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으로부터 녹박재, 엽전재, 옥쟁이고개를 넘어 서울로 향하는 충청, 전라, 경상도 사람들은 자연 안성을 거쳐 지나가게 되었다. 지금은 철도와 고속도로가 이웃의 평택을 지나가니까 사정이 달라졌지만 서울로부터 170리 떨어진 안성은 남쪽의 산물이 모여 상업이 번창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을 일찍부터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대구, 전주와 함께 조선 3대 장으로 불리운 안성장은 당시의 번창하던 모습을 천자문의 풀이말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이틀(2일) 이레(7일) 안성장에 팔도물, 펼 열(列)」이라고 하여 펼칠 열(列)자를 설명하고 있다. 지금도 이틀, 이레 안성장은 그대로 지켜지고 있고 사람들의 입에 익어 전해지고 있다. 또 주위에서 떠드는 사람이 있으면「안성장 웃머리냐?」라고 핀잔을 줘 당시의 시끌벅적했던 장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도 「안성에서 물건을 거두어 들여 곳간에 쌓아두면 서울의 물건값이 오른다」는 대목이
있을 정도였다.
풍부한 농산물은 물론 안성에서는 생활필수품을 직접 만들어내는 생산기반도 자연스럽게 다져졌다. 유기는 물론 가죽신, 갓, 담뱃대, 북, 한지, 옹기, 산자와 유과가 지금도 기억되어지고 있고, 특정 제품만 취급하는 중간상인인 객주가 많아 상업의 분업화가 이우어진 시초라 할 수도 있다. 그 중에서도 「안성마춤」이란 말을 탄생시킨 안성 유기는 김천, 남원, 홍성, 박천, 정주의 놋그릇에 비해 대감집에서 쓰던 것으로 정교하게 잘 다듬어져 일찍부터 널리 알려졌다.
고려시대에 발달한 청동기는 조선초기에 여주·이천의 쌀과, 광주의 분원사기와 함께 안성의 놋그릇이 진상품목이 되었고, 조선중엽 이후에는 사대부를 거쳐 일반에도 널리 이용되었다. 구리와 아연을 섞은 황동은 진유라고도 하는데 부드러운 성질을 지닌 금속이란 뜻이다.
잘 깨어지지 않고 닦기 편한 장점을 살려 여러가지 생활용품을 만들었는데 식기, 주발은 물론 수저와 제기, 대야와 요강은 당시의 유기장수들이 주로 취급하던 품목이었다.
놋그릇은 제조방법에 따라 주물 유기와 방자유기로 나뉜다. 방자란 쇳물을 덩어리로 만들어 두들기면서 형태를 만드는 것으로 주로 징이나 꽹과리와 같은 농악기와 놋상, 양푼, 대야정도로 다소 형태가 큰 물건을 만드는 방법이다. 주물이란 일정한 틀에 쇳물을 부어 그릇의 형태를 다듬어 만드는 것으로 안성에서 이런 공장이 한창 번창하던 조선말기에는 40군데나 되었다.
한 때 주춤하다가 해방후 다시 유기공들이 모여 공장을 재건하고 반상기와 농악기도 만들어 안성유기가 대중화 되었는데 그 후 알미늄, 스텐레스 그릇에 밀려 이제 김근수(金根洙·72제·안성읍 봉산동)씨에 의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스물 살때 유기회사 판매사원으로 인연을 맺은 김근수씨는 당시 가장 솜씨가 뛰어난 김기중씨에게서 기술을 익혀 1945년에 스스로 공장을 차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씨가 외무사원으로 일할 때 식기와 대접 한 벌에 3원씩 받았는데, 당시 쌀 한 말에 60전 하던 대여서 지금 값으로 따져도 족히 몇 만원씩에 팔리는 고가품이었다. 그러던 것이 한대 찾은 사람이 없어 해외 토산품 가게에 수출해 명맥을 유지하다가 그의 솜씨를 인정받아 73년에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최근 들어 반상기와 제기를 찾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멀리 시골에서 찾아온 노인네가 제기를 보고 그렇게 반가워하던 모습은 김씨가 이 일을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낀 일이다.
최근에는 서울에서 온 사람들 중에 어린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반상기를 사가는 사람도 더러 있고, 외국인을 위한 선물로도 손꼽히게 되었다. 김씨가 만드는 반상기는 형태에 따라 옥, 바리(주로 여성용), 연엽, 합의 4가지인데 각각 특이한 멋을 풍긴다 제기도 왕가에서 쓰던 것과 일반에서 쓰던 것으로 전시장을 둘러보면 조상들의 생활상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다.
유기와 함께 안성을 대표하는 수공예품으로는 백동(白銅 : 구리와 니켈의 흰색 합금) 담배대를 들 수 있다. 지금은 그 쓰임새가 거의 없어졌지만 양인석(梁麟錫 : 53세·안성읍 봉산동) 씨가 40년 가까이 그 솜씨를 전하고 있다. 한때 안성에서만 약50군데에서 3백여명이 이 일에 종사하던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다.
붐비던 안성장터의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음식으로 장국밥을 들 수 있다. 맑은 장국에 밥을 말아주던 것으로 바쁜 장꾼들에게는 큰 인기였다고 나이 지긋한 노인네들은 기억하고 있다.
이양귀비(李陽貴婢 : 68세·안성읍 동본동) 할머니는 장터에서 음식을 하던 시어머니 이승예씨를 도우면서 배운 솜씨로 지금도 진한 국물을 우려내고 있다. 이제 힘이 부쳐 며느리 박순자(38세)씨가 큰 일을 맡아 하고 있지만 사골, 양지머리, 꼬리, 족과 같은 주된 재료는 직접 확인하고 사와야 마음이 놓인다고 한다.「음식제 맛 내는데는 좋은 재료를 양껏 넣어야 한다.」는 생각이 3대에 걸쳐 변함없는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쌀을 이야기할 때 경기미는 나라안에서 으뜸의 자리를 오래 지켜왔고, 경기미는 바로 평택쌀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안성에서 서쪽으로 나아가 서해바다에 접한 평택은 못이 많은 평야지대로 농사짓기 좋은 땅이다. 그리고 산이라고 할 만한 산도 없고 언덕배기도 둥글게 경사져 넓은 초지를 가진 대단위 목장이 많은 것도 이국적이다. 73년에는 평택군 현덕면 권관리에서 안산군 인준면 공세리까지 2.5Km에는 방조제가 쌓여 거대한 아산호가 만들어졌다. 충청도의 아산, 당진, 서산에서 평택땅 포승면 만호리로 이어져 한양땅으로 향하던 뱃길이 육로로 이어지면서 바로 이웃한 삽교호와 함께 관광 평택의 이름을 더 높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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