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가입한지 오래되었지만
사리암에 갈 기회가 자주 없다보니 글 하나 올리기가 쉽지 않네요
그래서 장마철이라 심심하실것 같아 사월 초팔일에 다녀온 글하나 올려 봅니다.
팔만대장경
대한한국에 살면서 법보 종찰의 해인사 수다라장과 법보전에 본관 된 팔만대장경을 모른다면 한국 사람이 아니라 해도 무방하며
그것은 선조들의 억척스러운 고집이며 최고의 유산이며 고려 백성들의 간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방대한 장경이 모셔진 곳이다
간단하게 숫자로 본 팔만대장경은 모두 81,352장이며 평균 무게 3,5kg & 284톤 , 길게 줄지어 놓으면 60km
글 자수는 52,729,000자 그중에 오타는 158자라고 한다.
그리고 책으로 엮으면 6천 8백 2권이며 한문에 능통한 분이 하루에 한 권씩 읽는다 하더라도 18년이 걸리는데
어느 스님께서 하루 7시간씩 30년이 걸려서 모두 읽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대장경은 2차,3차에 걸친 여, 몽전쟁으로 지칠 대로 지친 고려인들의 절박하고 간절했던 염원과 마음
몽고의 침략을 불심으로 맞서기 위해 제작된 판전은 16년간 연인원 50만 명이 동원되었으니
그 간절했던 마음이 불심으로 이뤄졌을지...하지만 6차때는 고려인 포로 21만 명이 잡혀 가는 불운을 겪는다.
1398년 대장경이 강화도 선원사에 있던 것을 지금의 서울 시청 맞은편인 용산 지천사로 운반되었다가
해인사로 옮겨졌는데 어떠한 경로로 해인사까지 이운되었는지 사초나 실록에 기록이 전무하다.
다만, 육지 이동설로는 강화-서울-양평-여주-충주-백두대간 계립령-문경-상주-대구-현풍- 고령 개령포- 해인사
바다(海)이동설-강화-서해-남해 -낙동강-고령 개령포 -해인사
학자들은 육지설과 바다로 이운되었다는 각자의 생각을 주장하고 있으나, 어디로 옮겨졌는지도 중요하지만
그 많은 판전을 수레나 머리에 이고 지고 옮겼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대단함 자체이며 미스터리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장경 이운길은 육지설대로 백두대간 하늘재(계립령)를 중심에 두고
한강과 영강 그리고 낙동강을 전체 코스를 그려보니 520km의 긴 수행길이 될 것 같다
팔만사천 가르침이 녹아든 장경이 모셔진 해인사로 가기 위해 먼 길을 돌아 찾아온 강화도 선원사 앞
늦은 시간이라 낡은 버스 승강장에서 하룻밤 보내려 준비 중이다
이번 걸음은 오롯이 노숙을 전제로 하며 걷는데 밥은 하루 한 끼나 두 끼로 제한하고
강원(승가대학), 선원(참선), 율원(계율을 공부), 모두 갖춘 해인사 대웅전 앞 정중탑에 서서 비로자나불이 계신 대적광전을
올려다보며, 한 발의 미학이 수행으로 이어져 이곳까지 올 수 있게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며 합장할 수 있도록 빌어 본다.
최근 얼마간 사용하지 않았는지 먼지가 가득하고
도로가에 자리를 잡다 보니 차가 한대 지날 때마다 먼지가 들어와 방독면이라도 하나 준비해야 할 것 같다.
비몽사몽으로 잠을 잘까 했으나 계절이 농번기라 무논의 개구리 소리는 천군만마가 지나간 듯 우렁차고
어디서 들리는지 소쩍새 소리와 홀딱 벗고 새가 밤을 지새우게 만든다.
선원사지 절터
고려 때 이곳에서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가 조선 태조 7년 5월에(양력 6월) 합천으로 먼 길 여행하듯 옮겨진 대장경
그 길은 멀고 험했지만 육지 이동성을 유추해서 한번 걸어 봅니다.
경남 합천까지 장장 520km의 길을 시작해 보며
코스:강화도 선원사지-김포 보구곶리-한강-서울-양평-여주-원주-충주-월악나루-덕주산성- 계립령(하늘재)-문경읍-점촌-상주-김천-구미-대구-현풍- 고령-해인사 518km
날짜: 2023년 5월20일-27일까지
참고로 계립령은 신라 아달라왕때인 156년에 개통
문경의 새재는 조선초기 태종 14년에 1,414년에 개통
조선 조기까지 계립령으로 주요 교통 이동로 이었기에 팔만대장경은 계립령으로 지났다고 보임
아직 새벽이라 선원사지는 옛 영화를 잠시 잊고 긴 꿈을 꾸고 있나 봅니다.
산새소리 이외 들리는 건 아무것도 없고
조용하기만 하다.
참고로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 시대 때 물자 수송 능력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사람은 평균 23-30kg
소나 말 60-100kg
구르마(수래) 400-600kg
배(표준) 1 척당 6만 5천 kg 이 정도면 대충 쌀 1000석 규모 ) 쌀 한석은 대략 100kg
이제 팔만대장경을 어떻게 실어서 운반하던 수송능력에 의해서 운반하는 걸로 상상해 보고
생각은 각자의 몫으로...
아참! 대장경 한 장의 무게는 평균 3-4kg이고 총무게는 286톤
숫자는 이것으로 마치고 해인사로 떠나보겠습니다.
저는 대장경 5장 무게인 배낭 20kg로 준비했습니다.
금당지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이겠죠
여, 몽전쟁 80년 동안 8차에 걸쳐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 인구 4분의 1이 죽었으며
그로부터 7년 뒤 몽고의 침략을 부추기던 최씨 무신정권의 막내격인 최의가 부하 김준의 암살로 끝난 뒤 전쟁도 끝남에 이른다.
참고로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 군부가 쿠데타로 이어 진건 고려의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가 있었고 이후 현대사에는 전두환이 있었죠
여, 몽전쟁 8차까지 이어지는 동안 동네북처럼 아무리 맞아도 인구가 죽어 소멸되어도 "우리 민족은 절대 진건 아니다"라며
코피가 터지고, 이마가 깨지고 , 전우가 죽어 자빠져도 다시 일어서는 민족이었으니 실로 대단한 민족임에 틀림없다
이 무렵 우리나라 최고의 사찰이라던 경주의 황룡사와 9층목탑, 울산 태화사가 불타고 말았는데 서양의 건물처럼 대리석으로
만들었다면 어땟을까 하는생각도 덧 붙인다.
1976년 불교 대학인 동국대학교 발굴팀에 의해 발굴되어 절의 규모가 드러나고
고려 고종 때 최우가 창건한 절이며 팔만대장경이 이곳에 있다가 조선 태조 7년에 서울의 지천사로 옮겨졌다가 합천으로 다시
옮겨진다.
선원사는 당시에는 순천의 송광사와 함께 고려의 2대 선찰로 꼽혔으나 대장경이 서울의 지천사로 옮겨진 년도에 무슨 이유에서
인지 훼철되어 역사에서 사라진 절로 기록되었다
가스할배
무슨 말을 써드려야 할지
이번 걸음에 너무나 큰 힘이 되었던 분입니다.
일단은 가면서 말씀드리죠
선원사 절터옆에 자리 잡은 또 다른 선원사
이곳에 계시는 스님께서 한 달간에 걸친 팔만대장경 이운길을 진행하셨다고 하셨는데
이른 새벽이라 만나 뵙지 못했습니다.
스님의 수고로운 길 저도 한번 가봅니다.
멀리 속리산 천왕에서 분기된 산줄기가 안성땅 칠장산에서 부터 한남정맥이란 이름표를 받고 이어온 끝머리 문수산이 보이고
해안으로는 철책이 길게 자리한다.
앞으로 강화대교가 보이고 그 앞으로 팔만대장경을 배로 실었던 갑곳리 나루터
팔만 대장면 5장 무게인 20kg의 배낭을 메고 500km의 길을 나섰으나
벌써 어깨에 통증이 전해지는군요
팔만대장경 2,5톤 차량으로 100대 분량인데 그 당시에 쿠팡의 로켓 배송도 아니고
배에 실었거나 소 달구지에 실었거나 결국은 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 민족은 배달의 민족임에 틀림이 없다.
강화대교를 지나며
팔만대장경을 배로 실어 건너편 갑곶나루 선착장에 기다렸다가 밀물 때 한강으로 올라갔겠죠
이곳을 빠져나간 팔만대장경은 지금의 여의도 원효대교 부근에서 병사 2천 명으로 하여 지천사(지금의 서울 시청 맞은편 용산)로 옮겨졌다가 해인사로 다시 옮겨진다.
혹자는 왕실 사찰이던 서울시 성북구의 흥천사를 지천사로 이야기하지만 흥천사는 지천사가 될 수없다.
그리고 이곳 갑곶의 유래는 고려 고종이 강화도로 피난 갈 때 물길이 좁고 수심이 얕아 군사들이 갑옷을 벗어서 쌓아 놓아
그걸 밟고 건널 수 있었다는데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본인이 그냥 빤스 입고 가면 안 되나...
작년까지 작은아들이 군생활을 하면서 보내던 해병군부대를 통과해야
이 녀석이 어떤 곳에서 군생활을 했는지 아들의 땀 냄새가 날 것 같아 심장이 두근두근
부대를 지나며
존경하는 가스 할배와 수백 년 된 느티나무
평화누리길
몇 해 전에는 철책 옆으로 곱게 지나다녔는데 이제는 그 길은 통제되어 경운기나 트랙터만 겨우 다닐 수 있는 비포장길로 진행
멀리 오두산 통일 전망대가 보이고
저 멀리 할배가 지나시고
날씨는 덥지만 간간히 바람이 불어와 시원함을 느껴 본다.
보이지 않는 바람만 통할 수 있는 철책은 길게 길게 이어지는데
예전에는 거의 모든 구간을 지나다녔지만 지금은 몇 곳만 다시 지나지 못하게 통제하는 곳도 있다.
한강이로군요
조선 태조 7년 팔만대장경을 한양으로 옮겼을 당시 수많은 배들이 지금처럼 밀물 때 여의도 원효대교로 쉽게 올라갔을 것 같아
눈감고 상상해 보면 그런 모습이 그려집니다.
한강 참 넓다.
백두대간 기준으로 함백산에서부터 한강 발원지가 있고 물줄기를 본다면 어천, 지장천, 옥동천, 달천 복하천, 청미천, 경안천, 탄천, 안양천 있고
북쪽으로 본다면 송천 오대천 평창강 , 주천강, 섬강과 흑천이 있고
북한강 줄기에는 소양강, 홍천강, 가평천, 조종천, 왕숙천 중랑천이 양평 두물머리에서 만나 앞에 보이는 물이 한강이 되어 흘러 온다.
할배는 언제나 제 앞을 걸으시죠
그래야 제 마음이 편안합니다.
팔순의 할배, 월남 참전 용사 그리고 국가 유공자에 대한 예우도 있지만
제가 어떠한 농담을 해도 모두 다 받아주시는 편안한 할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뒤에서 할배의 걸음을 보며 걷게 되죠
첫날이라 75km만 걷기로 해서 오늘밤은 아마도 동작 대교 인근까지 가서 노숙을 해야 하고
가다가 쌀밥 구경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럴 수 있을지...
멀리 북한산이 보이고
조선초 수도를 한양으로 설계할 때 궁궐을 감싸는 여덟 산중에 內四山으로 1, 북악산 2, 인왕산 3, 목멱산(남산) 4, 낙산이며,
外四山은 1, 북쪽에 북한산(삼각산) 2, 남쪽으로 관악 3, 동쪽으로 아차산 4, 서쪽으로 행주산성이 자리하는 덕양산이다.
참고로 한양도성 18km를 쌓으면서 연인원 50만 명 동원했는데 농번기, 추운 날, 더운 날,
장마기간 제외한 98일 만에 성을 쌓았음에도 동원된 백성들에게는 좁쌀 한 톨 주지 않았다고 하니 도동력 착취가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보여 주는 곳이다.
팔만대장경을 운반할 때도 무조건적인 징발로 노동력 착취를 했을 것 같고
평지에서의 걸음은 언제나 적응이 안 됩니다.
맨 몸이 아닌 15kg 정도의 배낭을 메고 시멘트, 아스길 하루 65km 걷기 쉽겠죠
문제는 그다음 날인데...
한남정맥을 무 자르듯 싹둑 잘라내고 물길을 만들어 놓은 아라뱃길 시작인곳도 지나고
멀리 한남정맥의 인천의 계양산이 보이는군요
한강에서 강태공도 만나고
해빠질 무렵에 제가 좋아하는 종환님께서 나오셨습니다.
초밥을 배달시켜 오셨는데 잠시 앉아 이야기 나누다가 헤어지니 마음이 허전하네요
종환님 감사했어요
종환님 뒤로 덕양산(행주산성)이 고개를 내미는군요
한강을 걸으며
동작대교를 얼마 남기지 않은 75km 지점에서 노숙을 준비하는데 밤에 비 온다고 하네요
처마가 있는 정자라 그나마 다행이었고 비가 왔는지 말았는지
5월 21일 새벽 3시에 일어나 보니 비가 조금 내렸네요
할배는 조금 춥다며 판초우의를 입으시고
한강가에는 미루나무가 많이 자라는데 어릴 적 고향마을 앞 도로가로 길게 이어지던 미루나무가 생각나서
한참 동안 고향 생각을 하며 걸었답니다.
철인경기 준비 하시는 분들인가
똥물 수준의 물에서 퐁당거리는 모습을 보며... 더러운데
참 대단한 사람들이 모인 서울이라...
편의점에서 라면 하나씩 먹고 마치 붓을 세워놓은 듯한 미루나무길을 걸어간다.
이른 아침부터 자전거 타시는 분들은 쌩쌩 달리고
뭘 타고 가던 우리보다 빨리 가는 분들은 모두가 부러움의 대상처럼 느껴진다.
마라톤 국가대표 여성 한분이 달려가다가 멋진 분이라며 아미노 양갱 하나를 주시며 파이팅을 외쳐 주시더니 저 멀리 사라진다.
고마운 분
100km 지점을 지나며
예빈산과 검단산을 가로막은 팔당댐이 저 앞에 보이고
어제보다 더 덥지만 자전거 타는 분들을 보며 지나니 참 좋군요
사모님과 골프 치다가 달려온 감악산 할배께서 한 상 차려 주셨습니다.
손님이 바글 바글한 유명한 맛집인데 오래전에 이 길을 지나며 한번 찾아간 식당으로
여주인장께서 저를 알아보시고 무침회와 파전 하나씩을 서비스로 주셨습니다.
먼 길 달려와 주신 감악산님 감사드려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이라 강폭이 엄청 넓지만
팔만대장경을 실은 수많은 배들은 이곳에서 잠시 쉬다가 여주로 향했을 것 같습니다.
팔만대장경을 배로 운반한다면 배마다 각 400장씩 톤으로 따진 다면 1,4톤 정도가 되고
약 200여 척의 배가 필요하다
국토종주를 꼭 해보고 싶다는 분들을 만나서
여성 프로 골퍼 한분이 사진을 찍고 그분들의 일행과 함께
양평읍이 보이고
140km 지점
늦은 밤 갈산공원 정자에 노숙을 준비하는데
가스 할배의 발바닥 너무 처참하여 약과 드레싱 밴드를 드립니다.
정자에 노숙을 하니 새벽까지 운동하시는 분들이 지나다녀 잠을 설치는데
아직 덜 피곤 한지도 모르겠어 다음날 밤에는 좀 더 잘 잘 것 같기도 하고
5월 22일 어김없이 새벽 3시에 출발
양평의 맑은 흑천을 지나서
이포보가 보이고
발바닥이 엄청 불편하실 텐데
지금은 없어진 여주와 서울을 잇는 어량진 나루터를 지나며
여주보를 지나
멀리 양평의 추읍산이 보이는데
추읍산은 한강 물길을 찾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산으로 보인다.
한강을 오고 가는 배들이 멀리 추읍산을 보며 이제 한양이 다 왔구나며 생각했을 테니
여주 영일대에서 본 한강과 성주봉 방향
영일대에 올라서 잠시 누워 낮잠도 자보고
강천보
저곳에서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서 한낮의 더위를 식혀 보는데
그늘은 1도 없고
덥기는 무지하게 덥고
가스 할배
멀리 강원도 횡성군 봉복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해 횡성과 원주시를 지나온 섬강이 남한강에 합류하는 곳
이곳은 흥원창으로 인근고을의 세곡(稅穀)을 한양으로 운반하던 곳인데
소양강창과 가흥창과 함께 좌수창으로써 원주, 평창, 영월, 횡성의 강원도 영서지방 남부 5개 고을의 세곡과
울진 삼척, 평해 영동지방 남부 4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 보관 하였다가 서울에 있는 조창을 운송한 곳이다.
조선초기에 팔만 대장경은 운반했기에 가흥창은 아직 없었을시기
경기도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을 지나며 이제 충청도 관찰사땅으로 접어든다.
양반의 고장 충청도 땅으로 들어와 본 남한강 모습
길게만 느껴지던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하늘이 심상찮아 뒤돌아 보니 먹구름이 몰려있고 그 속으로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게 친다.
아직 노숙할 지점까지 가려면 멀었는데 일기예보 검색을 하니 지금부터 새벽 3시까지 비가 잡히고
비 맞는 건 상관없지만 잠자는 것까지 방해를 받는다면 앞으로가 문제가 될 것 같아 인터넷으로 민박집이며 여관을 검색해 보니
보일리 만무한데 마침 길가 한편에 황토방 민박집 안내글이 있어 전화를 하니
주인장 께서 수리 중이라며 안된다고 하신다
민박집주인께 사정 이야기를 하니 잠시만 기다리면 그리로 가겠다고 하신다
잠시 후 봉고차 한대가 앞에 서는데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봉고차로 20분 정도 산길을 올라오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민박집에 도착하고
방값을 지불하려고 하니 너무 대단하신 분들이라 방값은 따로 받지 않겠다고 하신다.
하는 수 없이 성의 표시라며 5만 원을 드리니 괜찮다며 하시며 보일러와 따뜻한 물이 나오도록 손 봐주시고
"편안하게 주무시라"며 하시더니 내려가신다.
주인께서 주신 라면으로 허기를 달래고 휴대폰 배터리 모두 충전 준비하고 씻는 건 포기하고 그대로 꼬구라진다.
알림 없이 일어나는 습관 때문인지 어김없이 새벽 3시에 일어나 잠자리 정리와 청소하고 밖으로 나와보니 비는 다행히 오지 않았고 30분 정도 내려와 남한강에 도착해서 길을 이어간다.
5월 23일 비내섬 역사 드라마 촬영지죠
이곳에서 잠을 자려고 했더니 비가 온다고 해서 간밤에 편안하게 잤던 것 같습니다.
할배는 오늘 충주에서 조기 퇴근하시는 날이죠
잠에서 깬 비내섬이며
곱게 분 바르고 우리를 맞이하는 모습에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물집 하나로 장거리를 망치는 경우가 많은데
대단함을 넘어 존경한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물집 사진을 찍어왔지만 너무 심해 올리지 못한 점 용서하시고요
조선시대 한강 끝자락에 왕들이 기거하시니 자연스럽게 한강 뱃길 문화가 발달하여
곡식과 소금배가 활발하게 오르고 내렸던 곳이지만 지금은 그저 말없이 흐르기만 할 뿐
눈감고 잠시 생각해 보면 오르고 내리던 돛단배의 노 젓는 소리가 들릴 듯하다.
감자밭에서
뭐가 좋다고 저러는지
그늘 없는 길을 지나며
반대편으로는 조선 시대 때 목개나루터가 있던 자리인데 올라오다 보니 놓치고 말았네요
목계나루는 영덕천이 남한강에 합류하는 지점에 있으며 그 옛날 영남이나 강원도에서 생산되는 물품이나
서해에서 생산된 소금이나 젓갈 종류가 상류고을로 운반되던 곳이다.
그리고 그곳 맞은편 지금 지나온 뒤로는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세금을 거두어 한양으로 보내던 가흥창이 있던 곳으로
목계나루와 마주 보며 있었으나 세월이 변한 만큼 역사의 흔적은 없어졌다.
팔만대장경이 한강길로 올라왔다면 분명 목계나루에서 막걸리 한잔 하며 잠시 쉬었다가 월악으로 지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덧붙이며
수문을 지나
물은 가장 약하지만 가장 강한 것이기도 하다.
세상 살면서 물처럼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저 아래로만 흐르는 물처럼, 때로는 높은 폭포에서 망설이 없이 떨어지기도 하고
어떠한 그릇에 담기더라도 어울리고 그리고 뭇 생명을 살리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그 어떠한 것도 바라지 않는...
중앙탑과 보현산 방향으로
중앙탑은 신라 석탑 중 가장 큰 규모의 탑이며 신라 원성왕과 관련이 있는데
신라 국토의 중앙이 어디일까 알아보기 위해서 국토의 남과 북 끝지점에서 한날한시에 출발시켰더니
저곳 중앙탑에서 만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곳.
속리에서 온 달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에서
이제 할배와 헤어질 시간이 다 돼 가고
기념으로 한 장 남겨 봅니다.
탄금대와 달천이 보이고
달천은 속리산에서 발원해 법주사 앞을 지나 보은과 청주, 괴산을 깊숙하게 파고들며 흘러와 남한강에 합류하는
다슬기가 많이 서식하는 맑은 하천이다
충주 목행대교의 아름다운 모습이고
물집으로 인해서 발바닥이 한 움큼 떨어져 나갔지만
아프다거나 포기하겠다거나 이러한 말씀 없이 강화도에서 이곳까지 220km를 걸어주신 할배
제가 이번에 너무나 많은 걸 배웠구요
한 발의 아름다운 미학의 진정한 고수는 할배 였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멀어지는 가스 할배
"서로 마음이 아프니 뒤돌아 보면 안 되고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렇게 멀어져 간 가스 할배
둘이 걷다가 이제 혼자가 되니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중얼거려야 할 입은 풀로 붙인 것처럼 말이 없어지고
석가모니 석가모니... 이 말만 한없이 옹알이합니다.
한강을 거슬러온 팔만대장경이 여울을 만나면서 고생 좀 했을 것 같은 구간이 보이고
풍경이 아름다운 집 카페 여사장님
날씨는 덥고 카페에 들러 시원한 음료수 한잔 하려니
주인께서 소고기 구워 밥 한 그릇 차려 주시겠단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가스 할배와 둘이 이곳에 왔더라면 하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아뇨 있다가 충주에 계시는 형수님을 만나기로 해서 빨리 가야 합니다라고 정중히 거절하니
"꼭 밥 한 그릇 대접하겠다"며...
훗날 이곳을 지나면 꼭 들리겠다며 말씀드리고 밖으로 나선다.
카페 사장님의 힘이 되는 말씀에 소고기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
충주댐 옆에 자리하는 계명산이 보이고
철길 넘어 지등산과 관모봉이고 우측은 계명산
3시 무렵에 계봉산 넘어 마즈막재에서 형수님과 만나기로 해서 마음이 급해진다
충주댐에서 흘러나온 물은 무척 맑게 보이고
충주댐
충주댐부터 종댕이 길이라고 아름다운 충주호를 보며 걸을 수 있게 둘레길이 만들어져 있고
마즈막재가 가까워질수록 걱정이 앞선다.
지금의 내 몰골을 형수님이 보신다면 또 뭐라고 하실까?
등산을 다니시거나 가까운 길을 운동삼아 걸으신다면 어느 정도 이해를 하실 것 같기도 한데
멀리 월악 영봉의 우람한 모습이 보이는데 내일 아침에 저곳에 도착할 듯
하지만 굽이 굽이 돌아가는 30km 길은 사람 식겁하게 만든다.
마지막재에서 도착해서 원두막에 걸터앉아 있으니 형수님의 자가용이 도착한다.
지난 설에 뵙고 이런 데서 만나니 어색하기만 한데
"아이고 도련님 진짜 왜 이러세요"
이 말씀만 몇 번 하시는데...
웃으며 "형수님 멋지지 않으신가요"라고 했더니
너무 불쌍한 모습으로 보신다.
형수님이 가지고 오신 통닭 한 마리 배낭에 넣으며 "형수님 추석 때 봐요 그리고 저의 뒷모습은 보면 안 됩니다."
ㅎㅎㅎ 형수님의 모습이 왠지...
마즈막재에서 충주댐을 돌아가는 비포장 임도길
임도길로 자가용 한 대 내려가는데
제가 오르고 지나갈 동안 3분 정도 꼼짝 안 하고 계시더군요
이유는 먼지 날까 봐! 서 있었다고... 고마운 분께 배꼽 인사 드리고
목벌동과 살미면을 잇는 진의실재 고개
밤이면 소복 입은 여우귀신이 나타날 것 같은 깊은 산속의 고개를 지나
진의실재를 지나니 멀리 영봉이 많이 다가와 있다.
월악산 영봉의 우람한 몸매는 바위 높이 159m 둘레 4km의 월악 영봉이 위엄 있게 다가오며
하설산과 월악 영봉-하늘재가 보이는 포암산도 조망된다.
바로 앞은 충주호로 슬금슬금 기어가는 악어 형상을 볼 수 있는 악어봉이고
충주에 사시는 소석님이 찾아오셨는데
제가 충주에 가면 꼭 만나야 하는 멋진 분으로 콜라와 물을 들고 멀리까지 찾아오셨습니다.
소석님 감사드립니다.
해는 넘어갈 준비를 하고
길을 걷다 보니 인근에 사시는 부처님의 제자 한 분을 이렇게 만납니다.
제가 가진 염주와 스님이 가지고 다니시는 작은 염주를 바꿔서 목에 걸고
작아서 그런지 한결 가볍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천국 가는걸 최대치로 하지만
불교에서는 붓다가 되는걸 바라죠
충주호 둘레길
백두대간 하늘재 아래 사시는 스님께 연락을 드리니 늦어도 찾아와서 밥 먹고 절에서 주무시란다.
"스님 일단은 가는 데까지 가볼게요?" 했지만 하늘재는 내일 오전에 지나갈듯한 먼 거리에 있다
충주호 옆에 자리하는 살미면 내사리 마을 오늘은 저곳에서 하루 노숙해야 할 것 같고
내사리 마을에서 노숙 준비하고 누웠더니
반가운 맥가이버가 찾아주셔서 만나고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마을 주민분께 허락을 받고 마을 정자에서 하룻밤 보내는데
정자 안에 전기가 있어 휴대폰 배터리 모두 충전시키고 누워 본다.
12시쯤 일어나 여분의 배터리 충전 시키고
3시에 일어나니 모든 배터리는 완충되어 며일간 밥 안먹어도 배부른 날이 될것 같아 기분이 좋다.
5월 24일 어김없이 새벽 3시에 나와
밤하늘에 별은 밝고
차량의 이동이 뜸한 도로길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며
이제 한 모퉁이만 지나면 월악 영봉 아래에 도착한다.
중원에 달이 뜨고 강물에 월악 영봉이 비추면 다시 오겠다던 마의태자의 한이 서린곳이라 충주호의 차가운 물빛이 더욱 애절하게 보인다.
영봉아! 너는 아느냐 마의태자의 한을 그리고 팔만대장경이 옮겨지던 날을
멀리 끝자락에 충주시의 계명산과 관모봉이 아침인사를 하는 듯 보이고
팔만대장경을 실은 배가 저곳까지 왔다면 월악 영봉을 방향으로 잡고 올라왔으리라
물은높은곳에서 한 곳으로 흘러왔지만 나그네는 지난밤 잠시 잠을 청하고 빙빙 돌아서 멀리도 왔구먼
오늘은 백두대간 하늘재를 넘어야 하니 그또한 즐거움이고 경상도땅이라는 기분에 마음이 한결 가볍다.
첫댓글 수희찬탄올립니다 🙏
수고하셨습니다 ㅡ
성불 하시기 바랍니다.
시리우스님 수희찬탄 올립니다
좋은날 되세요
감사합니다.
비오는날 이라 가까이 내려앉은 하늘 보기 딱 좋습니다.
대단하십니다 ()()()
감사합니다 성불 하시기 바랍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성불 하십시요
시리우스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탄사가 나오네요
대단하십니다
건강관리잘하시고 좋은인연으로 함께 합니다
성불하세요()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인연 저의 수행길 자주 올려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