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베이너스 건국일기. ---> 당근과 채찍 [1]
우아아앗... 다리에 힘 빠진다.. 에휴.
바르메티어 군단장의 '알겠소.'라는 한마디를 듣고 난 그대로 긴장이 풀려버렸다. 물론 그대로 쓰러지진 않았다. 만약 그랬다가 무슨 일을 겪으려고.
사실 내 무공만으로 무려 만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을 다 죽일만한 내공이 내겐 없었던 것이다. 설사 그런 힘이 있다 하더라도, 저들을 다 죽여버렸다가는 아마도 거의 모든 이들에게 배척받을 것이 분명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즉, 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된다 하더라도 저들을 모조리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모든 내공을 소진하고, [일루젼]으로 저들에게 겁을 준다는 계획은 어느 정도 들어맞은 것이다. 자, 일단은 저들의 무장부터 해체시키고 보자고.
아직 정령계로 돌아가지 않았던 실프의 힘을 빌어, 난 내 목소리를 증폭시켰다.
"다들 무기를 버려라. 반항하지 않는 자에게는 생명의 보존을 약속한다! 모두 무기를 버려!"
이것들이 머뭇대기 시작한다. 군단장마저도 머뭇머뭇 대고 있다니.. 쯧, 이것들이 항복한다면서 게기네?
"승복할 줄 알아라! 개죽음당하기 싫다면 지금 무기를 버려! 패배를 인정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기사다!"
기사란... 맹세와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는 자들이다. 자신이 맹세한 일은 죽더라도 해내고, 자신이 명예롭게 생각하는 일을 누군가가 모욕한다면, 응징을 가하기에 주저함이 없는 자들인 것이다.
난 지금 그들의 그런 마음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들 중에서도 나올 것이다. 자신들이 끝까지 따르겠다고 맹세한 자는..
"우리가 맹세한 사람은 저희 나라의 국왕이시오! 우린 비록 패배를 인정하나, 검을 버려 그 분께 한 맹세를 저버릴 수는 없소!"
....말 잘한다. 그래, 저런 녀석이 하나 둘 쯤은 있으리라고 생각은 했었다. 쿠쿡. 그래, 그렇다면 하나 묻자고.
"구심점을 잃은 나라를 공격해서, 그 나라의 백성들에게 혼란을 주려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나?"
내 말에 약간 찔린다는 표정을 짓는 기사. 주위 기사들의 얼굴도 별반 차이는 없다.
"네 국왕이란 자가, 이런 혼란한 틈을 타 나라를 넓히려고 하는 것이 진정으로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기사 중의 기사라고 불리우는 국왕이 이런 얍삽한 짓을 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가?!"
천천히 언성이 높아진다. 쳇, 나도 모르게 감정이 섞여버렸다.
하지만 별 상관은 없나보다. 내 언성이 높아진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는 당연한 듯이 보이는 걸 보니 말이다.
약간 곤혹스런 얼굴을 한 그 기사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내게 존대를 하는군.
"국왕께 모욕스런 언행을 삼가시오! 우리 국왕은 혼란을 겪고 있을 크레이드 제국의 백성들을 받아들여 그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크큭. 웃기는군. 울컥하고 짜증이 솟아오르려 한다.
"웃기지마. 혼란을 겪고 있어? 웃기는 소리! 네놈이 보았을 때, 이곳의 평민들이 다들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던가? 어려운 삶을 겪고 있던가? 오히려 다들 더 나아진 경제-세금이 줄어들었으니 당연하다-에서 더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침범했 에 더 혼란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을 뿐이야! 네놈들이 침범해 오지 않았다면 이 나라의 사람들은 스스로 황제를 내세웠을 것이다! 그리고 예전보다는 나아진 생활을 했을 거야!
하지만 너희들이 침범했기에 이들은 아직도 황제를 새우지 못 하고 있다! 더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거란 말이다!"
내 언성이 높아져 간다.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 솔직히 조금 찔리기도 했다.
사실 저놈들이 쳐들어왔기에 이 나라의 국민들이 하나로 뭉치고, 지방의 영주들이 세금을 많이 걷지 못한 것이겠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너희 황제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아는가?! 5년 전! 이미 돌아가신 황태자께서 너희 나라에서 무슨 일을 겪으셨기에 그 입에도 올리지 못할 모욕을 받았는지 아느냔 말이다!"
아아.. 젠장, 흥분해버렸다. 내 고함소리와도 같은 목소리에 기사들이 움찔한다. 병사들은 혹여 내가 폭주하지나 않을까? 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기사는 내 눈에서 살기를 느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 분이 겪으신 슬픔을 알게 된다면, 너희는 너희 나라의 국왕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 그 분께서, 얼마나 슬픈 기억을 갖고 계시는지, 안다면."
... 그것때문에 내가 지금 이렇게 흥분하고 있는 것이니까.
투툭. 탱!
병사들이 하나 둘씩 무기를 버리기 시작한다. 기사들도 마찬가지. 군단장은 버린지 이미 오래였고, 그 옆에서 나를 달구었던 기사는 마지막까지 망설이더니, 결국은 무기를 버렸다.
크하하핫!! 이겼다!
아아, 힘들다.
털썩.
막사에 있는 내 천막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사람들 설득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그 바르메티어 국의 병사들은 어차피 평민들 중에서 차출한 사람들이라 별 문제될 것은 없다고 하는데, 진짜 문제는 기사들이라나?
기사라면 일단은 오만불손 자아도취, 명예훼손 민감, 원칙주의 등으로 대표되는 인간들이다. 물론 친위단은 다르지만, 그건 나중으로 제쳐두자!
아무튼 이런 정신적인 측면에 많은 문제(?)가 산적한 자들이기에 회유는 거의 불가능하단다. 젠장...
그들은 지금 모두 포로수용소에 있었다. 사실, 그 포로 수용소라는 것도 실질적으로는 그들이 직접 챙겨온 막사였다. 갑작스런 9000명에 달하는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공간이 필요했는데, 그런 공간이 지금 우리 군에게 있을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그들의 막사에 집어넣고는, 막사에다가 결계를 쳐버렸다.
이 얼마나 독창적인가?! 아아... 역시 난 대단하다!
흠흠, 아무튼 간신히 그들의 신병문제를 해결한 나는 이렇게 마음 편하게 막사에 드러누워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막사도 그 백작이란 아저씨가 마련해 준 것이군.
"리온님, 안에 계십니까?"
이 목소리는..
"리온님? 안에 들어가겠습니다."
..레지나인가? 난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불법침입자에게 말했다.
내 허락도 받지 않았으니, 불법침입자는 불법침입자다!
".. 웬일입니까?"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왔어요."
뭘 또 참을 수 없다는 거야? 이 여자는? 난 정색을 하며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게의치 않으며 말했다.
"왜 그 때, 절 봐주신 거죠?"
"봐주다뇨? 무슨 소리십니까?"
"그 때, 저랑 대련할 때요! 왜 져주신 거죠?!"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 때, 약속 다 해놓고서는, 쯧.
"이긴 사람은 군말 없이 인정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패자가 승복하기로 하지는 않았잖아요?"
"패자는 접니다. 제가 승복하고 하지 않고는 제가 결정할 일이지요."
순간 말문이 막힌 듯이 머뭇대는 그녀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붉어 보인다. 착각인가?
한참을 머뭇대던 그녀가 침대에 앉아있는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막사 안이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몇 발자국 걷기도 전에 내 앞에 서 있었다. 윽? 뭐, 뭐야?
이 후각을 자극하는, 약간 기분 나쁜 냄새는..?!
".... 그래도 전 인정할 수 없어욧!!!"
앙칼지게 그렇게 외친 그녀는 그대로 나를 향해 천천히 쓰러졌다. 처음에는 피할까하고 생각했지만, 내 몸은 이미 그녀의 몸을 받치고 있었다.
쳇, 술 먹고 찾아와서 주정부리기는. 그렇게 투덜거린 나는 그녀를 침대에 눞혀주고는 막사를 나가려 했다.
".... 우웅... 인정.. 쩝쩝.. 못해..."
"....."
뒤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막사를 나섰다. 막사 밖에 약간씩 술에 취한 체 서있던 병사들은 -어느 새 바르메티어 군의 병사까지 섞여 있었다. 친화력이 좋은 모양이다- 나를 향해 어색하게 경례를 붙였고, 용병인 나는 그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한 공터로 걸어갔다.
그리고....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유쾌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