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까지 홍콩에 존재했던 마계,구룡채성】
내용은 나무 위키에서 많이 참고했습니다.
본래 구룡채성은 청나라의 요새로 청의 주전력인 팔기군이 군대로 주둔하면서 홍콩섬의 영국군을 감시하던 요새였다.
그러나 제2차 아편전쟁 이후 구룡채성이 있던 구룡반도까지 영국의 소유가 되었지만 구룡채성만큼은 중국의 소유로 남아 있었다.
거의 몽골팔기로 구성된 팔기군은 도주했으며 텅 빈 성채는 여전히 청의 영토라서 객가 사람들인 한족들이 빈 성채에 대거 들어가 점령했다.
보통 구룡성채(九龍城砦)로 불렸지만 1993년에 철거될 당시 구룡채성이라고 쓰인 현판이 발굴되면서 원래 이름은 구룡채성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원래 평범한 성벽 마을이었으나 슬럼가로 악명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직후부터인데 우선 요새였던 이 장소가 거주지가 된 것은 홍콩의 일제강점기인 홍콩일치시기부터였다.
1941년 홍콩을 점령한 일본군이 구룡채성의 성벽을 헐어버렸다.
그리고 헐어낸 성벽으로는 카이탁 비행장의 확장을 시도해 일본 육군항공대 소속 대형 항공기의 이착륙을 용이하게 했다.
짧은 점령 시기 이후 1945년 일본 제국이 패퇴하여 일본군도 쫓겨나고 다시 영국 땅이 된 뒤에는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발생한 수많은 중국 대륙 남부 출신 부랑민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하면서 거주구역이 되어버렸다.
여기까지는 전후에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난민 문제와 관련된 일이라 상관없는데 문제는 중화민국이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중화민국은 이 지역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1948년에 영국인 관리와 홍콩 경찰의 진입 시도를 막아냈다.
그리하여 영국령 홍콩 식민지 정부가 관리할 수 없게 되었는데, 문제는 소유권을 주장하는 중국 국민당 정부도 관리를 거부하여 완전한 무법지대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중화민국과 영국의 사이가 나쁘지 않아서 치안 공백이 곧 해결될 것 같았지만 1949년 국공내전이 끝나면서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도주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 대륙을 차지하면서 구룡채성의 치안 문제는 꼬여버린다.
상술한 대로 영국 정부가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구룡채성을 관리해야 할 중국이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쪼개져버린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후 영국 정부는 1950년 1월 6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한다는 선언을 했지만 이번엔 중화인민공화국 측에서 수교를 거부했다.
중화민국은 소유권을 주장했지만 실효성이 없었고 영국은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모두 개입을 거부하여 개입할 수 없었고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홍콩 깊숙이 들어가 있는 이 지대를 굳이 관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관리를 포기한 상황에서 결국 구룡채성의 행정 관리 문제는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1950년대부터 중국대륙에서 난민이 몰려오는 가운데 홍콩 정부가 정착을 거부한 중국 난민들은 무정부지역인 구룡채성으로 들어왔다.
1960년대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한창 진행될 때도 중국의 지식인,엘리트들은 중국을 탈출해 구룡성채로 숨어들었다.
1970년대 들어 무허가 고층 건물이 제대로 된 설계도 없이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슬럼화가 가속화되었다.
구룡채성의 가장 큰 특징은 마구잡이로 지어진 건물의 숲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계획은커녕 제대로 된 설계조차 없이 외부로 뻗어나갈 수 없는 상태에서 인구가 계속 늘어나는 대로 자꾸자꾸 빌딩을 높이 세우게 되었고 공간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더 넓은 상층부, 울타리가 있는 발코니, 옥상을 증축했다.
1975년에는 베트남 전쟁 때문에 보트피플로 전락한 베트남인까지 대거 몰려들어 성채는 더욱 혼잡해 졌는데, 특히 이들이 베트남 화교들이어서 베트남계 삼합회가 토착 삼합회 및 본토 삼합회와 알력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심할 땐 매일 밤마다 삼합회끼리 전투로 총소리가 들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1984년 중영공동선언이 체결되어 홍콩의 중화인민공화국 반환이 결정됨에 따라, 영원히 치외법권일 것 같던 구룡채성도 철거 수순에 돌입한다.
우선 경찰이 기습적으로 성채를 포위,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고 처음이자 마지막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이후 1986년에는 영국령 홍콩 정부가 원래 주인인 중국 정부의 암묵적 동의 하에 경찰을 동원하여 범죄자를 싹쓸이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영국 정부는 추가 논의 끝에 구룡채성의 철거를 1987년에 발표했다.
영국령 홍콩 정부는 27억 홍콩 달러를 들여 구룡채성에 살던 33,000여명의 주민에게 보상금으로 지급했다.
보상금이 적다며 불만을 품은 주민도 있었으나 홍콩 정부는 1991년 11월부터 1992년 7월에 걸쳐 주민을 강제로 이주시킨다.
당시 공식적으로 영국령 홍콩이 아닌 중국의 영토였지만 어차피 홍콩 전체가 중국에 반환될 예정이라 영국령 홍콩 정부가 구룡채성의 철거와 공원 조성 작업을 집행하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홍콩 경찰에 의해 철거 법집행에 들어간다. 철거는 1993년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직전에 성채의 합법적 소유권자인 중국 정부는 탐험가들로 하여금 지도를 작성하게 하였다.
철거 작업은 1993년 3월 23일에 시작되어 1994년 4월에 완료되었다.
이로써 악명 높던 구룡채성의 주택가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