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유월의 어느 날
갑자기 코 맹맹하던 안내 멘트가 조용해졌다. 순간 직감하였다. 아내 역시 뭔가 낌새가 다르다 싶었던 모양이다. 아내가 재빨리 수화기를 바꿔들었다. 아내의 순간 판단은 옮은 것이었다. 전화를 바꾸자 코 맹맹 소리가 다시 들렸다. 금세 ‘어쩌지요.’란 말이 새 나왔다. 괜스레 창피하고 면구하여 나는 창밖을 향하였다. 창에 비추어진 허망한 내 모습. 구질구질한 비는 그러한 나를 세차게 후려친다.
조금 전 까지 만해도 전화를 해보라고 성화였던 아내인데 수화기를 내려놓자 뭐가 미안했는지 ‘대충 안 거잖아.’ 하며 자리를 슬슬 피한다. 놀랄 일이 아니라는 태연한 아내의 숨죽은 말이 오히려 폐부 깊숙이 닿는다. 차마 그 누구도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는 현실. 난 2012년 봄 뜻하지 않게 실직자가 되었다. 아니 파면자의 신세였다. 실직과 파면은 또 다른 형국임을 나는 그때 비로소 제대로 알았다.
파면자에게 실직급여는 주어지지 않는다. 실직은 처량하다 보지만 파면은 순순하게 보지 않는다. 월급쟁이 30년에 종지부를 찍는 사회의 매장을 말한다. 이는 외길로 산 소심하고 소신 없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생의 파멸을 의미하는 중벌이다. 이 나이 취직도 어렵지만 꿈도 못 꿀 일이다. 내게 이러한 시련이 닥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가시나무 울타리에 갇힌 절해고도의 심정만큼이나 많은 번민이 시도 때도 없이 솟구치고 스러진다. 무엇보다도 내 안에 함성이 사그라지지 않아 그런 내가 두렵다. 욕되고 떳떳하지 못하여 참혹한 지난 시간들. 간뇌도지에 이르는 패망에는 채 가시지 않은 상흔이 있기 마련이다.
모두 잠든 새벽, 원성의 곡절을 어쩌지 못하여 검게 탄 속을 자학삼아 걷고 걸으며 나는 울고 또 울었다. 수십 명을 부수고 나 또한 수십 번 죽었다. 지우고 비우고 그렇게 헛헛함을 사르는 새벽길은 차라리 까만 음영 속 외톨이 나라서 좋았다. 그런 나는 나와 다를 바 없다는 속절없다 싶은 음영으로부터 이 또한 자연의 이치로서 인과의 한 흐름이며 바탕이다 여기며 나는 그간의 나를 지우자 했다. 한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것이다 하면서 또한 체념이 또 무엇인지를 알 것도 같은 2013년 6월의 갑천을 걸으며 나는 나의 패망과 내 삶의 준위를 스스로 무찌르고 있었다.
10. 검찰청 가는 길
요즘 전직 대통령을 포함 해 지도층 인사들이 검찰청 현관 저지선에 걸음을 멈추고 서서 사진기자의 카메라 앞에 얼굴을 추켜든 모습을 자주 본다. 하나 같이 준수하고 잘 생긴 얼굴들이다. 나 같이 못 생긴 얼굴은 없다. 당당하게 서서 카메라 불빛 세례를 받는 얼굴들, 수 억 내지 수백 억 짜리 얼굴들이다. 배임, 횡령, 알선수뢰, 그런 범죄형의 얼굴이 내 눈에는 그저 당당한 지도자의 얼굴로만 보일 뿐이다. 그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주목받는 것처럼 그들을 맞아들이는 검찰청은 추상같은 곳이며 또한 영화로운 곳이기도 하다. 아무나 그곳을 향할까?
내 집에서 불과 30분 안쪽 거리에 있는 검찰청 건물은 위풍도 당당히 네모반듯한 게 마치 철옹성 같이만 느껴진다. 일부러 검찰청은 당당하고 빈틈이 없다 하는 의미로 그렇게 두터운 시멘트로 탄탄하게 건물을 만드는 것만 같다. 나는 둔산동에 위치한 그 건물을 오가다 보면서 평생 곳을 들어갈 이유는 없다 싶었는데 추상같은 그곳에서 나를 호출할 것이라니 믿기지도 않고 가기 전부터 오금이 저리고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온다. 꿈에서도 소스라쳐 놀라 깨면 푸른 죄수복에 어딘가를 무작정 걷는 모습이 자꾸 연출됐다. 나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내 안목(眼目)은 얼마나 어리숙한 잣대인가. 평생 갈 리 없다는 나부터서 모든 것은 법정에서 밝혀질 거라는 그들의 당당한 말투도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말처럼 무슨 착오가 발생했지 싶기만 했다. 하지만 그들은 며칠이 지나면 한 결 같이 모두 푸른 복장으로 갈아입고 호송 버스에 올랐다. 여지없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도 그럴까 싶어 더욱 긴장하고 초조했었다. 급한 마음에 고발조치를 했다는 다음 날부터 나는 변호사를 찾아 다녔다. 그 분야를 알 리 없는 나는 기껏 찾은 맨 처음 찾은 인물이 근무처의 고문 변호사였다.
그런데 만나기로 한 날 변호사 측에서 아내 상을 당했다며 장기간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알려 왔다. 올해는 하는 일마다 꼬이고 만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무섭게만 느껴졌다. 그분 아내의 죽음이 내 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별개의 것인데도 불길함으로 연관 지어 생각한다는 것은 그만큼 나약해진 내 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잠도 못 이루고 갈증은 심해만 갔다. 해갈이 안 된다면 그로 죽고 말지도 모른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인터넷에서 광고 한 줄을 발견했다.
나는 그곳조차도 너무 떨려서 내 직장 상사이면서 인생선배인 KKK 실장님이란 분하고 같이 갔었다. 개업을 한 지 얼마 안 된다는 대전 특수 형수부장 출신 KCJ 변호사 . 걱정하지 말라는 말로부터 시작한 그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의 사무실은 문을 열면 그 안에 변호사 방이 별채처럼 또 따로 있었고 그 방 앞에는 부지런히 컴퓨터 자판을 치는 여직원이 차지하고 한쪽에는 내방객을 맞이하는 소파가 놓여 있었는데 그 뒤로 사무장이라는 나이든 노인이 뭔가를 연실 끄적거리고 있었다. 변호사와는 첫 대면 뿐, 나는 그 늙은 사무장이 주 차지였다. 연필을 들고 종이를 채우는 것을 보니 그는 아무래도 컴퓨터는 못 다루는 것 같았다. 상황을 소상히 말하라는 그에게 열심히 설명을 했는데 기껏 다 듣고서는 헷갈린다며 따로 적어오라고 했다.
글 쓰는 게 취미인 나로서는 그와의 대화보다는 적어 가는 게 더 편했다. 그는 내 글 내용을 보고서는 어느 정도 납득을 했는지 아니면 일 꺼리를 줄이려는 속셈인지 글의 전후를 바꾼다든지 몇몇 법률 용어를 껴 넣는 정도로 갈무리를 했다. 그렇게 한 열흘 쯤 지나니까 나도 그 사무실의 종업원이 된 것인 양 어느 새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내 글을 들여다보다 이력이 나면 검찰청에 들고 갈 서류뭉치를 들여다보곤 했는데 당시에 제일 많은 소송 껀은 세종시의 땅 보상비에 대한 다툼이었다. 대개의 소송은 돈에는 부모 자식 간도 형제도 모두 남남으로 국물도 없다는 귀결로서의 하소연과 억울함이 봇물을 이루었다. 고모부와 멱살잡이를 하는 조카 모습을 그곳에서 봤다. 참 못 올 곳이 바로 이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또 다시 드는 곳을 나는 그렇게 한 달 남짓 출근하다시피 다녔다.
물론 그쪽에서 나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초조한 나머지 서류를 보태는 척 그냥 나가 앉아 있었다. 한 달 정도 되니 눈에 들어오는 게 많았다. 변호사님은 형사특수 부장 검사 출신답게 교도소 출입 아니면 법원출입이 대부분이었고 삼청교육대 때 군수사관이었다는 무용담을 말하는 사무장은 거의 독립 적으로 민사 껀을 다루고 여 직원은 서류 제출 내지 타이프를 치는 둥 내부 운영을 전담하는 그런 체제였다. 변호사는 첫 대면에서 내 고발 껀에 대해 연구단지가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줄 몰랐다고 하며 이것을 꼭 검찰에 고발해야하는지 의문이라고 말을 했었다. 이는 그가 수임한 사건이 워낙 굵직한 것들이라 눈에 안차지만 돈벌이로 어쩔 수없이 한다는 소리로도 들리고 정말 하찮은 사안이라서 그렇게 말하는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둘 중 하나 일 텐데 한 달을 지나서 보니 나로선 일생일대를 가르는 큰 사건이지만 내가 보기에도 사건 축에 낄 것은 정녕 아니다 싶었다.
변호사는 내게 물었다. 이것 말고 또 다른 사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뭐 잘못 보인 것이라도. 나는 근무처 감사부서가 압수한 장부를 증거로 갖고 있으면서 그 안에 적힌 내용에 대해서도 추가로 조사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고발을 했다고 말을 했다. 앞서 말했지만 허위출장 말고도 간간이 서너 달에 한번 정도 나는 팀의 운영비 쪼로 많게는 1백 만 원 적게는 5십 만원 씩 여사무원에게 주었는데 이것이 검은 돈일 수 있다는 게 그들의 추정이었다. 직책판공비, 나는 아내에게 이 돈은 내 월급이 아니고 직원을 위해 쓰라는 돈이니 손을 대면 안 된다고 일렀고 이는 십 년째 지켜온 행실인데 근무처는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직책판공비가 개인의 월급처럼 취급되는 돈이란 것을 알았다.
따지자면 직책판공비를 월급으로 순순히 쓰는 연구원 전체의 직책 자들이 모두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나를 고발한 그들은 제대로 직책판공비를 쓴 것일까. 나는 고개를 젓는다. 나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은행 본사까지 찾아가 내 통장으로부터 인출해 때때로 건넨 돈의 행방을 빠짐없이 모두 증명해보여야만 했다. 나중에 경찰서로 불려갔는데 그들은 인출금말고도 혹시나 검은 돈이 들어온 흔적이 없는지를 샅샅이 훑는 듯 했다. 나는 좀 더 캐물어주기를 오히려 바랬다. 그런 경찰관은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이겠지만 ‘선생님은 오히려 표창장을 받아야겠는데요.’ 하였다. 아무튼 당시 형사부장 검사 출신답게 변호사는 물증도 없고 증거도 앖는 데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고발내용이라고 코웃음을 쳤었다. 그러면서 ‘감사부서가 너무 나갔네요.’ 하는 말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검찰청에서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유명명사들은 속전속결로 일도 처리가 되던데 나만 애가 타지 세상은 나를 쳐다도 안 본다. 아무나 유명세를 타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아니다. 변호사사무실도 나가기가 그러해 집에서 묵으려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어느 덧 7월이 넘어서고 8월이 다가 왔다. 한창 런던올림픽으로 후끈 달아오른 우리나라, 여느 때라면 밤잠 설치며 설쳐댔을 텐데 세상의 화창함이 야속하고 그저 나는 섭섭했을 뿐이다. 나는 옥상 평상에 누워 진 더위를 차라리 달게 마셨다. 너는 하늘아래 서서 울고 있는가? 세상은 또 다시 뜨거운 계절이 와서 감꽃이 피고 쥐똥나무 흰 꽃이 쏟아져 벌들이 괜스레 서성이는데. 감나무 새 잎 새에 비단 햇빛이 흐르고 길섶의 양달개비, 파란 혼불 꽃은 저마다 무더기로 피어 흐드러지는 데. 나는 하늘 너머 은하수를 멍하니 바라보며 울고 있는가? 내가 조금만 잘 했더라면 이렇게 내 자신을 나무라지도 이 세상을 원망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북극성 너머 아버지 계신 곳이 마냥 그리운 잠 못 이루는 여름 밤, 그렇게 꼬박 뜬 눈으로 밤을 지켜서야 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하는 말이 연상되는 스포트라이트에 선 그들과는 판이하게 당당하지 못한 나의 검찰청 길은 그렇게 고달프고 마냥 떨리기만 했다.
11. 지노위(지방노동위원회) 판결
올림픽이 다 끝날 쯤 둔산 경찰서에서 출두하라는 연락이 왔다. 검찰만 생각했던 나로선 아주 뜻밖이었다. 검찰의 지휘를 받고 경찰서가 일선에 나서서 수사를 한다고 했다. 내가 찾아 간 곳은 지능수사팀으로 사기유형을 맡아서 보는 곳이라고 했다. 내 죄목이 허위 출장으로 공금을 유용한 것이니 당연 그곳이 맞을 것이다. 그곳에 가던 날, 내 옆에는 휴대폰을 싼 값에 사주겠다고 인터넷 광고에 올려놓고 등쳐먹은 놈이 옆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한마디로 등쳐 먹은 놈들은 모조리 그곳에 모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는 반말을 찍찍해대며 몇 번의 호통을 얻어맞는 데 반해 나의 대우는 전혀 달랐다. 그에 비하면 극진함 그 자체였다.
잔뜩 긴장한 나로선 어쩌자고 그런가 싶고 오히려 더 겁이 났다. 죄를 져 온 마당 핀잔을 듣고 거칠게 굴어도 별 할 말이 없다 싶은 심정이었는데 말이다. 별반 묻는 게 없다 싶은 조사는 들어간 지 딱 2시간 만에 싱겁게 끝이 났다. 오히려 여기 오기 전 받았던 근무처 감사부서의 추궁이 더한 숨통 조르기였다. 10년 치 아내와 내 통장사본을 내고 그 외에 몇몇 보충자료를 덧붙이자고 했다. 그간 나는 수사에 대비해 쓰던 휴대폰도 가급적 피하고 탐문할지도 모른다 싶어 거동도 삼가고 수사에 만전을 대한다고 준비했는데 이렇게 허술하다니 오히려 그간의 진땀 어린 노고가 아깝다 할 정도였다. 아무래도 나는 그간 드라마를 너무 본 모양이다. 미리 준비해 둔 것으로 딱 하나 맞춘 것이 있기는 있다. 나를 호출하기 전 돈 관리를 맡아서 했던 근무처 팀에 계약직 여직원을 부르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는 생각 그대로였다.
사전에 나는 K 부장님에게 부탁을 했었다. 그는 내 선임자로서 전직 팀장님이셨던 분으로 당시는 정년퇴직을 하고 위촉 직으로 근무를 하고 계셨던 것인데 나를 위해 선뜻 나서서 여직원을 만나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겁에 질린 여직원은 나오지를 않았다고 했다. 나 때문에 곤욕을 치룬 여직원이 아니었겠나 싶다. 감사부서에서 꽤 많은 시달림을 당했다고 들었다. 대신 그녀의 아버지가 나왔기에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혹시 부르면 있는 그대로만 말하라고 했다고 했다. 그리고는 서류를 제출하러 경찰서를 한 번 더 갔다. 그때는 채 한 시간도 안 걸렸다. 허위로 쓴 출장비 전액을 환수조치까지 했다면서 그 안에서 징계를 하고 말 것인데 왜 여기까지 보냈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며 담당 형사는 아무리 봐도 과도하게 대한 것이라고 말을 했다. 그러면서 선생님의 공적 사항이 있다면 아주 써넣기가 좋은데 그것이 못내 아쉽다고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사람들의 말이다. 나는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경찰서를 흡족한 마음으로 나섰는데 결과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곳을 다녀오고 바로 다음 날 변호사 사무실에서 급히 나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여직원의 상기된 목소리가 내 가슴을 쿵쿵 뛰게 만들었다. 그리고 만난 변호사님, 그는 대뜸 ‘뭐 그놈들 기소의견으로 송치했던데 뭘.’로 말을 이어갔다. 말인 즉 안 좋은 의견으로 온 것을 그가 기소유예로 풀어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수고덕분인지 아니면 사안이 워낙 시답지 않아 그냥 묻어버리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른다. 다만 그는 일이 잘 성사되면 받는다는 성공보수를 정하기는 했는데 받지 않았다. 결국 검찰청 가는 길에 선 나로선 천만다행으로 문턱만 잠시 넘었을 뿐이다. 역시 검찰청은 아무나 드나드는 곳이 아닌 모양이었다. 민원실이란 곳에서 기소유예란 통보서를 받아 쥐고 문턱을 다시 넘을 때 담당자가 한 말이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5년 안에 똑같은 일로 문제가 생기면 가중 처벌되니 명심하세요.”
이는 죄는 있지만 정상을 참작해 봐주는 것이니 앞으로 정신 차려 똑바로 살라는 검사님 말씀을 대신 한 것이나 진배없을 테다. 하지만 기소유예라고 끝이 날 것이 아니다. 여전히 앞이 캄캄한 현실, 원래 법상으로는 3백 만 원 이상 벌금형이 아니고서는 부당한 해고를 할 수 없는 게 법 조문이다. 그런데 내 경우 이미 파면을 시켰기 때문 원상복구가 되려면 또 법에 호소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공무원과는 달리 내 경우 근무처가 정부출연기관이라 이때는 민간인으로 취급되어 행정소송이 아니라 민사소송을 거쳐야만 한다. 기관은 책임성의 문제가 있기 때문 대법원까지 가 최종 적인 결정이 되어야 어쩔 수없다는 듯 이를 수용하는 것이 태반이다. 갈 길이 너무 먼 현실, 나로선 불명예가 어느 정도 씻겨 졌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그 정도로 말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런 나에게 서광 [曙光]같은 빛이 깃든 것은 나로선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였다. 생각해보면 강변호사는 나에게는 구세주 같은 존재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는 8월 초순 내게 밑져야 본전이니 지방노동위원회에도 제소를 해보는 게 어떠냐고 했다. 퇴직하고 3개월이 지나면 제소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는 보통 노무사들 아니면 본인이 직접도 하니 그쪽도 마저 알아보라는 거였는데 변호사도 취급을 하기는 한다고 하기에 그에게 간곡히 부탁을 해 일단 그쪽에도 제소를 해 놓은 상태였다. 나는 보직을 놓으면 자동으로 노동조합원이 되도록 10년 전에 해놓았는데 내 스스로도 내가 노조원인줄은 까맣게 몰랐다가 근무처에서 마지막 받은 5월 달 월급에서 노조비가 떼인 것을 보고 안 내 신분이었다. 이는 나에게는 고귀한 혜택이었다. 9월 초던가 저녁 무렵 갑천을 걷는데 나의 처지를 말하는 왠 사내의 전화 한 통을 받았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기를 민주노총 소속의 지방위에 파견 나간 전교조를 대표한 국어선생 아무개라고 했다. 그는 다짜고짜로 3일 후 날짜가 잡혔는데 증인으로 같이 올 사람이 있느냐고 했다. 전혀 뜻밖이고 아무런 생각이 없던 상황이라 뭐 그런 것이 필요 하느냐는 듯 반문하자 그는 내 말에 적이 당황 한 것 같이 보였고 나 역시도 그의 반응에 엄청 당황을 했었다. 무슨 증인이 필요하죠. 그는 이어진 이 말에 더욱 놀라고 있었다. 그의 말은 대충 이러했다. 이명박이 들어서서 여실히 좁혀진 노동자 인권이긴 한데 선생님 건은 심한 점이 있다싶어 구제가 가능하다고 보는데 증인이 뒷받침을 해주면 아주 좋을 것 같다는 그런 말이었다. 무슨 증인이 필요한 건가요? 고작 남은 3일, 관례처럼 허위 출장을 썼다는 말을 해줄 사람이 과연 내게 있을까.
지노위 개최 당일 , 나와 변호사 그리고 전임 팀장이셨던 K부장님 또 전전 실장이셨던 KKK 실장님을 모시고 법정에 들어섰다. 변호사는 지노위는 결정까지 3개월이 안 걸리기 때문 노동자들에게는 돈도 안들이고 빠른 결정으로 아주 좋은 제도라고 했었다. 3명의 판결 관을 앞에 두고 그 다음 줄에 지노위 진행사항을 속기하자고 지노위 소속 직원이 앉고 그리고 양 쪽으로 갈라서 누가 봐도 양편으로 갈라선 것을 한 눈에 알 것 같은 ‘충남 지방노동위원회 사무실 대전 시 서구 청사로 189, 정부대전청사 2동 12층(둔산동)의 홀’. 3명의 심판관은 노동자와 경영자 층에서 각 한명을 추천하고 남은 한 분은 중재자 입장으로서 위원회에서 추천을 한다고 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직장동료로서 선후배로서 한 얼굴을 맞대고 수십 년을 같이 한 사람들인데 이제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마치 시위대와 대치한 전경인 양 양측은 니편 내편으로 진영을 갈라 열변을 토해내야만 하는 착잡한 상황, 그런데 보자면 한 쪽은 전경들에 중대병력에 버스까지 대동한 첩첩산중인 큰 진영인 모양새인데 이쪽 시위대는 고작 4인에 불과한 실로 가소로운 세발의 피같은 처참한 풍경이 연출하고 있었다. 서서히 싸움은 시작됐다. 단련된 노무사가 한껏 호기를 부리며 먼저 침공을 했다. 그 사람은 근무처에서 늘 보던 작자인데 여직 내가 잘못 안 게 있었다. 노무사라 해서 노동자를 위한 편에 서든지 중재자라 생각을 했는데 전혀 딴판이었다. 이야기는 드디어 첨예한 접경에 이르렀다. 분명 그는 나를 대변하는 전문가라 믿어진다. 이쪽은 별로 증인이 없으신데 오신 분들 잠시 소개를 해보시죠. 내가 나섰다. 이분은 전임 팀장님이시고 또 이분은 전전임 팀장님이십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묻는다.
이런 허위출장이 전례가 있습니까. K부장님이 일어서 짧게 답했다. "네" 그러자 그가 또 말을 했다. 옆에 계신 분도 똑 같습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KKK 실장님이 똑같이 답을 했다. 그러자 상대방 진영에서 웅성거림이 나오고 누가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하듯 이쪽을 노려보더니만 감사부장이란 사람이 시키지도 않는데 불쑥 말을 했다. 그런 것 없어진 지가 오랩니다. 그러면서 노무사가 말을 이었다. 주말까지 이에 대한 추가자료를 내겠습니다. 그는 당황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의 밥벌이에 흠집이 가해지는 것 같아 보였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그 자리에 모인 것도 다 저마다의 밥벌이로서 모인 것이다. 뭐 원수진 사이도 아니고 저마다의 밥벌이로 이렇게 다투는 것이 아닌가. 거의 회의가 종착지에 닿는 상황, 내 편에선 심판관이 내게 묻는양 스스로 답을 했다. 그 유용한 돈이 결국은 소속 원들을 위해 쓴 것이고 그런 것들이 수필에 쓴 것처럼 그대로라는 것이죠. 나는 일어서 답변을 했다. “맞습니다. 열 명의 할머니같은 글들에서 알 수 있듯이 열약한 환경에서 일하는 분들의 복지차원에서 썼던 게 사실이고 대부분입니다.”
이제는 막바지, 가운데 정좌한 좌장이면서 중간 입장인 듯 보이는 심판관이 내게 말했다. 이곳은 복도에 들어올 때부터 시끄럽고 난리법석이기 마련인데 꽤 조용하신데 선생님은 근무처가 한 것에 대해 원망스럽지 않은가요. 최후진술이다 싶으니 섧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그러한 내 처지가 가련하단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는 거의 울먹이며 말을 했다. “30년 가까이 봉직한 내 친정을 상대로 이런 소송을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억울하다기 보다는 창피하고 안타깝습니다. 다만 저는 개인 착복을 한 것은 절대 아니니 이점을 헤아려 주십시요.” 그리고 변호사가 제일 마지막으로 기소 유예가 된 현 상황과 개인 유용이 아님과 더불어 이미 손상 액은 전액 반납했음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다. 최소 며칠은 걸려야 최종판결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당일 저녁 민노총소속의 국어선생님이 다시 연락이 왔다.
3명 중 두 사람이 완강하게 돌려보내야 한다고 우기는 중인데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아마도 잘 될 것 같다는 그런 말이었다. 눈물이 왈칵 솟았다. 사실 근무처에 허위출장이 많이 없어지기는 했지만 아주 근절이 된 것은 아니다. 그 전 해만해도 내가 직접 상대하기를 시험실 수리를 한다고 계정통보를 해온 측이 연말에 쓸 자금을 못 만들었다고 부랴부랴 회수를 해갔었다. 당연 출장비 명목 등의 목간 전용을 해서 망년회라도 하겠다는 것이다. 아무튼 3일 쯤 지나 지노위 담당자란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서류를 꾸미는 중인데 아마도 1달 이내 복귀를 시키라는 공문이 기관에 갈 것이라고 전했다.
그렇다면 끝인가. 결코 그렇게 끝날 내 근무처가 아니다. 지노위에서 지면 중노위로 거기서도 지면 그들은 행정소송을 또 할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들어가는 돈과는 상관없이 기관의 행위가 정당한 것이었다고 그들은 끝까지 우길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과잉 공권력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꼴이 되는 것이 아닌가. K변호사는 내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했으니 당장 원장님을 찾아가 무릎 꿇고 복귀시켜달라고 애원을 하라고 했다. 기관장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거였는데 파면이 준 고통과 파문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은 것이었다. 과연 나는 이후 어찌됐을까. 불행이 불시에 찾아오듯 행운도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찾아오는 것도 분명 맞는 이치이지 싶다. 행복하다는 말 보다는 서광이 비친다는 말이 보다 달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흐릿한 빛 속에 스며든 어느 희망 때문이 아닐까. 그쯤 내게도 행운의 실마리가 가뭄 끝에 콩 나오듯 파란 잎을 겨우 드리우며 살포시 빛줄기를 한 모금 마시고 있었다.
12. 만남과 이별 선상에서
추석을 10일 정도 앞둔 어느 날, 그 날을 나는 도저히 잊을 수 없다. 아니 그때의 만남과 그를 나는 정녕 잊을 수 없다. 인연과 악연, 그 갈림 길에서 나는 여태 그 형태를 잘 모르겠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만남을 갖고 인연을 이어간다. 사회는 만남과 인연의 연속이며 수많은 감정의 교차점이다. 인연과 더불어 생기는 많은 일들, 속출한 감정으로써 만남은 그 자체로서 의미 부여가 되고 깊게 받아들이기도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인연이라는 별칭에 엮인 이별을 아쉬워하기도 하는 거다. 설령 무감정이라 할지라도 목석연한 흔적조차 어쩔 수 없는 삶의 자취로서 각자의 인생사의 한 편으로서 기록될 것 들이라 인연은 어느 것도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악연이란 것도 어쩔 수없는 인연이 아니겠는가. 만남이 악연이라 여겨질 때 우리는 흔히 '차라리 만나지 말 것을' 이란 말을 단서로 넣곤 한다. 이는 만남이고 어쩔 수없는 상황임을 전제한 인연임을 말하는 것이다. 재수 없다는 표현 또한 악연이란 것에 종종 따라 붙는다. "재수(財數)가 없다는 말은 일상생활에서 흔히들 일이 잘 안풀릴때나, 뜻대로 안될때 통상 쓰는데 엄밀히 말해 재수(財數)는 재물에 관한 운수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 '좋은 일이 생길 운수' 란 뜻으로 수용해 쓰는 방도를 보아서는 너를 만나 좋은 일이 생길 운수가 그만 달아나고 말았다는 또 다른 표현 같기도 하다.
운이 있고 없고는 어느 일에 우연으로서 시작한 결과의 소산으로서 이는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새기기 전 인연이 준 우연에서 막 벗어나 뒤따라 나선 어느 필연이 도사리는 그 사이 선상에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 사이라는 것이 자기 할 나름이라는 것과 어쩔 수 없는 과실이라는 것에 달려 있는 듯 보이지만 아무튼 살며 겪는 수많은 일들과 부침에는 우연의 만남이 존재한다. 그러한 그 우연이 서로를 연결시켜 주어 친구가 되고 부부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반드시 그 만남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보이지 않는 흐름, 그 과정이 좋든 싫든 있다고 나는 본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처럼 불가에서는 만남의 소중함을 여러모로 설파한다. 부모로서, 형제로서, 친구로서, 연인으로써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눈먼 거북이 바다에서 나무토막을 만나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 전생까지 더듬어 유추를 하고도 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부딪치게 되는 사건들이나,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과거에 맺어진 인연의 결과라는 것이다. 내가 과거에 선한 인연을 지었으면 현재에 선연의 결과를 얻을 것이요. 내가 과거에 악한 인연을 지었으면 현재 악연의 결과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 말이 생겨난 요지는 그 악연을 선연으로 풀어 주어야만 악연의 업이 풀린다는 의미를 전달코자 하는 것일 테고 현재 나에게 주어진 그 어느 것도 원인이 없음이 없으며 그 원인대로 결과가 만들어진다는 말에 그 주안점이 있을 것이다. 즉 피할 수없는 어느 인연이라면 이는 필연적이며 소중한 것이라는 귀결로써 악연은 악연으로써 무언가 희생을 하며 배울 것이 있으며 설령 손해만 보는 것 같다면 나는 그에게 무언가 아낌없이 주어야 하는 마음을 배워야 하는 까닭도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불자가 아니더라도 인생사에서 값진 성찰의 좌표로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음이다.
내가 그와 가까워진 것이 언제부터인지 기억이 안 나는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전임에 틀림이 없다. 그는 원자력을 대표할 우리나라의 석학으로 미국유학을 다녀온 사람인데 나와 같은 아파트 동네에 그것도 인접해 살았다. 대부분 그런 정도의 위엄이면 그에 맞는 치장을 한다 싶고 또 그렇게 하는 게 상례인 세상살이다. 그런데 그는 경우가 아주 달랐다. 런닝 바람에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돈다든지 갑천에 가서 낚시를 한다든지 동네 홍탁 막걸리 집을 기웃한다든지 하는 수수한 일상으로 서민적 풍취가 물씬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풋풋함으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마도 나도 그래서 그와 어울리기 시작했을 것인데 언젠가 부터는 우리끼리라는 조그만 막걸리 모임을 종종 갖았다.
내 근무처는 3년마다 원장을 뽑는다. 그가 물망에 오른 것은 당연하다. 원장에 등록신청을 했다는 날 나는 속리산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자연산 송이버섯을 캐는데 동참을 했었는데 내가 캔 것은 아니지만 그날 얻은 송이버섯중 제일 큰 놈을 골라 녀석을 막걸리 집 상위에 올려놓고 모두 기원을 했었다. 그때의 송이버섯 산신령 덕인지 그는 한 달 후 당당히 근무처 원장이 되었다. 그의 덕분에 그의 곁에 맴돌던 몇몇은 하마평에 올랐고 또 그렇게 대부분 한 자리 씩 차지했다. 나는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지만 복도 발령까지는 났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고 우긴다하여도 나는 이미 근무처에서는 그의 측근으로서 실세로 통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비록 부장이라는 진급 타이틀을 달지는 못했지만 물론 나는 흡족했다.
하지만 그런 태평세월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는데 나의 허튼 짓이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고 다들 보았던 모양이다. 나로선 억울한 노릇이지만 소문은 소문으로서 끝나지 않는다. 당시 노조는 원장과 사이가 극도로 안 좋았는데 빌미를 찾는 중이라는 소문이 엉겁결 들려 왔었다. 거기에 제 2 노조 신설 운운하며 민노총에 가담한 별도 비정규직들이 들고 일어나 뉴스에도 등장하고 내 근무처는 연일 시끄러웠었던 때이다. 물론 앞서 말 한대로 가짜 출장을 끊어 동료들의 복리후생에 썼다고 하지만 큰 잘못으로 그런 파국이 빚어진 것이지만 어쩌면 내가 그때의 희생양이 된 지도 모른다.
이에는 몇 가지 정황이 있다. 당시 노조에 사무국장은 내 팀 출신인데 그 무렵 원장 측으로 부터 그 친구가 문제라는 전갈을 받았었고 그리고 얼마 안 돼서 나는 본원에 팀장 직을 놓고 경주에 양성자가속기로 발령을 받았었다. 그 무렵 더 이상은 없던 것으로 하기로 했다는 식의 말이 들려왔다. 이를 나는 미운 털 박힌 나에 대한 방면조치로 나는 생각했고 그 저면에 노조가 있다 싶었었다. 그런데 일은 그때부터 더 커졌다. 감사실에서 나에 데한 조사가 대대적으로 실시되었고 종래는 인사위원회에서 파면이라는 직장인으로서는 사형에 가까운 판결문이 떨어진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사무국장이란 친구와 수석부위원장이라는 친구에게 징계를 최소화 해달라고 부탁을 했었는데 사무국장이라는 친구의 답변은 ‘그렇게 까지 될 줄은 몰랐어요. 차마 내 입으로 말 못하니 죄송합니다.’ 라는 말이었다. 이는 노조의 개입은 분명한 것인데 그 정도까지의 벌은 원한 게 아니었다는 말로 해석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다른 이상한 정황이 또 있다. 요즘 많은 그 시대의 상황이 생생이 나오던데 당시는 공공기관은 국정원 출신이 할당 받다시피 하여 관리에 가까운 감시를 했었다. 이런 상황을 그 무렵 모르던 사람은 거의 없는 엄연한 사실인데 내 근무처 담당자는 상록수를 쓴 소설가 이름과 같아 지금도 기억하는 그의 이름이다. 당시 나를 봐주려 해도 이미 국정원에서 안 된다고 했다고 당시 인사위원장은 분명 내게 말을 전했고 고등학교 동창인 직장동료를 시켜 자진해서 스스로 그만 두는 게 낫다는 암시까지 해 왔었다. 말인즉 험한 꼴 당하지 말고 이쯤 자진해서 그만두면 모두가 화평하다는 그의 쉬운 제안인 것인데 참으로 나로선 복창 터지는 사악한 말이었다.
나는 과연 이것이 국정원이 개입할 일인지 의심스러웠다. 그 말을 듣고 나도 백방으로 도움을 줄 곳을 찾았다. 그러던 중 G 부위원장이라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통해 ‘빽을 동원한다면 누구는 빽이 없냐.’ 하며 그만둘 것을 종용하는 간접적 전갈을 해 오기도 했다. 참으로 시정잡배와 다를 바 없는 거지발싸개 같은 짓거리가 따로 없다. 이게 순수하다 싶은 연구소란 곳에서 벌어질 일인가. 참 나도 알량한 인간이지만 소위 경영자라는 사람 또한 버금가지 않는다싶다. 용렬함의 극치를 보이며 나는 그렇게 파멸하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이를 치욕스럽게 생각한다. 아무튼 모든 게 나로선 역부족이었다. 인사위원장은 1치 판정에 대한 나의 이의 신청에 끝내 확정적으로 파면을 명시하고 검찰청에 고발도 병행했다. 나를 파면시키고 난 후 인사위원장이라는 사람은 나를 불렀다. 그리고 명치끝을 짓누르듯 그가 한 말이다. “살아 돌아오기 어렵지만 살아 돌아오면 거부는 않겠다.“ 듣는 순간 눈물이 솟구치고 앞이 캄캄했다. 이 말은 가망이 없다는 다른 표현이 아닌가.
그리고 추석을 10일 정도 앞두고 만난 원장님, 지노위에서 승소한 소식을 접한 후라 그가 어찌 할 것인가는 실로 내 인생을 좌우할 엄청난 지렛대였다. 그는 주저함 없이 말했다. “발령 날 때까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라. 지노위에서 중노위로 상고하자고 밑에선 말할 텐데 나는 안할 것이다. 그러니 마음 편히 먹고 기다려라.”나는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텐가. 그날 그는 너무 힘들어 돌봐줄 처지가 못됐다는 알 듯 모를 듯 한 말을 하며 만취해 돌아갔다. 그와 대면한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다. 그와의 인연이 그렇게 끝이 났다는 것이 나는 너무 마음 아프다. 내게 꼭 작가라는 말을 붙여준 그는 인문학적으로도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고 정이 많은 소박한 동네 형 같은 사람이었는데 그도 나도 매듭 없이 헤어지고 말았다. 기관장이란 직책도 순수치가 않으며 작은 집단도 권력이라는 게 악착같이 존재하고 물고 뜯고 사는 싫증나는 아수라장이라니,
많은 정파가 존재하듯 많은 변수가 도사리는 직장생활이지만 연구를 한다는 이곳에서도 예외가 아니라는 게 나는 서글프다. 서울 북한 산 푸른 집은 무소불위임에 틀림이 없다는 생각을 그 때 많이 했다. 나란 존재, 그들 눈에 그렇게 비추어졌다면 이는 맞는 것이다. 설쳐댔다가 그 지경이 되었던 것이 어디 한낱 우연이고 재수 없는 악연의 소치이겠는가. 나는 이를 지금도 자성한다. 아무튼 그와의 만남은 비록 일생일대에 큰 시련으로 번졌지만 그럼에도 굳이 안 만났던 게 낫다고 말을 하지는 못하겠다. 내가 잘못이 없었다면 그런 변고가 생겼을 리 만무이지 않는가. 전북 지리산 밑에 장수 마을에 번암 막걸리까지 찾아 나서던 그와 나 그리고 그 동지들은 당시 너무 행복했었고 지금도 두고두고 생각나는 그의 무명시절의 추억이다. 차라리 그가 원장이 언 되었더라면 하는 생각의 말미를 갖는다. 이는 그 무렵의 정겹던 때가 그리워서도 아쉬워서도 하는 생각이다. 참 사람 인연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지난 해 늦가을 아들 결혼식 때 아내는 축가로 꼭 불러주기를 바라는 노래가 하나 있었다. 우리는 당시 이 노래를 들으며 퍽퍽 울었었다. ‘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쏟아지는 햇살 받아 가을빛 고운 하늘 싱그러운 갈바람의 이야기 계절의 언덕을 넘어 들려오면 가을이 건네주는 사랑 떨어지는 나뭇잎에 내려앉아 그리움이 머물던 자리에 따뜻한 미소 내려놓고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일렁이는 그리움 가을빛에 곱게 물들어 계절의 길목에서 이 가을 보낼 수 있기에.....나는 그 무렵 다시 근무처로 돌아갈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과다한 공권력은 꼭 그 후유증이 생긴다. 노동자가 결코 유리하지 않던 시절, 파면이 부당했다는 판결을 받아 나는 구제 됐으며 그들은 과했다는 것이 객관적으로도 입증이 된 셈이다. 나는 복귀하는 시점에 인사위원장이란 사람을 공권력 남용에 따른 명예훼손으로 고발할 생각도 했었다. 변호사도 가능하다고 했다. 아무리 공권력이라지만 이는 고발 자체로도 그에게 경종을 울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사람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다. 수십 년을 한 솥밥을 먹은 사람을 무 자르듯 단숨에 해치운 사람들, 실로 그 죄는 더 크다싶다.
13. 고물기기를 치우며
집게가 물어 뜻 듯 꽉 쥐고 우지끈 힘을 주자 부지직 부지직 소릴 연발하는 기기. 순식간 형체는 알 수없이 되어 버렸다. 이 보다 ‘인정사정 볼 게 없다.’ 란 말을 실감나게 표현할 장면은 이 세상에 없지 싶다. 나이 탓인지 지켜보는 마음이 괜스레 조마조마하고 착잡하기 까지 하다. 저 장비로 말 할 것 같으면 한때 내 노라 하는 국내 몇 없다는 실험 테스트 장비가 아닌가. 들어올 때 고사도 지내고 포만감이 연구소 전체에 그득했었다. 숫한 해 박사논문도 만들고 유명타하는 학술지에 뽐을 내며 소문자자한 명품이란 말을 늘 듣고 지냈던 기기다. 사람으로 치면 이분으로 말 할 것 같으면 ‘00이시며 00이시며’ 를 대여섯 족히 단 명사격인 주제다.
그런 명품이 한 순간 그야말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차마 그 이력을 보아서도 숨을 거두었다는 표현은 쓰기가 뭐하다싶다. 고정 자산에 생기는 가치의 소모를 결산기마다 계산하여 자산의 가격을 감해 가는 회계 상의 절차. 감가상각. 회계장부상 감가상각 셈수가 이제 더 이상 용납이 안 되는 상황에 다다른 것이다. 이를 우리는 불용자산이라 부르고 시중에선 고물이라 말한다.
즉 용도 수명을 다한 기기이다. 사람도 나이가 들면 흡사 용도의 가치를 다한 양 퇴직을 하고 사회와 자연 멀어진다. 요즘은 중도 탈락도 심심치 않은 게 갈수록 용도 수명이 짧아지는 추세다. 명품 고물이 처참히 무너져 어느새 퇴물 테이블 곁에 나란히 자리를 한다. 어제만 해도 존재의 가치론 비교도 안됐는데 이제는 동료 고물이다.
어제의 가치는 어제이고 고물로서의 등급은 따로 있다. 신이 난 집게차를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마구 휘두르는 폼이 흡사 대어를 낚은 양 한다. 고물은 재활용이 가능한 철판이라면 최고의 가치이다. 천도 넘는 용광로를 거쳤던 철판은 이제 새 삶을 위해 다시 용광로를 향하는 채비를 할 것이다.
우리도 재활이라 할까. 그와 같은 부활이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말이 시중에 있다. ‘남자나이 오십이면 잘 났던 놈이나 못 났던 놈이나 그 얼굴이 그 얼굴이고, 남자나이 육십이면 많이 배운 놈이나 못 배운 놈이나 그 머리가 그 머리고 남자나이 칠십이면 돈 많은 놈이나 돈 없는 놈이나 돈 쓸 일 없기는 매한가지다.’
씁쓸한 이 말은 용도를 중시하는 한 사회의 단면이고 독설일 뿐이다. 사람들은 사회를 너무 따르기 때문 이 세상 전부인 양 종종 착각을 한다. 나이 들어 팔다리도 쑤시고 자연 고물이 되는 마당 나는 굳이 헉헉대며 사회를 추종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급급한 사회는 용도를 챙길 뿐 목적에는 관심이 없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知天命),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이치에 통달하고,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60세 이순(耳順), 이 나이가 바로 삶을 목적으로 바라볼 좋은 때가 아닐까 싶다. 삶의 목적은 각기 다르고 고유하기 때문 진중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렇게 늙고 싶다가 그런 의미의 쉬운 표현이 아닐까? 어려서는 이를 감내하거나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시중의 말대로 그 나이엔 돈도 재물도 별반이고 지식도 보잘 것 없는 지능으로 전락한다. 좁은 시야로는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없으며 뜻을 달리 둘 수도 없다. 생각에 따라서는 홀가분하여 만사가 편하고 쾌청한 사랑의 가을 하늘일 수 있다. 사유할수록 이 세상은 넓고 해야 할 일도 많다. 가끔 자신의 과거를 유창하게 현재성으로 말하며 과거를 늘려 만끽하려는 분들을 만나곤 한다. 난 그럴 때 솔직히 쓴웃음이 난다. 아직도 명예와 권위에 매달리는가 싶고 소견이 좁다 여겨진다. 철 지난 괜한 용도에 붙들려 자기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란 생각도 한다.
너저분하게 널린 큰 평수를 차지한 마당 한가득 고물을 치우는데 고작 한 시간도 채 안 걸렸다. 채우니 8톤 트럭이 전부고 값은 1천오백만원. 철판이 아니었더라면 5 백 만 원도 안 되는 값이다. 철 지난 고물인 줄 모르고 과거를 들먹이며 용도로서 제 값을 받으려고는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볼품도 포기한 고물이다. 대신 값으론 절대 평가가 불가한 자유로운 목적의 영혼을 꿈꾸며 나만의 역사를 만들며 살겠다. 나는 용도의 물품이 아닌 고유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회와 작별하는 고물기기가 내게 많은 생각을 전한다.
나는 복직을 해 자산팀 소속이 되었다. 예전 팀에서 그 난리가 났는데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상황, 예전의 자리는 고사하고 내 전공을 살리는 길마저도 막막해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맡은 일이 바로 고물치우는 일이다. 솔직히 창피했다. 나는 명예회복은 어느 정도 이루었다 싶어 그만 둘 생각을 수없이 했었다. 하지만 퇴직까지는 아직도 7년이라는 긴 시간이 주어져 있고 아직 자식들 장가도 한 명도 못 보낸 처지로 가족들을 봐서라도 차마 어쩌지는 못하였다.
현장에 나갈 때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따갑다 싶으면 나는 오로지 가족을 생각했다. 그러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시 복귀를 못해 가슴 졸이며 지내지 않았던가. 저 고물들은 내 생계를 챙겨주는 고마운 산물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미 고물 같은 신세다. 불용자산이란 명칭이 뼈 속 깊숙이 의미 깊게 다가온다. 하지만 예서 포기할 내 인생은 결코 아니지 싶다. 저 고물이 팔려나갈 때 그야말로 용도 폐기로 재생이 불가한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개중에는 빛을 얻어 소생하는 놈도 생긴다. 내가 바로 그렇게 어렵게 되돌아오지 않았는가. 나는 재생하는 철 조각 마냥 용광로에서도 끄떡없을 신념으로 용도가 아닌 목적, 지식이 아닌 지혜의 삶으로 부활한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아니 난 가끔 감히 골동품을 꿈꾸기도 한다.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골동품은 오랜 과거인데 미래를 수용한다. 고물인데 용도로서 찾지는 않는다. 품위 있는 골동품은 뭔가 다른 구석이 있다. 그만의 역사를 갖고 예술성을 지니고 세월을 초연하여 영혼을 갖고 산다. 나로선 남은 기회와 꿈이 있다. 글은 그런 면에서 나에게는 실로 보배 같은 존재물이다. 녀석을 마저 보고 고별인사를 했다. 나보다 수십 배는 더 훌륭했던 고성능 정밀 질량 분석기여, 부디 잘 가라!!!. 그간 찌지직 고문의 전기 맛 잘 견디며 수고했다. 비록 형체는 사라졌지만 이제 내 영혼은 자유다. 네가 이룬 게 얼만한 것인데. 마음속에 너를 고이 간직해두마. 녀석을 거두며 시종 나는 내 자신을 보는 양 엄숙했다. 그래! 나는 부단히 정진하련다. 나는 고물이 아니다. 나는 언제든 부활하겠다. 꼭 그렇게, 자유로운 영혼으로. (2012 10 30 새벽)
14. 죄와 벌
복직하고 1달 반쯤 지나서 다시 내 죄를 묻는 인사위원회가 열렸다. 지난번의 파면조치는 법적으로 무효 화 되었기 때문 다시 거치는 과정이다. 나는 정직 4개월이라는 벌을 받았다. 파면 다음에 해임 그리고 중한 벌이 정직일 것인데 나는 직장에서 받는 제일 큰 벌이라고 할 정직을 받은 것이다. 정직이면 그 기간 동안은 봉급이 반으로 줄고 출근도 정지되며 업무도 할 수 없다. 솔직히 파면이라는 큰일을 겪어서인지 당황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집에 틀어박혀 있으니 의당 잘못을 한 대가로 어떠한 고통이나 제재를 당하는 벌이라 할 것인데 실상은 노니 그냥 좋았다. 그러다보니 자연 백수생활이 내 천직에 맞는 게 아닌가 하는 교활한 눈빛마저 번득이는 것이 실로 예사롭지 않았다.
백수에도 등급이 있다는데 이쯤이면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안절부절 한다는 초보는 넘은지 오래고 넘쳐나는 시간이 부담스럽지 않다는 중급 수준은 족히 되겠다싶었다. 이참 무궁무진한 시간을 자유자재로 활용한다는 프로급 시테크 전문가로 아예 전향을 할까 두려웠다. 누군가 내게 ‘엎어진 김에 푹 쉬시오.’ 하였더니 평소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친구는 수양의 미를 갖추라는 깊은 뜻은 간파하지 못한 채 우매함을 한 자락 더 늘이고 말았다.
노는 데 지쳐 오도카니 돌아 선 시간, 땅거미가 지자 마음이 금세 어둑하다. 문득 나같이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일어나고 아무 짓도 아니 하는 것이 자유로운 것이고 자율이라 할 수 있을까 의심이 난다. 물부충생物腐蟲生이라 더니 딱히 정의 하지도 못하면서도 자유도 자율도 아닌 방종이고 망동妄動이란 생각이 들고 머쓱해진다. 아마도 이는 어쩌다 읽은 중인 출신 아전인 황상이 유배지 강진에서 스승 정약용을 만나 생을 바꾼 삶이 내게 큰 전율로 남아 나를 여직 쑤시는 때문인 것 같다. 하필 책 첫 대목부터서 스승 분부대로 76세 노인이 다 된 황상이 붓을 놓지 않는다는 성실한 공부(치원유고에 실린 내용) 이야기이다. “무지렁이 천한 백성이 되려느냐.” 호령을 하는 정약용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다.
자율이라면 정녕 산 무덤과 다를 바 없는 유배지에서 금옥의 학문과 예술을 꽃피운 그들 정신세계 속에 깃든 예도와 혜안이 진정한 자율이 아닐까. 뛰어난 문장력으로 ‘조선의 두보’로 통하는 소재 노수신은 순천을 시작으로 진도 괴산에 이르는 무려 20년간의 한 많은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러한 소재는 다시 영의정에 이르기 까지 16년 동안 국정을 총괄한다. 참 기 막힌 인생행로이다.
큰 시련 속에서 창작의 기틀을 만들고 이상과 꿈을 체계화한 그들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나는 소스라치고 또 감격한다. 당쟁 심한 조선시대라 한때는 남도의 유배지가 동이 날 지경이라 하였다. 명현 그들을 들여다보자니 유배지가 아니었더라면 하는 의구심마저 솟구친다. 조선시대 유배 형기는 무기종신형이다. 유배는 사형 다음 가는 중벌이자 큰 시련이었다. 그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거나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고 빛내는 계기로 삼았던 그들이다.
창작에 몰두해 후세에 남을 명작을 숫하게 남겼고, 학문에 정진했으며, 지역의 풍속을 상세히 기록해 소중한 사료를 전하였다. 이는 실로 값진 자각이고 문인으로서의 절절한 진실성이다. 진정한 고독은 윤택한 사상과 절실한 감동을 남긴다싶다. 응어리진 감정을 다스리고 승화하여 피보다 진한 감성과 예술을 술술 담아낸 그들이다. 그러한 그들의 굴하지 않는 정진의 자세를 나는 심안의 행복에서 찾고 싶다.
남해로 귀양 간 김만중도 그렇고 김정희도 정약용도 귀양내내 몸이 성하지 않았다. 정약전은 고기를 못 먹어 빈사상태에 가까웠다. 동생 정약용은 생각다 못해 개고기 처방을 써 형에게 전달을 했을 정도이다. 훗날 사람들은 그나 허균을 미식가로 평하나 난 가소롭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글에 매진한 데는 나름의 행복이 있었기 때문이다.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그것이 곧 행복.’ 이란 말을 참 많이들 쓴다.
기본적 욕망 충족을 말하는 이는 나 같은 백수근성을 갖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지 그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말이다. 기실 행복은 자기가 좋아하거나 몰두할 수 있는 일이나 대상이 있어야 하고 꿈과 희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집념과 열정이고 심안의 행복이다. 추사는 높은 지체인데도 황상의 시가 좋다 싶으니 귀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강진을 찾는다. 한양 길 오르기가 바쁠 것인데 나로선 상상이 안가는 진정한 글 사랑이다.
귀양도 귀양 나름 다산은 주군안치라 하여 강진 전역을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추사는 위리안치라 하여 탱자나무 가시울타리 안에 갇혀 지내야 했다. 다산과 추사의 유배지가 뒤바뀌었다면 어떠하였을까. 다산은 외향적인 현실을 발견한 듯 생감 있는 글 집들이 수백 편 나왔고 추사는 내면인 듯 자아에 몰입하여 조선초유의 독특한 글씨체를 만들어냈다. 백수근성을 어찌 탈피하여야 하나 생각하던 그 무렵 나는 항간에 유행하는 영화 레미제라불을 보았다. 장발장을 안타까워하고 나쁜 사람을 잡는 좋은 일 하는 자베르 경감을 미워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어린 시절 혼돈을 많이 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어린 나이 선과 악을 구분하는 수준에서 아마도 관용까지는 역부족이었을 게다. 그런데 마음에 남는 건 장발장도 아니고 그를 감싸주는 미리엘 주교의 미소다. 미소를 연상하자니 문득 유배지의 그들이 떠오른다. 순간 또 다른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세상의 인심은 사납기 이를 데 없었는데 그들은 한 결 같이 세상과 세월을 한탄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을 선으로 행하는 영혼의 승화, 관용 또한 그들의 큰 덕목이 아니었던가. 벌을 받으면서도 자율을 아끼지 않았던 그들이 내게 뭔가를 일신하여 큰 가르침을 준다 싶다. 이를테면 시련이 특별한 은혜인 양, 아니 융화한 자비로 거듭나는 인격의 수양으로서 거듭 나는. 그러기에 그들은 큰 인물이 된 것이다. 시련이 오히려 특별한 보시가 뙨 그들의 믿음, 무엇보다도 마음 속에 앙금을 훌훌 털어버려야 할 텐데...나는 여직이다. (2013년 3월)
**장장 이광사는 무려 23년이란 세월동안 천형의 삶을 살다 죽었고 정약전은 14년, 정약용은 18년, 추사 김정희는 함경도 북청 제주도 하여 10년이란 긴 시간 유배를 떠났다. 개중에는 이 한은 정녕 살아있으리라고 통곡하는 송시열이나 김이익 같은 분들도 있었고 몸은 유배할 수 있어도 어찌 마음까지 유배할 수 있으랴 하는 굴하지 않는 지조를 내세운 정도전, 조광조나 최익현 같은 분들도 계시고 푸른 바다에 몸을 씻고, 달빛에 마음을 닦는다는 유연한 신조의 윤선도 정약용 노수신 같은 분들도 계셨다. 이에는 사람의 유형에 따른 마음가짐이라 하겠으나 송시열 같은 군에 속한다 싶은 분들은 대개 높은 관직에 계셨던 분들이고 정도전 같은 군은 개혁이나 사상을 표방하는 사상가들이 대부분이다. 정약용이나 김정희 윤선도 같은 부류들은 문인의 면모가 짙은 분들이라 할 것이다.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정치란 결국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민본사상을 가다듬으며 조선 건국의 혁명을 준비한다. 정약용은 18년간이나 유배 생활을 하면서, <목민심서>와 <흠흠신서> 등의 대작을 남겼다. “왜적을 물리치지 않으려면 차라리 내 목을 베라”고 외쳤던 최익현은 유배지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훗날 의병을 일으켰던 꿋꿋한 의지를 지켜나갔다. 조선 회화사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김정희의 '세한도'는 유배지 제주에서 나왔다. 자신의 처소를 '만 마리의 갈매기가 우는 곳'이라 칭하며 외롭고 궁핍한 유배지 생활에서 여유를 찾았던 조희룡은 화아일체(畵我一體)의 경지를 화폭에 담았다. 이광사는 민족 고유의 정서와 감성을 토대로 한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하였으며, 파란만장한 삶을 겪은 윤선도는 유배지 보길도에서 국문학의 금자탑 <어부사시사>를 지어냈다. 대학자 노수신은 유배지에서 절해고도(絶海孤島)의 외로움을 시로 달래며 가인(歌人)의 모습을 보여준다.
15. 그들의 자화상을 보며
운명과 분노, 순순히 맏아들일 운명이라 한다면 분노도 지워야 할 것이다. 트로이전쟁은 스파르타 왕비인 헬레네를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데려가면서 시작된다. 헬레네의 남편 메넬라오스 왕은 함대를 꾸리고 사랑의 도피행각에 나선 왕비를 찾아 트로이로 출정한다. 전쟁은 10여년간 계속됐고, 영웅들의 무덤이 되었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는 절친인 파트로클로스가 전사하자 칼을 들었다. 분노한 아킬레우스의 창에 파리스의 형 헥토르 왕자가 숨진다. 아킬레우스도 파리스에 의해 발목에 독화살을 맞으면서 같은 운명이 된다. 그리고 파리스마저도 히드라독이 묻은 화살에 죽는다.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헬레네가 없었다면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로 시작하는 최초의 서사시 ‘일리아드’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삶의 전쟁은 결국 모두에게 파멸을 안긴다. 나는 그 무렵 내 모습이 무척 걱정이었다. 벌을 받는 나는 과연 어느 모습이라 해둘까. 주위 사람들이 나를 어찌 볼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도 컸지만 또한 여직 아물지 않은 상처는 원망을 갖고도 있기에 생각도 여러 갈래로 내 마음을 내 자신도 모르겠다 했다. 그러면서 나는 공채 윤두서의 자화상이 아마 내 모습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 무섭고 뚜렷한 눈빛, 이는 세상을 등진 자로서 갖는 시대적 아쉬움과 원망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 초상화 그림을 종종 보았었다. 그 그림에 그의 마음이 들어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누구든 실제 옛 초상화를 어디서든 많이 본다. 모르긴 해도 지구상 박물관에 모셔진 초상화가 전체 그림의 반을 차지하지 않나 싶다. 제례를 위한 경건함이나 권세의 위엄성을 나타낸 모습들이 대부분이다. 세기적 대표적인 작품으로 언뜻 생각나는 게 말을 탄 나폴레옹 모습이다. 키가 작달막하다는데 그림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누구는 광고적인 효과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그려졌다고 했다. 실제 근엄하고 진지하게 느껴지는 그림은 인상에 그다지 남지는 않는다.
내가 아는 한 적어도 16세기 전의 인물 그림들은 동서를 막론하고 어디를 가든 대동소이하다. 이는 시대적 흐름과도 유사하다. 절대군주의 시대엔 절대적인 위용이 가치의 기준이 된다. 인간의 참모습을 그린다는 것이 시대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 세상 제일 많은 자화상을 그렸다는 렘브란트 선생. 그는 그 시대의 풍속과는 다르게 호기에 찬 젊은 모습에서부터 모든 것을 체념한 동정어린 눈빛의 말년의 모습까지 있는 그대로 나타냈다.
그런 그림을 보면 한 시대가 느껴지고 내면의 감정을 읽을 것만 같다. 빛과 어둠을 세밀하고 정교하게 표현한 그의 그림 속에 영혼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나는 그의 그림을 보고 확연한 사실적 사진보다 그림이 현실감이 있고 뜻이 깊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고흐의 자화상도 좋아한다. 그 역시도 많은 자화상을 남겼다. 그는 돈이 없어 자신을 모델로 삼아 그렸다는데 그린 시간의 순서를 쫓으면 물씬 풍기는 인상적인 색채의 변모와 그의 심리 추적이 가능하다. 귀가 잘린 말년의 자화상은 화가의 혼돈을 그대로 말해준다. 두 화가의 자화상이 실감이 나지만 주는 이미지는 또 다르다.
고흐는 색채의 교감(붉은 색채를 처음 사용하였다가 나중엔 노란 색의 채색을 즐겼다. )으로 자신을 그렸지만 렘브란트는 이중의 명암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냈다. 화사한 색채가 더욱 더 고흐를 슬프게 만들고 렘브란트의 음영의 극적 대비는 대중에서 멀어져 간 침울한 말년의 그를 체념으로 이끌고 간 것만 같다. 부귀를 잃은 렘브란트의 말년 또한 고흐처럼 비참했다.
그러한 두 화가가 마음에 드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유독 그들은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자화상, 자신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제일 두려운 모습이 자신일 수 있다. 슬프다면 슬픈 자신의 감정, 어느 특정한 느낌이 그대로 잘 투영되었는지 그림으로 확인하고 그들은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의 존재를 일깨우려 한 것은 아닐까.
그들 그림은 ‘나는 누구인가.’ 묻는 듯 자폐적인 느낌이 짙다. 그 그림을 보면 나도 모르게 나 또한 ‘나는 누구인가.’ 자문하게 된다.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바라보며 또 그 생각을 했다. 흡사 렘브란트의 슬픈 말년의 모습이기도 고흐의 충혈 된 다소는 억울한 모습이기도 하다 여겼다. 허나 이는 처량함에서 떠오른 생각이었을 뿐 기실 나는 줄곧 화가 난 모습의 윤두서의 자화상을 내 심중으로서 연상하곤 한 것이었다.
그의 쏘아보는 눈빛은 오금이 절로 저린다. 결판을 내자는 강렬한 눈빛이다. 눈길을 피해도 잔상이 남는 지극히 매서운 눈빛. 나는 그에 의존해 내 처한 상황을 대신 앙갚음하듯 느끼려 했다. 나는 당시 분명 내 자신에게든 누구에게든 화가 나 있었다. 꼿꼿이 마주해 저항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분개함이 한동안 자리했었다. 그로 그에게도 나의 한풀이 같은 어느 비련이 담겨있으리라 추정 했었다. 하지만 이는 큰 오산이었다. 그가 대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 TV에서다. 동공과 홍채는 잡티 하나 없이 또렷하였으며 달무리 지듯 눈언저리는 둥근 자국으로 깊게 파여 눈빛은 돋보이듯 강렬하였다. 그 뚜렷한 눈매의 극 사실에 가까운 도도한 생명력으로 노려보는 듯 그는 자신에게 말한다. 거울을 보고 그린 것 같이 한 올 한 올 불타오르는 수염. 수염 털끝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세묘로서 사실을 초월하는 관조의 아름다움과 삶의 지각을 강하게 말한다. 나는 선비로서의 어디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그의 기상을 그때서야 제대로 또렷이 알았다. 한낱 화풀이로 그런 그림을 남겼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역시 나다운 생각이었을 뿐이다. 유교적 사고로는 쉽지 귀납이 안 되는 얼굴 이외의 다른 신체를 생략한 것 또한 예사롭지가 않다.
날카로운 관찰력과 뛰어난 묘사력으로 각광을 받는 그의 자화상이지만 무엇보다도 섬뜩한 자신을 올바로 직시하는 담대한 성품이 놀랍다. 극한 인생을 다독이는 표상인 듯 흐트러지지 않겠다는 결연한 자세인 듯 성찰하는 짙은 결기가 나를 소스라치게 한다. 알고 보니 그는 그림처럼 올 곧았지만 낙향하여 세세히 서민들과 어울려 전원적인 삶을 영위하였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자화상이라 해둘까. 한 때 내 상심은 극에 달하였는데 나약한 탓인지 흐르는 세월 덕인지 도시 나를 그릴 수가 없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그들이 치열하게 그들의 모습을 그렸듯 나 역시도 붓만 안 들었지 나의 자화상으로 번민을 한다. 세상을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는 생각도 내 탓이란 생각도 억울하단 마음도 이제는 한낱 흩어지는 바람 같이만 느껴진다. 있는 그대로 한 올 한 올 찬찬히 수염 그리듯 쓰는 글, 수필. 수필이란 어쩌면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또 다른 자화상의 화구가 아닐까 싶다.
나는 늘 반문한다. 그런 나의 글은 단호한 인생론은 무섭기도 하고 날로 미쳐가는 그림 또한 두렵고 체념은 너무도 허망하기도 하여 분란이 끊이지를 않는다. 이는 어느 면 내 삶의 패망에 대한 극렬 저항이며 꿈과 현실 그 발산과 수렴 속에서 나를 거듭나게 하고도 있다. 결국 나는 누구인지에 대해 말하고도 있는 셈이다. 그리하여 나는 글이 다하는 세월의 끝 무렵 나를 닮은 수수한 자화상을 마침내 걸어두었으면 싶다. 이왕이면 누구같이 세세하고 도도하며 누구같이 눈빛 가득 물결치듯 아름다움이 허공에 휘날리며 누구같이 지극히 달관한 눈빛으로 음영을 아스라이 그리는 작은 낭만이라면 그만이다 싶다.
16. 큰 아픔은 후유증이 깊다.
질풍노도의 혹독한 계절은 지났다. 바깥문이 닫히면 안의 문이 절로 열린다는 말처럼 절박한 원성의 절곡과 긴 나락 허망을 비집고 어느 참 독야의 빈 틈새로 여명이 비치고 낮은 문턱 앞에 서있는 듯도 하다. 다가온 봄볕은 따스하고 향기롭기 그지없다. 산다는 게 무엇이고 어찌 사느냐의 숙제를 여직 풀지 못하는 소인배로서 곡절의 삶, 행간을 거울삼아 지표로 삼고 행복을 일구고자 함이 우선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로소 내 안의 좁은 문틈으로 찾아든 여명, 이는 희망이기 전에 필시 時不家室한 하늘의 뜻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실은 이렇듯 의도적으로 희망 행복이란 말까지 동원하며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무던히도 애썼지만 이는 당시는 실로 어려운 행보였다.
솔직히 나는 < 南郭濫吹 한 자는 似而非이기에 때를 助長하거나 아무 때나 병불염사를 말하고 匹夫之勇하기 십상이다. 이에 민초는 민이식위천은 커녕 서러움은 날로 깊고 종래에는 위세한 자는 완화자분에 이를지 모른다. >하는 생각과 더불어 마음의 갈증이 더 컸다. 필시 앙금이 남아 있어서 일 것이다. 물론 그 대상들이 서넛 있다. 하지만 이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 무뎌지고 사라지지 않을까.
그 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내게 있다. 이는 밖을 내다보는 내 안의 풍경일 뿐 실제 중요한 것은 이 일이 있고 나서 분명히 달라져 있을 밖으로 부터서 나를 보는 인식이라는 것과 그에 봉착한 내 마음의 갈피를 어찌 감당하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미 나는 내 팀원들로부터 배신을 당한 처지로 이는 누가 보더라도 큰 흠결이다. 거기에 올바르지 않다하여 파면까지 당했던 존재가 바로 내가 아닌가. 신의와 정의가 손상을 입었는데 예전의 나로 돌아간다는 게 가능이나 하겠는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사람들은 외면하고 돌아섰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나에 대한 신의가 일순 깨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를 대하는 사람들은 여러 질이었다. 당시 인사위원장과 그 패거리들은 여러 루트를 통하여 나를 설득, 자진 퇴사하는 방법을 구사하였는데 일부 부류는 그들로부터 부탁을 받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기도 하고, 일부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는 차마 전달 못한 부류도 있으며, 일부는 부탁을 하더라 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세세하게 전달하는 부류도 있었다. 그 중 제일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한 부류는 그들이 부탁한대로 내 스스로 알아서 퇴사해 달라는 말을 거침없이 한 자들이다. 물론 업무상 도리를 다하는 것이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피눈물이 난다. 그에 반해 가혹함을 차마 말 못하고 머뭇한 친구나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오히려 내게 용기를 북돋아준 당시 내 상관(그는 나 때문인지 주차장 일을 나와 같이 열심히 추진하고 나서 직책을 내려놓았다.)의 목소리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래도 이쯤은 직장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그보다 더한 아픔이 내게 있다.
닥치고 보니 참으로 마음 아픈 게 인간적인 배신감이다. 물론 나로선 아낌없이 했다 자부했는데 일차적으로 믿던 팀원들이 배신을 했으니 더 뭐라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업무 차원으로 차치한다지만 친했다고 믿었던 사람이 돌아설 땐 참으로 참혹했다. 내가 복직을 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하여서 그런지 몰라도 내게 함부로 대한 사람들이 개중에는 더러 있었다. 정말 인간적으로 신뢰하고 믿었던 사람의 배신감은 너무도 큰 상실감을 안긴다. 이 사람은 정말 그럴 사람이 아니다 세상 다 나에게 등 돌려도 이 사람은 아닐 거라 믿었던 신뢰가 깨지는 순간의 허탈감이란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다. 내 자신이 세상을 잘못 살았다는 자괴감과 믿음에 대한 분노감이 뒤섞여 마음의 갈등이 숨을 막고 가슴을 짓누른다. 벌을 준 사람들보다 더한 후유증이 남는다.
어쩌면 이때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아니었을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서 그렇게 믿은 동아줄인데 지푸라기만도 못한 허 껍데기 의리라 한다니, 자칫하다가는 몸을 크게 상할 수 있다. 왜 그런 잘못을 저지른 사람하고 만나느냐 하는 소리를 주변에서 많이 듣는다는 말을 듣고 나는 믿었던 신의가 송두리 째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했다. 배신감을 잘 극복하지 못하면 마음에 엄청난 상처를 입게 된다. 믿음이 깨졌다면 그것으로 인연을 끊도록 노력해야지 더 이상 미련을 갖고서 분노감에 허덕이다간 큰 병을 얻게 된다 싶다. 어차피 세상에는 배신이 있을 수밖에 없다. 믿음이란 항상 깨지게 되어 있는 것이 또 이 세상이 아닌가.
그 무렵 내가 내린 결론이다. 믿음이 깨졌으면 그것으로 매듭을 지어야 한다. 마음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것은 악수 중의 악수를 두는 것이다. 차라리 남들의 어려움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들과 아픔을 함께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길이다. 믿음에 대한 배신의 원망은 무서운 병으로 돌변하여 자신을 공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분한 원망의 감정을 잘 정리하여 몸을 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세상을 사는 방법에 문제는 없었는지 반성하는 시간을 갖자. 이것이 내 자신에게 훨씬 이롭다. 나는 이미 늙었고 있는 믿음을 소비하기에도 너무 시간이 짧다. 보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사람, 그것들이 바로 내 믿음의 근간이 될 것이다.
나는 2013년 4월 22일 무사히 다시 복직을 했다. 내 신의가 저 땅 끝이라 여겨지던 때 믿음에 대한 배신감이 더하여 나는 대인기피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사람을 만나기 극히 부담스럽고 걱정이 되며 부정적인 생각과 함께 혼자 있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어 출근이 주저되었다. 사람들 앞에 서기 두렵고, 창피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강한 나머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할 것만 같았다. 이 증세가 무서운 이유는 사람을 피하고 싶어서 스스로 피하는 것이지만 그 내면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고 있는 욕구가 아직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러했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다시 맺고 싶어도 특성상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부정 심리가 형성되어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이 자꾸 돌출된다 싶었다. 그러다보니 점심에 식당을 안가고 누구와 만나지도 않으며 퇴근하면 쫓기는 사람처럼 집으로 쏜살같이 내뺐다. 자연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니 삶이 단조로웠다. 그렇다 해서 혼자 있는 것이 즐거운 것은 또 아니었다. 시시 때때 엄습하는 외로움과 허전함 그리고 무료함은 나를 두렵게 했다. 나는 그 무렵 복직만 되면 3백 만 원 어치 쏜다는 소리를 입버릇처럼 외치기도 했는데 이는 나는 외롭고 힘들다는 또 다른 표현이었음이다. 분명 나는 예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익숙하고 편한 것들만 하게 되고 새로운 것에 두려움이 날로 커졌다.
누군가 말했다. 대인기피증이란 선천적인 성격보다는 타인에 대한 심리적인 외상 및 트라우마로 인하여 발생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뿐만 아닌 전반적으로 자신감이 부족하거나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분명 당시는 그러했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에 대한 걱정이 매우 많았다. 하지만 대인기피증 또한 개인의 성격으로 굳어진 질환인 만큼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나의 노력과 의지가 뒷받침이 된다면 충분히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나는 늘 반문하고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나의 의지다. 직접 사람들과의 만남을 갖기 위해 노력한다든지,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긍정적인 부분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든지 등등 아님 사람과의 만남에서 이전에는 웃지 않았다면 용기 내어 활짝 웃어보며 스스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어필하기 위해 시도해 보는 등등...비록 작은 시도이고 작은 변화이지만 변화는 이러한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겠는가. 결국은 나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런 험난한 마음 속 질곡에서도 내 곁엔 변함없는 든든한 후원자는 그래도 있었다. 대인기피 심리치료를 하듯 나를 이끌어준 임성팔박사님과 그 일당들(이호진박사와 안병길박사), 친동생 대하듯 나를 위로해주고 이끈 도재범박사님, 곽김구부장님, 강경철실장님, 이규암박사님 그리고 노남철 부장, 박근배 박사님과 황영동 박사님등등(이 쯤 고마움의 표식으로 성함을 밝히고 싶었다.) ....힘든 일을 닥쳐봐야 그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바로 알 수 있다. 이후 나는 그들과 상해와 심양을 같이 다녀오기도 했다. 이는 여행이라기보다는 나의 치료차 그들이 기꺼이 동행을 해준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들과 더불어 지란지교를 꿈꾼다. 이 세상은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우정도 있다는 것을 나는 바로 말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