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겨울 치곤 화창한 날씨였다.
사무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아이스크림처럼 몸이 녹아버릴 것 같은
12월의 마지막 월요일 오전이었다.
오늘까지 제출해야 할 기안 서류를 아직 끝내지 못했기 때문에 곧 있으면 시작될
부장의 듣기 싫은 잔소리를 알면서도 창가에 기대 서서 다음 달로 결혼을 앞둔
김 대리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싱거운 농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대리는 결혼 안 해?"
"해야지. 아직 그럴만한 상대를 못 만났어"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그에게 나는 '이성에겐 관심이 없는 남자'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안대리 정도면 주변에 붙는 여자가 꽤 많을 텐데. 왜 아직 혼자야?
좀 오버 프라이스 하고 있는 건 아냐?"
"뭐 아직 바겐세일에 내 놓을 정도는 아니니깐"
정말로 일 같은 건 하기 싫은 월요일 오전이었다.
그리고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 벨이 울렸다.
근 한 달 만에 아니, 그가 먼저 연락을 한 걸로 치자면 거의 반년만의 통화였다.
그는 점심시간에 맞춰서 사무실 근처의 커피숍으로 오겠다고 했다.
나는 마음이 들떠서 부장의 듣기 싫은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오전 내내 손에 일을
잡지 못하고 조바심을 내다가 12시가 되자 마자 사무실을 나왔다.
지난여름 이후 반년만 이었다.
계상이 먼저 연락을 한 것은.
그래서 며칠 전의 크리스마스도 나는 그가 없이 혼자 보내야만 했다.
계상은 연말 정산으로 바빴다.
"계상아, 여기야"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를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한 달만 이지만 십 년쯤은 된 것 같은 심정이었다.
계상은 익숙한 표정으로 다가와 마주앉았다.
"..일찍 나왔네"
"아니야. 방금 왔어. 근데 점심 해야지? 나갈까?"
"어..아니. 시간이 없는데 그냥 차나 한 잔 마시자"
"어? 어. 그래 그럼"
얄궂게 외면하는 시선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지만 나는
오랜만에 먼저 연락을 해온 계상의 비위를 맞추고 싶었다.
우리는 커피를 주문했다.
"신원아.."
"........"
무시하고 싶지만 비슷한 기억이 떠오르고 말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가 연인이 되고 나서 계상이 나를 데니가 아닌
신원이란 이름으로 부른 적은 단 두 번이었다.
첫 번째는 나에게 처음으로 고백을 했을 때였고 두 번째는 올 초 아버지의 병환으로
나와 살던 동거생활을 접고 집으로 들어가야겠다 말하던 때였다.
"왜 계상아"
확률적으로 보면 반반의 가능성이 있었다.
좋은 쪽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전자의 경우로 믿어 보자 편안한 표정을 애쓰고 물었지만 계상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할말을 찾는 듯 가만히 침묵했다.
나는 아랫입술을 조용히 깨물며 기다렸다.
"담배 줄까?"
"어? 아니...끊었어"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걸자 고개를 돌렸지만 아직 나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
나는 탁자 위에 놓인 담배를 물끄러미 쳐다볼 뿐 무슨 일이냐 먼저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아 다시 기다리기로 했다.
"신원아..!"
"어어..!"
우리에게 서빙 할 커피를 가져온 나이 어린 점원이 탁자 위에 커피를 내려놓다
다소 급작스럽게 나를 부르는 계상의 목소리에 움찔 놀랐는지 덜그럭 소리를 내며
한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직 쟁반에 남아있던 한 잔의 커피가 내 다리 위로 쏟아졌다.
"아, 손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근데 저기..닦을 것 좀.."
이런 일이 아직 손에 익지 않은지 허둥대는 점원을 대신해 계상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손수건...같은 걸 챙기고 다녔던가.
하긴, 나와 살지 않은 후로 계상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그를 사랑한다 해도 어머니나 마누라의 역할을 할 순 없었으니까.
가게 주인이 와서 죄송하다는 사과를 하고 내가 손수건으로 젖은 다리를 대충
다 닦아 낼 때까지도 계상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묻고 싶지만 손수건으로 다리를 톡톡 두들기며
머리 속으로 다른 말을 찾았다.
"이거 다 젖었다. 나중에 돌려줄게"
"응? 아니.. 그냥 너 가져"
"정말? 이거 나 주는 거야?"
"으응. 너 손수건 없잖아"
교묘하게 시선을 피하는 태도는 손수건 같은 걸 챙기지 않는 나를 생각해주는
애틋함으로는 아무래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다른 마음으로 해석하고 싶지 않았다.
계상은 나를 사랑하니까.
내 앞으로 새로 가져온 커피를 천천히 뜸을 들여 반쯤 비웠을 때야
계상은 안쪽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탁자 위에 내놓았다.
K자와 D자를 이니셜로 새겨 내가 만들어준 그와 내가 살았고,
지금은 내가 살고 있는 우리 집 아파트 열쇠였다.
"돌려줄게"
"......"
왜. 라고 물어야 할까.
아니면.. 이러지 말라고 해야 할까.
"우리.. 헤어지자"
"......."
헤어지자니.
지금 무슨 말을 하고있는 거야.
....어떻게 네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어.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가만히 있는 나에게 네가 먼저 다가와서 나를 설득하고 흔들어 놓고
결국은 너에게 마음을 다 주게 만들어 놓고 이제와서 네가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어.
"계상아.."
"결혼해 나"
"........"
결혼..?
결혼..이라니..
너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말하는 거야..?
결혼은 계상아.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게 결혼이야.
우리랑은 상관없는 얘기라는 걸 모르는 거야..?
"왜.."
"........"
이번에는 그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왜. 라고 묻는 내 질문이 잘못됐는지도 모른다.
"왜 계상아..왜.."
"........."
나는 그를 다그쳤다.
다그치고 다그쳐서 사실은 거짓말이라고.
아니 그가 잘못 생각 한 거라고 말하게 만들어야 했다.
네가 얼마나 나를 사랑했는데.
나를 네가 얼마나 사랑했는데..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
"......."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면 꽤 오래 전 언젠가 나는 허세를 부렸던 것도 같다.
-계상아. 언제든지 좋은 여자 생기면 그러면 나랑 헤어져도 좋아.
그래서 니가 행복하면 나도 좋은 거니까.
그러니까 우리 거짓 말 같은 건 하지 말자. 응?
-...사랑해 데니야
좋은 여자 따위의 이유로 나와 헤어지는 일 같은 건 하지 않겠다...란 약속은
아니었지만,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언제부터.. 언제부터 그랬던 거야..너 그래서..
그래서 집..나간 거야..? 그래서...그랬던 거야..?"
"아니. 아니야. 신원아. 그건 아니야.
....만난 지 얼마 안 됐어"
후 얕은 한숨을 쉰 계상은 끊었다던 담배를 집어 입에 물었다.
그런 거야?
너의 여자가..
손수건도 챙겨주고. 담배도 건강에 해로우니 끊으라 한 거니.
그 여자가 나보다 널 더 사랑한다는 거야..?
나보다 더 널 사랑하는 거야..?
"사랑하니..?"
"........"
"사랑하냐구"
"..응"
응..?
네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거야..?
그래. 네가 집을 나간 후로 나와 만나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그리고 승진이다 뭐다 해서 정말로 바빠보였고,
그래서 지쳐 하고 힘들어 하는 널 보면서.
이제 더 이상 너에게 받기만 하는 사랑은 하지 않겠다고 생각해서.
나는 너를 이해하려고 했어.
비록 지난 반년동안 네가 먼저 연락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해도 말이야.
왜냐하면.
너는 날 사랑하니까. 너는 나를 사랑했으니까.
그걸 나는 믿고 있었어.
그런데 응..이라니. 응이라니 계상아.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얼마나 네가 나를 사랑했는데..
"그럼. 난.. 난 이제 너한테 아무 것도 아니야? 응?"
"........"
이런 건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
하지만 한 번도 이런 걸 생각해 본적이 없단 말이야.
그래서 그런 마음에도 없는 허세를 부린 거야.
나 아닌 누구를 네가 사랑한다는 것 따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너무 자만했던 거니? 그런 거니?
“그런 게 아니야 신원아. 이건 누굴 더 사랑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이건 그냥..."
"...그냥 뭐"
"이건 그냥.. 현실이야. 난 이제 더 이상 현실을 피할 수가 없어.
그런데... 때마침 그 여자가 나타났어. 좋은 여자야. 그래서..."
"그래서 뭐. 그래서..사랑하지도 않는데... 결혼하겠다는 거야?"
"......."
바보처럼 나는 울고 있었다.
자리를 채워가는 맞은 편의 사람들이 나를 보고있었다.
궁금함을 숨기지도 않고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람.
흐릿한 내 시선과 마주치자 못 볼 걸 본 듯이 흠칫 외면하는 사람.
여자도 아닌 남자가 대낮의 사무실이 들어찬 도시의 한가운데서
무슨 못난 짓이냐 수근 대는 사람.
그러나 그들을 상관할 내 처지가 아니었다.
"사랑..
그래. 난 널 사랑했어.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은 너에게 다 주었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제 와서 너를 사랑했던 감정까지 부정하진 않을게. 그 순간은 정말 진심이었어.
그리고 지금도 난..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야. 그런데 신원아.."
"그렇게 부르지 마"
"......."
그저 멍하니 계상이 두 개피 째 담배를 피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바들바들 입술이 떨려서 담배를 물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그리고 참지 못하는 계상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응. 어.. 아니 잠깐 밖에 나왔어..
아니.. 누구 좀 만나고 있어. 그래. 응. 있다가 다시 전화할게. 응"
짧은 통화를 끝내고 나서도 계상은 창 밖만 고집스레 쳐다보며
마치 나의 선처라도 기다리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낯선..계상의 모습이었다.
더 이상 내가 알고 있는 계상이 아니었다.
"식이...언제야"
"...오지마"
울고 있는 주제에 피식 웃음이 났다.
오지 말라 한다. 나를 사랑한다 말하던 입으로 어떻게 저리 못된 말을 하는 걸까.
무릎을 꿇고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왜 네가 지금 화를 내고 있는 거지?
어째서 네가 더 이렇게 당당한 거야.
"풋. 왜. 내가 결혼식에 가서 이상한 짓이라도 할까 겁나?"
"우리.. 이제 더 이상 만나지 말자. 난 널 다시 볼 자신이 없어"
"........"
"힘들었잖아. 언제까지 이럴 수 없다는 거.. 서로 알고 있었잖아.
그래. 아버지가 편찮으셔. 나는 외아들이야. 아니, 이런 건 핑계일지 몰라.
구실을 찾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난.. 용기가 없었어. 너랑 헤어진다는 것.
두려웠어"
"........"
난.. 믿을 수가 없어.
인정 할 수가 없어 계상아..
넌 지금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거야..
이건 아니야.. 이건 정말 아니라구..
"사랑하냐고 물었어"
"........."
"대답해"
"힘들었어. 쉽게 결정한 게 아니야. 사랑..
....나도 알아. 아마 널 사랑했듯이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그러고 싶어. 노력할래. 너라면..
이런 나를 이해해 줄 거라 믿어"
"......."
너는 다시 나를 설득하고 있는 거니.
처음 네가 나에게 다가와서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나에게 이별을 설득하고 있는 거니.
"넌 강하잖아. 이런 건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지금 당장은 이래도..
넌 곧 날 잊을 수 있을 거야. 그게..내가 아는 안신원이야. 그리고.."
"......"
안다구..?
네가 나를 알기는 하는 거야..?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야..?
정말로 안다면...그래도 네가 지금 나에게 이럴 수 있니..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네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는 있는 거야..?
"좋은 여자 만나라. 너라면 그럴 수 있을 거야.
....넌 좋은 남자야"
"......."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앞으로 가 계산을 마치고 나를 남겨둔 채
가게문을 열고 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지만..
계상은 끝내 나를 외면했다.
한 번쯤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내 눈을 쳐다볼 수도 있었는데..
창 밖으로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가 벌써 며칠이나 되었는데도 사거리 맞은 편 백화점 앞
가로수에는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반짝이는 노란 전구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화창한 12월의 마지막 월요일.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우리는 헤어졌다.
<2>
점심시간이 지나 썰렁해진 커피숍에 혼자 남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내 다리에 커피를 쏟은 가게 점원이 말없이 다가와 빈 잔에 찬물을 따라주고
차갑게 식은 커피 잔을 가져가 새로 끓인 따뜻한 커피를 내왔지만
고맙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조용한 가게 안으로 몇 번쯤인가 내 핸드폰 벨이 신경질적으로 울렸지만
가게 주인도 점원도 뭐라 타박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창피함도 느낄 수 없었다.
맞은 편 계상이 앉았던 자리를, 마치 그 자리에 지금 그가 있는 것처럼
주문을 외듯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기다리면. 그 자리에 그가 다시 와서 앉을 것 같았다.
그리고. 미안해 거짓말이었어 데니야. 라고 말할 것 같았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용이 없는 일 같았다.
으스스 몸이 추워졌다.
누군가가 꼭 끌어안아 줬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간절히 들었다.
마른침을 삼키고 눈을 감고, 다시 마른침을 삼키고 눈을 뜨고,
더 이상 눈물도 흐르지 않는 빡빡하게 시린 눈을 깜박이다 무거운 다리를 일으켜
커피숍을 나오는데 등뒤에서 저기요 하며 점원이 나를 불렀다.
숙연한 표정으로 점원은 내게 계상이 남기고 간 열쇠를 내밀었다.
나는 한참동안 은색의 열쇠를 바라보다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맡아 주실 래요? 그걸.. 찾으러 오는 사람이 있을 거에요.
아까 나랑 같이 있던 그 사람인데.. 그 사람이 찾아와서 달라고 하면.
....주세요"
나를 쳐다보는 그의 안스러운 눈빛을 향해 마지막 남은 의지를 쥐어 짜내
억지로 웃으며 커피숍을 나왔다.
햇살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야 하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차를 타고도 거의 한 시간쯤 걸리는 거리를 걸어 집으로 오자마자
옷도 벗지 않고 그대로 소파 위에 누워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깜깜해진 후였고 몸도 마음도 멍했지만 금새 기억이 나 버렸다.
내가 계상과 헤어졌다는 사실을.
오랜만이니 술이라도 한 잔 하자 불러낼 친구들은 있다.
그러나 남자를 사랑하다 비참하게 버려진 내 처지를 헤아려 줄 친구는 없다.
그런 것은 내색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연인이라는 것은 집 근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약은 눈치 말고는
세상에서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세상에다 대고 내가 얼마나 근사한 연애를 하고 있는지 자랑하지 못하는 것쯤은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그토록이나 멋있는 사람이 바로 내 연인이었으니까.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그가 있었으니까.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아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별할 때를 대비해서 한 사람 쯤은 준비를 해 둬야 했을까.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혼자 아파하지 않아도 됐을까.
명치끝이 찌르르 아프게 찔러왔다.
내가 계상을 처음 만난 것은 군대를 다녀와 복학한 대학 3학년 때였다.
재수를 한 나보다 한 학번이 위인 그는 내가 입학한 첫 해에 군대를 다녀와
나보다 일년 먼저 복학을 한 동갑내기 선배였다.
그의 첫인상은 그리 싹싹한 편이 아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계상은 결코 무례하지는 않지만 아무나 에게
또는 누구나 에게 친절이 후한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를 처음 보았을 때도 별로 친해지고 싶은 태도를 보여준 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나에게 조금은 입장이 불편한 동갑내기 선배였을 뿐이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인가 부터 우연 치곤 너무 자주 내가 가는 곳에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심스러운 접근이었는데 계상 역시
그 당시에는 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그는 문득 돌아보면 내 주위에 머물고 있었다.
매일 조금씩. 더 자주. 그리고 항상.
게다가 처음 보았을 때와는 달리 나를 향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어 주곤 했기 때문에
이 사람은 낯을 좀 가릴 뿐이지 알고 보면 무척 따뜻한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것은 아니었지만.
-계상선배
-선배는 무슨. 너 생일이 12월 22일이라며? 그럼 내가 이틀 형이네. 히히.
뭐 까짓거 내가 봐 준다. 그냥 우리말 트고 지내자. 응? 데니야
-...데니?
-너 어렸을 때 미국서 살아서 이름이 데니라며. 음..신원이란 이름도 좋지만
그건 남들이 다 부르는 이름이니깐 난 데니라고 불러줄게. 어때. 괜찮지?
대답 대신 웃기만 하는 내 얼굴을 쳐다보던 그의 눈이 아무리 눈치가 없다 하더라도
무언가 아플 만큼 애틋하게 느껴져서 도무지 민망하기만 했던 나는 그때만 해도
그 이유를 전혀 몰랐었다.
-눈이 너무 예쁘잖아. 나는 이제까지 그렇게 예쁜 눈을 본 적이 없었어.
반짝반짝 빛났거든. 넌 있지. 가만히 있으면 얼음처럼 차가와 보이는데
조금만 웃어도 눈에서 별이 막 쏟아지는 거 같아.
-와아. 이리 와 우리 애인. 하루종일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이리오라니깐~! 어디 보자 우리 초롱초롱 별. 아유~~ 이뻐. 쪽쪽쪽.
........
이미 오래 전 일인데 그의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너는 그렇게나 다정했는데.
나를 그렇게나 사랑했었는데.
나를 그렇게.. 사랑했었는데..
그런데 그런 네가 나를 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절대로. 절대로.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 나는 너를 붙잡아야 해. 그래야 해.
왜 바보같이 너에게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던 거야 나는.
정말 이대로 끝난다고 생각하는 거야 안데니?
아니지. 아니야. 그건 아니야.
어두운 방에서 벌떡 일어나 불을 켜고 전화기를 들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여러 번 울렸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음성 메세지로 넘어가길 여러 번 반복하며 계속 재다이얼을 누르자
마침내 저쪽에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러나 그 목소리는 내가 알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상냥한 여자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여보세요란 말을 했을 때
나는 그를 찾았다.
그제서야 내 목소리를 확인한 그녀가 잠시만요. 라며 전화를 넘겼다.
-여보세요. 누구니?
"...계상아. 나야. 데.."
-아, 신원이구나. 근데 웬일이야. 지금이 몇 신데.
"...계상아.."
-야야야. 너 또 술 마셨구나. 빨리 빨리 집에 들어가라. 마누라 기다린다.
"계상..아.."
-하여간 자식 눈치 하난 증말 없어. 나 지금 바빠. 끊자. 나중에 연락할게.
딸깍.
전화가 끊겼지만 나는 수화기를 든 채로 멍하니 서서 뚜뚜거리는 신호음을 듣고있었다.
새벽 1시. 이 시간에 너는 그녀와 있는 거야..?
나와는 바쁘다고 피곤하다고 하면서 만나자 구걸하는 나에게 선심이라도 쓰듯
어쩌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만나주더니.
그런데 이런 시간에 너는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
내가 한 전화를 이런 식으로 밖에 받을 수 없는 거야..?
내가 언제 술을 마셨어.
난 술 같은 건 마실 줄 모르잖아. 네가 더 잘 알잖아.
마누라는커녕, 나에겐 지금 부모도 형제도 없는 혼자라는 거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나에겐 너밖에 없다는 걸.
계상아..
네가 그렇게 사랑하던 내가 이제는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존재가 되어 버린 거야..?
너의 그녀를 위해서? 너의 새로운 사랑을 위해서?
미련하고 어리석게 이별에 대한 어떠한 대책도 없이 있던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손등을 아프게 깨물며 울음을 삼키는 것밖에는.
"헤이 맨~ 저러다 정말 떨어지겠어"
"호호호. 내비 둬. 죽고 싶다는 데는 약도 없어. 몰라?"
"그렇긴 하지만. 저 사람은 예정에 없단 말이야.
우리가 보고있었다는 걸 알면 한달 간 근신이라구"
"안 봤다고 하면 되잖아. 뭐가 걱정이야. 호호호"
"그게 되냐? 태우가 우리더러 지키고 있으라 했는데.
나중에 와서 가만 있겠냐구"
"호호흐응... 저 따위 말라비틀어진 자식 어디가 좋다고 그 미련한 곰팅이"
"눈이 예쁘다잖아. 그리고 뭐, 우리가 봐도 눈은 좀 예쁜 편이지 뭐"
"이쁘긴 뭐가 이뻐?! 웃으면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 하구만. 호호호"
저 사람들 지금...나한테 하는 소리야..?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캄캄한 옥상에 그들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나를 두고 저들끼리 하는 말이었다.
"근데, 저러다 정말 죽으면 어떡하지?"
"호호호. 죽거나 말거나"
그런데.
정말 아무리 세상 인심이 야박해졌다고 하나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누가 봐도 나는 지금 이 17층 고층 아파트 꼭대기에서 저 아래로 떨어져
죽으려는 상황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일단은 말려야 하는 게 아닐까.
어떻게 저렇게 야박한 말들을 할 수 있는 거지.
죽거나 말거나라니.
기가 막힌 심정으로 샐샐 웃는 노랑머리의 녀석과 온통 새카매서
이빨과 눈자위만 희게 보이는 조금 나이 든 녀석을 쳐다보았다.
"이 봐요. 지금 당신들 나한테 하는 소리에요?"
"어머. 그럼 여기 당신 말고 또 누가 있다고. 호호호"
나는 방금 전까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훔쳐내고 재수 없는 말만
골라 하면서도 시종일관 샐샐 웃는 노랑머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내가 노려보거나 말거나 노랑머리는 여전히 샐샐 웃고있었다.
"헤이 맨~ 그러지 말고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
당신이 그러면 우리가 아주 피곤해 진다구 맨"
인간적으로 나를 생각하고 걱정해 주는 건 좋은데 날 언제 봤다고 처음부터
반말이야 저 시커먼 자식은!!
"내가 죽는데 당신들이 피곤해 질 일이 뭐가 있어...요?
날 알지도 못하면서...요"
"알지 못하는 건 아니지. 우리는 늘 당신을 보고 있었으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날 언제나 보고있었다니.
당신들 흥신소 같은데서 라도 나온 거야?
혹시.. 계상이 내가 걱정이 되어 나에게 당신들을 붙여 놓은 거야..?
"왜...왜...날 보고 있었는데.....요"
"음.. 그건. 우리 친구 하나가 당신을 아주 좋아하거든.
그래서 지금도 당신을 지키라는 부탁을 받고 있는 거야.
당신 오늘 애인이랑 헤어졌잖아. 걱정하고 있다구"
뭐?!!
나는 화들짝 놀라서 하마터면 서 있는 자리에서 중심을 잃을 뻔했다.
"어어. 조심하라구. 그리고 이리 좀 내려오면 안 돼? 불안해서 볼 수가 없어"
그의 말이 아니고 라도 내가 먼저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놀랐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옥상 난간에서 내려왔다.
웃기는 일이었다.
죽으려 작정하고 올라왔건만, 죽을까 봐 덜덜 떨고 있다니.
한심하고 비참했다.
"그 사람이 누..누군데요"
"말하면 안 되는데.. 사실 당신한테 우리 모습을 이렇게 막 보여줘도 안 되는 일이거든.
그런데 당신 하는 짓이 하도 불안해서 할 수 없이 모습을 보인 거야. 우린 천사거든"
뭐?? 뭐?? 뭐??
아........안데니......
지금 꿈을 꾸고있는 거냐 아니면, 달밤에 체조하는 미친 환자들을 보고 있는 거냐.
"호호호흥...안 믿나 봐 쭌. 하긴. 그걸 바로 믿는다면 그것도 문제가 있지.
이 봐요. 그냥 살아보는 게 어때요. 아직 그렇게 심각한 상태는 아닌 것 같은데"
뭐라고 하는 거냐.
천사라니. 천사라고 했나 지금?
내가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오늘 계상이 나와 헤어지자 말했던 것도 전부다 다 꿈인 거야?
그러나 슬그머니 꼬집어 본 내 허벅지는 아픈 감각을 제대로 전하고 있었다..
"글세. 정말 그냥 살아보는 게 어때. 죽어 봤자 지옥에 간다구. 알아 맨?
자살하면 지옥으로 직행이거든. 지옥 알아?
안 가봤으니까 몰라서 지금 이러는 거겠지만 거긴 정말 살만한 데가 아니라구.
게다가 요즘은 얼마나 지옥이 꽉 찼는지 트래픽 초과로 난리야.
그러니 가도 당장 못 들어가. 대문 앞에 줄줄이 밀려있거든.
지금 가도 한 몇 년 기다려야 될걸?"
이런 미친 정신병자들을 내가 왜 상대하고 있어야 하나...란 생각이 들면서도
그들이 내가 오늘 계상과 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라는 사실이 걸렸다.
하지만 그런 것쯤이야 얼마든지 어림짐작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캄캄한 새벽에 옥상에 올라와 죽으려고 작정한 이유가 실연 때문이라는 추측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천사란 자고로 무언가가 다른 특별함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다른 건 관두고라도 나보다는 잘생겨야 하는 거 아냐?
천사가 어떻게 나보다도 더 안 생겼냐.
게다가 저 온통 시커먼 녀석이 어떻게 천사라는 거야.
"정말 천사라면, 날..날개가 있을 거 아니에...요"
"푸하하하. 정말 못 살겠다니깐. 날개래 날개. 하여간 인간들이란 정말
상상력 제로라니깐. 이 봐요. 진짜 천사라면 날개가 없어도 날수 있는 거 아니에요?
천사가 무슨 새에요? 날개를 달고 있게"
"하...하지...만...그렇다면 날아봐...요. 어디 한 번"
그러나 그들이 나에게 직접 확인을 시켜 줄 필요는 없었다.
갑자기 어둠 저편에서 커다란 물체가 총알처럼 확 다가와 우리 앞으로 내려섰다.
그는 키가 아주 큰 사람, 아니 키가 큰 천사였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이 사람이 우리를 볼 수 있는 거지?"
너무 놀라 숨이 탁 막혀 뒤로 주저앉은 나를 걱정스럽게 보며 커다란 천사가
그들에게 말했다.
저..정...정말...이 사람들이.....천사...라는...거야...?
세상에 무슨 천사가 안경을 쓰고 있어.
그런 것은 어느 책에서도 본 적이 없다.
"왜긴. 호호호. 죽으려고 환장을 하니까 그러지. 네가 그랬잖아. 잘 보고 있으라고.
우린 네 말대로 잘 지키고 있느라 그런 거야. 근데 뭐 별로 놀라지도 않네.
우리가 천사라고 해도 믿지도 않더니. 네가 와서 믿나 봐. 우린 아무 짓도 안 했어."
"후... 놀랬어요?"
체격이 컸지만 우락부락하기보다는 순진한 아이 같은 얼굴을 한 안경 낀 천사는
바닥에 주저앉은 나에게 손을 내밀며 걱정스레 물었다.
침을 꿀꺽 삼키며 겁먹은 눈으로 내민 손만 뚫어지게 보고있자
그가 내 앞으로 무릎을 꿇었다.
"왜 죽으려고 해요.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데"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하는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서 순간 울컥 서러움이 들었다.
"잠깐만 힘들면 돼요. 정말이에요. 나를 믿어봐요"
"그렇지...않아요...난...난..잠깐만..힘들 수가 없어요..."
결국 나는 아이가 된 것처럼 울음을 터트렸고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가
팔을 벌려 품에 안아주었다.
끄억끄억.
나는 그의 품에서 울었고 그는 따뜻한 손으로 내 등을 다정히 토닥였다.
"난...난...계상이 없이..살 수가 없어요...끄윽..끄윽...
계상이가...끄윽..없으면..."
"알아요. 알아요..."
다 큰 어른이 그것도 남자어른이 이렇게 못난 아이처럼 떼를 쓰듯 울고 있는데
그는 놀리지 않고 나를 위로했다.
나는 처음 보는 그에게 아니 처음 보는 천사에게 안겨서 펑펑 울었다.
그의 넓은 가슴은 너무 따뜻했다.
이 사람은 정말 천사가 맞는 것 같다.
"참나. 정말 눈꼴이 시어서 볼 수가 없네. 뭐하는 거야 정말. 야! 태우! 그만 못해!
그거 다 받아주면 한도 끝도 없다구!"
"그래 맨. 적당히 해. 어차피 그 사람 겁쟁이라서 죽지도 못해. 그만 가자"
시커먼 천사녀석의 말을 듣는 순간 발끈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천사라면서 사람의 마음 하나 헤아리지 못하는 걸까.
저거 정말 천사 맞아?
난 지금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라구.
아니, 난 죽을 거야. 반드시 오늘 밤 죽고 말 거야.
나에겐 이제 남은 게 하나도 없는데 살아서 뭐해.
지옥이 트래픽이던 뭐던, 여기서 계상이 없는 채 사는 것보다 더 비참하진 않겠지.
아니, 비참하더라도 계상이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이 세상에선
살고 싶지 않아.
"당신들이 뭘 알아! 마음 하나 헤아리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천사라는 거야.
당신 같은 사람, 아니 천사들이 있는 천국 따위는 가고 싶지도 않아!"
나는 키다리 천사의 품을 밀치고 일어나 난간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러나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내 발은 무언가에 옭아맨 듯
꼼짝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지만 나를 잡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야야!! 너 미쳤어!!"
"태우!!"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은 키다리 천사의 짓인 것 같았다.
입을 꾹 다물고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그를 향해 노랑머리와 시커먼스가
이러면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사람의 의지를 방해하면 안 된다. 잔소리를 한다.
아마도 천사가 사람의 의지를 막는 일은 그들 사이에서 금기시 되어 있는 일인 것 같았다.
그러나 키다리는 나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놔!! 이거 놔!! 죽을 거야!! 노란 말이야!!!"
"잠깐만요, 잠깐만요, 데니씨"
"........"
데니라고 내 이름을 부르는 키다리 천사의 목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나를 데니라고 불렀다.
"내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난 천사잖아요. 날 믿어요"
"......."
"제발요. 천사라도 죽겠다는 사람의 의지를 어떻게 할 수는 없어요.
그건 당신의 의지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부탁할게요"
당신이 날 도와주겠다고?
천사인 당신이 날?
"어떻게 날 도와주겠다는 거죠?"
"물론. 그 사람의 마음을 바꾸게 할 능력 같은 건 천사에게도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당신에게 기회를 줄게요"
키다리 천사의 눈은 임기응변의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난간에서 내려왔다.
<3>
두 번째 이별.
-데니야아아아아 일어나아아! 우우우우우웅쪼~~옥!! 데..
탁.
6시 30분.
오늘도 나는 계상의 목소리로 잠에서 깬다.
멈춰버린 알람 시계의 정적 속에서 슬그머니 베게로 얼굴을 묻으며 뒤척이던 나는
엎드린 채로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지난 밤 꾸었던 긴 꿈의 기억을 더듬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모든 것이 꿈이라 할지라도 한가지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나는 계상과 헤어졌다.
현실이라고 말하던 계상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리며 나도 내 현실을 생각했다.
우선은 어제 점심 시간 이후로 돌아가지 않은 회사.
어제까지 마쳐야 했던 결재서류.
걸어왔기 때문에 차도 가져오지 못했다.
모든 걸 내팽개치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기엔 내 자신이 너무 초라했다.
지금쯤 계상은 벌써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내가 너무 비참하다는 마음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으며 욕실로 들어가 칫솔을 물었다.
어제는 너무 당황해서 내가 생각해도 미련한 짓을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을 생각하면 이런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그를 다시 만나야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다가온 또 한 번의 위기 일 뿐이다.
이번에는 내가, 그가 아닌 내가 풀어내야 할 순서라는 것 뿐.
칫솔을 문 채로 주방으로 가 커피를 내리고 거실 TV를 켜 아침 뉴스를 맞췄다.
-월요일 아침 출근 정체가 다른 때보다 많이 심하기 때문에 출근 시간을 조금
서두르셔야 하겠습니다. 구간 별 교통 상황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먼저 서부간선...
우뚝.
.........
꿀꺽.
입 안 가득 들어있던 치약 거품을 삼키고 말았다.
꿈...
-기회를 줄게요.
-어떤 기회를 준다는 거에요.
-어제.
-어제..?
-그래요. 당신이 원하는 만큼 어제를 선물로 줄게요.
어제는 분명 월요일이었다.
그리고 저 아나운서의 멘트를 나는 어제도 들었다.
그런데 오늘도 월요일이다.
똑같은 아나운서가 같은 멘트를 하고 있다.
아침 방송에서 저런 걸 재방송 해 줄 리가 없다.
삼켜버린 치약으로 매운 목을 찬물로 급하게 가글을 한 뒤 경비실 인터폰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저씨. 저 703호 사는 사람인데요. 네. 혹시 주차장에
제 차 있는지 좀 봐 주시겠어요?
.........
네? 아, 네에.. 감사..합니다. 아 저, 아저씨! 오늘 무슨 요일이죠?
네. 네? 아.. 아니 그냥.. 어제 술을 좀 마셔서요...네...수고하세요.."
"그런데 안대리는 결혼 안 해?"
"어...해야지.."
"안대리 정도면 주변에 붙는 여자가 꽤 많을 텐데, 왜 아직 혼자야?
좀 오버 프라이스 하고 있는 건 아냐?"
"........."
하나, 두울, 세엣, 네...
Rrrrrrrr
"....계상이니?"
계상은 점심시간에 맞춰서 사무실 근처의 커피숍으로 오겠다고 했다.
하루 만에 다시 듣는 계상의 목소리였다.
"...일찍 나왔네"
"응.."
"......."
계상은 어제와 같은 넥타이에 같은 색 셔츠를 입고 있다.
어제는 오랜만에 만났다는 흥분 때문에 제대로 살피지 못했는데,
오늘 다시 본 계상은 예전보다 훨씬 말쑥한 차림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오늘도 내 시선을 얄궂게 피하고 있다.
"계상아.."
"...응"
"커피..마실까?"
"어? ...그래"
나는 어제의 그 점원에게 커피를 두 잔 주문했다.
이제 곧 계상이 내 이름을 부를 것이다.
신원아...라고.
"신원아.."
"......"
이번에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신원이라 나를 부르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그의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미안하니.. 아니면.. 괴로우니...그것도 아니면..
이런 일 자체가 너에게 짜증이 나니.
너의 아무 것도 없는 무표정만으로는 알 수가 없어.
네가 조금이라도 나에게 미련이 있는지..그렇지 않은지..
나는 어떻게 해야 네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을 막을 수 있는 거지..?
초조한 마음에 주머니 안쪽에서 담배를 꺼내다 생각했다.
나는 오늘도 너에게 담배를 권해야 하는 걸까.
"...담배 줄까?"
"어? 아니...끊었어"
알아. 알고 있어.
그리고 이제 곧 너는 나에게 열쇠를 돌려 줄 테지.
그러면 나는 오늘은 어떻게 말해야 할까.
무슨 말로 너를 설득해야 하지?
"신원아..!"
"......."
"아, 손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깜박 잊고 있었다.
지금은 점원이 내 다리에 커피를 쏟을 순서였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계상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넨다.
나는 어제처럼 계상이 건넨 손수건으로 다리를 훔치다 말고 내 옆에서 허둥대는
점원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가만히 그의 젖은 손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당황하는 그에게 나는 진심으로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사실은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어제 나에게 베풀어준 배려에 대해서 진심으로 고맙다고.
그러나 손을 닦아주고 괜찮다 웃는 나의 행동만으로도 그는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맞은 편에 앉은 계상도 나와 점원을 쳐다보며 조금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다 젖었다. 나중에 돌려줄게"
"응? 아니.. 그냥 가져"
"....그래"
그리고 순서에 따라 내 앞으로 점원이 새로 커피를 가져왔다.
벌써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다음에 이어질 순서를 바꿔야 하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의 손이 이미 안쪽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 있는데 말이다.
"돌려줄게"
"........"
"우리...헤어지자"
"........"
나는 어제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생각이 나지 않는다.
또한 어제 그는 이 말을 하며 어떤 표정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지금과 같은 표정이었겠지. 다만...
당황한 내가 미처 살피지 못했을 뿐.
계상의 표정은 단호했다. 서운할 만큼.
"계상아. 결혼하니?"
"....어..어...응"
불쑥 꺼낸 내 질문에 그는 조금 놀란 듯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질 말들을 더 이상 듣고 싶은 심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 역시 어제와 같은 말들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계상은 덤덤히 묻는 내 태도를 오해하는 듯 했다.
내가 자신과의 이별을 그렇게 어려워하지 않아 다행이다란 안도의 표정이었다.
"그 여자 사랑해..?"
".........."
"사랑하냐구"
".....응"
만약, 내가 너 그 여자 안 사랑하지. 라고 물으면 넌 뭐라고 대답할래.
그래. 내 질문이 잘못된 걸지도 몰라.
그런데 처음 듣는 말이 아닌데도 네가 그 여자를 사랑한다는 대답은..
오늘도 아파.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느라 담배를 물었고,
계상은 이런 나의 반응이 머쓱한지 담배를 물었다.
나에게 미안하다기보다는 이런 상황이 자신에게 부끄럽다 생각하는 것 같다.
계상은 친절한 편은 아니지만, 남에게 먼저 피해를 주는 타입은 아니었다.
지금 이런 상황은 그로서는 대단히 싫은 상황일 것이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계상은 오늘 자신의 이별 통보에 대해서 내가 어떤 반응일지를 기대했을까.
담배를 피며 맞은 편의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어제는 나를 쳐다보며 수근 대고 호기심에 가득 차 있던 그들이었는데,
지금은 상관도 하지 않고 있다.
밉살스럽다.
내가 어제처럼 나를 사랑하는냐 묻는다면 너는 똑같은 대답을 할까.
나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하지?
"신원아.."
Rrrrrrrr
아무 말 없이 담배만 피고 있는 나를 기다리다 계상이 먼저 나를 불렀고
오늘도 참지 못하는 그의 핸드폰 벨이 순서대로 울렸다.
어제 내 전화를 받던 그녀의 목소리겠지.
"여보세요. 응. 어...아니 잠간 밖에 나왔어. 아니.. 누구 좀 만나고 있어..
그래.. 응.. 있다가 다시 전화할게. 응"
나는 이제 계상에게 '누구'가 되어 버렸다.
어젯밤 내 전화를 받던 계상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옆에 있는 그녀를 의식하느라 나에게 술 주정하지 말라 핀잔하던 계상.
집에서 기다리는 마누라에게나 가보라고 했던 계상.
결혼식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오지 말라고 하겠지.
나에게 어제란 기회가 주어졌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뭐가 다르단 말인가.
단지 어제보다는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다는 것을 제외하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신원아.."
"........"
"........"
"...말해"
어제처럼 아무 것도 다그치지 않는 나에게 그가 뭐라 말할지 궁금했다.
그러나 계상은 내 이름을 불러놓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결혼 꼭 해야 돼?"
"........."
담배를 끄고 내가 먼저 차분히 물었다.
이렇게 담담히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제보다는 많이 나아진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대답하지 않는 계상의 침묵이 무겁게 내 목을 조른다.
"하지마"
"........"
"결혼하지마"
"........"
"내가 잘못했어. 너한테...그래. 내가 잘못했어.
나한테 섭섭한 게 있으면 말로 해. 이러지 말고"
".........."
"계상아"
"아니야. 니가 잘못 한 거..그런 거 없어. 이건... 내 문제야"
너의 눈이..
나를 바라보며 맥없이 웃기만 하던 너의 다정한 눈이..
이렇게 차가웠던가..
어떻게 하면 너의 눈을 다시 내게로 향하게 할 수 있지..?
"내가 도와줄게. 내가 있잖아. 넌 혼자가 아니라구. 계상아"
"그런 게 아니야. 모르겠니? 그래. 이런 말하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이제 나는 싫다. 이런 거. 지쳤어.
....힘들어"
".........."
"이해해 줘"
그는 어제만큼의 위로도 하지 않고 커피숍을 나가버렸다.
혼자 남아 차갑게 식은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생각했다.
널 뺏기지 않을 거야. 오늘은 아직 준비가 안 되었지만.
내일은...내일은 이런 식으로 대책 없이 너를 만나지 않을 거야.
세 번째 이별을 맞이할 준비를 위해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로 했다.
<4>
세 번째 이별.
커피숍을 나와 나는 오늘도 사무실로 돌아가지 않았다.
내일의 이별을 위해 생각하고 궁리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나에게 어제를 선물해 준 키다리 천사는 어디에 있는 건지 나타나지도 않고
나 혼자서 생각하기엔 이제까지 누군가에게 먼저 버림받은 경우는 처음이기에
도대체 어떻게 해야 계상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아직도...그래도...> (지은이: 릴리)
<그들은 사랑한다 말하지 않았다> (지은이: 릴리)
<사랑 반, 아픔 반> (지은이: 릴리)
<어느 더운 여름 날 단비처럼>(지은이: 릴리)
<Love me, Love not>(지은이: 릴리)
이제까지 동성을 애인으로 두고 있었으면서도 동성을 주제로 한 소설을 읽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누구에게도 조언을 받을 수 없는 처지에서는 이런 경우 다른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할까란 생각으로 서점을 뒤졌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섯 권의 책을 쌓아놓고 소파에 누워 읽기 시작했다.
모두가 릴리라는(아마도 가명인 것 같다)이름을 가진 사람이 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신기할 정도로 모두가 나와 계상을 보는 듯 했고, 나는 캄캄한 밤이 될 때까지 꼼짝 않고
집중해서 책들을 읽어 12시가 지났을 때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영화나 소설을 보면 으레 나와 비슷한 주인공의 처지에 동화되어 버리는 게 흔한 일이지만
이건 너무했다.
책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우연 치곤 정말 너무 많이 나와 계상을 닮아있었다.
결국 나는 책을 통해서 무언가 묘안을 얻으려고 했다가 행복했던 지난 기억만 잔뜩 떠올리고
미칠 것처럼 계상이 보고싶어 콧물까지 흘리며 펑펑 울고 말았다.
실컷 울다 보니 속이 좀 후련해지는 기분도 들었고 그러다 문득 번쩍 드는 생각이 있었다.
추억을 생각나게 하는 것.
우리가 함께 했던 추억을 그에게 다시 기억 나게 하는 것.
자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었는지를 기억 나게 해야 한다.
오늘도 TV속 아나운서는 월요일 출근길 정체를 알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키다리 천사씨!!"
허공에다 대고 소리 지른 뒤 욕실로 들어가 콧소리를 흥얼대며 칫솔을 들었다.
그리고 오늘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재빨리 순서를 정리해 나갔다.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한 뒤에 김대리에게 전화를 걸어 결근을 알렸다.
어차피 오늘도 월요일이지 않은가.
어제도 그저께도 나는 무단조퇴 같은 건 아직 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내가 먼저 계상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계상아. 나"
-어.. 웬일이야. 아침부터..
"오늘 나랑 어디 좀 가자"
-으응? 어딜.. 너 회사 출근 안 해..?
"결근하려구. 너도 오늘 하루만 그래라"
-무슨..일인데..
"무슨 일인지는 만나서 얘기 할 테니까, 그냥 그렇게 하자"
-..........
생각해보니 나는 근래에 들어 그에게 이런 식으로 주장을 한다거나 떼를 쓴 적이
없었다. 그저 만나기 어려운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만 했지 내가 먼저 무얼 하자고
한 적이 없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 계상도 어리둥절하고 있는 것이다.
"계상아!!"
-.....결근은 안돼. 그냥 점심 때 잠깐 보자.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어.
그래 알아. 넌 오늘 나를 만나서 네 멋대로 이별을 통보하려고 했을 테지.
나는 아무런 준비도 돼 있지 않은데 말이야.
"결근 좀 해. 하루 그런다고 뭐가 어떻게 돼?"
-....너 왜 그래 오늘.
왜 그러냐고. 그래. 이런 적 없었지 한 번도.
난 언젠가서부터 네가 무서워서 함부로 이러자 저러자 한 적이 없었으니까.
어쩌면 진작에 눈치채지 못한 내가 미련한 건지도 몰라.
나에게 마음이 떠나서 그랬던 건데. 나는 그걸 왜 몰랐을까.
"그래. 그러니까 한 번은 그냥 내 말 좀 들어주면 안 돼?"
-........
"계상!"
-....알았어. 어디로 갈까. 내가 집으로 갈까..?
"오케이. 좋아. 그럼 지금 와라"
-.....알았어.
나에게 이별을 통고해야 하는 너는 지금 내 비위를 맞추어야 하겠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너의 약점을 쥐고 있으니까.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돼 버린 거니.
내가 너의 약점 따위나 되다니..
그러나 이런 씁쓸한 기분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옷장을 열어 나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옷을 골라 입고 머리를 다듬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말쑥한 모습으로 그를 맞아야 했다.
거울 속에 보이는 내 얼굴을 향해 웃었다.
이거 봐. 내가 얼마나 잘 생겼는데.
그러나 계상은 현관에서부터 나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
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아서 오랜만에 오게 된 집을 건성으로 둘러 볼뿐,
정작 나에게는 제대로 관심 있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런 계상의 태도에 기가 꺽이는 기분이었다.
예전 같으면 새 옷을 입은 나를 보면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야, 우리 애인 오늘 왜 이렇게 멋있어~라며 온갖 말로 민망할 때까지
추켜세우곤 했던 계상이었는데..
서운한 마음으로 할 말을 잊은 채 쳐다보지만 계상은 무심한 태도로
핸드폰을 열어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네. 저 윤계상인데요. 오늘 출근이 좀 늦을 것 같아서요.
갑자기 집에 일이 좀 생겨서요. 네.. 그럼 오후에는 출근하겠습니다. 네"
나에게 통보를 하는 듯 통화를 끝낸 계상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제대로 진행 될 수가 없다.
이것은 마치 나는 네가 하려는 게 뭔지 다 알고 있어 라고 말하는 투였다.
할 말을 잊은 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리 속으로 부지런히 궁리를 하고 있는 나에게
이번에도 계상이 먼저 말했다.
"안 그래도 오늘쯤 연락하려고 했어. 앉아 봐. 할 얘기가 있어.
....신원아"
"계상아. 일단 우리 나가자. 빨리"
"........."
"빨리 일어나라니깐. 너 시간 없잖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게 아닌데..
넌 어떻게 끝까지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하니.
이러지 마 제발..
이러지 마 계상아.
"도대체 어딜 간다는 거야"
"나가자니깐. 빨리이~"
"........"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 눈치도 없는 척.
완고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있는 그의 손을 잡아 끌어 일으키자
계상은 마지못한 듯 일어서서 나를 따라 집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입술을 꼭 깨물고 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허리를 숙여 구두끈을 다시 또 다시 고쳐 맸다.
계상은 함께 있을 때 내가 운전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늘 언제나 자기 차에 나를 태우고 운전하길 좋아했고, 그 덕분에 나는 면허를 따고도
몇 년이 지나서야 겨우 제대로 겁을 먹지 않고 운전을 할 수 있게 되었었다.
그리고 내가 운전대를 잡으면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를 걱정하듯 옆에 앉아
안절 부절 조마조마 이런 저런 참견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깜박이도 켜지 않고 옆 차선을 옮겨가도
아무런 말이 없이 앞만 보고 있다.
견디기 힘든 침묵이 좁은 차 안에 냉랭하게 퍼져갔고 나는 라디오를 틀었다.
-자 그럼 이번 사연에 대해서는 덴지씨께서 조언을 해 주실 차례네요.
-네. 안녕하세요. 덴지입니다. 어...지금 사연을 보니까 미진씨가 사귀셨던 남자분에게
다른 여자 분이 생겼고, 그래서 남자분이 헤어지자 그랬는데, 음...제 생각에는,
그냥, 미진씨가 그 남자 분을 깨끗이 잊으셨으면 좋겠네요. 저라면 그럴 거 같아요.
그냥 깨끗이 잊으시고, 아직 젊으시니까 분명히 또 좋은 분 만나실 수 있을 거에요.
미진씨, 그냥 그 남자분 얼른 잊으시라고. 그렇게 말씀 드리고...
탁.
앞만 보고있던 계상이 라디오를 꺼버렸다.
"........."
"........."
"어디 가는 거니 지금"
"........."
춘천으로 가는 국도를 접어들자 계상이 물었다.
기억하니..
네가 처음 나에게 고백을 했던 날.
너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나를 차에 태웠어.
그리고 강촌이란 곳까지 갔었지.
그 날 거기서 너는 나에게 처음으로 고백했어.
기억 나니..?
캄캄한 밤이 되었을 때, 하늘에 별이 총총 박혀있던 그 날 밤에..
너는 네 맘대로 나에게 키스를 했어.
교묘하고 능란하게 나에 대한 네 마음 꼭꼭 숨겨 놓고 있다가
그 날 밤,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잖아.
날 사랑한다고, 죽 그래왔다고 말하는 너에게 나는 대답대신 들고 있던
플라스틱 물병을 집어 던졌지.
그래도 너는 웃었어. 그래도.. 웃었다구.
"어디 가는 거냐구"
"........."
"데니야"
"........."
준비한 말들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침묵을 선택했다.
네가 기억할 때까지. 기억해 낼 때까지.
월요일의 춘천국도는 한산했고 1시간이 조금 넘자 강촌에 도착했다.
텅 빈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매운 바람이 부는 공기가 코끝을 찡하게 했다.
내가 차에서 먼저 내리고 나서도 계상은 그대로 차 안에 앉아 있었고 한참을 기다리던 나는
아무 말 없이 조수석 문을 열며 그를 쳐다보았다.
내 시선을 알면서도 앞 유리만 쳐다보고 있던 계상은 한숨을 들이키며 차에서 내렸다.
그러는 동안 역시 나에게는 한 번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서러움이 복받쳐 오르는 것을 누르고 언젠가 함께 걸었던 길을 먼저 걷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곳을 왔던 처음 그 때는 여름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길가의 나무들이 초록을 뽐내며 아무 말이 없어도 부족함을 느낄 수 없는 계절이었는데..
지금은 12월의 마지막 월요일이었다.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들이 우리 사이에 흐르는 적막한 공기를
더 분명히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어디 좀 들어가자"
"..........."
"데니야"
".........."
그는 나와 걸었던 이 길을 걷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짜증이 묻어난 목소리를 애써 감추려 하지만 그것조차 내게 들키고 말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그를 마주보았다.
가만히 내 시선을 견디던 계상은 이제는 짜증난 목소리를 숨기지도 않고 말했다.
"너 뭐 하는 거야 지금"
".........."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월요일 아침부터 사람을 불러내더니
여기는 왜 온 거야. 어린애도 아니면서"
"........."
적어도 좋아하는 사람이 평소에 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면 이런 말보다는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을 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나를 생각 없이 까부는 어린애 취급했다.
게다가 이제는 이런 식으로 나를 몰아붙여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정당화를 시키려고 한다.
원망을 담고 있는 내 눈이 불편한지 계상은 슬쩍 시선을 외면하며 말했다.
"어디 좀 들어가자. 할 말 있어"
여기까지인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너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그렇게 나오면 내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걸 넌 알고 있지?
내가 너에겐 꼼짝없다는 걸 너는 알고있는 거지?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 너는 너무 잘 알고 있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무례할 수가 없어.
"여기서 해"
"........."
"해 봐. 하고 싶은 말"
".........."
"너"
".........."
"내가 이제 재미없어졌어?"
".........."
"그래서 이렇게 막 하는 거야? 내가 너한테 이렇게 우스워?"
".........."
"난 너 포기 안 해. 이제 와서 니가 날 사랑하지 않든, 다른 여자랑 결혼을 하든.
시작은 네 맘대로 시작했을지도 모르지만. 끝내는 건 니 맘대로 못 해"
"........."
"내가 널 안 놔 줄 테니까"
계상은 당황스러움에서 곤란함으로 그리고 결국은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옆으로 돌아섰다.
"알았나 보구나. 그래. 나 결혼해.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만났어.
...네가 재미 없어졌냐구. 글세. 네가 아니라 너와 만나는 이런 식의 생활이
재미없어졌다고 하는 게 솔직한 말이겠지"
"..........."
"우리한테 미래가 있니? 이런 식으로 산다는 게 언제까지 계속 될 수 있어.
너는 안 힘드니? 숨겨야 하고, 속여야 하고. 그런 식으로 사는 거. 넌 안 힘들어?
누군가는 먼저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핑계대지 마. 차라리 내가 싫어졌다고 말해. 솔직하게 말하라구!"
"............"
그게 아니라는 대답이 아니라도 좋다.
이제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좋다.
아무 대답이라도 해 준다면 이보다 더 비참하지 않을 것이다.
대답 없는 계상의 태도는 절망이었다.
"그만 하자. 너랑 싸우면서 헤어지고 싶지 않아.
나도 마냥 기분이 편한 게 아니야. 날 이해해 줘 신원아"
"왜"
"......."
"왜 나만 널 이해해야 되는데. 왜 언제나 난 네가 하자는 대로 해야 되는데!"
"........"
이럴려고 여기를 온 게 아니야 계상아..
나는 정말 너한테 화를 내고 싶지 않아.
나는 네가 미운 게 아니야.
네가 미워서 이러는 게 아니라구.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얼마나 널 사랑하는데...
왜 그걸 몰라. 응? 말하지 않아서 그래?
그래. 난 너한테 사랑한다는 말조차 제대로 한 적이 없었어.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넌 알았잖아. 알았잖아...
"계상아..미안해...미안해.. 그래..네가 얼마나 힘들지 생각하지 못했어.
힘들면 힘들다고 해도 돼. 나한테 투정 부려도 돼. 화내도 돼.
그렇지만 헤어지자고는 하지 마. 난 네가 없으면 안 돼"
"이러지 마 신원아"
"........"
바로 가까이 그가 있는데..
손을 뻗으면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다가갈 수가 없다.
"너. 이러지 않았어. 내가 아는 안신원은 이런 사람이 아니야.
정신 차려. 나는 네가 이렇게 할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구. 알아?
난..못난 놈이야. 그래서 먼저 지쳤고. 힘들어서...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하는 거야. 모르겠어?"
"..........."
"...가자"
그는 내 손을 잡고 걸었다.
여전히 따뜻한 손이었는데 나는 춥기만 했다.
열쇠를 달라는 말에 바보처럼 무기력하게 건네자 나를 차에 태우고 운전을 했다.
이것이 그가 나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이번에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 나는 눈물조차 흘릴 수가 없었다.
또 다시 내일이 온다 해도 이제는 자신이 없어진다.
나는 도대체 계상을 어떻게 찾아와야 하는 거지..?
집 앞에 나를 내려주고 그는 주차장에 세워두었던 자신의 차로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계상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계상이 떠나고 천천히 아파트 현관의 계단을 올라 엘리베이터를 타자
나는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5>
네 번째 이별.
눈을 떴을 때 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워있었다. 방안은 캄캄했다.
잠에서 막 깨어난 먹먹한 상태에서 천장을 향해 눈을 껌벅이다
이내 베개 속으로 얼굴을 묻었다.
나직하게 들이쉬는 내 숨소리를 제외하곤 너무나도 쥐죽은듯이 고요한 정적 속에서
새삼 이제까지 이런 집에서 혼자 용케도 오래 견디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그를 위해서 언제나 깨끗이 청소해 두었던 청결함 조차도
외로움의 냄새로 느껴졌다.
계상이 집을 나가고 난 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
그러다 일주일이 이 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고.
어느새 혼자 있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하게 되고 말았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때그때 임기응변식으로 적당히 내 자신을
억지로 설득시키며 얼버무리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것이 이별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깼으면 좀 일어나 봐요"
거품처럼 소용도 없는 생각을 하며 누워있는데 갑자기 말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켜자 언제부터인지 침대 발치에 앉아 있는 노랑머리가
시커먼스와 키다리를 찾느라 두리번거리는 나에게 말했다.
"나 혼자에요. 태우랑 준은 일하러 나가서 없어요"
지난번에 보았을 때는 시종일관 샐샐 웃던 노랑머리가 지금은 전혀 웃지도 않고
또렷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있었다.
"사실은, 태우가 당신을 그냥 내버려두라고 했는데. 아, 그건 알아요?
당신 엘리베이터 안에 쓰러져 있는 걸 태우가 집으로 데리고 들어온 거에요"
그랬구나.. 어쩐지 엘리베이터에 탄 이후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키다리가 날 그냥 내버려두라고 했다고?
어쩐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당신 하는 짓이 하도 답답해서 도저히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바보 같은 짓만 골라 해요?"
"..........."
더 심한 말을 하더라도 할 말이 없어 시무룩한 얼굴로 발끝만 쳐다보자
노랑머리는 그런 내가 정말 한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
"당신은 자존심도 없어요? 그렇게 당하고?"
이번에는 눈을 치켜 뜨고 거슬린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지만 나를 딱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는 노랑머리의 표정이 비웃음만은 아닌 것 같다 느껴졌다.
"어...떻...."
"네? 뭐라구요?"
"......어떻..."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구요?"
끄덕끄덕.
천사에게 자존심을 내세워서 뭐해.
아니. 천사가 아니더라도 지금 나는 아무나라도 좋으니
나를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붙들고 묻고 싶어.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도와줄까요?"
다소 거만한 듯 눈을 살짝 내리깔고 말하는 노랑머리가 키다리 천사만큼은
신뢰를 주지 않았지만 나는 간절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일찍 나왔네"
"어.."
"......."
"......."
다소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 해야 한다.
오늘은 내가 먼저 그에게 이별을 통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차 시킬까?"
"...그래"
......당신이 먼저 헤어지자고 해 봐요. 그러면 그 사람이 어떻게 나오는지.
당신은 그 사람 마음이 궁금한 거 아니에요. 당신이 먼저 헤어지자고 하면
어떻게 나오는지 보란 말이에요. 내가 도와줄 테니까.
"계상아.."
"응?"
시선을 내리깔며 침잠하게 낮은 목소리로 내가 먼저 이름을 부르자
계상이 대답했고 나는 그가 내게 했던 것처럼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계상은 심각한 내 태도에 조금은 긴장한 듯 했다.
어쩌면 내가 자신이 하려는 말을 눈치채서 이런다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가라앉은 침묵 속에서 가게 점원이 다가와 커피를 서빙했지만 오늘은 계상이 나를
급하게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내 다리에 커피를 쏟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준비한 말을 시작했다.
"할 얘기가 있어"
"..........."
"..........."
"....뭔데..."
"헤어지자.. 우리"
"..........."
하고 말았다.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시선을 들고 계상의 표정을 보고싶어 조바심이 나지만
그러다 속마음이 들킬까 봐 애써 참았다.
"미안해.. 나.. 다른 사람이 생겼어"
".........."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려 뜬 눈을 들어 그에게 시선을 맞추자 계상은
가느스름한 눈으로 나를 보고있었다.
눈을 마주하고 있기가 힘들었지만 간절한 심정으로 그의 눈에서
나에 대한 무언가를 찾아보려 했다.
한참동안 표정 없이 나를 응시하던 계상은 천천히 시선을 내리며 물었다.
"....오래 됐니?"
"아니..아니야. 만난 지.. 얼마 안 됐어"
나는 그가 내게 했던 대답을 똑같이 하며 마른침을 조용히 삼켰다.
그러나 여전히 계상은 아무 표정이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앞에 놓인 찻잔만 가만히 쳐다보다 얕은 한숨을 쉬더니
흘깃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담배 있니?"
끊었다던 담배를 먼저 찾았다.
물론 나는 그가 담배를 끊었다는 것에 대해서 모른 체 해야 했기 때문에
아무 말 없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건넸다.
담배를 물고 창 밖을 쳐다보는 계상의 표정을 보고있자 나는 입안이 바짝 탔다.
노랑머리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을까.
내가 먼저 이별을 통고하고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하자
지금 계상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내 기분을 알겠니.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이제는 너도 알겠어..?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자식, 나만큼 힘들진 않겠지. 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걸 즐기기엔 나는 계상을 너무 사랑했다.
무표정하게 담배를 피우는 계상의 쓸쓸한 옆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마음이 너무 아파서 사실은 아니다라고 당장 말하고 싶어졌다.
"계상아. 사실..은..."
"어머, 데니씨~"
마른침만 꿀꺽꿀꺽 삼키다가 더 이상은 못 하겠다란 생각이 들어 말을 꺼냈을 때
난데없이 노랑머리가 커피숍 안으로 들어와 나를 불렀다.
나는 놀란 마음에 얼른 주변을 휘휘 둘러보는데,
분명. 내 눈에만 보여야 할 노랑머리를 계상도 올려다 보고있었다.
베이지색 캐쥬얼 수트를 멋지게 입고 나타난 노랑머리는 샐샐 웃으며
내 옆으로 앉아 앞에 앉은 계상은 안중에도 없는 듯 내 팔을 붙잡고 말을 했다.
"와아. 이런 데서 우연히 만나니까 더 반갑다. 여긴 웬일이에요?
아 맞다. 데니씨 사무실이 이 근처지. 하긴. 나 안 그래도 여기 근처에 왔다가
데니씨한테 전화해서 같이 점심 먹자고 하려고 했는데, 근데 바깥에서 보니까
데니씨가 딱~! 보이잖아요. 정말 우린 인연인가 봐. 그죠?"
뭐...뭐..뭐야. 이건.
이런 건 미리 얘기 한 적이 없잖아.
나는 당황하고 기가 막혀 그리고 앞에 앉은 계상이 신경 쓰여서 내 팔을
붙잡고 있는 노랑머리의 팔을 슬그머니 떼어내며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아....저기...저..."
난 시커먼스와 키다리의 이름이 준과 태우라는 건 알지만 이 노랑머리의 이름은
아직 들어 본적이 없다. 뭐라고 불러야 하지 몰라 더듬대는데 말없이 지켜보던
계상이 노랑머리를 향해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데니 친구.. 분이신가 보죠..? 윤계상이라고 합니다"
"아, 저기.. 친구 아닌데.."
아....씨..
잘 나가고 있었는데 왜 나타나서 방해를 놓는 걸까.
도와준다고 하고선, 도대체 뭐야 이건.
그러나 친구 아닌데..라는 묘한 뉘앙스를 풍기며 노랑머리가 웃자
계상의 표정이 일순간 눈에 띄게 굳어졌다.
아닌가? 노랑머리가 맞는 건가?
"아, 맞다. 두 분 얘기 중이신데 제가 갑자기 나타나서 방해한 거죠?
죄송해요. 그냥 이런데서 우연히 데니씨를 보니까 너무 반가와서 제가 그만.."
"....괜찮습니다"
이 노랑머리는 소속이 어디인지 의심이 간다.
정말 천사가 맞을까.
혀를 찰 만큼 능숙한 연기가 너무 무섭다.
"전 손호영이라고 해요. 데니씨랑 만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사실은 제가 아주 오랫동안 쫓아다녔거든요.
같은 남자지만, 데니씨 정말 너무 매력적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윤. 계. 상. 씨?
아, 저기 성함이 윤계상씨 맞죠?"
".........."
계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호영이라는 노랑머리는 그의 대답 따위를 들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샐샐 웃으며 내 앞으로 놓인 커피를 집어 내가 입술을 댄 곳에
입을 대고 마셨다.
"근데, 점심은 먹고 커피 마시는 거에요?
빈속에 이런 거부터 마시지 말라고 내가 그랬잖아요. 네?"
"저기..호..영...씨.."
"네? 아, 알았어요. 지금 두 분이 중요한 얘기 중이었나 봐요. 미안해요.
그럼 나 저쪽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두 분 얘기 끝나시면
저랑 같이 점심 해요. 네?"
"저기..."
"아닙니다. 저는 가려던 참이었어요. 두 분이 식사하세요"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말하는 노랑머리와
안절부절 하는 나를 지켜보던 계상이 일어나려 했다.
다급한 마음에 그를 붙잡으려는데 나보다 노랑머리가 빨랐다.
"그러지 마시고 저희랑 같이 식사하세요. 아직 식사 안 하셨죠?
데니씨랑 잘 아는 분 같은데 제가 점심 살게요. 같이 가세요. 네? 네?
아이, 제가 괜히 끼어 들어서 두 분 방해 한 것 같아 죄송해서 그래요"
말은 애교가 살랑살랑 넘쳤지만 일어서는 그의 팔을 잡은 노랑머리의 손은 어찌나 힘이
완강한지 계상은 도로 제자리에 털석 주저앉을 정도였다.
기가 찬 듯 멍하니 쳐다보는 계상에게 노랑머리는 특유의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안 그러면 저 데니씨한테 혼나요. 전 데니씨가 무섭단 말이에요"
그리고 계상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러나 계상은 플립을 열자마자 도로 닫으며 전원을 꺼버렸다.
순간 나는 노랑머리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돼버렸다.
<6>
천사란 마음만 먹으면 어떤 모습이라도 능숙하게 할 수 있는 걸까.
아무래도 인간보다는 여러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노랑머리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반시간 정도만 있다 나온다 해도 온 몸에 숯불에 구운
고기 양념 냄새가 잔뜩 배어서, 먹을 때는 모르지만 식당을 나오자마자 먹은 나조차도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숯불갈비 집이었다.
콧소리와 함께 샐샐 웃는 노랑머리에게 홀린 듯 끌려 식당에 들어온 순간부터
나는 계상의 눈치를 살폈다.
다른 좋은 곳도 많은데 왜 하필 숯불갈비 집이란 말인가.
촌스럽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어쨋든 노랑머리는 지금 현재 내가 사귀고 있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단정히 타이를 맨 사무실 복장의 계상은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아무런 내색 없이 우리를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마치 어떤 것에 대한 대가를 치룬다는 듯한 태도로 느껴질 만큼
계상은 커피숍을 나온 뒤로 아무 말 없이 우리의 뜻을 따라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몹시 궁금했지만 옆에서 끊임없이 재잘재잘 대는 노랑머리에게 끄덕끄덕
상대를 해 주느라 제대로 상황 판단을 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나와 노랑머리가 나란히, 맞은 편에 계상이 마주앉아 갈비 3인분을 주문했다.
"저, 이런 거 제가 여쭤봐도 될지 모르겠는데요.."
"...말씀하세요"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지 귀에 담아지지도 않는 말을 내게 종알대던 노랑머리가
갑자기 앞에 앉은 계상에게 말을 걸었다.
"아, 저기 혹시.. 불쾌하지 않으신가 해서요"
"...뭐가요"
계상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들렸지만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런 태도는 상대를 제압 시키는 그 나름대로의 방법이라는 것을 안다.
"저랑 데니씨랑 친구..이상이라는 거. 아..사실 일반적인 상식은 아니니깐.
그래서 혹시 불쾌하시진 않나..걱정이 돼서요"
"..........."
왜 이런 말을 하나 나는 깜짝 놀라서 노랑머리를 흘금 쳐다보는데 노랑머리는
살랑살랑 봄바람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계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계상은 굳은 표정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제가 곤란한 질문을 드렸나 봐요. 죄송해요"
"............"
"불쾌하시다 해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데..
데니씨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우리가 이렇게 된 거,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제가 일방적으로 데니씨를 오랫동안 짝사랑 해 왔거든요.
물론 저도 데니씨를 만나기 전까지는 저한테 이런... 아, 뭐라고 해야지?
아무튼, 남자에게 반해서 이럴 줄은 몰랐어요. 변명 같지만요"
노랑머리의 의도를 알아챈 나는 더 안절부절이 되어 마른침만 꼴깍 삼키며
앞에 앉은 계상의 굳은 표정을 훔쳐보았다.
계상은 엉뚱한 면이 많았다.
사실은 계상이 상식을 벗어나는 것에 대해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것을 지내면서 알게 되었지만,
그래서 계상은 무례한 것을 가장 싫어했다.
그러나 나에게 한참 열중했던 때의 기억을 해 보면...
확실히 나에게 미쳤었다..라고 밖에 해석할 수 없는 일도 종종 있었다.
-데니야 나 미쳤나 봐
-왜
-아무 때나 니가 막 보여.
-보이다니. 어떻게
-그냥 내 눈에 니가 자꾸 보여. 오늘도 그랬어
늦은 밤에 나란히 누워서 마감뉴스를 보고있었다.
옆에 누워있던 계상이 슬쩍 내 몸 위로 올라와 목과 어깨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로
아무 때나 내가 보인다는 엉뚱한 말을 했다.
나는 그가 내 마른 몸 위에서 편안하도록 이불 위로 허리를 받쳐주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어떻게 했게
-쿠쿡.. 가라고 했어?
-아니
-그럼
-니네 회사에 갔어
-으응? 우리 회사에?
-응. 너 몰랐지.
-언제. 진짜야?
-응.
-근데 왜 말 안 했어
-그냥. 일하는 니 모습이 보기 좋아서.
근데 너 진짜 일만 하더라. 한 번쯤은 날 볼 줄 알았는데.
그때만 해도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은 고객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곳이었기 때문에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일일이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 계상은 용건도 없으면서 우리 사무실로 와서 내가 일하는 모습을 한참 보고
갔다는 말을 했다.
-어우...우리 계상이 섭섭했겠네.
-슬펐다. 무진장
-그러게 왜 그냥 가. 부르지.
-옛날 생각났어. 내가 널 몰래 좋아했을 때 니가 가는 데마다 쫓아다닌거.
가슴 아픈 추억이 다시 생각났지.
-근데 너 회사는 어떡하고 그랬어.
-혼났지. 과장한테.
-뭐? 야 윤계상.
-응?
-너 미친 거 맞구나.
-응. 미쳤어.
자기가 생각해도 자신이 오늘 한 짓이 우스운지 킥킥 웃으며 내 목 언저리에 간지러운 숨을
뱉어내다가 그냥 참기에는 아플 만큼 이빨로 내 목을 깨물었다.
덕분에 다음 날 나는 목 감기가 걸렸다는 핑계를 대며 턱까지 올라오는 폴라를 셔츠 안에
껴입어야 했다. 그랬었다.
.............
"아하핫.. 제가 괜한 말을 했군요. 죄송해요. 자, 좀 드세요"
"..........."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지만 계상은 노랑머리가 권하는 대로 젓가락을 들고
앞에 놓인 고기를 집어먹었다.
"아..그거 아직 안 익은 거 같은데.. 이거 드세요"
나는 이 상황이 그저 당황스러워서 뭐가 뭔지 분간을 할 수가 없지만
노랑머리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차분했다.
아직 익지도 않은 붉은 살점의 고기를 집어먹은 것을 지적하자 계상도 그제서야
자신의 입안에서 씹히는 날고기의 찝찌름한 맛을 알아챘는지 씹던 것을 멈추고
냅킨 안으로 조용히 뱉어냈다.
이런 식이었다 계상은 늘.
여간해선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있는지 무슨 기분인지 대번에 알아채기 힘들었다.
게다가 언제부턴가 함께 있으면 흐르는 시간이 아까워서 어떻게 해야 할까를
궁리하느라 마음만 급했다.
"데니씨도 많이 좀 먹어요. 왜 맛없어요?"
"아니.. 먹고 있어요"
정말 나를 사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노랑머리는 애틋할 만큼 살가운 표정으로
내 앞으로 잘 익은 고기를 집어다 주었다.
너무 이러면 계상과 다시 어떻게 풀어야 할지 걱정이 되면서도 아직까지
아무 표정 없이 흘금 우리가 하는 양을 무심한 듯 외면하는 계상의 태도는
나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했다.
너...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지..? 그렇지..?
"아, 식사 중에 죄송한데 저 잠시만요"
그를 향해 양해의 미소를 짓고 노랑머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을 찾았다.
그러고 나자 우리 사이는 답답할 만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별로 식욕이 있어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말없이 앞에 놓인 고기를 집어먹던
계상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이 너무 불안했기에 나는 무슨 말인가를 해야 했다.
"계상아.."
"..........."
내가 부르자 계상은 눈을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 결혼해"
"..........."
저 말만큼은 막았어야 했다. 무슨 말이라도 내가 먼저 했어야 했다.
"사실은 그래서 오늘 널 만나려고 했어"
".........."
"네가 상처 받을까 봐 걱정했는데, 좋은 사람이 있었구나"
그런게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계상아.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뭐. 그런데 뭐 계상아..
"이제 와서 내가 너한테 이런 말 할 자격은 없지만..
질투..한다고 생각하지 마. 그래서 그런 게 아니고"
"........."
"너에게 좋은 사람이 생긴다면 나도 좋아. 그렇게 늘 생각했었고.
그런데.. 여자였으면 좋겠다"
"........"
계상은 차분하고 진지했다.
그런데 그 진지함 마저도 나에게는 이미 그가 잡을 수 없는 먼 곳의 사람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눈에는 질투 따위는 전혀 없었다.
"남자와의 사랑....은..."
"..........."
"나로서 끝냈으면 해. 너를 위해서"
"..........."
"아직..저 사람 그렇게 좋은 게 아니라면... 더 심각해지기 전에 그만 둬.
저 사람도 네가 처음인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지금이라면 두 사람 다
접을 수 있을 거 같아"
그래. 네 말이 맞아.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너는 그렇게 나를 잘 파악하면서 어떻게 내가 널 사랑하는 건
모르는 거니. 네가 없으면 난 살 수 없는데..
"너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야. 네가 잘 되기를 바래"
"계상아"
"저 사람과 네가 다시 또 힘든 길을 걷게 되는 건...
....바라지 않아"
"..........."
"인사 못하고 가서 미안하다고 전해 줘"
계상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내 앞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아니라고 설명해야 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이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 계상에게
무슨 말로 설득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말문이 막힌 채로 식당문을 나서는 계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쯧쯧쯧.. 이럴 줄 알았어"
우리가 하는 것을 다 보고있었는지 노랑머리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이젠 알았어요? 저 사람은 이제 당신에게서 완전히 마음이 떠났다구요"
머리가 어질어질했기 때문에 나는 눈을 감았다.
노랑머리가 의도했던 것은 이런 것이었을까.
나에게...그가 마음이 떠났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도무지 그를 붙잡고 싶어하는 내 바보스러움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궁상 떨지 말고 일어나요. 나랑 술이나 마시러 가자구요"
맥없이 앉아있는 내 팔을 홱 잡아 일으키며 노랑머리는 카운터 앞으로 갔다.
"쳇. 그렇게 가버릴 거면 계산이나 하고 가지. 쫌스럽게. 당신이 돈 내요!"
나는 안쪽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점심 값을 지불했다.
웃음도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한마디라도 더 했다간 내 자신이 바보라는 걸 확인할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천사도 술을 마시냐고 묻고 싶었다.
식당을 나와서 비척비척대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보고있던 노랑머리는
한숨을 쉬고선 나를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선 내 지갑을 들고 나가더니 잠시 후에 소주와 안주 따위를 잔뜩 사왔다.
"나 술 못 마셔요"
"못 마시는 게 어딨어요. 마시면 마시는 거지. 자 어서요!"
그의 우격다짐으로 나는 마실 줄 모르는 소주를 한 입에 목으로 넘겼다.
차갑고 톡 쏘는 소주가 목으로 뜨겁게 넘어가며 쓴 인상을 짓게 만들었다.
"잘 마시네 뭘. 자 한 잔 더요"
왜 이렇게 그가 내게 당당한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가 하라는 대로 다시
한 잔의 소주를 또 마셨다.
그리고 나자 그도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 한 번, 그리고 또 한 잔을 따라 마셨다.
"크아~ 좋다. 자, 이것도 좀 먹어요"
그는 내 입안으로 뜨거운 우동 국물을 먹였다.
의지를 상실한 사람처럼 그가 주는 대로 술과 안주를 받아먹었지만 술이라면
한 잔만 마셔도 온 세상 술을 다 마신 것 같은 내가 취한 기분도 들지 않았다.
게다가 쓰기만 한 소주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고 녹녹하게 몸 속으로 스며들어
편안한 기분마저 들게 했다.
"우리 오늘 이별식을 하자구요. 당신이나 나나 이제 더 이상 희망 없는 사랑은
집어치우고 정신 차리자구요. 알았어요? 자, 마셔요"
당신이나 나나?
비장한 표정으로 술을 들이키는 노랑머리를 바라보다 물었다.
"당신이나 나나라구요?"
"그래요"
"당신이 왜요?"
"당신이 왜라니요. 천사는 뭐 사랑도 못하는 줄 알아요?"
술도 마실 줄 아는 걸 보면 천사도 사랑을 할 수 있다 이해할 수도 있지만,
천사가 사랑에 실패할 수도 있는 건가?
"천사도 다른 이의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말했잖아요.
우리도 그런 건 할 수 없다고"
"누굴.. 사랑했는데요. 사람이에요?"
"아니"
"그럼?"
대답 대신 노랑머리는 다시 술을 따라 마셨다.
나는 내 상황의 심각성을 잠시 잊고 그의 사랑이란 것에 호기심이 생겼다.
"천사는 사람을 미워하면 안 돼요. 아무리 나쁜 사람일지라도"
".........."
"그런데, 미운 사람이 하나 있어요"
".........."
"당신이에요. 바로 당신"
"....나요?"
뜬금 없는 그의 말에 어리둥절해서 되묻자 정말 나를 미워하는 것처럼
얄밉다는 듯이 쳐다보며 노랑머리는 말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거든요. 천사인 주제에.
하찮은 사람인 당신을"
"......천사가 나를...요..?"
"바보. 당신은 정말 절망스러울 정도로 바보야"
"........."
"그 곰팅이가 당신을 사랑한단 말이에요! 태우!
......태우가 당신을 사랑한단 말이에요"
나는 술기운으로 풀어진 눈에 힘을 주며 노랑머리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한참동안 눈을 깜박였다.
그 키다리 천사가 나를?
나에게 매일 월요일의 기회를 준 그 키다리가 나를?
<7>
"말해 봤어요?"
"뭘요"
"사랑..한다구요"
"태우한테요? 뭐하러요.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요?"
".........."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로 하기조차 아까웠다. 자존심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잊어버려요. 그런 사람"
"...나도 그러고 싶어요"
"그럼 됐네 뭐"
"......."
그런 건가.
그러고 싶다 마음을 먹으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건가.
아니. 그러고 싶다는 건 진심인가.
좋아서 죽고 싶다는 말과 무엇이 다른 걸까.
정말로 좋은데 죽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정말 작정을 하고 계상을 잊어버릴까.
그런데 내가 할 수 있을까.
"미련 갖지 마요. 바보 같아요"
"..........."
바보 같기는 저도 내 입장이나 마찬가지란 걸 모르는지 아까부터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종알거리는 노랑머리의 빈 잔에 나는 싱겁게 웃으며 술을 채워주었다.
"꺽. 태우가 당신 어디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아요?"
"..어디가 좋대요"
"눈. 당신 눈만 보면 애가 정신을 못 차린다니깐.
근데 정말 무슨 남자 눈이 그렇게 생겼어요?"
"....몰라요"
피식 웃으며 바보 같은 대답을 하는 나를 기가 차다는 듯 쳐다보는 노랑머리에게
다시 술을 따라주었다.
"아씨, 기분이다. 내가 솔직히 하나 말해 줄께요. 당신. 아까 말한 거 취소.
그렇다고 당신이 뭐 좋다는 말은 아니고. 당신도 맘에 안 들지만, 그치는 더 미워.
그러니까 당신이 좀 더 낫다는 말이에요"
"그렇게 보면 당신도 태우씨보다 나요"
"으응..?"
"웃는 얼굴이 정말 천사 같아요"
"치. 천사가 천사 같은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솔직히 태우씨랑 그 또..까만 분. 그 두 분은 천사라고 보기엔 좀 어렵던데요 뭐"
"....왜요. 멋있잖아요. 두 사람.."
"당신도 멋있어요"
"............"
그는 잠시 웃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말했다.
"여시"
"하하하하하"
나는 허리가 휘어지게 웃었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계상도 나를 그렇게 부르곤 했었다. 여시라고.
"아씨, 지금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있는 거에요?"
"아하하하...위로하는 거 아니에요. 정말인데..하하하하"
노랑머리는 샐쭉한 표정으로 머쓱한지 내 잔에 술을 따라 내밀었다.
"마셔요. 당신 증말 미워"
"많이 마셨어요. 힘들어요"
"마시라니깐!"
"알았어요"
인상을 찌그리면서도 고분고분 따라준 술을 받아 마시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는
노랑머리가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 괜찮은 사람이에요. 이제 그만 힘들어 해요.
착한 짓 좀 그만 하고"
"내가 착해요?"
"칭찬 아니에요"
"........."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나는 그에게 빈 잔을 내밀었다.
그리고 남은 술을 다 마실 때까지 우리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잠이 들었는지 소파에 기대 쓰러져 누워 있는 나를 누군가가 들어올리는
느낌이 들어 설핏 잠이 깼다. 계상인가..?
습관처럼 기대하고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자 침대 위로 편안히 나를 누이고
바라보는 이는 키다리였다.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며 가만히 손을 들어 내 눈을 감겼다.
이불을 차분히 덮어주며 가만가만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려주는
그의 손길에서 나는 어렴풋이 슬픈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동안 나를 지켜보고 내 주위에서 맴돌기만 했을 뿐, 말을 하거나
무언가를 함께 한 적은 없지만, 내가 이이에게 상당히 사랑 받고 있었구나..란 느낌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아픈 것이다 란 것을 비로소 알았다.
아마도 나는 줄곧 아팠을 텐데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이겠지.
열에 들떠서 감각조차 마비되어 있었을 테니까.
깨닫고 보니 사실은 너무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다섯 번째 이별.
"...일찍 나왔네"
"........."
녹음기를 틀어 놓은 것처럼 반복되는 대사들.
슬며시 짜증이 난다.
"너 점심 할 시간 없지? 그럼 우리 생과일 쥬스라도 마시자"
"어어.."
나는 가게 점원에게 오늘은 키위쥬스를 주문했다.
"너 담배 끊었니?"
"어? 어.."
"얼굴이 좋아보여서. 그럼 나 한 대 펴도 돼?"
"으응"
니가 어제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아? 이 나쁜 놈아!
거침없이 대하는 내 태도에 준비하고 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새롭게 궁리하는 계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나는 담배를 물었다.
"신원아..!"
"잠깐!"
커피도 아닌 시퍼런 키위 쥬스를 쏟게 할 순 없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어떻게 한다 한들,
오늘도 똑같은 대사와 태도를 보이는 계상이었고 나는 휘청 쟁반을 기울이는
점원을 피해 창 쪽으로 바싹 날렵하게 몸을 피했다.
"아..손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난 괜찮아요. 여기나 닦아주세요. 계상아. 너 손수건 있어?"
"어? 어어.."
신원아..!, 어어..
아까부터 계상은 나의 신기에 가까운 행동들로 인해 바보 같은 두 마디만을 반복하며
도무지 진지할 수 없는 분위기가 계속 연출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당황한 표정이다.
소용없어. 나는 니가 말하려는 걸 다 알고있어 임마.
자 이제 열쇠 꺼내셔야지.
"돌려줄게"
그렇지. 그럼 다음은 헤어지자는 말을 하셔야지.
"우리..헤어지자"
"........."
"...신원.."
"결혼하니?"
"어?!"
"그렇구나. 어쩐지"
나는 키위 쥬스를 시원하게 들이키며 딴청을 부렸고 계상은 답답한지
도무지 어쩌지를 못하고 초조해 했다.
"알..았어..?"
"알긴. 내가 어떻게 알아. 그냥 눈치가 그래 보였단 거지"
그래. 이제야 좀 새로운 대사가 나오는구나.
"좋은 여자겠지. 그치?"
"........."
"축하해. 잘 살 거야 넌"
"........."
"결혼식은 안 갈게. 아무래도 서로 불편할 거 아냐. 그지?"
"........."
들뜨지도 그렇다고 가라앉지도 않은 말투의 나에게 놀랐는지
계상은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네 입에서 그 여자를 사랑한다는 말은 이제 정말 듣기가 지겨워.
더 이상은 네 지독한 말들을 참고 견딜 인내심도 남아 있질 않아.
계상아. 난 이제 네가 미워지려고 한다. 그런 것 같아.
날 왜 이렇게 만들었어. 왜.
"그럼 우리 오늘 송별회나 하자. 마지막이잖아"
".........."
마지막..이라는 내 말에 계상의 눈이 잠시 흔들리며 나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그 눈에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 또 다시 슬퍼질 것 같아서 나는 아무 느낌도
가지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걱정 마. 딴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언제부턴가 네가 이럴 거라
짐작하고 있었어. 그래서 이런 때가 오면, 마지막으로 같이 좋은 시간이나 보내고 끝내자.
생각했던 것 뿐이야"
"..........."
"그래도 뭐 니가 싫다면 할 수 없고. 거절한다 해도 미안해 하진 마"
그리고 계상의 핸드폰이 울렸다.
귀에 거슬리는 벨소리가 오래 울렸지만 계상은 여전히 흔들리는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는 내 눈만 바라보았다.
".........."
".........."
내 청을 거절하기엔 너는 내게 너무 미안하겠지.
협박쯤이라 생각할지도 몰라.
나에 대한 아쉬움이나 미련 따위가 아니라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은 것뿐일 테니까.
"안 받어?"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내가 묻자 겨우 계상은 시선을 털어 내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플립을 열었다 다시 닫으며 말했다.
"뭐 할까 우리.."
나는 웬지 허탈한 마음이 들어 피식 웃었다.
네가 그랬잖아. 나는 여시라고.
계상은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적당한 이유를 대며 조퇴를 알렸다.
그리고 그의 대학동창이면서 나와도 친분이 있는 연석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저녁 만나기로 한 약속을 취소했다.
그리고 나서 또 한 통의 전화를 걸려 번호를 누르다 관두고 전원을 꺼버렸다.
우리는 그 동안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거짓말들을 해 왔다.
가끔은 어쩜 이렇게 능숙한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라고 감탄 할만큼.
우리가 단지 조금 특별한 친구인 것처럼 보여야 하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랑을 부끄럽다 생각하는 비겁함으로 비난하기엔 그와 나의 관계는
그렇게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원래부터 계상이 거짓말에 능숙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무언가를 감추고 속이려 하면, 그것이 단순히 장난이 아니라
자신에게 부끄러운 일이라 판단되었을 때는 스스로와의 타협이 힘들었다.
그것은 계상에게 있어 자존심이었다.
속에 없는 말이라든지, 듣기 좋은 말 같은 것도 잘 할 줄 몰랐다.
그리고 그런 계상을 알았기에,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러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계상에게 그 동안
줄곧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나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디 갈까"
시동을 걸고 나를 쳐다보며 계상이 물었다.
글세. 어디로 가야 하지.
막상 그에게 오늘 하루를 나에게 달라고 했지만 둘이서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낸 것이
하도 오랜만이라 무엇을 해야 할지 금방 떠오르지를 않았다.
빈집에서 혼자 그를 기다리는 동안은 이것저것하고 싶은 궁리도 많았건만.
한 번 때를 놓치고 나면 이런 식으로 김이 빠지는 것이다.
"밥부터 먹자. 어디 조용한 데 가서. 나 배고파"
밥이나 먹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일단은 무언가를 시작해야 했고
또 아직은 한낮이라 그 정도는 시간의 여유를 가져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습관처럼 그에게 배가 고프다는 투정 섞인 말을 하자 예전처럼 계상은 얼른 응해주었고
나는 순간적으로 애틋한 마음이 들어 흔들렸다.
유난히 마른 체격인 나에게 밥을 먹이는 것은 늘 계상에게 과제와도 같은 일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배가 고프다고 하면 계상은 만사를 제치고 그것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급한 일인 것처럼 서두르곤 했다.
계상은 팔당댐을 지나 정경이 꽤 근사한 통나무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지금 주어진 계상과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었다.
<8>
부드러운 갈색의 나무 테이블이 알맞은 간격으로 놓여 있다.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은 겨울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밝은 파랑이다.
달콤하고 경쾌한 음악소리는 적당한 볼륨으로 흐르고 있으며
주문한 점심메뉴가 카운터 안쪽 주방에서 고소한 냄새를 흘리고 있다.
월요일 오후 3시경. 손님은 우리뿐.
이별에 대한 서글픈 감상은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맞은 편에 앉은 계상의 불편한 눈치는 상관없이 음악에 맞춰 손가락을 까딱까딱
테이블 위로 치며 아직 식당 안에 남아있는 크리스마스의 흔적을 눈으로 훑었다.
"이거 먹어볼래? 맛있어"
내 접시에 놓인 고기를 집어 그의 접시에 얹어주었다.
"먹어봐. 진짜 맛있어"
살가운 짓. 별로 하지 않았었다.
하고 싶었던 지도 모른다.
어색해 하는 그에게 아무렇지 않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권했다.
다정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면, 나라도 다정한 연인의 흉내를 내고 싶다.
입안으로 내가 건넨 고기 덩어리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도 음식에 다시 집중을 하며 말했다.
"여기 분위기 좋다. 이런 데가 있었네?"
"........."
아마도 계상은 자신의 그녀와 이곳을 와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한 말의 숨은 속내를 아는지 계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마음을 돌릴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반쯤은 자포자기의 심정에서
나는 태연히 음식을 씹어 삼키며 반응 없는 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연석이 만나기로 했었어?"
"으응"
"요즘 뭐해 걔는? 아직 그 증권 회사 다녀?"
"응"
"결혼 안 한대?"
"...봄에 한 대"
"봄? 으이구 돈 나갈 일만 줄줄이군. 그럼 넌 언제 하니?"
".........."
"아직 날짜 안 정했어?"
"........."
곤란해 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끈덕지게 대답해 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태도로
쳐다보자 시선을 외면하고 입안에 남아있는 음식을 천천히 넘기며 계상은 대답했다.
"다음 달... 셋째 토요일"
"뭐??? 푸하하하"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 이제서야 나한테 얘기한 거야?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라기 보다는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너는 아주 진작에 나에게서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을 텐데,
나는 그 동안 무슨 헛 꿈을 꾸고 있었던가 말이다.
기가 찬 듯 웃어대는 나를 계상은 불안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야야 윤계상. 다음 달이면 아직 한겨울인데, 왜 이렇게 서둘러?
혹시 너 뭐 실수했냐?"
"........."
끅끅끅. 나는 시선을 외면하는 계상을 보며 웃어댔다.
왜 이렇게 웃음이 나는지 내 자신도 이유를 몰랐지만 자꾸 웃음이 났다.
이렇게 아직 추운 겨울인데, 봄까지 기다리지도 못하고 결혼을 하겠다는 거야?
웃음이 났다. 미칠 만큼.
"아, 미안해. 기분 나뻐? 응? 크크크"
"........."
그가 난처해 할수록 나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정말 미쳐버려서 제 정신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굳은 계상의 표정을 보니 이쯤에서 그만 웃어야 한다.
"..신원아"
"응?"
"........"
"왜. 말 해. 진짜 화났어?"
"........."
"미안해. 밥 먹어. 체하겠다"
눈이 휘어지게 웃는 내 얼굴에 계상은 할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그의 입에서 나올 내게 상처가 될 말을 막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어쩌면 계상은 이제 이런 식으로 상황을 얼버무리는 내 웃음에는 싫증이 날 대로
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야야야, 계상이 너 빠지고 신원이가 해라.
-내가?
-그래 얌마. 계상이 저 녀석 그 좋은 인상 가지고 우리 술값 모자른다. 봐 달라.
그러면 누가 좋다. 그래라 하겠냐? 신원이 니가 눈 휘어지게 살살 웃으면서
잘 좀 말해봐. 니가 명색이 우리 얼굴 마담 아니냐.
대책 없이 마셔대고 모자른 술값을 어떻게 좀 해 보라는 친구 녀석들의 성화에
써먹었던 그 웃음을 나는 지금 계상에게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씁쓸한 기분이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는 짜증스러움으로 밀려왔다.
함께 했던 시간의 눈부시도록 찬란했던 이유들이 더 이상은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울고 싶은 마음을 대신해서 웃기만 했다.
후식으로 나온 차까지 다 마시고 나자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다시 궁리를 해야 했다.
한때는 같이 있기만 해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는데 이런 일에 머리를 써야 할 날이
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열심히 머리 속으로 궁리를 하는 나와 달리 계상은 아무 생각이 없는 듯
멀거니 창 밖만 보고 있다.
말쑥하게 차려 입고는 있지만 어쩐지 피곤해 보이기도 하다.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든지도.
지금 이 상황이 계상에겐 이만저만 피곤한 일인지도 모를 테니까.
어째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데 카운터에 있던 가게 주인이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두 분이 친구세요?"
".........."
"네"
네. 라고 내가 대답하자 계상은 내가 아닌 가게주인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쳐다보면 어떡해 임마. 쫄아 붙겠다.
그러나 가게 주인은 그런 계상의 시선에도 주눅들지 않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남자분들 끼리 오시는 경우는 별로 없어서요. 저희 집 처음이시죠?"
"저는 처음이에요"
나도 마주 웃으며 대답을 하고 계상을 쳐다보자 계상은 머쓱한 표정으로
식어버린 남은 커피를 마시며 대답을 회피했다.
"제가 웬만하면 저희 집에 오셨던 분들은 거의 다 기억하거든요.
게다가 두 분처럼 눈에 띄는 분들은요"
"눈에 띄어요?"
마주 앉은 계상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주인에게
아무렇지 않게 되물었다.
"두 분처럼 멋있는 분들이란 말이었어요. 참 잘생기셨어요 두 분다."
"아..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기.. 제가 말씀 나누시는데 실례하는 건 아닌가요?"
나는 잠시 눈을 내려 깐 계상을 쳐다보다 뭘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오히려 잘됐다 싶어서 아니라고 대답했다.
가게 주인은 우리보다 조금 위의 비슷한 연배로 보였고 또 자기 가게를
처음 찾은 손님에게 무례하게 굴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월요일은 손님이 거의 없거든요. 특히 낮에는요.
그래서 다른 때는 오후 늦게 문을 열었는데 오늘은 그냥 날도 좋고 해서..
괜찮으시면 제가 와인 한 잔 서비스해도 될까요? 시간이 되시면요"
이번에도 나는 먼저 계상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계상 역시 나와 단 둘이 있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지
말은 안 했지만 싫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웃으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한 접시 가득 솜씨 좋게 깍은 과일을 담아 주인은 와인과 함께 내왔다.
무료한 월요일 오후의 시간을 우리와 떼우기로 했다 하더라도 서비스는 후한 편이었다.
아마도 그는 주말에 연인들이나 찾는 이런 곳에 와서 남자 둘이 식사를 하는 것에
호기심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인은 그런 노골적인 질문을 피해 우리가 오래 된 친구 사이냐고 물었다.
"오래 됐죠. 대학 때부터 알았으니까요"
"그럼 서로 잘 아시겠어요"
"그럼요. 모르는 거 없죠"
누군가에게 우리가 연인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라는 욕심이 전혀 없었다..라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오늘은 심술이 날 정도로 아무나에게 말하고 싶었다.
나는 눈치 볼 거 없이 우리 사이에 대해 묻는 주인에게 넙죽넙죽 대답을 했다.
"부럽네요. 그런 친구가 저에게도 예전에는 있었던 거 같은데..
결혼을 하더니 다들 멀어지더군요. 아, 아직 두 분은 결혼 전이시죠?"
"어...저는 그런데 이 친구는 곧 결혼해요"
"아..그러세요. 축하드려요"
어색하고 불편한 심기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계상에게 주인이 눈치를 보듯
인사를 하는데도 대답이 없자 나는 테이블 아래로 그의 다리를 툭 쳤다.
....감사합니다. 계상이 마지못해 대답하고 드디어 나를 슬며시 쳐다보자 나는
잘 했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그러나 계상은 그런 내 얼굴을 곧 외면했다.
그런 계상의 태도는 파도야 어쩌란 말이더냐 어쩌구 하는 시가 떠오르게 한다.
정말 꿈쩍도 하지 않는 계상의 태도에 아무리 용을 쓰고 기가 죽지 않으려 해도
의기소침해 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웃으며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결혼 하셨어요?"
"아니오. 아직.."
"그럼 애인은 있으세요?"
"...없어요. 좋아하는 사람은... 있지만.."
주인은 머뭇거리며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순진한 표정을 짓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애인이 있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있었어요"
내 대답에 주인보다는 계상이 반응을 보였다.
물론 아주 많이 불편한 기색이긴 했지만.
있었다...라고 대답한 내 심정 같은 건 알까.
궁금하지만 더 묻는 것이 실례라고 생각하는 듯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주인에게 내가 먼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헤어졌어요. 아니, 아직은 아니고 곧 헤어질 거에요"
이번에는 계상이 나를 쳐다보는 걸 알았지만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그리고 무슨 말이냐는 듯이 쳐다보는 주인에게 덧붙여 말했다.
"다른 사람이 생겼대요. 어쩔 수 없잖아요"
어깨를 으쓱하고 빙긋 웃으며 말하는 내 대답이 민망할 법도 한데 주인은
그런 내색은 전혀 없이 말했다.
"어떤 분이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멋진 분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 가신다니.
무슨 다른 사정이 있는 건 아닐까요?"
나는 대답대신 계상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계상은 테이블 위로 시선을 고정한 채 와인을 한 모금 마실 뿐이었다.
도저히 자기 생각 같은 건 절대로 내보여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태도였다.
빤히 쳐다보는 내 시선이 불편한지 슬쩍 손을 들어 시계를 본다.
나는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참으며 꾹꾹 누르는 목소리로 계상을 쳐다본 채
주인에게 말했다.
"제가 멋있는지 어떤지 어떻게 아세요. 처음 보시면서.
생긴 거만 뺀질하게 생겼지 못난 구석이 많은지 모르잖아요"
"하하하..."
주인은 자기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하는 내 무례를 하하 웃으며 넘겼다.
그러자 계상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이 내게 경고의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어때 계상아. 니가 볼 때 내가 그런 거 같지 않아?"
"..........."
우리 사이에 흐르는 어색하고 팽팽한 긴장을 눈치 챘을 텐데도 주인은 모르는 척 했다.
어쩌면 기가 막히게 눈치가 빨라서 우리가 지금 왜 이러는지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아도 상관없고 몰라도 상관없다.
나는 계상의 대답이 듣고 싶었다.
한참 동안 무표정으로 나를 마주보던 계상이 무겁게 입을 떼었다.
"안 그래. 넌 좋은 남자야. 네가 아까워"
"........"
나는 잠시 시간이 정지 한 것처럼 계상을 뚫어지게 마주보다가 표정을 풀고
주인을 향해 말했다.
"아니래요. 엄청 위로되네요"
"하하하..."
이번에도 주인은 그저 하하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할 수 없이 나도 실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계상은 웃지 않았다.
"아 두 분 오늘 저녁에 시간 되시면 제가 콘서트 표 하나 드릴까요?
아는 사람이 준 건데 가게도 그렇고 같이 갈 사람도 없고.
그래서 어떡하나 했는데.. 가수 이승환 좋아하세요?"
허무한 웃음도 잦아들고 어색한 침묵 속에서 주인이 우리에게 제안을 했다.
어리둥절한 나를 대신해서 계상이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아,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가서는 곧 티켓이 든 봉투를 가져왔다.
아마도 계상은 지금의 어색한 상황을 피할 수 있다면 다른 것은 무엇이라도
상관이 없다 생각한 모양이다.
시계를 보며 저녁 7시에 시작하는 공연이니 지금부터 서두르라는 주인의 말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니씨"
인사를 하고 계상이 먼저 가게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등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그에게 나를 데니...라고 소개했었던가.
"나에요"
키다리였다.
방금 전까지 가게에는 주인밖에는 없었는데 휘휘 둘러보아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당신이..
"좋은 시간 보내요. 계상씨 너무 곤란하게 하지 말구요"
"....당신이...어떻..."
"어서 가봐요. 계상씨 기다려요"
카운터에 기댄 채로 좋은 미소를 지으며 키다리는 말했다.
그의 재촉에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차가 출발하고 가게 쪽을 다시 뒤돌아보자 반짝거리는 크리스마스 전구는
이미 꺼져있었고 문 앞에 빨간 푯말이 걸려있었다.
월요일은 정기 휴일입니다.
<9>
그대 나를 위해 웃음을 보여도 허탈한 표정 감출 수 없어
힘없이 뒤돌아 서는 그대의 모습을 흐린 눈으로 바라만 보네.
나는 알고 있어요 우리의 사랑이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서로가 원한다 해도 영원할 순 없어요
저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을 잊지 말고 기억해줘요.
-세월이 가면
"세월이 가면.....가슴이 터질 듯한......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해도......
한없이....소중했던....사랑이 있었음을....잊지 말고.....기억 해.... 줘요...."
쏟아지는 함성 속에서 나는 결국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릴 적 추억 속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는 마치 그 소리가 눈에 보일 듯
정확하고 엄격하게 그러나 애잔한 떨림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엄청난 속도로 꽁꽁 묶어버리고 있었다.
어지러울 정도로 무대를 향해 환호하는 사람들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흐릿해진 눈을 감자
공연장 안의 소란마저 희미하게 사라지고 엄청난 음량으로 노래하는 가수의 목소리만이
똑똑히 들려왔다.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을..
잊지 말고..
기억 해 줘요..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가까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였는데 지금은 손조차 잡을 수가 없다.
세 시간이 넘는 공연 내내 나는 감정을 조절하느라 있는 대로 애를 썼기 때문에
마라톤이라도 완주한 사람처럼 기진 맥진이었지만 계상은 감정이란 것이 처음부터 없는
사람처럼 아무 감흥도 없이 시종일관 무대 앞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가수는 마음을 다해 사랑에 대해 노래하고 있었는데...
떠나가는 연인에게 지나간 시간을 기억해 보라 애원하고...
이별의 슬픔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를 설명하고...
헤어진 연인과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했었는지 늦은 후회를 했는데...
귀가 먹먹해 질 정도로 소리지르는 사람들의 틈에 서 있는 고요한 옆 모습을 보고있으니
이것이 정말 진실일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하더라도. 상황이 어떻더라도.
정말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 거니..
나만 이러는 거야..? 그런 거야?
어떤 것도 이제는 너를 돌이킬 수 없는 거니..
원망스러운 시선을 돌리며 어금니를 깨물고 있자 눈앞으로 계상이 가만히 손수건을 건넸다.
콘서트는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고 나는 계상의 손에 들린 손수건을 한참 쳐다보다
집어 들고 콘서트 장을 빠져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꽁꽁 얼어버릴 듯이 기온이 내려가서 조금만 입을 벌려도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주차장을 지나쳐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등뒤로 그가 따라와 서 있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거리의 네온 사인들이 반짝거리며 따뜻한 곳을 찾아 걸음을 서두르는 사람들의 얼굴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 모습들이 지금의 나와는 상관없이 행복해 보여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건 이제 그만 하고 싶어 어금니를 물며 참았다.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고 보도위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 이제까지 말없이 서 있던
계상이 나를 잡았다.
"데니야.."
"..........."
나는 팔을 붙들린 채로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냥 지금은 차라리 그가 매정하게 나를 놓아두고 가 주길 바랬다.
그에 대한 원망이 너무 커서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하루종일 마음에도 없는 허세를 있는 대로 부린 것에 대해서도 지쳐있었고
그런 모습의 나조차도 우습게 느껴져서 더 이상 비참해지기 싫었다.
그러나 데니야..라고 부르는 목소리를 듣자 나는 다시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은
혼란 속에서 갈등 했다.
자존심은 상관없으니 그를 붙잡고 싶다는.
"그냥 가. 계상아. 난 여기서 갈 테니까 넌 너대로 가"
"..........."
그러나 계상은 내 팔을 놓지 못했다.
그래. 너는 적어도 이게 마지막이란 건 알고 있구나.
이런 식으로 마지막이란 게 개운치 않겠지.
헤어짐이란 어느 정도의 형식적인 절차란 게 필요하니까.
아무리 미워하고 싫었던 사람들일지라도 마지막을 이런 식으로 흐지부지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계상아. 난 처음이 아니야.
너에게 헤어짐의 말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젠 지쳤어.
오늘은 뭐라고 말할 작정이니.
네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나에겐 위로가 되지 않아.
잘 살라는 당부 따위 나에겐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구.
"미안해. 나 너랑 할 얘기 별로 없어. 그냥 가.
그리고 손수건. 내가 가질게. 괜찮지?"
".............."
그러나 잔인한 계상의 손은 내 팔을 놓지 않았다.
왜 이래. 미안한 거야? 그래서 그런 거야?
나는 깜빡깜빡 눈을 움직여 물기를 거두고 뒤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미련이라기 보다는 그저 미안하고 불편해 하는 계상의 시선을 보자
허탈한 웃음이 났다.
"야아.. 너 왜 이래. 이러면 나 오해한다? 뭐야. 나랑 다시 시작하자는 건 아니지?"
"............"
"그런 거 아니면 그냥 가. 걱정 마. 나 아무렇지도 않아. 나 간다"
팔에서 그의 손을 거두며 돌아서자 다시 나를 잡았다.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고.
"놔"
"......"
"놓으란 말이야!!"
결국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성이란 건 이제 물 건너갔다.
"뭘 바라는 거야! 내가 불쌍해? 웃기지 마. 그런 식으로 생각해 주지 않아도 돼.
할 말 있니? 왜. 나도 좋은 여자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이제 난 너랑 상관없는 사람이잖아. 니가 날 왜 걱정해. 왜! 왜!!!"
"걱정하는 거 아냐"
"걱정이 아니면. 뭐야. 자존심 상해? 헤어지자고 하면 내가 울면서 바짓가랑이 잡고
사정할 줄 알았어?! 제발 날 버리지 말아달라고? 그러길 바래? 알았어.
그게 소원이라면 해 줄게. 가지 마. 난 너 없이 안 돼. 날 버리지 마. 제발! 제발! 됐어?!!"
".........."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우리를 흘금거리기 시작했지만 상관없었다.
내일이면 저들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설령 오늘이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동안 치사할 정도로 우리는 비겁했었다.
언제부터였던가.
내가 가는 곳에는 계상이 슬그머니 빠지기 시작했고 계상이 있는 곳에는 내가 그랬다.
계상과 가장 친한 연석조차도 나와 계상의 관계를 전혀 모른다.
그러나 우리와 상관없는 타인들의 시선조차도 우리는 염려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결국은 이렇게 될 것을 계상은 미리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서로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을 대비해서.
"장난 같아? 아니야. 장난 아니라구. 나 너 붙잡고 싶어.
너 가지 말라고. 헤어지지 말자고. 애원하고 사정하고,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어. 그러길 바래? 그래줘?!"
"...데..."
나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우리를 지켜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알면서
그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움찔 반사적으로 몸을 빼려는 그를 우격다짐으로 끌어안고 거칠게 입술을 밀어붙였다.
한때는 그렇게 정다웠던 입맞춤이.. 심장이 바르르 떨리듯 설레이던 입맞춤이..
오로지 증오와 분노만으로 가득했다.
한동안 무방비 상태로 내 입맞춤을 당하던 계상이 거칠게 나를 밀어내며 손을 잡아 끌고
사람들을 피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주차장까지 억센 힘으로 나를 끌고 온 계상은 후- 한숨을 쉬고는 조수석을 열어
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운전석에 오르기 전 차를 돌아가며 한 손으로 젖은 입가를 쓰윽 닦아내는 걸
백미러로 보니 다시 웃음이 났다.
너는 불쾌하고 화가 날지 모르지만 계상아 나는..
오늘이 지나면 없던 일이 돼 버릴지라도..
사람들 앞에서 잠시라도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걸 보여 주었다는 것이..
나는 너무 좋아..
그렇게 화내지마...내일이면.. 내일이면 없던 일이니까..
차가 스르르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는 눈을 감았다.
"미안하다. 그러게 그냥 가게 내버려두지 왜 붙잡았어. 화 많이 났니...?"
"....들어 가"
"..........."
코 먹은 소리로 사과하는 나에게 계상은 그 한마디만을 했다.
화도 내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차에서 내려 걸어갔다.
아파트 현관 계단을 오를 때 조용히 차가 다시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령처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버튼을 누르고 문이 닫히자 벽에 기대어
천장을 보며 소리쳤다.
"야! 키다리! 지금 보고있지? 내가 우습지? 우스워 죽겠지?! 하하..하하하..."
땡~ 7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서고 문이 열렸지만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일어서지 못했다.
몇 초간에 시간이 흐르고 다시 문이 닫히자 정지한 엘리베이터의 정적 속에서 나는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뭐야. 이게 도대체 뭐야.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게 없잖아.
왜...왜 당신은 나에게 이런 기회를 준거야.
알고 있었지 당신은...
아무리 애를 써도 이제는 계상이를 잡을 수 없다는 걸..
소용없잖아...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잖아...
스르르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기색이 없자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앞에 서 있는 이를 보았다.
"일어나 맨~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몸을 숙여 내게 손을 내미는 이는 시커먼 천사였다.
"이거 마셔"
"........."
"자 얼릉. 이거 마시고 진정 좀 해"
주방 어딘가를 뒤져 자기 마음대로 따뜻한 차를 끓여왔다.
기가 막힌 심정으로 받아 들고 마시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거실 탁자 위에 놓인 담배를 가져와 권한다.
아무 말 없이 그가 내민 담배를 받아 입에 물자 불도 붙여준다.
"인간들은 이걸 좋아하더라. 맛도 없던데. 하긴 답답한 일이 오죽이나 많겠어.
이열치열인가? 속에서 불 나는데 불을 집어넣다니. 답답한 건 답답한 걸로 누르자 이건가?"
별로 우스운 얘기는 아니었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며 신기해 하는 표정이 우스워
나는 피식 웃었다.
게다가 천사들에게 돌아가며 대접을 받는 나는 무슨 복을 타고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유쾌하지도 그렇다고 불쾌하지도 않은 허한 웃음이 피식 나왔다.
기가 막힐 따름이다.
"어때. 이제 좀 괜찮아?"
나는 대답대신 담배 연기를 다른 곳으로 뱉으며 옆 눈으로 그를 가만히 쳐다봤다.
참 험악하게도 생겼다.
누가 천사라고 생각하겠어.
게다가 지금 저 표정은 날 걱정하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더 무섭게 보일 뿐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왜 자꾸 나한테 반말이야? 자기가 날 언제 봤다구.
"내가 반말한다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맨~ 난 당신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할할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으니깐.
머 우리들 나이야 당신들은 짐작도 할 수 없겠지만 우리 사이에서도 난 나이가 좀 많거든.
이제 곧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구"
컥. 나는 담배를 물고 있던 숨에 사래가 들릴 뻔했다.
뭐라구? 정년퇴직? 천사에게도 그런 게 있단 말이야?
"그런 게 있어요?"
"뭐. 아.. 그럼. 이제 딱 80년 남았거든"
80!! 뭐야. 그럼 내가 100살이 넘게 살 리가 없는 한 내가 살아있는 것보다
더 긴 세월인데 그게 곧이란 말이야?
"힘들지?"
"............"
"이젠 태우가 원망스러워?"
"............"
어차피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그에게 감출 것도 없다.
대답대신 후- 한숨을 내쉬자 그가 가만히 웃었다.
샐샐 거리는 노랑머리의 환상적인 웃음에 비하면 영 어색한 표정이지만
그래도 웃으니 그나마 좀 부드러운 인상이 된다.
"말 해 줄래요? 당신들은 다 알잖아요.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응? 뭘?"
".....계상이요. 계상이 마음이 정말 뭔지 당신들은 알잖아요"
"아, 그건 안 돼. 금지된 사항이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려줄 순 없어"
사실은 대답을 듣는 것이 두려웠다.
정말로 계상이 이제 나에게는 정내미가 다 떨어져서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모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확신이 든다 해도 일단 귀로 듣게 되면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다.
"태우가 왜 이런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해?"
"..........."
왜?
왜라니.
당연한 거 아니야?
계상이를 붙잡을 수 있...............
이제까지 생각하던 것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자
인정하기 싫은 절망적인 진실이 나를 보고있었다.
"세상에는 말이야. 인정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때도 있는 거야.
이런 생각 해봤어?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소용이 없는 일.
나는 잘 하고 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불행이나 행운들로 뒤바껴버리는 운명들.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들 말이야.
당신이 선택했던 사랑이 당신이 계획해서 이루어진 게 아니었던 것처럼.
그런 건 어느 날 갑자기 닥치는 자신의 운명이야"
"............"
"그런데 사람들은 몰라. 잘해도 그게 다 자기가 잘해서 인줄 알고.
좋은 복이나 재능을 타고난 것들조차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니까.
나쁜 일도 마찬가지야. 자기가 잘못해서 만들어진 일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생기는 일이 있거든"
"............"
"그렇다고 운명에만 자신의 인생을 맡기고 살아야 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지.
진짜는 그 다음부터야. 받아들이는 거지. 아프고 쓰리고 힘들더라도.
행복도 마찬가지야. 인간이 누리는 행복 중에 뭐가 제일 큰 건지 알아?
권력. 명예. 돈. 그런 것들도 행복하게 하지만. 사랑에 빠진 인간이 제일 행복해.
사랑에 빠지면 이유를 상관없이 그냥 받아들이잖아.
고통이나 슬픔도 마찬가지야. 인정하고 나면 그 다음은 훨씬 편해지거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니까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사랑에 빠졌을 때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
"그런데, 사랑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불행도 마찬가지야.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아무 것도 없어. 그렇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들은 있지만.
그래서 스스로에게 절망하게 되는 것 역시 나쁜 건 아니야.
한계를 알 수 있는 거거든. 자신이 인간이란 걸 비로소 알게 되는 거지.
그런데 그러고 나서야 인간은 무엇이 진짜 소중한지 알게 되는 거야.
신께서는 인간을 아름답다고 하셨어. 그 이유가 나는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
인간이 신처럼 완벽하다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야.
인간이 인간답지 않은 것. 그건 제일 매력이 없는 거지.
생각해 봐. 딸기에서 토마토 맛이 난다거나 우유 같은 맛이 난다면
누가 그 딸기를 좋아하겠어"
"............"
"태우는 말이야. 당신이 이걸 알기 원하는 거야.
그렇다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는 걸 원하는 건 아니야.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을 준거지. 그것만해도 사실 당신은 특별대우라구.
내 말 무슨 뜻인지 언더스탠드?"
"............"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한다는 거 알아 맨.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었다면.
차라리 추억할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봐.
시간이란 무한대처럼 보이지만, 하루라는 시간은 사실
내일 당장 죽게 되는 사람에겐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야"
"............."
그러나 나는 아직 인정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계상과 헤어진다는 사실을.
<10>
여섯 번째 이별..
"그래서?"
"........."
담배를 문 채 빤히 쳐다보며 그게 다냐는 식으로 묻는 말에 계상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웃기고 있네 자식. 사랑 좋아한다. 차라리 나한테는 이제 재미가 없어졌다고 말을 해라.
나는 담배를 비벼 끄고 나서 키위 쥬스로 목을 축이고 말했다.
"알았어. 무슨 얘긴지 알았으니까 더 설명하려고 하지마. 듣기 싫다"
".........."
적어도 미안하다거나 양심이 괴롭다는 내색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렇게 입만 꾹 다물고 있으면 내가 또 니 비위나 맞출 줄 아는 거냐?
나는 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제 난 니 앞길에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사라지라 이말 아니야.
그런데 윤계상. 너 그렇게 니가 원하는 대로 다 될 거라 생각해?"
"............"
"넌 참 편하다? 관두자는 말 한마디면 다 끝나는 거라 생각하는 거야?
내가 그냥 가만있을 거라 생각하냐구"
"............"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 인생 앞에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는 거야맨.
받아들이라구? 웃기지마. 나는 그럴 수가 없어.
뭐가 운명이고 뭐가 겸손이라는 거야.
나는 내 인생에 자만 한 적 없어.
다른 욕심 과하게 부린 적도 없다구.
내가 원하는 사람, 내가 원하는 세상에 단 한사람을 가지고 싶은 게 어떻게 욕심이야.
계상의 핸드폰이 울렸다.
Rrrrrrrrr
"............"
Rrrrrrrrrr Rrrrrrrrrr
"안 받어?"
Rrrrrrrrrr Rrrrrrrrrr Rrrrrrrrrr Rrrrrrrrrr
"여보세요. 윤계상씨 핸드폰입니다."
내 얼굴에 못이 박힌 듯 굳어있는 계상을 대신해 내가 울리는 벨소리가 귀찮다는 듯
전화를 받자 조심스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그를 찾았다.
그 날 밤 새벽에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란 것을 기억했다.
나는 오늘 처음으로 흔들리는 눈빛을 보이는 계상을 모른 척 하고 태연히 말했다.
"아, 계상이요. 전 계상이 친구 안신원이라고 하는데요. 아,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계상이 지금 잠간 어디 갔거든요. 네. 아.. 오늘 만나기로 하셨어요?"
뚫어지게 나를 응시하는 계상의 시선을 알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상의 친구라는 내 말에 상냥하고 명랑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김지은. 김지은. 이름만큼 목소리만큼 얼굴도 예쁠까.
그런데 내가 만약 앞으로 이대로 영영 오늘 하루를 붙들고 있겠다고 하면.
그게 가능하다면.. 그래도 당신은 나에게 이렇게 친절할 수 있을까.
아니. 바로 내가 당신의 남자의 연인이란...
........연인이었다는 것을 안다면.
그는 당신의 남자가 아니야. 그렇게 당당하게 찾지 마.
나를 사랑했다구. 나를 사랑했고. 내가 사랑했고.
당신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세월이 우리에게 있었단 말이야.
이제와 나타나서 내 자리를 뺏은 주제에 그렇게 처음부터 그의 여자였던 것처럼
굴지 말란 말이야. 내 자리라구. 내 자리. 당신의 자리가 아니야!
"어, 그런데 어쩌죠? 오늘 제가 급한 일이 생겨서 계상이한테 뭘 좀 부탁했거든요.
계상이 저랑 어디 좀 다녀와야 하는데, 네. 그럼 계상이한테 나중에 연락하라고 할게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약속..."
전화기 너머의 그녀는 사과하는 내 말이 시작되자마자 금새 아니라며 상냥하게 웃었다.
성격도 좋은 모양이군. 윤계상. 넌 재주가 좋은 가봐.
어떻게 너한테는 이렇게 다 이해심도 많고 인심이 후할까.
나부터 시작해서.
딸깍.
전화가 끊기고 나서야 나는 계상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어금니를 지그시 물고 있는 녀석의 굳은 얼굴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놀랬냐? 야, 관 둬. 나도 너랑 삼류 드라마 찍고 싶은 생각 없다.
내 맘대로 약속 취소한 건 미안한데, 나도 그냥 얌전히 널 보내주는 건 좀 억울하잖아.
그래도 우리가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만데. 야! 너 아까 내가 한 말 걸려?
짜식. 장난이야 얌마, 얼굴 풀어. 그런 거 하고 싶어도 귀찮아서 못해"
미안하긴. 하나도 미안하지 않아.
계상은 내 말을 믿지는 않는 눈치였지만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추느라 담배를 물었다.
나는 그런 계상이 재밌다는 듯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오늘 하루만 나하고 지내주면 얌전히 보내줄게. 나 너하고 하고 싶었던 거 있어.
그거 오늘 하루만 다 해 줘라. 안 그러면 나 억울해서 너 못 보내"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계상은 손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웃었다. 억울한 심정을 대신해서.
"나 장어구이 먹고 싶어. 니가 사 줘"
우리는 장어구이를 먹으러 일식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장어구이를 좋아했지만 계상은 별로 즐기지를 않았기 때문에
그와 함께 장어구이를 먹은 적은 별로 없었다.
나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순대국을 그렇게나 자주 먹었으면서.
-계상아. 나 이런 거 별로야
-별로가 어딨어. 서방님이 먹으라면 먹어야지
-미친놈. 니가 왜 내 서방이냐?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자 먹어. 푹푹
아무거나 잘 먹어야 이쁘지. 우리 이쁜이.
-칫.
-그렇지. 잘 먹네 뭐. 이쁘다. 우리 데니. 히히
나는 순대국이 정말 싫었어. 계상아.
"와. 맛있다. 야 너도 먹어"
"..........."
"먹으래니깐. 내가 다 먹는다?"
"..........."
뜨거운 철판에서 노르스름하게 잘 구워진 장어를 젓가락으로 집어 앞으로 내밀자
됐다는 고개짓으로 거절하며 제 손으로 장어를 하나 집어 든다.
"먹어. 내가 주는 거"
입으로 가려는 계상의 젓가락을 탁 거두며 조용히 말하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계상의 얼굴이 내 손에 들린 장어만 한참 쳐다보다 마지못한 듯 받아먹었다.
"맛있지? 그지. 내가 준거라 더 맛있는 거야. 알아?"
나는 웃었지만 계상은 여전히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고 썩은 고기라도 씹는 것처럼
우물우물 입 속의 장어를 씹어 삼켰다.
"야! 너 표정 안 풀래!"
갑자기 버럭 성을 내는 내 목소리에 계상이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오늘 하루라고 했. 잖. 아"
"............."
"내가 무슨 속셈인지 머리 굴리지 말고. 불편해도 내색하지 말고.
내가 해 달라는 대로만 해 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바라지 않으니까.
이거 경고야. 먹어. 표정 풀고"
가만히 계상은 침을 삼켰다.
나는 장어를 다시 또 집어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먹으라는 말도 없이 내밀어진 눈앞의 장어를 계상은 쳐다보기만 했다.
"힘들다는 거 알지만 내 말대로 좀 해 주면 안 돼?"
".........."
공허하다 싶을 만치 우울한 내 목소리에 계상은 다시 마지못한 듯 장어를 입에 넣었다.
그제서야 나는 표정을 풀고 웃으며 내 입으로도 장어를 집어넣었다.
꾹꾹 위 속으로 집어 쳐 넣는 기분이었지만.
"사진 찍어 줘. 생일 선물로"
스티커 사진가게 앞에서 나는 말했다.
하루를 나에게 볼모 잡힌 계상은 아직 내 말대로 표정을 풀고 있진 않았지만
사진을 찍자는 말에는 아예 인상을 찌푸렸다.
"싫어?"
다시 묻자 얼른 찡그린 얼굴을 바꾸려고 하며 무슨 말을 할까 고민 중인 표정을 짓는다.
"찍자"
"...데.."
"이리 와. 얼른"
무어라 반박할 여지도 주지 않고 팔을 꽉 붙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일찍 학교를 파한 중 고등학생들이 박작박작 들어차 있는 가게 안에서 나는 얼른
비어있는 기계 안으로 계상을 끌고 들어갔다.
"자, 웃어. 빨리이"
옆으로 붙어 카메라를 향해 웃으며 재촉했다.
하얀 와이셔츠에서 계상의 냄새가 전해져 왔다.
익숙한 냄새.
항상 그립게 만들었던 계상의 냄새였다.
너는 냄새조차 하나도 변한 게 없는데...그런데 왜 이러는 거야..
찰칵찰칵찰칵.
일정한 간격으로 카메라 셔터가 눌러질 때마다 나는 더 가까이 계상의 옆으로 붙었다.
이 사람은 내 꺼야. 라고 확인을 하듯.
"야, 너 안 웃었잖아. 다시 찍자"
"데..."
"웃어. 너 웃을 때까지 찍을 거야"
나는 처음 찍은 사진 여섯 장을 박박 찢어 휴지통 안으로 던지고 기계 안으로
다시 지폐를 밀어 넣었다.
"자, 웃어! 얼르은"
계상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흔들어 재촉했다.
찰칵찰칵
"웃어. 빨리이"
찰칵찰칵.
"쪽~"
찰칵.
허리에 올려져 있던 손을 들어올려 목을 끌어안고 순식간에 입을 맞췄다.
계상이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찰칵. 마지막 셔터소리가 그치고 난 뒤에도 입술을 놓지 않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키스하자"
"........"
"한 번만"
"........."
"마지막이잖아..."
대답대신 계상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조심스럽게 열려진 입술 사이로 달큰한 숨을 집어넣으며
우리는 천년 만에 하는 것 같은 입맞춤을 했다.
혀를 감고 들어오는 계상의 감촉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았다.
그렇게 내가 원하는 대로 꽤 오랜 시간 나를 달래듯이 인색하지 않은 키스를 하던 계상은
서서히 입술을 떼고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눈을 뜨자 뚫어지게 내 눈을 보고있다.
그 시선을 침을 삼키지도 못하고 바라보자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하자.."
천천히 어깨에서 손을 내리고 이미 현상이 다 된 사진을 들어 가만히 찢어낸다.
조각난 사진들은 조금 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 휴지통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말라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계상이 밖으로 나간 후에도 나는 그대로 선 채 휴지통 안에 버려진 조각난
사진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차피 내일이면 없어질 사진이었어 계상아..
알았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거지..?
그렇지..?
나 정말..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너와..
헤어진다는 사실을..
<11>
5시 50분.
이제 10분 정도만 더 기다리면 된다.
나는 두 시간 전부터 계상의 사무실 건물이 마주 보이는 커피숍 창가에 앉아서
네 잔의 커피를 마셨다.
성급하고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며 다짐했다.
다시 잘 말해 보는 거야.
나는 네가 없으면 도저히 안 되겠다고.
내가 너무 성급했어. 그렇게 곤란하게 하면 안 되는 거였어.
쓸데없는 자존심도 버리자.
다시. 차분하고 진지하게 얘기해 보는 거야.
아니. 부탁하자. 나는 네가 없으면 살수가 없다고.
수없이 다짐하고 다짐하며 계상이 퇴근하는 6시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혹시 회사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어쩌지?
아니야. 회사로 돌아갔을 거야. 아니야. 아니면 어쩌지. 아니야.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며 6시가 되어 가는 시계의 초침을 불안하게 쳐다보는데
드디어 회사건물 입구로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문을 열고 횡당보도를 건너려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여자..
검고 결 좋은 단발머리에 단정한 하얀 얼굴.
보기에도 따뜻해 보이는 낙타색 코트를 입고 여기쯤에서 보아도 쾌활하고
좋은 미소를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그리고 계상은 다정히 팔짱을 낀 그녀를 향해 그보다 멋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순간이었다.
나는 예상치 못한 장면으로 다리가 후들거려서 발을 내딛자마자 휘청거렸다.
어....하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몸이 땅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누군가 나를 다급히 잡았다.
키다리였다. 그는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있었다.
그러나 나는 얼른 다시 건너편의 계상을 눈으로 쫓았다.
그들은 함께 택시를 타고 있었다.
"놔요. 이거 놔요. 놔요. 가야 돼요. 말해야 한다구요. 놔요. 놔요!!"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가만 좀 있어요. 데니씨. 데니씨!"
"당신이 그 이름 부르지 말아요!!!"
붙잡는 그의 품에서 나오려고 애를 썼지만 나는 이미 다리에 힘이 풀려있었고
온 몸이 낙지처럼 흐느적거려서 오로지 목소리에만 힘을 싣고 있었다.
왜 나를 막으려는 거야.
당신 사실은 나와 계상이 다시 잘 되기를 원치 않는 거야?
선심을 쓰듯 매일 똑같은 하루를 주면서 사실은 우리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게 될까.
주어진 운명을 거스를까 봐 걱정하고 있는 게 아니냐구!
아니면 비웃고 있는 거야?
바보 같은 내 모습.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없는 내 모습을
신이라도 된 것처럼 비웃고 있는 거야?
"계상아! 계상아! 놔요. 놔요! 놔.."
그는 악을 쓰듯 소리지르며 버둥대는 나를 아무 대꾸 없이 우격다짐으로 끌고
커피숍 안으로 들어가더니 카운터 뒤쪽의 화장실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화장실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시 나를 품에 꼭 안았고
나는 몸이 위로 뜨는 어지러움에 눈을 감았다.
다음 순간, 속도를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그리고 나로서는 설명할 수도 ,
이해할 수도 없는 이상한 공간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지금은 분명히 12월의 겨울인데 이곳은 벚꽃이 만발한 봄날이었다.
그 아래 벤치에 오래 전 어울리던 재형과 지금은 미국으로 유학을 간 주원, 그리고
내가...보였다.
오래 된 앨범을 다시 꺼내어 확인을 하듯, 군대를 막 제대한 복학생답게
이마 위로 짧게 자란 검은머리의 나는 그들과 함께 있었다.
캠퍼스 하늘 위로 보이는 현수막들에는 98학번 새내기들을 환영합니다.
모모고등학교 동문들의 새내기 환영회란 글씨들이 써 있다.
98년.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첫 해였다.
"야, 군대에 있을 때는 제대만 하면 뭐든지 다 잘 할 수 있을 거 같더니.
이 좋은 봄날 강의실에만 얌전히 앉아있으려니 온 몸이 근지러워서 미치겠다야.
그리고 96학번에는 왜 그렇게 여학생들이 없는 거냐. 못생겼어도 좋으니
치마 입은 여자구경 좀 실컷 해 봤으면 좋겠다. 안 그러냐? "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며 불평하는 재형에게 나는 싱겁다는 듯이 피식 웃는다.
마치 타인의 눈으로 보는 듯한 스물 네 살의 내 모습은 오랫동안 잊고있었던
그리운 향수처럼 묘한 설레임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니들 여기서 뭐하냐. 담배 있어?"
"아, 연석이 형. 그냥 있어요. 강의가 좀 일찍 끝나서 시간이 비었거든요.
계상이 형도 드려요?"
가만히 고개를 저어 사양하는 계상은 가는 금테안경을 쓰고 청색 잠바를 입고 있다.
저런 모습이었구나..
나중에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을 생각했을 때 나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었다.
잘 웃지 않는 어려운 선배다...라는 인상뿐...
그때의 계상을 다시 만났다는 것에 나는 가슴이 뛰었다.
-아니야. 난 너한테 첫눈에 반했었어.
-웃기네. 너 처음 봤을 때 날 제대로 쳐다도 안 봤어. 알아?
-아니라니까. 정말 첫눈에 반했어. 화가 날 만큼. 진짜라니까.
-아. 알았어. 그렇다고 하지 뭐. 치.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나에게 첫눈에 반했었다고.
그럴 때마다 믿지는 않았지만 싫은 얘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기분 좋게 넘어가곤 했다.
그러나 내 말이 맞았다.
계상을 처음 만났던 바로 이 날.
계상은 연석과 함께 우리가 앉아있는 이 벚꽃 나무 아래로 왔고,
처음 보는 나를 연석이 소개 시키자 잠시 동안 눈이 마주쳤지만 동갑내기 선배가
더 어려운지라 공손히 예의를 차리는 나에게 건성으로 겨우 고개를 까딱하며
아무 느낌이 없는 특유의 그 무표정으로 다시 돌아갔다.
보라니까. 내 말이 맞았잖아. 첫 눈에 반하긴 뭘 첫눈에 반해.
계상을 제외한 우리는 연석과 함께 시시껄렁한 얘기들을 주고받다가 내가 먼저
재형과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업 때문에 먼저 가보겠다며 인사하는 나에게 연석은 나중에 술이나 같이 한 잔 하자며
인사를 하지만 계상은 고개를 숙이고 역시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지금의 내가 봐도 서운 할만큼 계상은 내 존재에 대해서 무심했다.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연석을 향해 싱긋 웃고 재형과 상대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내가 가버리자 계상은 연석이 재형에게서 뺏은 담배를 한 대 집어 들더니
입에 물고 어딘가를 뚫어지게 응시한다.
뭘 보는 거지...?
나는 옆으로 가서 그의 시선이 가는 곳을 함께 눈으로 쫓았다.
내가 맞다면.. 그는 나와 재형의 뒷모습을 보고있었다.
나는 무슨 우스개 소리를 하는지 재형에게 툭툭 어깨를 맞으며 걸어가는 내 모습과
그런 나를 바라보는 계상의 시선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분명히 계상은 나를 보고있다.
그것도 아주 한참을.
나와 재형이 길을 돌아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에야 눈을 돌려 주원에게 말을 건다.
"주원아, 쟤... 니들 보다 한 살 많지?"
"응? 누구요? 아, 신원이요? 네. 맞아요. 신원이 재수했어요.
어. 근데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우리 그냥 다 신원이라고 부르는데?"
그러나 계상은 재밌다는 듯이 피식 웃는다.
혼자서 계속 실없이 웃기만 하는 계상에게 뭐냐며 말을 해보라고 연석이 다그치자
천천히 담배를 비벼 끄고 말한다.
"기억 못하나 봐. 내가 그렇게 인상이 희미하냐?"
"응? 니가? 윤계상이? 허. 무슨 그런 어림없는 소리를. 니 인상이 희미하면
누구 인상이 강렬하다냐. 근데 왜. 너 쟤랑 언제 만났었어?"
그러나 계상은 대답은 안하고 또 피식 웃는다.
그럼....
내가 계상을 처음 만났던 게 이 날이 아니었단 말이야?
언제지? 내가 언제 계상을 만났었다는 거지?
계상은 그런 말 이제까지 내게 한 적이 없었다.
"뭐야, 그럼 아까 말을 하지. 왜 처음 본 사람처럼 그랬어. 너 뭐 쟤랑 내외하냐?"
"날 몰라보는데 나만 아는 척 하기가 좀 그렇잖아"
"뭐어? 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건 생김은 정말 뭣 같이 생겨 가지구선
하는 짓 보면 어째 그러냐. 어째. 쯧쯧. 너 사내새끼 맞아? 그거 달렸어? 응?"
연석이 타박하자 계상은 자기가 생각해도 민망한지 주원을 신경 쓰며 싱겁게 웃는다.
그 웃는 모습이 너무 애틋해서 만약 조금 전 이렇게 웃어주었다면 내가 너를 훨씬
더 잘 기억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진짜 첫 만남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근데, 혹시 저거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한 거 아니야? 쟤 너한테 뭐 실수했냐?"
"아니, 아니야. 그런 거 없어. 그냥 우연히 한 번 만난 건데 모를 수도 있지 뭐.
그리고 정말 몰라보는 거 같더라."
"그래? 눈이 디게 나쁜 모양이군. 아니면 눈썰미가 꽝이던지.
어떻게 윤계상이를 한 번 보고 몰라볼 수가 있냐.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니가 한 인물 한다는 건 인정해주지. 흠"
"고맙다. 눈물 나게"
왜...말을 안 했니..
내가 널 못 알아본 게 그렇게 서운했었니..?
"주원아. 내가 낯을 좀 가려서 그래. 생각해보니까 좀 챙피하다.
너 쟤한테 이거 말하지 마. 알았지?"
"네"
계상은 아주 머쓱한 표정으로 주원에게 당부했다.
그리고 주원은 계상선배가 무서웠는지 끝까지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우리가 처음 어디서 만났었는지 알지 못한다.
분명히 다 알고 있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까지 내가 모르던 계상과
처음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연석과 주원은 상상할 수 없었겠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처음 고백했을 때도... 계상은 이런 걸 다 일일이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오랫동안 나를 지켜보며 마음을 숨기고 있었다고만 했었지.
나는 너의 기분 좋은 거짓말에 속아주자 생각했었어.
그런데 정말 너는 처음부터 내게 그랬었구나..
시계를 보던 연석이 강의에 들어가자고 계상에게 말했다.
그들마저 떠난 벤치에 혼자 남게 되자 나무 아래 기대 서 우리를 지켜보던 키다리가 다가왔다.
왜 나에게 이런 과거를 보여주냐고 물어야 했지만.
가슴이 먹먹해서 아무 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다른 것을 따지기 전에 나에 대한 계상의 수줍은 첫 마음을 확인한 이 순간이
눈물이 날만큼 행복하기만 했다.
계상은 날 무시했던 게 아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내 뒷모습을 아련히 쫓던 계상의 시선은 우리의 첫 만남을
기억할 때마다 서운하다고 불평하며 믿지 못하던 나를 바보로 만들었다.
"괜찮아요? 그냥 돌아갈까요?"
"....더 보여 줄 게 있어요..?"
"당신이 원하면요. 싫다면 그냥 돌아갈게요"
나는 고개를 저어 대답을 대신했다.
보고싶다. 그가 보여주려는 것을.
무엇이 보고싶은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직도 모르는 계상을 만나고 싶다.
"그럼 가요. 이리 와요"
그가 다시 나를 품에 안았다.
나는 눈을 감았고 다시 한 번 아찔한 어지러움을 느끼며 다른 공간으로 들어갔다.
<12>
"그러니까 신원이 오빠 얼른 대답해 보라니까"
"와아~~! 오빠랜다. 오빠! 신하영이 입에서 오빠란 소리 나왔다"
"그러게. 야, 신원아. 넌 좋겠다. 키키"
"아참, 다들 조용히 좀 해 봐요! 도움이 안 돼 도움이"
그러나 나는 옆으로 바짝 다가앉으며 대답을 재촉하는 하영의 당돌한 기세에 움찔 놀라
입안에 맥주를 잔뜩 문 채 삼키지도 못하고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나와 하영, 재형. 그리고 연석과 또 태준, 그리고 저 선배 이름이 뭐였더라.
아. 맞다. 창원선배. 그리고 계상.
아릿한 기억 속으로 그들과 함께 했던 어느 날 밤의 술자리라는 걸 알았다.
아마도 복학한 첫 학기를 종강하고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쯤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냐며 사귀지 않겠느냐는 하영의 질문에 모두들 짖궂은 표정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지만 계상은 맞은편 맨 끝자리에서 옆에 앉은 연석과 자기들끼리 무슨
말인가를 하면서, 진지하기도 하고 싱겁게 웃기도 하며 이쪽의 대화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모습이었다.
신하영.
그래. 하영이가 있었지.
96학번의 몇 안 되는 우리 과 여학생 중 한 명이자, 우리 복학생 선배들에게 무늬만
여자 아니냐는 놀림을 듣곤 했던 씩씩하고 털털한 성격의 후배였다.
하지만 하는 행동에 비해서 하영은 꽤 곱상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사내 녀석들만 모이는 삭막한 술자리에 그녀를 끼워주곤 했었다.
게다가 하영은 자기가 여자라는 이유를 들어 특별대우를 바라지도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와 스스럼없이 지내곤 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저 때 하영의 돌발적인 프로포즈가 아주 싫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저런 모습이 하영이 답기도 했지만 선배들까지 함께 있는 자리라는 점에서
나는 좀 당황스럽기는 했다.
하영이 평소에 나를 포함한 남자 선배들 중 그 누구도 남자로 보고있다고는
한 번도 의식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술 때문인가. 아니면 장난이었을까. 지금도 잘 모르겠다.
"싫은가 보네? 실망이다. 아, 신원이 형은 나의 이상형이었는데.
에이, 나 오늘 실연 당했네. 술이나 왕창 마시자."
"야아. 하영이 정말 신원이 좋아했나 부다. 야, 신원아 너 그럼 쓰냐아.
여자가 공개적으로 프로포즈를 했는데 이러는 건 예의가 아니쥐"
하영의 불평과 재형의 놀림에 나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우물우물
어정쩡한 태도로 피식 웃으며 난처해 하고 있다.
그리고 내 눈은 아까부터 구석에서 연석과 무슨 말인가를 열심히 하고있는
계상만 보고있지만 계상은 저 쪽의 대화에는 무심하다.
"야야. 하영아. 저 자식 몰래 챙겨둔 여자 있나 부다. 니가 이해해라.
하영이를 거부하다니, 지 복을 지가 걷어차는 거지 뭐. 근데 나는 어때. 응?"
"피. 관둬요. 신원이 형 아니면 싫어"
"뭐? 야. 너 너무한다? 내가 신원이 보다 못한 게 뭐 있어. 말해봐.
솔직히 신원이 녀석이 얼굴만 좀 기생 오래비처럼 생겼지 뭐 잘난 게 있냐!"
"재형이형. 주제파악 좀 해. 못한 게 뭐 있냐니. 그걸 정말 듣고 싶어?
일단. 형 말대로 저 기생 오래비처럼 생긴 얼굴이 무지하게 잘났다는 거고.
그런데 얼굴만 잘났냐. 뭐 얼굴만 잘난 남자들은 많지.
뭐 여기 계상이형만 해도 배우 뺨치게 생겼잖아."
갑자기 하영의 말에 자기 이름이 나오고 모두 돌아보자 이제까지 이쪽에 별 관심을
안보이던 구석자리의 계상은 "난 빼줘" 라고 하며 사양한다는 듯 손을 내젓는다.
그래.. 계상은 항상 저런 식이었지..
지나치지는 않지만 확연히 선을 긋는 듯한 태도로 후배들을 대했다.
그래서 나도 계상에게는 더 이상 가까이 할 수 없는 어떤 선을 느끼곤 했었다.
"어쨋든 신원이 형은 다른 사람에게 없는 묘한 매력이 있다니까"
"뭔데 그게"
이제는 연석도 이 쪽의 대화가 궁금한지 고개를 돌리고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그리고 계상도 마지못한 듯 이쪽을 쳐다보지만 단순한 호기심 외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는
표정이다.
"신원이 형은 말이야. 중성적인 데가 있어. 음..그러니까 동전의 앞뒤처럼
두 가지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니까."
"어떻게?"
"어떤 때는 나도 여자지만 여자보다 더 애교가 넘치고, 치. 웃을 때 봐.
야, 니가 이래도 안 넘어 올테냐? 이러는 거 같잖아"
"아하하하하. 그리고 또"
"그런데 어떤 때는 또 깜짝 놀라게 남자다운 점이 있잖아. 으허허허.
이렇게 웃을 때. 숨넘어가겠어 증말. 으허허허. 아니 이게 아닌데. 으하하하"
하영이 계속 그럴싸하게 내 모습을 흉내내자 모두들 재밌어 죽겠다는 듯이 웃어댄다.
그러나 계상은 피식 싱거운 웃음만을 지을 뿐, 별로 재밌지 않다는 얼굴이다.
"그래서 신원이 웃는 모습이 널 그렇게 반하게 했냐?"
"더 얘기해? 정말? 아씨. 모르겠다. 그래. 다 말하지 뭐.
어차피 오늘 신하영이 자존심 다 구겨졌는데 뭐"
"푸하하하. 그래. 말해 봐 어디"
"아니 사람을 왜 또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야. 그 말간 눈으로. 치.
거짓말을 할 수가 없잖아. 꼭 정직을 강요하는 눈이란 말이야.
뒤 돌아서도 자꾸 생각나잖아. 왜 날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하고 생각하게"
"야, 이제 그만. 너 하영이. 나 바보 만드는 게 재밌지? 자, 술이나 마셔"
나는 화제를 돌리려 하영에게 술을 따라준다.
그리고 계상도 연석이 남은 맥주를 마저 비우자 얼른 따라주며 앞에 앉은
창원선배에게 뭐라 말을 걸고 함께 웃는다.
이제는 더 이상 이쪽의 얘기에는 상관을 하고있지 않다.
"항상 이런 식이라니까. 얄미워 죽겠어. 형! 다 알고 있었지? 그치? 말해봐"
"뭐얼 또"
"시치미 떼는 거 좀 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
알면서 모르는 척. 몰라도 아는 척. 그런 거 아니야? 여시"
"뭐? 여시? 야! 너 선배한테 막 이래도 돼? 앙?"
"아유아유, 무서운 척 한다. 정말 어떻게 화내는 모습까지 이렇게 이쁠까"
"야. 신하영. 나도 남자야. 너 자꾸 이러면"
"이러면 뭐. 말해 봐. 이러면 뭐."
"얌마. 나두 여자 좋아해. 근데 니가 여자였어?"
"그럼 내가 여자지 남자야? 남자가 형한테 좋아한다고 그래?"
우리의 티격거리는 모습을 모두는 재밌어 하며 놀린다.
모두가 재밌어 하자 하영은 신이 난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사랑해 형!"
"알았어"
"사랑한다니깐!"
"그래"
"정말 사랑한대니깐!"
"나두 너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됐지?"
"그럼 나 뽀뽀한다?"
"뽀뽀?"
정말 쪽. 하고 하영은 내 볼에 뽀뽀를 했다.
하영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손으로 확 가리며 화들짝 놀라는 나를 보고
모두들 상을 치면서 재밌어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이번에는 계상도 어이없다는 듯 하하하 웃는다.
나이 많은 복학생 창원선배만이 유치해서 정말. 이라며
심드렁한 표정일 뿐 모두가 재밌어 한다.
"야야. 뽀뽀가 뭐냐. 시시하게. 할려면 제대루 해야지"
"그래 맞어맞어. 한 번 제대로 해 봐. 니들 사랑한대매~"
부추기는 말들에 장난기가 더 발동했는지 하영이 슬쩍 더 가까이 몸을 붙이며 다가왔고
나는 무서워...라고 하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주춤주춤 재형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 정말 형이랑 키스하면 기분이 어떨까. 졸업하기 전에 형이랑 한 번 키스해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뭐. 참는다 내가. 기회는 또 있을 테니까"
하영의 뻔뻔하고 넉살 좋은 말에 모두 허리를 굽히고 웃으며 좋아했고
나는 옆에 앉은 재형에게 등신이라며 퍽퍽 등을 얻어맞는다.
그리고 계상이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화장실 쪽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멀거니 보고있자 키다리가 따라가 보라는 눈짓을 했다.
계상은 세면대로 가서 물을 틀고 가만히 고개를 들어 거울 속의 자신을 쳐다본다.
한참동안 물끄러미 자신을 보고있더니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갑자기 물을 세게 틀어
거칠게 얼굴을 씻어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거울 속의 자신을 쳐다본다.
이번에는 좀 전과 달리 섬뜻할 정도로 무언가에 몹시 화가 난다는 표정으로 노려본다.
나는 계상의 뒤에서 거울 속에 비친 그 얼굴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왜 저러지..
"화가 나......화가 나...화가 나...화가...화가..!!!"
자신에게 말하는 듯 중얼거리던 계상은 결국 획 몸을 돌려세워 벽에 기대 눈을 감는다.
내가 보이지 않겠지만 갑자기 돌아서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라 바닥에 주저앉았다.
앉은 채로 숨도 안 쉬고 올려다보니 계상은 물에 젖은 가느다란 머리칼이 이마에
달라붙고 시근거리는 호흡을 참느라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 있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괴로워하는 순간순간의 모습에 나까지 너무 아플 지경이다.
"미쳤어...미쳤어.."
눈을 감은 채로 계상은 거의 절망에 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쳤어...라고.
목소리와 표정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왜...그러니...너.
나는 화장실 안으로 누가 들어올까 봐 조바심이 나는데 계상은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차오르는 거친 숨을 애써 삼키며 한참동안 서 있다가 바지 뒷 주머니에 있는 지갑
안쪽에서 사진을 한 장 꺼냈다.
"웃지마.....그렇게 쳐다보지 마....아무 말도 하지 마...날 봐주지 않아도 돼...
내 마음 너한테 들키고 싶은 생각도 없어...
나도 이제 관두려고 하거든....미친 짓이니까....
그래...알아....미친 짓이야.....미친 짓.....넌....남자잖아..."
중얼거리는 말이 꼭 지금 눈앞에 있는 내게 하는 말처럼 들려 나는 다시 한 번 거울 속으로
내가 비추지 않음을 확인하면서도 의심쩍은 눈으로 눈치를 살폈다.
계상은 피식 김빠진 웃음소리와 함께 들고있던 사진을 손으로 구겨 쓰레기통 속으로 던지고
곧 화장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나는 쓰레기통 속으로 빠진 사진을 집어 펴보았다.
구겨진 사진 안에는 내가 카메라를 모른 채 무심히 웃고있었다.
지난 봄 과 엠티에서 찍혔던 독사진이었다.
나도 이 사진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닌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계상이
무슨 수로 이걸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잠시 계상이 버린 사진을 손에 들고 굳은 듯 서 있던 나는 화장실을 나왔다.
자리로 돌아간 계상은 가면을 쓴 듯 좀 전처럼 연석과 담배를 피고 맥주를 마시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얘기를 하고 있다.
역시 맞은 편의 나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이.
그리고 나 역시 재형의 옆에서 술기운에 나른한 표정을 짓고서
건너편의 계상에겐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아니, 정말 그랬다.
저 때의 나는 계상이 내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도 할 수 없었고,
그는 내게 그저 허물없이 지내기에는 조금 어려운 한 사람의 동갑내기 선배였을 뿐이다.
잠시 우리는 슬쩍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계상의 눈이 내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다고 느꼈는지
머쓱한 표정으로 왜 그러냐는 무언의 눈빛을 한다.
".......라이터 좀..."
"아, 네"
내가 활짝 웃으며 재형의 옆에 놓인 라이터를 집어 그에게 건내자
우리는 아주 잠시 잠간 손이 스쳤다.
나는 다시 재형에게 고개를 돌렸고 계상은 입에 물린 담배에 불을 붙이지도 못하고
금방 울음이라도 터질 것 같은 표정으로 라이터를 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눈치도 정말 지겹게 없는 나.
정말 몰랐다.
이렇게 힘들어 하고 있을 거라고는.
<13>
"아무리 사는 게 바쁘다고 해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
윤계상 한 번 만나기가 연중 행사네. 왜 그렇게 바빠?"
"미안하다"
연석과 계상은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바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계상은 졸업을 하고 나서 야근이 잦은 회사로 출퇴근하기가 멀다는 구실을 내세워
내가 사는 아파트로 들어왔다.
우리 가족들은 내가 군대를 제대하자마자 미국으로 모두 이민을 갔고 복학을 하면서 나는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계상과의 동거는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연석을 포함한 그의 친구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나와 계상이 그럴 만큼 절친한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뭐라고 둘러댈
적당한 핑계거리도 없었고 또 우리만의 시간과 보금자리를 누구에게도 방해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졸업 후에 계상은 가까이 지내던 연석 등과도 자연히 소식이 뜸해졌었다.
"근데 계상아. 아버지 사업은 괜찮으시니? 요즘 중소기업들 많이 힘들던데"
"좀.. 힘드셨어"
"그래? 많이?"
계상은 대답 대신 담배를 입에 물었고 연석이 불을 붙여주며 걱정스러운 눈을 하자
피식 웃으며 잔에 술을 따라준다.
나는 이제까지 계상의 집에 대해서는 어떠한 얘기든 자세히 들은 적도
내 쪽에서 먼저 궁금해 하거나 꺼낸 적도 없다.
그런 얘기는 우리 사이에 일종의 금기사항처럼 함구할 수밖에 없는 사항이었다.
뭐라고 딱 설명할 순 없지만 집안 얘기 따위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일종의
두려운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이란 것을 이불 속에 감춰두고 사는 것처럼 모른 체 했다.
계상의 집안 걱정을 해 주는 연석을 보니 이것이 연인과 친구의 차이란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없었던 것을 연석은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계상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위로 시집을 간 누나가 있다는 것과
그래서 그가 외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선 별 걱정이 없어 보인다는 것 등이었다.
대학 때부터 계상은 학생으로서는 꽤 좋은 차를 몰고 다녔다는 점이나
나를 만나기 위한 구실로 후배들에게 종종 거하게 술을 사기도 했던 것들은
그가 결코 가난한 집 아들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나와의 동거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들어갈 때도 아버지 병환을 얘기했을 뿐
집안 사정에 대해서는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연석의 질문에 대답을 안 하는 계상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근심이 있었다.
계상은 피곤한 듯 꽉 죄이는 넥타이를 느슨히 풀며 의자 등에 몸을 기댔다.
"두 달쯤 전에 부도처리 됐어. 공장이랑 회사는 이미 다 정리했고"
"아버지는. 아버진 괜찮으시고?"
"액수가 큰 건 아니었기 때문에 다 정리하니까 그런대로 법적인 문제는 괜찮아."
그런데 그렇게 다 싸그리 다 정리해버리니까 아버지가.."
"힘들어 하시는구나. 건강은"
"혈압 때문에 한 번 쓰러지셨어. 지금은 괜찮아지셨는데 그래도 조심해야지."
"그랬구나.."
"걱정하지마.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니야"
"걱정 안 한다 짜샤. 자 한 잔 받아라"
처음 듣는 얘기였다.
계상의 아버지가 혈압으로 쓰러지셨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때의 나는 겉으로는
내색을 안 했어도 더 이상 계상과 함께 살 수 없다는 사실에 더 속이 상했었다.
"너 장가가야겠다. 응?"
"........."
"이제 니가 집안에 가장 아니야. 넌 외아들이니까.
장가가서 손주도 안겨드리고 그러면 아버지도 많이 위로가 되실 거야.
근데 너 정말 여자 없냐?"
"...없어"
계상은 없다 대답하고는 앞에 놓인 술잔을 비우고 담배를 또 한 대 물었다.
"계상아. 나 정말 예전부터 너한테 궁금한 게 있는데.."
"........"
친구 사이지만 어딘지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위기의 계상이라는 걸 연석도 알고 있었기에
혹시나 언짢은 말이 될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지만 계상은 눈앞의 술잔만 가만히 보고 있다.
"너 왜 여자 안 사귀냐. 내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진짜 그런 거야.
허우대 멀쩡한 놈이 솔직히 니가 원하기만 하면 어떤 여자라도 좋다 할 텐데.
왜 여자 문제에 있어선 그렇게 초연해? 아무리 눈이 높다고 해도 말이지"
"..........."
계상은 대답하지 않는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연석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사정이다.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나는 남자를 사랑해. 그래서 여자를 사귈 수가 없었어. 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다른 변명을 그럴싸하게 하기에는 계상은 그럴 주제가 못되었다.
"사실 내가 너랑 친한 거 아니까 애들도 함부로 말하진 않지만,
이런 소문도 있었어. 니가 어디 병신...아니냐고..."
".........."
"화...안...나냐? 난 화나던데"
풋. 계상은 웃어버린다.
"그러지 말고 말해 봐. 어떤 여자를 원하는지"
"말하면"
"내가 백방으로 찾아서 니 앞에 대령할게. 그것도 내가 못해주겠냐?"
쿡. 하고 계상이 또 웃자 연석은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이
단단히 작심한 얼굴로 얼른 얘기해 보라며 채근한다.
"나를 미치게 할 수 있는 여자"
"응?"
겨우 계상의 입에서 무겁게 떨어진 말은 자기를 미치게 하는 여자라고 했다.
연석은 멍하니 되묻다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짓는다.
"야. 그러니까 어떤 여자가 널 미치게 하는지를 얘기해야 할 거 아냐"
"웃으면.."
"응"
"웃으면 이렇게 눈이 휘어져야 하고"
"으응..?"
"그리고 아주 잘 삐져야 해"
"뭐?"
"그래야 풀어졌을 때 그 웃는 걸 또 볼 수 있잖아"
"야. 너 변태냐?"
"그리고 어떤 때는 나를 여자처럼 만들 수 있어야 돼"
"널 여자로 만든다고? 야, 그런 여자가 어디 있냐?"
"그러니까"
"뭐?"
"그런 여자 없겠지..?"
".........."
이제 연석은 계상이 자신을 놀리는 건지, 아니면 이것이 진심인지 의중을
헤아려 보려는 듯이 진지한 눈으로 계상을 살핀다.
담배를 비벼 끄며 계상은 다시 말했다.
"농담이야. 그냥..
우리 아버지 어머니에게 잘 해 줄 수 있는 여자면 돼"
"자식. 싱겁기는. 난 또 어디 숨겨놓은 여자라도 두고 얘기하는 줄 알았잖아"
"쿡. 병신이라며"
"내가 언제! 그냥 그런 말이 돌았다는 거지. 짜식, 싫긴 한가 부네.
그러니까 얼른 장가를 가든지 여자를 사귀던지 해. 그래서 그런 오명 벗으면 되잖아.
야야. 천천히 마셔. 술이 놀래겠다"
얼음도 섞지 않은 위스키를 한꺼번에 비우는 계상을 보며 연석이 잔소리를 하지만
계상은 오늘은 끝까지 가보자며 다시 연석과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른다.
쓰디쓴 술을 입안으로 삼키는 계상의 목줄기가 가늘게 떨린다.
"계상아, 사랑이 다 그런 거야. 다 그 여자가 그 여자라구.
머 별다른 게 있는 줄 알아? 그리고 또, 너를 미치게 할 정도의 사랑이라면.
그건 독이야. 사랑도 지나치면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구"
"............"
몇 잔의 술이 더 오간 후에 연석이 차분하게 말했다.
연석은 알고 있었다.
계상이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 때문에 계상이 줄곧 힘들어 하고 있었다는 걸..
가깝다고는 하지만 계상이 속내를 쉽게 털어놓지 않는다는 것을
나보다 먼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에서라도 서로를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런 허무한 일이 바로 나에게도 적용이 된다는 것을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나는 결국 내 눈앞에 보여지는 계상만을 계상이라 믿고 살아왔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널 힘들게 하는 사랑이라면. 정리해라.
마음으로 먼저 정리하라는 말이야"
"............"
"대꾸하기 싫으면 그냥 듣기만 해.
내가 널 알아서 그래. 너란 놈 살가운 구석은 없지만 한 번 마음 주면
절대로 니가 먼저 그만 둘 놈 아니란 거 알아.
씨뎅할 의리 때문이라도 넌 못 그러지"
"...의리?"
"그래. 의리. 잘 생각해 봐. 아직도 정말 사랑해서인지. 아니면 의리 때문인지"
"...그런 거 아니야. 의리...그런 거 아니야"
연석은 뭐라 대꾸를 하려다 관두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런데 연석아.. 나.. 자꾸 지쳐. 너무 힘들어.."
"힘들면 관 둬. 왜 억지로 붙들고 있어. 뭐야. 그 쪽에서 도저히 못 헤어지겠대?
너 미안해서 책임감이나 뭐 그런 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아니야?"
술 때문일까 아니면 상대가 연석이기 때문일까.
계상은 평소와는 다르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했다.
"내가 없이도...나 하나 없어도... 잘 살 사람이야. 그래. 그럴 거야."
계상은 씁쓸히 웃었다.
아니야. 계상아. 나는 그렇게 강하지 않아.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그럼 너만 혼자 목매고 있는 거야? 야, 너 안 어울리게 짝사랑이었어? 그런 거야?"
"쿡. 짝사랑으로 시작했지."
"허. 너도 그런 거 할 줄 알았냐? 윤계상 너 오늘 진짜 여러 번 놀래킨다?
이거 겉으로만 온갖 폼 다 잡고 있었으면서 실속 없는 짓은 지가 다 하고 있었네.
짝사랑. 그딴 이익 없이 억울한 건 나도 안 한다 자식아"
연석의 핀잔에 계상은 또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처음으로 자기 속내를 보여주는 것일 게다.
Rrrrrrrrr
11시 30분. 계상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으응..네. 아니오. 지금 연석이랑 술 한잔하고 있어요 어머니.
걱정하지 말고 먼저 주무세요. 네.. 저두요.. 네.. 아니오.. 네.."
딸깍.
전화가 끊어지자 계상은 플립을 닫아 주머니에 넣으려다 다시 꺼내어
밧데리를 빼버린다.
"그 여자지?"
눈치 빠른 연석은 계상을 쳐다도 안보고 담배연기를 흘리며 말했다.
계상은 우리를 아는 사람과 함께 있거나 통화를 할 수 없는 곤란한 상황에서는
이런 식으로 내게 어머니라 부르곤 했다.
아마 나는 이 날도 퇴근이 늦는 계상을 기다리다 전화를 했겠지.
대답 않는 계상에게 연석이 다시 말했다.
"다 큰 녀석이 누가 어머니한테 그렇게 애인한테 하는 목소리를 내냐.
호칭만 어머니라고 하면 모를 줄 알고?"
그러나 아무리 눈치가 빠르다 해도 그 상대가 바로 나라는 것까지는
연석도 상상조차 못하겠지.
그럴 것이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만약 연석이 우리 관계에 대해서
알았다면 아니 지금 안다면, 계상에게 뭐라고 할까.
..........
"나는 계상아. 니가 힘든 건 싫다. 그래서 사정이 어떻든.
너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그게 누구든 그냥 싫어."
"..........."
"어이구. 이 인상 봐라. 그래두 지 사람 뭐라 하는 건 싫은가 부네.
야 이 자식아, 표정 안 풀래? 너 애인 때문에 이젠 친구도 필요 없다 이거냐?"
".....좋은 사람이야. 나쁘게 생각하지 마"
연석은 예전부터 계상을 끔찍이 아꼈다.
가끔 내가 질투를 할 정도로 계상도 연석과는 유독 가까운 사이였다.
그래. 연석은 언제든 계상의 편을 들어 줄 친구였다.
계상이 나와의 관계가 힘들어서 그만둔다고 한다면, 연석은 기꺼이 찬성할 것이다.
나와의 친분 정도는 그런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문득 계상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이런 친구조차 하나 없다.
내게는 가족도, 친구도 없이 오로지 계상 뿐이었다.
이 날, 전화선 이쪽과 저쪽의 계상과 내가 있었던 서로 다른 공간은
천국과 지옥만큼이나 먼 거리였던 것이다.
"집에서도 아시니?"
"....아니"
"왜. 도저히 알릴 수도 없는 정도야?"
"............"
"야, 유부녀냐?!"
갑자기 물고있던 담배를 확 꺼버리며 연석이 놀라 다그친다.
"야야, 너 그건 정말 안 돼. 그건 안 되는 거야. 계상아, 아니지? 응? 아니지?"
"너 날 뭘로 보냐"
"그래. 그럼 됐구. 그건 정말 안 돼."
무슨 큰 일이라도 났던 것처럼 후 한숨을 내쉬며 연석이 찬물을 마시는데
계상이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
물을 마시던 연석은 계상의 그 말에 동작을 멈추고 입도 다물어버렸다.
자신을 향해 굳어버린 연석을 흘깃 쳐다보는 계상은 피식 웃으며 말한다.
"정말 여자 소개 시켜 줄 거야?"
"그래"
"이뻐야 돼"
"짜식, 알았어 임마."
"..........."
"괜찮지?"
"응."
그래도 연석이 의심쩍은 듯 묻자 계상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가서 대답했다.
거기까지였다. 나는 더 이상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을 자신이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
연석이었다.
어린애 같은 생각이겠지만 내게서 계상을 빼앗아 간 것은 결국 연석이었다.
아마 단발머리의 그녀를 소개한 것도 연석일 것이다.
계상이 집으로 들어가겠다 한 것도 결국은 오늘 연석과의 술자리를 하고 난
뒤였을 것이다.
이런 건 불공평해.
나에게는 아무도 없었는데 어째서 계상에게만 이런 친구가 있는 거야.
나는 저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어째서 저는..
억울해.
나는 억울해.
억장이 무너지게 연석이 원망스럽다.
그리고 이런 것을 보여주는 키다리가 원망스럽다.
"괜찮아요 데니씨..?"
나는 그를 쏘아보았다.
눈에서 불이라도 뿜어져 나온다면 그를 당장 죽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천사가 죽는지는 모르겠지만.
"포기 안 해."
"..........."
"소용없어. 포기 안 한다구"
"..........."
"포기 안 해!!!"
소리지르는 나를 키다리는 아무 표정도 없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거대한 산이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로서는 오를 수도, 그럴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의 크기로.
그러나 나는 그럴수록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계상에게 해 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말이다.
<14>
지난 주 금요일. 그러니까 12월 24일.
나는 평상시보다 한시간 일찍 사무실에서 나와 곧 시작될 끔찍한 크리스마스이브의
교통체증을 피해 서둘러 집으로 퇴근을 했다.
길거리에는 온통 노란 전구들로 반짝이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분주한 모습이었지만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집으로 들어오기 전 편의점에 들러 캔 맥주 몇 개와 컵라면 등을 사 가지고 왔지만
그나마 라면은 더운물을 채워놓자마자 미국서 걸려온 가족들 전화를 받느라 퉁퉁
불어서 먹지도 못했다.
결국 혼자서 먹기 위해 다시 한 번 애를 쓴다는 게 영 재미가 없어서 티비 앞에서
계상이 좋아하던 복숭아 통조림을 따서 맥주와 함께 국물까지 몽땅 마셔버렸다.
그렇게 이리저리 재미도 없는 티비 채널을 돌리다가 당분과 적당한 알코올 기운에
몸이 녹녹해져선 아침까지 소파에서 잠이 들어버린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리고 계상이 연말정산 때문에 야근을 해야 한다고 했던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이리 줘봐. 내가 해 줄게"
여자는 순순히 손에 들고있던 마개가 잘 열리지 않던 음료수병을 건넨다.
내가 해 줄게..
그저 아무 것도 아닌 흔히 볼 수 있는 말과 행동이겠지만 그것이 계상이기에
내 눈에는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에 대한 애틋한 마음 고생을 하던 안스러운 너를 보았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다른 사람과 이럴 수가 있는 거니..
한 여자의 남자인 계상의 모습.
이제까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런데 막상 내 눈앞에 그런 계상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말쑥한 차림으로 한 여자의 옆에서 보호자라도 된 듯이 있는 계상의 모습.
현실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계상아! 일찍 왔네? 우리가 늦은 거 아니지?"
연석이 또 한 명의 여자와 함께 도착했다.
연석이 데리고 온 여자는 봄에 결혼한다는 녀석의 약혼녀인가 보다.
이미 서로들 안면이 있는지 계상과 계상의 그녀, 그리고 연석과 연석의 그녀는
서로 아는 체 반가운 인사를 한다.
두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
각각 사이가 좋아 보이는 두 쌍의 커플.
지극히 일반적이고 평범한 모습.
"연석씨 이거 받으세요. 그리고 이건 정화씨꺼"
계상의 그녀가 핸드백에서 연석과 연석의 그녀에게 초록과 빨강이 섞인
성탄용 포장지에 싸인 선물을 꺼내 건넸다.
"어? 이거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우린 아무 것도 준비 안 했는데.."
"아니에요. 이거 그냥 계상씨하고 저랑 연석씨한테 고맙다고 같이 산 거에요."
"그래요? 그럼 이거로는 안 되죠~ 지은씨.
원래 중매쟁이에게 양복 한 벌은 기본인 거 아시죠?"
"야, 차연석. 싫으면 도로 내 놔"
연석이 지은이라 하는 그녀를 짖궂게 놀리자 계상이 그녀를 보호라도 하듯이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연석에게 면박을 준다.
그리고 계상의 그녀는 그런 계상의 곁에서 편안히, 너그럽고 조용하게 웃는다.
같이 있어도 조바심이 난다거나 남들의 시선 때문에 불안하거나 초조한 모습이 아니다.
"알았다 알았어. 감지덕지 고맙게 받으마. 근데 지은씨. 이거 지은씨가 사자고 했죠?
저 녀석이 나한테 이런 걸 챙겨줄 리가 없다니깐요"
"어머, 왜요. 계상씨가 얼마나 연석씨를 생각하는데요"
"설마요. 지은씨. 그렇게 감싸 줄 필요 없어요. 저 녀석은 제가 더 잘 안다니까요"
"왜 그래요 연석씨. 지은씨 고마워요. 내 것까지 챙겨주고. 계상씨도 고맙구요"
연석의 여자가 연석에게 곱게 눈을 흘기며 핀잔하더니 계상과 지은을 향해
상냥히 웃으며 인사를 대신 한다.
투덜대고는 있지만 연석 역시 자신들과 계상의 커플이 함께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낸다는 사실이 무슨 어릴 적 소원성취라도 한 듯 신이 나 있었다.
내가 불은 라면을 나무젓가락으로 휘휘 젓다가 복숭아 통조림 국물로 저녁을
대신하고 있었을 때 네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그들은 아마 앞으로도 사는 동안 이런 식으로 부부동반의 모임을
여러 번 가질 것이고 연석이 계상을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식의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저녁식사를 마친 네 사람이 시계를 보며 서둘러 도착한 다음 장소는 바로 나와 계상이
며칠 전, 아니 다섯 번째 월요일에 찾았던 이승환의 콘서트였다.
그러니까 연말정산으로 바쁘다던 계상의 성탄이브 스케줄은 연석이 커플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2차로 다 함께 콘서트를 가는 일정이었다.
나는 배신감에 떨리는 입술을 꼭 깨물며 그들이 자리를 잡은 좌석 옆으로 다가갔다.
뭐야, 그럼 너는 이미 한 번 보았던 콘서트를 나에게 자선이라도 베푸는 양 한 번 더
구경을 했다는 거야?
"계상씨! 어때요?! 좋죠!"
시끄러운 공연장 안에서 계상의 그녀가 귀에다 대고 커다랗게 소리를 치자 계상은
그녀에게 가까이 몸을 숙이더니 귓가에 바짝 입술을 대고 무어라 대답한다.
이승환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가수였나 보다.
나는 정신이 멍한 상태에서 더 이상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힘찬 가수의 목소리도,
환호하는 사람들의 고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나의 눈은 계상과 계상의 그녀만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계상은 여전히 이별의 노래 가사 따위, 별 감흥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눈물을 글썽이며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은 계상의 그녀와 연석의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들 역시 가수의 노래에 감동했을 뿐이지 이별에 대한 감상에 취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녀들은 곧 있으면 새하얀 웨딩드레스의 주인공이 될 세상에서 누구보다 행복한
여자들이었다.
그리고 가수의 열창에 감동해서 무대위로 열중하는 자기 여자들을 재밌다는 듯이
서로 바라보며 눈을 맞추고 피식 웃는 계상과 연석이었다.
계상에게는 이제 더 이상 나와 함께 했던 과거 같은 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신이 나서 죽겠다는 모습은 아니지만, 적어도 며칠 전 나와 함께 했던 콘서트에서의
모습 때보다는 훨씬 편안하고 즐거워 보인다.
가끔 옆에 앉은 자기 여자와 눈을 마주치고 웃기도 한다.
아직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네 마음에 나는 전혀 걸리지 않는 거니..
아무 것도? 응? 아무 것도 걸리지 않아?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에 변해 버린 거니.. 어떻게...
하지만 친구녀석의 커플과 함께 한 여자의 남자로서 안정되고 편안해 보이는,
눈치 볼 것도 없고, 비겁한 거짓을 꾸미지 않아도 되는 계상의 모습은 이제서야
제대로 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할 수만 있다면 계상이 이런 모습이길, 예전에는 나도 습관처럼 바랬었다.
그러나 막연한 상상과 그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계상아..
너 정말 너무 한 거 아니니..
"아니, 지은씨. 벌써 계상이 너무 꽉 잡은 거 아니에요?
저번에는 담배를 끊었다더니 이젠 술도 끊었다?"
"연석씨는, 잡긴 누가요. 잡는다고 잡힐 사람인가요 계상씨가?"
"하하하...와아. 역시 계상이가 잡힐 만하네요. 네에, 잘 알았습니다"
콘서트 장에서 나온 그들은 근처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운전을 해야 한다는 핑계로 콜라를 마시는 계상을 연석이 놀리자 지은이 대꾸했다.
정말로 그녀는 계상을 잘 알아버린 것 같다.
누가 억지로 무언가를 하게 한다고 고분고분할 계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반감을 가지는 게 계상이었으니까.
계상이 그녀를 좋은 여자라고 한 것은 이런 점이었을까.
오늘 저녁 내내 보여준 그녀의 태도는 나를 실망시켰다.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위해 어떻게 해 달라는 식의 응석도 전혀 없었고,
자신에게 충분히 당당하면서도 그렇다고 거만하게 보일 정도는 더욱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옆에 있는 계상의 존재는,
그저 가만히 옆에 있기만 해도 마치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존재로 느껴졌다.
지은은 그런 계상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다.
계상은 자랑 할 만한 연인이었다.
"이젠 괜찮냐..?"
여자들끼리 화장실을 가느라 함께 자리를 비웠을 때 연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엇을 묻는 건지 나도 계상도 알았다.
그러나 계상은 피식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저기 계상아, 이런 말하면 기분 나쁠지 모르겠지만.."
"말 해"
"결혼.. 좀 서두르는 거 아냐?"
"........."
"그냥 저기.. 아직은 날도 너무 춥고, 봄까지 기다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
계상이 결혼을 서두르는 것이 연석의 눈에는 다소 불안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오늘 밤 내 눈에 보이는 계상이 모습은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나와 지내던
그 어느 때보다도 차분하고 안정돼 보였다.
그러긴 해도 연석의 말에 계상이 어떤 대답을 할지가 나는 궁금했다.
정말로 계상의 마음속에 나에 대한 미련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지 않은 지..
"너 내가 먼저 장가가는 게 배아파서 그러지"
"뭐? 얌마, 뭐 니가 먼저 장가간다고 내 형이 되냐?"
"내 자식은 니 자식한테 형이 될 수도 있지"
"뭐? 좋아 그래. 그래도 아들은 내가 먼저 낳을걸?"
"내기할까?"
"내기? 좋아. 내기하자 그래. 뭐 걸래?"
계상은 또 피식 웃어버린다.
그러나 나는 가슴이 아파서 마른침을 힘들게 삼켰다.
"연석아"
"응"
"걱정하지 마. 나 잘 살 거야"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연석아"
"응"
"고맙다.."
"짜식. 이 형님의 마음을 알아주니 다행이네. 결혼식 날 보자. 알지?"
"내가 먼저야"
"어허, 양복 한 벌은 못해 줄지언정 나에게 축의금 따위를 바래?"
네가 이렇게 여기서 시시덕거리고 있을 때 아무 것도 모르는 나는 빈집에서
혼자 잠이나 자고 있었겠지.
어떻게 그렇게 날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었어.
어떻게...니가 나한테... 어떻게..
"근데 계상아, 너 담 달에 결혼이면 애들이랑도 한 번 모이자.
담 주 월요일 어떠냐. 요즘 망년회가 많아서 시간이 잘 안 나긴 할 테지만
차라리 월요일이면 될 거 같은데. 어때"
"....그래"
"좋아. 그럼 애들한테는 내가 연락할 테니까 넌 지은씨랑 같이 나와. 소개시켜야지"
"...응"
그랬구나.
누군가의 입으로 내 귀에 들어오기 전에 나와의 문제를 정리하려던 거였구나.
그래서 월요일 점심시간에 귀한 시간을 내서 나를 만나 이별 통보를 하고,
그리고 저녁에는 연석이 일행들과 만나서 결혼발표를 하려던 거였구나.
그런데 연석이가 이런 제의를 하지 않았으면...
넌 대체 언제쯤 나에게 이별을 알리려 한 거니...
결혼식 전날 불쑥 전화해서 무슨 예비군 훈련이라도 다녀오겠다는 것처럼
나 내일 결혼해. 라고 했을까.
아니면, 내가 또 기다리고 기다리다 전화를 하면,
어. 나 결혼했어. 라고 하려던 건 아니니?
계상은 생각하기 싫은 나와의 문제를 고민하느라 그런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 밖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하지만 여자들이 자리로 돌아오자 네 사람은 다시 유쾌하고 기분 좋은 대화를 이어갔고
계상은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여자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성의껏 들어주며
편안하고 좋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계상의 저런 모습을 알고 있다.
예전에는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계상의 특별함.
그러나 이제 그것들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I'm dreaming of a white Christmas
Just like the ones I used to know..
May your days be merry and bright
And may all your Christmases be white
늦은 시간이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의 거리에는 귀에 익은 캐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밖으로 나와 가게 앞에 전시된 크리스마스 트리 옆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I’m dreaming of a white Christmas
With every Christmas card I write
May your days be merry and bright
And may all your Christmases be white
세상이 온통 축복으로 가득해서 모두가 행복해서 미치겠다고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12시쯤 호프집을 나와 연석이 커플과 헤어진 두 사람은 계상이 차로 그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 주는 것으로 오늘의 데이트를 마감했다.
그녀가 사는 아파트 앞에 차를 세우고 계상이 손수 차 문을 열어주자 그녀가 내렸고
두 사람은 잘 자라는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뜨거운 입맞춤 같은 것은 없었지만 나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친밀한 공기를 느꼈다.
"또 뭘 더 봐야 돼요?"
나는 계상의 차 뒷좌석에 앉아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다 아까부터 내내 보이지 않는
키다리가 어디선가 나를 보고있으리란 생각에 허공에다 대고 물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계상이 나를 속이고 연석이 커플과 같이 어울려 하루를 얼마나
근사하게 보냈는지를 보여준 의도를 따지고 싶었지만 관두었다.
나를 그토록 사랑하던 계상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라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런 거라면 충분히 알만큼 알았으니 더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이제 나는 그만 쉬고 싶다.
자고 일어나서 또 한 번 새로운 상처를 받더라도 일곱 번째의 이별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직도 역시 아무 결정도 어떤 대책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너무 지쳐버려서 어떤 결정도 할 수가 없다.
나는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식이 되어 계상이 차로 돌아와 시동을 걸자 눈을 감아버렸다.
잠이 든 것은 아니지만 피곤에 지쳐 한참 동안 달리는 차 안에서 눈을 감고 있던 나는
문득 차가 너무 오래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눈을 떴다.
차창 밖의 풍경은 온통 캄캄하고 어두운 도로뿐.
이미 우리가 서울을 한참 벗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밤중이지만 이 길은 우리가 세 번째 월요일에 갔던 춘천 국도였다.
백미러로 훔쳐본 계상은 무표정이지만 점점 속도를 높이느라 아까와는 달리
다소 굳어서 긴장된 모습이었다.
어딜 가려는 거니..
새벽 2시가 넘어 계상이 차를 세운 곳은 예상했던 대로 강촌이었다.
계상이 나에게 처음으로 고백을 했던 장소이고,
그리고 며칠 전 세 번째 월요일에 내가 데리고 왔다가 실컷 면박만 당했던 곳.
그런데 실컷 좋은 하루를 잘 즐기고 나서 이 새벽에 여기를 혼자 찾은 이유가 뭘까..
그러나 계상은 시동을 끄고도 지루할 정도로 한참동안 차 안에서 꼼짝 않고 앉아있다.
나는 바짝 긴장해서 백미러로만 계상을 가만히 살폈다.
하루종일 따라다니며 본 대로라면 내 생각 같은 건 조금도 하지 않는 것 같더니.
음..? 뭐라고 하는 거지..?
계상은 눈을 감고 무언지 알아듣기 힘든 소리를 입 속에서 웅얼대고 있었다.
앞 시트에 바짝 머리를 기대고 집중을 하자 그것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라는 걸 알았다.
입 속에서 웅얼대던 노랫소리는 스피커의 볼륨을 키우듯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며
노래라기 보다는 말소리처럼 뚝뚝 끊어져서 내 귀로 전해져 왔다.
"......이.....가...면..........가........이.........질.......듯.......한..........그으.....리이......운.........."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노래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조금 더 매끄럽게 이어졌다.
".....그으.....리....운........마음......이야.......잊는....다....해도........."
계상은 음치가 아니었고 오히려 노래를 썩 잘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노래도 아니고 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흐느낌이라거나 하는
그 어느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기묘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계상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알아듣는 순간 가슴이
무거운 망치로 세게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느껴버렸다.
두 번의 콘서트에서 매번 아무 감흥도 없이 노래를 듣기만 하던 네가...
왜 지금 여기서 혼자 청승맞게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니..
"데니야..."
노래를 부르다 말고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계상은 눈을 감은 채로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계속 말했다.
"기억나..?
여기...너랑 처음 같이 왔던 날...
내가...널 사랑한다고 해서...너 정말 깜짝 놀랬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뜨고 놀래서....너 아무 소리도 못했어..."
내가 듣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하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놀란 토끼처럼 눈을 뜨고 앞 좌석의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데니야...
나...나.. 결혼한다.. 나 결혼해 데니야.. 나... 결혼한다구....
데니야....데니야...."
내 이름을 부르는 녀석의 목소리가 이미 잔뜩 젖어있었다.
"나는 두려워 데니야...
너 없이 살게 되는 것도 두렵고...
그리고 너랑.... 계속 같이 지내는 것도 두려워....
데니야.....나 어떡하니....데니야..."
나는 숨도 쉬지 않고 녀석의 혼잣말을 듣고 있었다.
명치끝이 찌르르 아파와서 어금니를 물었다.
"널....잊을 거야...잊을 거야 데니야....그러니까....
.....너도 날....잊어....데니야....우리....
잊어버리자.....잊자.....잊......"
결국 녀석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그러다 갑자기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내려섰다.
12월의 찬 공기가 매서운 강바람과 함께 오싹한 한기를 느끼게 했지만 계상은
뒷좌석에 걸어둔 코트도 입지 않은 채 차 트렁크를 열고 그 안에서 조그만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나와 찍었던 몇 장의 사진들과 많지는 않지만 가끔 내가 녀석에게 썼던
편지들 따위가 들어있었다.
계상은 그것들을 하나 하나 손으로 만져보다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함께 한 시간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지만 우리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흔적들을
지금 계상은 태워버리려 하는 것이다.
라이터를 켜고 내가 웃고 있는 사진 한 장을 손에 들고 한참 쳐다보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불을 붙이자 매서운 강바람이 한 번 붙기 시작한 불을 거칠게 할퀴고 지나간다.
계상은 불길 속에서 점점 사라지는 사진 속의 나를 상자 안으로 던져 넣었고
상자 안은 곧 앉은키만큼이나 높이 기세도 등등하게 불길이 타올랐다.
그러고 녀석이 실성한 듯 내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데니야......데니야......데니야....."
타버리는 상자 앞에 주저앉아 꺽꺽 숨이 차게 내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들썩이고
자포자기가 된 사람처럼 울기 시작했다.
이렇게 밖에 못하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다는 식의 울음이었다.
녀석이 내게 모질게 굴었던 여섯 번의 이별.
나는 녀석이 이렇게 괴로워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데니야....흐흑....데니야......데니야...흐흑....데니야....!!!"
제 손으로 태워버리는 상자 앞에서 마치 어린 새끼의 죽음 앞에서 어쩌지도 못하고
스스로를 자책하듯이 우는 짐승처럼 내 이름을 소리질러 부르며 녀석이 울고 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또 깨물었지만 숨이 턱까지 차서 나를 부르며 억장이 무너지도록
펑펑 우는 녀석의 모습에 거의 실신을 할 지경이었다.
"그만 해....계상...아....그만...해....."
겨우 입 밖으로 내 보는 목소리도 녀석에게는 전달되지 않는다.
내가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렇게 괴로워하는 녀석의 모습을 보느니 차라리 내가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했어야 했다.
녀석은 강하지 못했다.
그런 척을 했을 뿐.
내가 그래왔던 것 이상으로 모든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모르게 태연한 얼굴로 제 감정들을 정리해야만 했던 녀석을
왜 진작 몰랐을까.
"데니야......데니야.....데니야.....!!!!"
더 이상 보고있다가는 내가 먼저 어떻게 돼버릴 것 같은 지경이 되었을 때 나를 부르는
계상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또다시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묻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 방 침대 위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러나 캄캄한 방안에서 나는 아직도 나를 부르는 계상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소리 내어 울고 싶었지만 가슴이 너무 아플까 봐 입술만 깨물었다.
<15>
일곱 번째 이별..
"계상아, 여기"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손을 들며 웃고 있는 데니가 보인다.
나는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애쓰면서 자리로 걸어갔다.
"...일찍 나왔네"
"아니야. 방금 왔어. 앉아"
한 달 만에 보는 데니는 독감이라도 앓았는지 해쓱했지만 오늘따라 멀리서 봐도
눈에 띌 만큼 스마트하고 매력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데니가 흰 와이셔츠에 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었을 때가 좋았다.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자켓에 맞춰 타이를 고르는 센스도 세련된 취향을 가지고 있었고,
무척 말랐지만 옷태가 좋아서 양복을 입었을 때의 데니가 왜소하다고 느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 때때로 그 마른 어깨에 무작정 기대고 싶어질 만큼...
근사했다. 데니는..
"바쁜데 부른 거 아니니?"
"...아니"
안 그래도 오늘 너에게 연락을 하려고 했어 데니야..
"연말이라 바쁘지?"
"으응...좀.."
"차 시킬까?"
"..그래"
오랜만에 만났건만, 며칠 전의 크리스마스도, 그리고 그보다 앞서 이틀 간격의 우리
두 사람의 생일날도 함께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선 불만스러운 투정 한 번 부리지 않는
데니의 태도에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점심시간에 잠시 만나자고 걸려온 데니의 전화에 대해서 나는
아마도 그런 것들에 대한 투정쯤 일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게 아니라면
혹시 데니가 벌써 알고 있는 걸까..
그러나 그렇다고 보기엔 데니는 침착하고 다정한 태도였다.
"신원아.."
"계상아"
동시에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눈이 마주쳤다.
가느다랗게 흔들리는 시선이 허공에서 잠시 어지럽게 얽혀 들어간다.
오늘 할 얘기가 있다며 만나자고 한 것은 데니였지만 내가 먼저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지금으로선 데니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짐작도 할 수 없지만,
만약,
그 동안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던 우리의 소원한 관계를 따져보자는 거라든가,
아니면,
어디 선가 벌써 나에 대한 소식을 듣고 확인을 해보려 한다는 거라든가,
아무튼 어떤 말이 나올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나중에 내 말을 들었을 때 녀석이
더 무참해질지 모르는 상황은 피하게 하고 싶었다.
물론 어떻게 말한다 해도 데니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을 리 없겠지만..
"계상아. 내가 먼저 말해도 돼..?"
그러나 데니의 상냥한 눈을 마주하고 있는 나로서는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고
데니 역시 조용히 웃고는 있지만 순서를 양보할 마음은 없어 보인다.
할 수없이 머리 속으로는 일초에 백 번쯤 초조한 갈등을 느끼면서도 나는 서빙 된
커피를 마시며 침착한 척 입만 꾹 다물고 데니의 말을 기다렸다.
"계상아..오늘 너를 만나자고 한 거는..."
데니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 지가 두려워서 커피 잔을 쥐고 있는 손가락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
계상아, 너 결혼한다는 말 사실이니? 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그렇게 물으면 당장 응, 그래. 나 결혼해. 라고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니다...라고 할 수도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미루고 미뤄오며 버티고 버텼지만...
그러기에는 이제 너무 많이 와 버렸다.
처음부터 데니를 속이자고 작정을 했던 것은 아니다.
돌아설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없었던 일로 하려고 했었다.
정말로 할 수 있다면 그럴려고 했다.
그런데 무엇에 홀린 듯이 내가 스스로 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끌려가다시피
내 의지의 반쪽을 상실하며 여기까지 와 버렸다.
나는 연석에게 지은을 소개 받고, 만나고, 모든 것이 구체적으로 진행이 될 때까지도
설마 내가 정말 데니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할거라고는 믿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이런 건 아무 소용이 없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해 봤자 아무런 설득이 되지 않는다.
또 한 번의 비겁한 변명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란,
결국 우리의 현실을 나와 데니에게 가능한 한 냉정히 알리는 수밖에 없다.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도록..
나란 녀석을..
데니의 기억 속에서 가능한 빨리 지울 수 있도록...
그래서 나를 미워하게 된다 하더라도..
"계상아. 나... 미국 가려고 해. 가족들한테..."
"....응?"
뜻밖의 말에 나는 커피 잔으로 향해있던 시선을 들고 데니를 쳐다보았다.
목소리는 상냥했지만 데니는 조금 전처럼 웃지도 않고 눈빛이 진지했다.
마주친 내 눈을 미안한 듯, 그리고 조금 난처한 듯 바라보며 뜸을 들이더니
다시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너한테 미리 상의하지 않고 혼자 결정해서 미안하다 계상아..."
"무슨.....말이니..."
"나 얼마 전부터 공부를 좀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너도 알잖아. 부모님도 계속 들어오라 하시고.. 아니 그것보다는....
지금 여기서 이렇게 회사 생활하는 게 아무래도 나에겐 적성이 안 맞는 거 같아.
더 늦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고 싶어"
알고 있었다.
우리는 둘 다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데니는 적성이 맞아 선택 한 것이 아니라고 했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 있는 무역회사에 입사하게 된 것도 사실은 나와 함께
한국에서 지내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한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거...하려는 거야...? 그림...?"
"아직 뭘 할지는 구체적으로 정하진 않았지만, 좀 쉬면서 생각해보려고 해.
이 나이에 순수미술을 한다는 건 늦기도 했지만 너무 현실성이 없고
하긴, 뭘 한다고 해도 늦은 감은 있지만.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시작하고 싶어"
그러니까 지금 데니는...
이곳에서의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떠나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하는 거지..
나는 지금 왜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런 결정을 한 거냐고 따질 주제가 못 된다.
그렇다고 내 입장에선 잘 된 거라며 축하를 해 줄 수도 없다.
아니...웃기는 건..
정작 나는 오늘 헤어지자는 말을 하려고 나온 주제에...
데니가 떠난다...는 사실을 데니의 입에서 듣게 되자...
헤어짐이란 것 자체가 마치 청천벽력처럼,
그런 것은 한 번도 상상 해 본 적 없는 놈처럼 당황하고 있다.
그런데...
또 하나 내가 더 당황하고 있는 것은..
이런 얘기를 하는 데니가 지나치게 침착하다는 사실이다.
내가 알기로 데니는 이런 결정을 할 수는 있어도,
이런 말을 태연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까탈스럽다...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남에게 상처가 된다거나 자신이 미안해지는 말들..
데니의 입에서는 이런 식으로 나올 수 없다.
어울리지 않는다..
"계상아..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지만..
쉽게 결정한 건 아니야...
......오랫동안 생각만 하고 미루면서 용기를 못 냈어...
물론....우리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나서.....그래서 흔한 말로
눈에서 안 보이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
"나는 있지 계상아..."
"..........."
한 음절 한 음절을 꼭꼭 씹듯이 얘기하는 데니의 목소리는 떨리고,
그러다 잠시 멈추었다.
"너와 지냈던 시간을... 평생동안 소중하게 기억하고 싶어.
하나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너도 그래 주었으면 좋겠어.
혹시라도 나중에 이대로 시간을 보내다가..
내가 너 때문에 내 인생을 양보했다거나..
포기했다거나 하는 미련 같은 거... 만들고 싶지 않고...
그리고 너도...나 때문에 혹시라도... 포기하고 있는 인생이... 있다면...
그것도... 바라지 않아..."
"............."
데니야...
데니야..
"그러니까 계상아.. 나는 지금....우리가....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
"그게 아니라...너와 나...각자... 새로 시작하자는 말을... 하는 거야..."
"............"
"그리고....욕심이지만......이런 내 결정.....내 용기에 대해서...
....너에게 축하 받고 싶어"
"............"
우리 지금 헤어지자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헤어지자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헤어지자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렇지만 나는 알았다.
데니는 앞으로 다시는 나를 보지 않을 것이다...란 것을.
내가 다시는 데니를 볼 수 없다...란 것을.
데니는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먼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내가 너무 나만 이해해달라고 하지.."
"............"
이이가 바로..
내가 사랑하던 이였다.
나는 오늘 무슨 걱정을 하고 이 자리에 나온 거지.
이이는 처음부터 나를 개의치 않는 눈빛과 무심한 미소로
내 심장을 미치게 만들었고..
함께 있어도 그립게 만들었고..
그래서 항상..
나보다 강한 이였다.
내가 사랑하던.. 지금도 사랑하는 이이는..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이이는..
나 따위에게 상처를 받을 이가..
아니었다.
"계상아..
나는 있지 계상아.. 네가.. 정말..."
".............."
"....좋은 여자...만나서...편안한...가정도 만들고.....
너 닮은 자식들도... 많이 낳고... 그래서.... 이제는 네가...."
"............."
"네가... 다른 사람들....눈치 보지 않고....떳떳하게....너 답게....
편해졌으면 좋겠어"
".............."
"우리...함께 한 시간들...서로...잊기 어렵겠지만...
만약에 잊게 되더라도.....그건....우리 탓이 아니야...."
"............"
"그러니까....우리...그렇게 되더라도....서운해...하지 말고..."
"............."
"그러지 말고......잘....."
"..........."
"계상아...이게...."
".............."
".....내 진심이야..."
이게..
내 진심이야..
진심이야..
진심이야...
"그러겠다고....약속해 줄래...?"
"............."
끝까지 이이는 아는 체를 하지 않을 작정인가 보다.
자신을 배신한 이 못난 나를..
이렇게나 다정히 웃으며 보내 줄 작정을 이미 해 버린 것이다.
"약속해 줘.."
".........."
"계상아..."
"....약속....할..게.."
"너무 많이 괴로워하지도.... 않겠다고 약속해...."
"............"
"나도... 그럴게.."
"...약속....해...."
나는 아직은 눈물을 참을 수 있는 나에게 고마웠다.
비록 기를 쓰고 참느라 입술을 파르르 떨며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는 있지만...
저렇게 상냥히 웃으며 힘들게 진심을 전하는 그에게 눈물이나 흘리는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도 그처럼 웃어야 한다.
진심으로 그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해야 한다.
"그리고 나 솔직히 하나 고백할게 있어.
나도 너를... 너를 처음 봤을 때.. 그러니까 벚나무 아래서 봤던 그 때가 아니고 말이야.
정말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너에게 반했었어. 나도 그랬어. 네가 좋았어"
"............"
기억해 주었다.
처음부터 나에게 반했었다는 말은 거짓이겠지만..
그렇지만 기억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그 바람에 나는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계상아.. 잘 지내"
"............"
내가 감은 눈을 뜨고 자신을 마주할 때까지 기다리던 그는 마지막 인사를 했다.
입가에는 어설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두 눈으로는 마지막 기억으로 내 얼굴을
담아두려는 듯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Rrrrrrrrr Rrrrrrrrr Rrrrrrrrr
눈치 없이 울리는 탁자 위의 내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데니는 뚝. 하고 어느 순간
소리가 그치자 자리에서 일어서며 꼼짝없이 앉아있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눈앞에 내밀어진 그의 익숙한 마른손을 가만히 잡았다.
따뜻한 그의 손이 내 손바닥을 힘주어 감싸 안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고마워... 데니야.."
"........."
"기억해 줘서..."
".....그래"
그의 손이 나를 놓았다.
금새 그가 나로부터 멀어져 가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12월의 마지막 월요일.
윤계상과 안데니는 헤어졌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
하고 싶은 말... 하려 했던 말..
이대로 다 남겨두고서
혹시나 기대도 포기하려 하오
그대 부디 잘 지내시오
기나긴 그대 침묵을 이별로 받아두겠소
행여 이 맘 다칠까 근심은 접어두오
사랑한 사람이여 더 이상 못 보아도
사실 그대 있음으로 힘겨운 날들을
견뎌 왔음에 감사하오
좋은 사람 만나오
사는 동안 날 잊고 사시오
진정 행복하길 바라겠소
이 맘만 가져가오
김광진 -편지-
epilog
"아, 맞다. 나 이번에 거기서 신원이 만났다?"
"안신원이? 걔 몇 년 전에 미국 갔다는 얘기는 들었었는데."
오랜만에 다같이 모인 술자리에서 얼마 전 뉴욕으로 출장을 다녀온 연석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그를 만났다는 말을 했다.
나는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신원.. 안 신원...
"그래 맞어. 신원이. 깜짝 놀랐다니까.
그런데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나니까 증말 반갑더라"
"어떻디? 나도 졸업하고는 걔 한 번도 못 봤는데"
"여전하더라. 오랜만에 봤는데도 딱 알아보겠더라구"
연석이 그를 만났단다.
오랜만에 보는데도 바로 알아보았단다.
나는...
나도 그랬을까...
나도 만약 그를 우연히 보게 된다면..
"근데 걘 거기서 뭐해?"
"응. 무슨 인테리어 쪽 일을 한 대나봐"
"결혼은 했고? 야야..계상아. 너 벌써 취했냐?"
내 손가락에서 힘없이 빠져나간 맥주 잔이 테이블 위로 흘러 넘친다.
"아직 혼자래"
"그래? 아직도?"
"응. 근데 니들은 결혼 일찍 해서 좋으냐? 난 신원이 보니까 부럽더라.
걘 총각이라 그런지 아직도 20대처럼 팔팔한 청춘이더라구"
그의 집에...
그가 사는 집에 연석이 이틀을 묵었단다.
매일 그가 눈뜨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그의 집에서.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에 대해서 평범한 안부조차 물을 수가 없다.
"아무튼 덕분에 마지막 이틀은 신원이네서 편하게 지내다 왔잖아.
자식, 집도 좋고 팔자 부럽더라. 하긴 뭐 먹여 살릴 딸린 식구들이 있나.
잔소리에 바가지 긁는 마누라가 있나.
야, 계상이 저거 또 혼자 딴 생각한다. 야! 윤계상!"
연석의 핀잔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신원에 대한 얘기는 거기서 끝이었다.
그는 잘 지내는 것 같다.
아직도 여전히 예전과 같은 모습이라고 한다.
가끔 기억을 더듬으면 얼굴이 금방 떠오르지 않는 때가 있다.
점점 그렇게 되어 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진이라도 한 장 남기는 건데..
나는...
그저 남들이 하는 것처럼 정해진 코스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공격할 때와 후퇴할 때를 적당히 터득해가며 편안한 길을 고르는 요령을 알아가면서.
진짜로 내가 원하는 것을 사실대로 말하며 산다면, 내가 속한 이 세상에서는 한 순간에
구제불능의 인간이 돼버린 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득, 바로 이것이 내가 원해서 선택한 평범한 인생이 아니었던가를 생각하면
스스로 기가 막혀 허무한 웃음이 난다.
한밤중에 눈을 뜨면 내가 지금 과연 어디서 무얼 어떻게 누구와 살고 있는지
현실에 대한 자각이 공포처럼 휘감기는 때가 있다.
시간이 이만큼이나 흘렀는데 나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내가 데니와 헤어졌다는 사실이.
영원처럼 느껴지던 데니와의 시간이 끝나버렸다는 사실이.
잊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럴 수 있을 거라 내 자신을 믿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나간 과거쯤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첫사랑? 너도 그런 게 있었냐?"
"얌마, 나 무시하는 거야?"
누군가의 입에서 첫사랑에 대한 얘기가 시작되자 녀석들은 저마다 할 말이 많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현실과 이상에 대해서 설교하며 애인과 마누라는 엄연히 다르다고
가르치던 연석도 지금은 결혼 전의 첫사랑을 그리워한다.
여자가 다 거기서 거기라고 잘난 척 하더니.
그 여자와 결혼했다고 해서 지금과 특별히 다를 것 같지도 않은데.
매일 아침저녁으로 마주하며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마누라에게 아직도 애틋한
로맨스 따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런 녀석은 분명 바람을 피는 중이다.
그리고 지나간 첫사랑 타령이나 하고 있는 녀석들은 그럴 용기도 없는 놈들이다.
아.. 이따위라니.
사는 게 너무 재미가 없다.
연석아, 나도 신원이 연락처 좀 가르쳐 줄래..
그냥 이렇게 말하면 되는데..
만날 수는 없더라도 어디서 살고 있는지 정도만 알아도...
전화번호만 알아도..
이쪽이 누군지는 말하지 않고 목소리만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하지만..
지난 몇 년간 데니는 나와 나를 아는 이들에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고
부모님과 함께 예전에 살고 있는 그 집에서 살고 있지만..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다. 데니는..
혹시 하는 마음에 핸드폰 번호도 아직 그대로이지만
잘못 걸려온 전화처럼 말없이 끊기는 경우도 한 번 없었다.
연석을 만난 그가 내 생각을 했을까...하며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는 내 자신이 우습다.
나는 그와 헤어지며 그가 잘 살기를 바라고,
나 때문에 힘들어 하지 않을 것을 입으로는 바랬으면서..
사실은 그가 나를 잊지 않았으면..
나 때문에 조금은 힘들어 했으면...하고
염치없이 바랬었나 보다.
그러나 연석의 입에서는 지나가는 말이라도 그가 내 안부를
궁금해 했다던가 하는 눈치가 없다.
정말로 데니는 이제 나를 잊었을까..
나는..
데니가 보고싶다.
나를 보며 웃던 미소가..
내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그때는 몰랐었다.
그런 것들이 생각만으로도 슬프게 될 거라는 것을..
"야야. 너 그러다 니 마누라 알면 어쩌려구 그래?
너 여자들이 얼마나 그런데 눈치가 빠른지 몰라?"
모두들 남의 일에 참견을 할 때는 똑똑해 진다.
정작 자신이 그 일을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그에 대한 것을 입밖에도 낼 수 없는 처지이지만.
그렇지만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그에 대한 기억을 나누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슬퍼지는 마음조차 내게는 소중하다.
보고싶은 마음.
아무에게도 간섭 받고 싶지 않다.
이제는 비록 지나간 기억의 한 부분일지라도...
데니야..
내 인생의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어 줘서..
고마워..
사랑해...
보고 싶어요 투정 부리던 그대를
보고 싶어요 내게 기대 잠든 그대
날 기다림 조차 행복한 미소로만
가득 채워준 그대를
웃어버려요 그대는 그게 예뻐요
내가 말하면 얼굴을 가리고 나요
날 너무나 기쁘게 했던
그댈 다시 느낄 수 없나요
나에게만 썼던 그 말투
나를 닮은 그대의 습관까지도
두 눈을 감아도
이젠 그대 얼굴 그릴 수는 없지만
정말 너무 보고 싶어요
듣고 싶어요 재잘거리던 목소릴
그땐 귀찮아 고갤 끄덕이곤 했죠
날 보면서 똑같은 얘길
들려주던 그대가 그리워
나에게만 썼던 그 말투
나를 닮은 그대의 습관까지도
두 눈을 감으면 우리 지난날들
어젠 것만 같아서
나도 몰래 눈물이 난 어쩌나
두 눈을 감아도
이젠 그대 얼굴 그릴 수는 없지만
정말 너무 보고 싶어요
그댈 너무 보고 싶어요
-조규만 <보고싶어요>
-태우씨.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줘요.
-정말 계상씨와 헤어질 수 있겠어요?
-...할만큼은 했잖아요.. 자신은 없지만...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에요.
하지만 나는... 계상이의 기억 속에서 언제까지 살아있고 싶어요.
내가 사랑하는 그와 그가 사랑하는 이는 5년 전 12월의 월요일에
일곱 번의 이별을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지금 그는 잘 지내고 있다.
언젠가는 그에게도 새로운 사랑이 올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의 기억 속에서 그가 살아있듯이..
그의 기억 속에도 윤계상이란 사람은 언제까지 소중하게 살아 있을 것이다.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