곱 번째 날에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주로 일곱째 날에 드린다고 하였다. 이들은 중국어로 ‘하늘’(Teen, 天)이라는 단어와 ‘주님’(Choo, 主)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 노인은 글을 읽지 못하였다. 그는 안식일에도 장사를 멈추지 않았다.
바로 이어지는 두 번째 사건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참고로, 아래 인용 마지막에 언급된 ‘주마일’(主麻日)은 매주 금요일 오후에 드리는 이슬람교 예배일을 뜻한다.
10월 13일, 과주(Kwa-chow) 인근의 한 사원에서 정부 관원 한 명을 만났다. 그는 무슬림이었다.
그는 무슬림이 대략 1,200년 전 당나라 시기에 중국에 들어왔다고 알고 있었다. 무슬림들은 중국어로 ‘주님’(Choo, 主)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신’(Shin, 神)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신은 창조된 사물 중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주님을 경배합니다. 그분은 모든 존재와 무존재의 참 주이시며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은 그 어떤 것과도 다릅니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유일한 참 주님이십니다.” 그는 안식일을 ‘주마일’(Choo-ma-urh)이라고 하였다.
모리슨은 그 무슬림 관원과의 대화에서 느낀 바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며 마무리하였다.
이 사람은 종교를 주제로 대화하기를 원치 않았다. 낯선 사람[모리슨을 뜻함-필자 주]의 호기심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기 위하여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종교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들의 습관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 사람은 나를 자신의 형제를 대하듯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우리 테이블에 함께 앉아 있는 사원의 사제는 조용히 찻잔에 물만 따라주었다.
모리슨의 이 기록에서 우리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당시 중국 무슬림 신앙은 정부 관원뿐만 아니라 글을 읽지 못하는 계층에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둘째, 이슬람은 중국 문화에 정착하면서도 고유한 신앙 양태를 유지하였고, 예배 장소와 형식, 그리고 예배를 인도하는 성직자가 고정적이어서 안정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특히 중국 문화에서 다신교적 용어로 인식되는 ‘신’(神) 대신 ‘주’(主)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유일신 사상을 강조하고 예배일을 ‘주마일’로 부른 것이 돋보인다. 셋째, 종교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중국의 고유한 문화를 존중하여 다른 종교에 관해 부정적인 언급을 피하는 온화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 선교 시작부터 이어진 이슬람에 대한 관심
처음 만났던 중국 무슬림의 강렬한 인상은 줄곧 모리슨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던 듯하다. 그 단서는 중국의 첫 영문 선교잡지 Chinese Repository(중국어로는 「中國叢報」라 부른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잡지는 미국해외선교위원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ABCFM)에서 파송한 선교사 브리지만(Elijah C. Bridgman, 裨治文, 1801-61)이 1832년 5월에 광저우(廣州)에서 창간하였다. 브리지만은 1830년에 광저우에 도착하자 바로 모리슨에게서 중국어를 공부했고, 그 이후로는 모리슨의 가장 친밀한 선교 협력자가 되었다. 이 잡지의 창간 역시 모리슨의 제안과 적극적인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창간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서두에 실은 이 잡지의 첫 코너는 브리지만이 쓴 서평 “중국 무슬림”(Mohammedans in China)이었다.2 브리지만의 서평은 창간호에 이어 다음 호까지 연재되었는데, 그가 서평으로 다룬 책은 『두 무슬림의 고대 인도와 중국 여행기』였다. 두 명의 무슬림이 9세기에 인도와 중국을 여행하면서 아랍어로 남긴 여행 견문기를 1733년에 프랑스의 동방학자 르노드(Eusebius Renaudot, 1648-1720)가 영어로 번역하여 런던에서 출판된 책이었다.3
브리지만은 이 서평을 통해 이슬람이 중국에 전래된 시점과 경로, 인물에 대해 밝히려 하였으나, 분명한 답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2회에 걸쳐 연재한 많은 분량의 서평을 다시 정리해 보면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정보를 알 수 있다. 첫째, 이슬람의 중국 전래 시점에 대해 확정하지 못하였다. 613년에 시작된 이슬람 시대는 9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는데, 이 서평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 두 명의 무슬림 여행가가 각각 850년과 877년에 중국에 도착했을 때 많은 무슬림을 만났다는 정도뿐이다. 둘째, 여행을 목적으로 중국에 첫 발을 디딘 소수의 여행자들은 육로로 이동했다고 할지라도, 무슬림이 본격적으로 중국에 올 때에는 상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 도착했다고 보았고, 그들이 처음 도착한 지점을 광저우로 판단하였다. 셋째, 무슬림들이 중국에 온 주된 목적은 종교를 전하기 위함이 아니라 상업활동, 즉 무역을 위함이었다.
중국 선교사들의 첫 선교잡지에 9세기 중국 무슬림에 대한 인상을 소개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을 시사한다. 첫째, 모리슨이나 브리지만과 같은 선교사들은 이미 존재하던 무슬림에 대해 주목하였고, 그들에 대한 관심을 선교적인 차원으로 뇌리에 담고 있었다. 둘째, 중국 내에서 이동의 자유가 제한받는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중국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중국 무슬림에 대한 이해를 계몽주의(Enlightenment)에서 빌려올 수밖에 없었다. 주지하다시피 중국의 여러 문화적 요소들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시작된 계몽주의 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계몽주의의 대표적 주자인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중국 문화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르노드가 중국 무슬림에 대한 9세기 견문을 번역하여 소개한 것도 그러한 계몽주의 풍조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셋째, 천주교 선교사들이 중국 선교 초기부터 유교와 불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개신교 선교사들은 초기부터 유교와 불교 외에 중국 무슬림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졌다.
서양 문헌을 통한 간접적인 중국 이슬람 이해
르노드의 역서에 대한 브리지만의 서평이 발표된 지 38년이 지난 후, The Chinese Recorder(중국어로는 「敎務雜誌」라 부른다) 1889년 1월호와 2월호에는 선교사 노이스(Henry V. Noyes, 那夏禮, 1836-1914)가 쓴 “중국 이슬람”(Mohammedanism in China)이라는 장문의 글이 실렸다. 이 글은 1878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출판된 동방학자 티에르상트(Dabry de Thiersant, 1826-98)의 『중국과 동투르키스탄의 이슬람』에서 중국 이슬람에 관한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한 글이다.4
티에르상트가 15년간의 작업을 통해 완성한 이 책은 상·하권으로 나누어 총 530페이지에 달하는 거작이다. 이 책에서 티에르상트는 중국 무슬림의 형성 과정, 그들의 교리와 우주관, 그리고 중국 간쑤(甘肅)와 윈난(雲南) 등 지역 무슬림의 특징들을 소개하였다. 이 책은 노이스뿐만 아니라 나중에 많은 중국 선교사들이 인용하는 중국 이슬람 연구의 권위적인 교과서가 되었다. 노이스가 요약한 글 “중국 이슬람”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무함마드 종교(이슬람)는 세상에 이미 오랫동안 존재해 왔고,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세상 많은 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종교는 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지만, 오히려 한 가지 숭고한 진리, 즉 모든 참된 종교의 초석은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진리를 반증해 주기도 한다.
무함마드 종교는 유대교와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후예에 기원을 둔다. 이 종교(유대교와 기독교)는 모두 약속의 아들 이삭의 혈통이며, 이슬람은 계승권을 박탈당한 이스마엘의 혈통이다. 그러나 이 셋 다 “아브라함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다”라고 공통되게 말한다. 그리고 이 셋이 기타 종교와 구별되는 공통점은 오직 여호와만 경배하는 것이다.
이슬람의 신조는 매우 간단하다. “알라(眞主) 외에는 다른 신이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다”라는 것이다. 이 신조의 절반은 영원히 남을 진리이고, 그 나머지 절반은 멸망할 ‘낙’(le, 落)이다. 이렇게 한쪽 발은 세월이라는 바위를 딛고, 다른 한쪽 발은 미친 듯이 변화무쌍하게 미혹하는 인간의 허망한 꿈을 딛고자 한다면 반드시 재앙으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이 재앙이 계속되는 동안, 무함마드주의는 그 조잡하고 위장되지 않은 관능[일부다처제를 가리킨다-필자 주]에도 불구하고, 또한 실제적인 작용에 있어서는 종종 죽음처럼 잔인하고 무덤처럼 냉정하지만 많은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은 우상 숭배의 깊은 구덩이에 빠져 있는 그 추종자들을 참된 믿음으로 끌어 올려야 한다는 목적에서 우리가 연구할 가치를 부여하며, 이는 이 세상을 최종적으로 구원해야 할 기나긴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사역이 될 것이다.5
노이스는 위와 같은 서두 이후에 중국 무슬림의 전래 역사와 경로에 관한 여러 설을 비교적 긴 분량으로 소개하였다. 그리고 중국 양쯔강 이북의 무슬림 인구가 1,000만 명이라고 설명하였다. 이 숫자는 윌리엄스 선교사(Samuel Wells Williams, 衛三畏, 1812-84)의 저서 The Middle Kingdom(『中國總論』)에서 인용한 것이다.6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노이스 자신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슬람이 중국에 전래된 역사를 이해하고, 아울러 현재 중국 무슬림의 통계 숫자가 반영하는 세력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감히 위험스러운 예언을 하지 않을 것이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하려고 한다. 즉, 향후 이슬람이 중국에 끼칠 영향은 어떠할 것인가? 이 질문에 관련하여 우리는 몇 가지 사실만을 제시하며 독자들이 각자 추론하는 데에 참고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1) 중국 무슬림의 수적인 성장은 선교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무슬림은 수백 년간 가족의 혈통을 지키면서 자연 성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종교적 의무에 따라 기근이 발생하거나 재난이 닥쳐올 때마다 많은 아이들을 돈을 주고 사서 입양하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2)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는 매우 완고하게 고수하지만 그 교리 준수에 대해서는 느슨하기에 자신의 종교를 쉽게 떠나지 않는다. 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반면에 이들의 교리 준수는 느슨하기 때문에 중국 정부의 관원으로 임명될 때 그 어떤 형태의 의례를 통과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이들은 중국 황제의 위패를 숭배하면서 선지자의 초상화를 그 위패 뒷면에 두어 자신의 종교 양심에 변명거리로 삼는다. 이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중국 습관을 따르고 있다.
(3) 이들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중국 통치자나 백성들이 이들에게 특별한 반감을 가진 것 같지는 않다. 이들은 이미 많은 관직에 앉아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때때로 이들과 관련된 충돌을 보면 종족 간의 전쟁이지 이들의 종교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모든 충돌은 정치적 이유이지, 신앙적 이유가 아니었다.
(4) 마지막으로 우리는 중국 무슬림들이 외부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을지 결코 확신할 수 없다.7
이처럼 중국 무슬림에 대한 선교사들의 관심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당시 중국 무슬림에 대한 이해는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서양 문헌을 통한 간접 연구 혹은 관심에 머물러 있었다. 선교사들의 중국어 실력이 아직은 미숙한 수준이었고 또 중국 대륙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의 중국 이슬람에 대한 이해의 범위는 역사와 현황 통계, 교리와 선교 분석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음을 알 수 있다.
탐방을 통한 직접적인 중국 이슬람 이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선교사들은 서양의 중국학 문헌에만 의지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중국 이슬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크게 두 가지 경로가 있었는데, 첫째는 다양한 지역을 탐방하여 직접 체험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중국어로 된 중국 이슬람 문헌을 직접 연구하는 것이었다. 제2차 아편전쟁에서 청나라는 패했고, 1858년에는 〈텐진조약〉(天津條約)을, 1860년에는 〈베이징조약〉(北京條約)을 체결하면서 선교사들의 이동은 자유로워졌다. 선교사들은 중국 각 지역을 순방하며 중국 무슬림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고, 단순히 문헌에만 의지하는 것을 넘어 무슬림을 직접 관찰하며 그들을 더욱 폭넓게 이해할 수 있었다.
선교사들이 이동의 자유를 얻기 전에도 탐방과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중국 이슬람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당시 선교사들은 광저우에 머물러야 했기에 이러한 탐방과 만남은 물론 광저우에서 이루어졌다. Chinese Repository 1851년 2월호에 실린 글 “‘소리 나는 무덤’(響墳)-광저우 부근의 이슬람 청진사와 묘지”에서는 광저우 북쪽 성벽에서 반 마일 떨어진 청진사[淸眞寺, 이슬람 사원 모스크(mosque)를 뜻하는 중국 표현]와 그 옆에 있는 한 묘지를 소개하고 있다.8 1190년 2월 광저우에서 사망한 87세의 ‘Shems-du 'Adin’이라는 무슬림을 매장하였는데, 무덤에서 코란을 읽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여 ‘소리 나는 무덤’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이 글은 묘지에 있는 비문을 소개하는 데 집중하였지만, 선교사가 처음으로 중국 이슬람에 대한 문헌적인 이해가 아닌 직접적인 체험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1869년 9월에 출간한 The Chinese Recorder에 에드킨스 선교사(Joseph Edkins, 艾約瑟, 1823-1905)는 자신이 만났던 베이징 청진사에 관한 글을 발표하였다. 1848년에 중국 상하이(上海)에 도착한 그는 1863년에 사역지를 베이징으로 옮겼고, 거기에서 처음으로 중국 무슬림을 만났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관찰했던 초점은 모리슨 같은 초기 선교사들과 유사하였다. 에드킨스의 글은 크게 세 가지 내용에 집중하였다.
첫째, 에드킨스는 청진사의 직분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에드킨스가 만난 성직자 ‘이맘’(Imami)은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에 능숙했는데, 아랍어는 코란을 이해하기 위해, 페르시아어는 코란에 관한 각종 주석을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했다. 예배 중에 이맘은 먼저 아랍어로 기도문을 낭독하고 그다음 중국어로 도덕과 종교에 대한 의무들을 설교했다. 청진사 안에는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있었고, ‘아훙’(Ahhung, 阿訇은 페르시아어 ‘Akhond’의 음역이라고 볼 수 있는데 ‘교사, 학자’라는 뜻이다)이 가르치고 있었다. 아훙은 정규적인 종교교육을 받은 학자인데 청진사에 성직자로 청빙을 받았다. 아훙은 예배당 서북쪽에 있는 강단에서 아랍어로 기도문을 낭독하고 다시 중국어로 도덕과 종교의 의무들을 설교하였다.
둘째, 에드킨스는 무슬림의 장례에 관심을 가졌다. 청진사 안에는 관, 상자, 초롱불, 기타 장례용 기구들이 놓여 있었다. 애도를 표하는 색상은 흰색이었다. 장례는 시신만 매장하고 시신을 담았던 관은 다시 회수하여 사용하였다. 시신과 옷가지들은 묘에 묻고 나무 상자들도 전부 회수하였다. 장례식에서는 조문하는 사람들이 서쪽을 향하여 서서 사망한 사람의 나이에 따라 코란 전체 30권을 한 번 혹은 여러 번 낭독하였다. 코란을 읽는 행위는 속죄를 위한 것인데 코란을 한 번 읽는 것이 1년의 죄를 속죄하는 것이라 한다. 13세 이전까지는 속죄할 죄가 없다고 가정하고, 그 이후부터의 햇수만큼 계산하는데, 예를 들면 40세의 사망자를 위해서는 코란을 27번 읽으면 완전히 속죄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에드킨스가 관심을 가진 것은 중국 무슬림의 기원이다. 에드킨스는 다른 선교사들처럼 이슬람이 중국에 전래된 시기나 경로에 대해 파헤친 것이 아니라 민족 내지는 인종에 대한 관심으로 그 기원을 해석하려고 했다. 에드킨스가 본 중국 북방지역 무슬림은 중국인들과 다른 얼굴 윤곽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페르시아인인지 터키인인지 확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그리고 명나라 때부터 무슬림을 ‘회회’(回回, Hwei-hwei)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는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하였다. 특히 중국인들과 비교했을 때, 무슬림들의 눈은 위로 찢어져 있지 않고 이마는 더 튀어나왔으며 얼굴은 더 길고 네모졌다고 말한다. 이를 근거로 에드킨스는 중국 무슬림은 페르시아인의 후예라고 판단하였다. 물론 에드킨스도 중국 무슬림의 전래 시기에 대해 언급하지만 단 한 줄로 이렇게 적고 있다. “이들(중국 무슬림)이 중국에 들어 온 시기는 타타르(Tartar) 왕조 시대라고 하지만, 팔라디우스(Archimandrite Palladius, 1817-78, 중국에서 30년 이상 러시아정교회 사절단을 이끌었으며, 중국 이슬람 연구를 개척한 중국학자로 인정받는 인물)의 연구에 따르면 당나라 시대에 중국에 전래되었다는 중국 무슬림의 전승은 아무 근거가 없는 것이다.”9
1910년 런던에서 출판된 선교사 브룸홀(Marshall Broomhall, 海思波, 1866-1937)의 책 『중국 이슬람: 방치된 문제』(Islam in China: a Neglected Problem)에는 산둥(山東) 린칭(Lin-tsing, 臨淸)에 머물던 선교사 길리브레이(Donald Mac Gillivray, 季理斐, 1862-1931)가 청진사를 방문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10 그 방문기의 제목은 “중국의 청진사”(The Clean Sect in China)이다.11 길리브레이의 방문기는 청진사를 건축적 시각으로 관찰하고 소개한 것이 특징이다. 1만 명 정도까지 수용할 수 있는 건축 규모와 성 소피아 사원과 다른 지붕 양식도 자세히 묘사하였다. 흥미롭게도, 예배당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으라는 요구에 대해 길리브레이는 다음과 같이 불만을 토로했다.
중국인들이나 일본인들은 신발을 벗고 입장하는 데 익숙할지 몰라도 원래 구두끈으로 꽉 조여 매는 신발을 신는 서양인들에게는 신발을 벗는 것 자체가 번거롭고 쉽지 않은 일인지라, 방문하러 온 일부 외국인들은 ‘용서받지 못할 무례함’을 무릅쓰고 신발을 신은 채로 들어갔다.12
에드킨스와 마찬가지로 길리브레이 역시 예배당 안에 비치된 장례 용구들, 예배 전에 목욕재계하는 샤워실 등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길리브레이는 “원뿔 모양의 모자와 머리수건, 그리고 길게 땋은 변발(髮)이 없는 것, 온통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말, 이 모든 것은 이곳이 중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오직 한 가지 물건만이 이곳이 중국이라고 느끼게 하는데, 그것은 곧 예배자들의 손에 들려 있는 중국 부채이다.”라고 소개한다.13
중국 이슬람 문헌에 대한 직접적인 탐구
선교사들의 중국어 어학 능력이 향상됨에 따라 서양 문헌을 통한 간접적인 탐구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중국어로 된 이슬람 문헌에 대한 직접적인 탐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결과물들은 1886년부터 발표되었다. 선교사 클라크(Geo. W. Clarke, 花國香, 1852-1936)가 The Chinese Recorder 1886년 7월호와 8월호에 연재한 글 “이슬람의 중국 전래 소개”(The Introduction of Mohammedanism into China)는 클라크가 중국 무슬림 친구로부터 빌려온 『西來宗譜』(서방으로부터 온 족보)를 소개한 글이다.14 그가 소개한 『西來宗譜』는 윈난 신싱(新興) 출신의 마계영(馬啓榮)이 광저우의 가장 큰 청진사인 회성사(懷聖寺)에서 이맘(阿訇)으로 재직할 때 역대 이슬람 전승들을 편찬하여 1876년에 출간한 책이며, 분량은 약 4,000자에 이른다. 이 글에서 클라크는 『西來宗譜』에 기재된 중국 이슬람의 전래 역사를 소개하였다.
클라크에 이어 선교사 호그(Charles Frederick Hogg, 何格, 1859-1943)는 1891년에 중요한 중국 이슬람 문헌 세 편을 The Chinese Recorder에서 소개하였다. 6월호에는 『回回說』(회회설)을, 8월호와 9월호에는 『修眞蒙引』(수진몽인)을, 12월호에는 『天方典禮』(천방전례)를 소개하였는데,15 앞의 두 문헌은 이슬람 교리를, 마지막 문헌은 이슬람 율법과 예전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중국어로 쓰인 이슬람 문헌에 대한 탐구는 선교사들의 중국 이슬람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중국 무슬림 학자들도 선교사들의 이런 사역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다음 글에서는 중국 무슬림 ‘이맘’들이 선교사들에게 보인 반응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주(註)
1 이하 인용문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Robert Morrison, A Memoir of the principal occurrences during an embassy from the British Government to the court of China in the year 1816 (London: Black, Kingsbury, Parbury, & Allen, 1819), 92-93.
2 Elijah C. Bridgman, “Review: Ancient Account of India and China by Two Mohammedan Travelers, translated by Eusebius Renaudot,” Chinese Repository, Vol.1, No.1 (1832. 5): 6-15; No.2 (1832. 6): 42-45.
3 Translated by Eusebius Renaudot, Ancient Account of India and China, by two Mohammedan travelers (London: Printed for Sam. Harding, at Bible and Anchor, on the pavement in St. Martin’s Lane. MDCCXXXIII).
4 Dabry de Thiersant, Le Mahométisme en Chine et dans le Turkestan Oriental (Paris: Ernest Leroux, 1878).
5 H. V. Noyes, “Mohammedanism in China,” The Chinese Recorder, Vol.20 No.1 (1889): 10.
6 Samuel Wells Williams, The Middle Kingdom: A Survey of the Geography, Government, Education, Social Life, Arts, Religion, Etc. of the Chinese Empire and Its Inhabitants (New York: Wiley&Putnam, 1848). 윌리엄스는 1832년 광저우에 도착한 이후 1876년까지 중국에서 선교사, 외교관, 중국학 학자로 활동했으며, 오랜 기간의 생활과 체험을 바탕으로 중국과 관련한 많은 저작을 남겼다. 이 책은 그 대표적인 저작으로 19세기 초 중국의 지리, 역사, 문화, 종교, 학문, 과학, 정치, 예술 및 외교 등 다방면에서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으며,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세계에서 중국을 이해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7 H. V. Noyes, “Mohammedanism in China,” The Chinese Recorder, Vol.20 No.2 (1889): 71-72.
8 A. G, “The Hiang Fan(響墳) or Echoing Tomb, a Mohammedan mosque and burying-ground near Canton,” Chinese Repository , Vol.20 No.11 (1851): 77-84.
9 J. Edkins, “Note on Mohammedanism in Peking,”The Chinese Recorder, Vol.1 No.9 (1869): 176-177.
10 Marshall Broomhall, Islam in China:a Neglected Problem (London: Morgan&Scott, 1910), 183-190. 이 책에서 브룸홀은 길리브레이의 방문기가 아직 공개되지 않은 미발표 원고이며, 길리브레이가 린칭에 거주하고 있을 때 방문한 것이라고만 밝힐 뿐 방문 시기에 대해 정확히 언급을 하지는 않았다. 길리브레이가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바로 1888년 12월에 린칭에 도착하였고, 1890년 5월 상하이(上海)에서 열린 “제2차 기독교 재중 선교사대회”에 참석하여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戴德生, 1832-1905)를 만나 허난(河南) 지역 선교 협력 문제를 논의하고 난 후 10월에 선교 거점을 허난으로 옮겼던 것을 감안하면, 길리브레이가 린칭의 청진사를 방문한 시기는 1890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참고로 브룸홀은 허드슨 테일러의 여동생(Amelia Taylor Broomhall, 戴賀美)의 아들이며, 1890년 10월에 중국으로 파송되어 외숙부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사역을 돕다가, 1900년에 런던으로 돌아가서 내지선교회 총무로 27년간 사역하였다.
11 중국에서는 처음부터 이슬람 사원을 ‘청진사’라고 불렀는데, 한자로 ‘맑을 청’(淸), ‘참 진’(眞)이다. 길리브레이는 이 한자어의 뜻을 그대로 옮겨 영어로 ‘Clean Sect’라고 칭한 것으로 보인다.
12 Marshall Broomhall, 앞의 책, 185.
13 Marshall Broomhall, 위의 책, 190.
14 Geo. W. Clarke, “The Introduction of Mohammedanism into China,” The Chinese Recorder, Vol.17 No.7 (1886): 269-271; No.8 (1886): 294-295.
15 C. F. Hogg, “Mahommedanism(回回, a Review),” The Chinese Recorder, Vol.22 (1891): 263-264; “Mahommedanism(修蒙引, a Review),” The Chinese Recorder, Vol.22 (1891): 354-358, 401-405; “Mahommedanism-Laws and Ceremonies,” The Chinese Recorder, Vol.22 (1891): 546-553.
문영걸|목원대학교(교회사)와 북경대학교(종교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지식계층의 기독교 이해” 등의 논문이 있다. 제주반석감리교회 담임목사이며, 미도(美道)중국선교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