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게 참가하는 데 보람을 느끼는 전쟁은 평화를 위한 전쟁입니다. - 이츠하크 라빈 |
너희가 가면 평화로운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 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는지라
- 사사기 18장 10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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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팔레스타인에 극단주의는 필요 없다
영국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의 ‘해결’을 UN에 넘기는 그 순간 모두는 다가올 폭풍을 예감했습니다. 소비에트 연맹의 초대 법무인민위원인 이츠하크 스테인베르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미국 내 좌익 유대인 지식인층과 팔레스타인 내 일부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아 여섯 명의 구성원을 모으고,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에 맞서 최후까지 항전했던 ‘마사다 요새’의 이름을 딴 ‘마사다’라는 조직을 꾸렸습니다.
마사다는 금세 일행의 독특한 구성(주류 시온주의자가 한 명도 없음) 덕에 특별한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바로 ‘같은 유대인을 견제’하는 일입니다. 1947년 2월 28일, 텔아비브를 본거지로 한 이들은 스테인베르그를 매개로 다비드 벤구리온의 의견을 받아 가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가장 먼저 맞서게 된 건 우익 유대인 민병대인 이르군과 극우 민병대인 레히였습니다. 이들은 영국군과 아랍인을 상대로 한 무차별적인 공격을 공공연히 예고하였고, 주류 유대인 사회는 민족주의에 매몰되어 ‘같은 유대인을 공격할 수 없다’라는 명분으로 이들을 막기 꺼렸습니다. 벤구리온은 마사다에게 ‘유대인이 유대인을 해치는 일만 제외하고 이들을 막아달라’라는 지령을 내렸습니다.
반면 나치 독일과 ‘쇼아’(홀로코스트)를 겪은 구성원들이 포함되어 있던 마사다는 그렇게 순진하지 않았습니다. 팔레스타인을 내팽개치는 영국에 대한 성토가 잠깐 있고 나서, 스테인베르그를 비롯한 유대인 고위인사들은 ‘사고로 사망’하거나, ‘직접적으로 공격’한 게 아니라면 상관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논의 과정에서 유럽의 수용소 지옥을 체험했던 에프라임 로텐베르크가 ‘차도살인지계’를 제안하고 야콥 엘하난이 이를 보완하였습니다. 로텐베르크가 이르군과 레히의 활동을 조작해서 UN 및 적십자사 인사, 특히 구호 활동 목적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한 풀케 베르나도테 백작을 레히 측이 공격하려 한다는 가짜뉴스를 만들고, 엘하난과 함께 이 정보를 영국에 전달하기로 하였습니다. 마침 영국군은 자기들이 나치 독일이 북아프리카에서 쫓겨난 뒤 유대인 군사 조직을 토사구팽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런데도 이르군과 레히를 제외한 유대인들이 ‘절제’ 타령을 하며 자신들에 대한 공격을 그나마 자제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정보 전달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파도가 커진 이유는 이르군과 레히가 정말로 영국군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베르나도테 백작을 죽이자는 의견까지 나온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로텐베르크가 위조한 ‘팔레스타인 분할안’ 가짜뉴스 문서를 들고 이르군을 찾아간 요셉 미카엘과 하일레 미카엘은 민족주의에 매몰되어 자신들을 의심하지 않는 이르군 측을 낚아버리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이르군과 레히가 이미 ‘하루 뒤’인 3월 1일 영국군을 상대로 총공격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르군과 레히는 섣부르게 준비하여 영국군을 공격하였습니다. 공격은 미리 매복한 영국군에 의해 대실패로 돌아갔고, 이 과정에서 영국군 장교 클럽에서 일하던 유대인 소녀가 이르군의 총격에 맞는 일이 벌어지며 유대인 사회는 일제히 이르군과 레히, 나아가 수정시온주의 세력을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뒤이어 3월 2일, 예루살렘의 UN 및 적십자사 회의장에 찾아간 게오르그 브라운과 하말 하카람은 ‘하가나 및 팔마흐의 합법화 및 유대인 지구의 공식 치안 조직인정’을 내걸고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미국 대표가 중립을 지키는 가운데 중국 대표는 노골적으로 둘의 의견을 반대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계획이 엎어질 수도 있다는 긴장감이 도는 가운데, 소련 측 대표는 놀랍게도 먼저 마사다 측에 접촉을 제안했습니다.
소련 측 대표는 다름 아닌 소련의 원로 중 한 명인 레프 트로츠키의 맏딸인 지나이다 르보프나 브론시테인볼코바로, 소련의 견해를 대변하면서도 소련 내 트로츠키주의 세력의 입장 또한 대변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브론시테인볼코바는 아버지를 닮은 현란한 화술로써 마사다의 일원을 흥분시켜 이들이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는지, ‘어디까지 급진화될 수 있는지’를 보려 하였으나 큰 소득은 없었습니다. 브론시테인볼코바는 소련 내 트로츠키주의 세력이 지지하는 ‘4국 방안’, 즉 팔레스타인을 이집트 지역/트란스요르단 지역/페니키아 지역/이스라엘국으로 나누는 방안을 미리 알려 놓고는 돌아가 마사다의 제안이 전부 받아들여지도록 막후에서 조종하였습니다.
마침내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정부는 ‘마지못해’ 하가나와 팔마흐를 합법화하고 이르군과 레히를 이들과 함께 때려잡기 시작했습니다. 다비드 벤구리온과 마사다의 입지는 더욱 넓어졌으며, 영국의 분위기 또한 유대인 사회에 대해 온건하게 변화하였습니다. 영국군은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분쟁을 막는 일에 힘썼고, 이는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갈등이 줄어드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최후 유엔 총회에서 구성된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에 대한 아랍인들의 견해를 크게 바꿨습니다. 페니키아 출신의 미셸 아플라크를 중심으로 창당된 중도좌익 정당인 ‘아랍사회주의 부흥당 팔레스타인지부’는 세속적이고 진보적인 이미지로 팔레스타인 내 아랍 사회를 변신시키는 한편, 유엔 특별위원회를 환영하였습니다. 이들을 비밀리에 지원하기 시작한 중국과 중국의 동맹국 버마를 제외하고 유엔 측에서조차도 당황할 정도의 깜짝 변신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유대인을 공격하기보다도 가장 먼저 추축국에 협력했던 이슬람주의 군사 조직인 ‘연합성전군’의 잔재를 뽑아내는 데 힘썼습니다.
1-1. 만팔레스타인의 노동자도 단결하는가?
한편, 브론시테인볼코바를 통해 자신들이 팔레스타인, 특히 유대인에게 우호적이라는 의사를 밝힌 소련은 또 다른 계획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새로이 재창당 된 ‘이스라엘 공산당’, 즉 마키는 이미 유대파 공산당으로 유대인 자치기구인 대표회의에 다수의 의석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랍파와 합쳐지며 그 세가 더욱 커질 것임이 예측되었습니다. 특히 새로이 당주석으로 선임된 ‘토니 클리프’는 트로츠키주의자였지만 좀 더 민주사회주의자에 가깝게 우경화된 인물로서 꽤 의외의 선임이었습니다.
바르샤바 봉기의 참상을 겪은 요셉 미카엘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붉은 제국주의 국가’ 소련의 진의를 의심했지만, 정보를 파내면 파낼수록 꽤 의뭉스러운 결론이 나왔습니다. 바로 소련이 중동 지역에 동맹국을 만들려 하며, 친유대 정책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소련의 차기 지도자 후보군에 속하는 정보기관의 일인자 ‘라브렌티 베리야’가 이러한 움직임을 진두지휘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조종을 받는 공산주의 정당이 고스란히 다수당이 되거나 다른 계획을 꾸미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던 마사다는 이번에도 계획을 준비했습니다. 중국의 지원을 받는 바트당과 마키를 연계해 마키 지도부와 소련을 한 방 먹인다는 로텐베르크의 계획을 엘하난이 가짜뉴스를 만들어 퍼뜨렸습니다. 중국이 어리둥절해 하고, 미국이 무시하는 가운데 바트당은 ‘반시온주의 정당인 공산당과는 협력할 수 있다’라며 마키를 들들 볶았습니다. 소련의 지령도 없던 마키는 이 문제를 결국 유대인민평의회(유대인 임시정부)에 넘겼습니다.
한편, 애써 키워놓은 마키가 독자노선을 추구하려 하는 것이 보이자, 소련 내 친유대주의자인 라브렌티 베리야는 ‘합법적으로’ 나치 독일의 무기를 수리하고 생산할 수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찾아갔습니다. 미국의 금전 지원인 마셜 플랜의 부분적 수용까지도 인정하는 대가로 베리야와 체코슬로바키아 지도부는 엄청난 양의 무기공장을 세우고 수리하였습니다.
2. 평탄한 길과 가시밭길
마침내 1947년 6월 말, 세계 각국의 대표로 구성된 UN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의 위원들이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을 방문했습니다. 텔아비브, 예루살렘, 야파, 헤브론, 가자, 하이파 등을 방문하는 그들은 성대하게 준비된 환영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아랍인들에게 서도요. 자신들만의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바트당이 장악한 아랍고등위원회는 여성을 내세우고 세속주의적인 면을 부각해 UN 특별위원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동안 아랍인들을 투쟁과 추방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유대인 인민평의회에서는 대응책을 고심 중이었습니다. 그때, 패배를 인정하고 자신의 사조직을 해산하고 기성 유대인 조직에 합류한 이르군과 그 지도자 메나헴 베긴과는 달리, 아직 활동 중인 레히 측에서 아랍고등위원회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마사다의 일원이 다시 한번 모인 가운데, 상황은 묘하게 흘러갔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극단적인 해결책을 내었고, 스테인베르그는 내내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로서 벤구리온이 이 사태를 관망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써먹으려 하는 것은 마치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떠올리는 안 좋은 기억이었으며, 다른 유대인들이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의견을 내는 것도 그리 좋게만 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대로 여러분을 호위하던 하가나 조직원들은 아랍인을 적대하는 방안에 열성적으로 찬동하고, ‘기왕 악인이 될 거면 확실하게 하는 게 낫다’라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나아가 레히 측이 계획하던 습격 안과 마사다에서 언급된 대처법이 ‘거의 동일’하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자, 스테인베르그는 머리를 식힌다는 핑계로 자리를 나섰고 대화 내용을 불편하게 받아들이던 하카람 또한 그를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이때, 의외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2차대전 당시 유대인의 정보총책이었던 루벤 쉴로아가 마사다 측에 전화를 건 것이었습니다. 하카람과 스테인베르그가 부재한 가운데, 루벤 쉴로아는 바트당이 유대인 측에 접선하려 한다는 정보를 알려줍니다. 이 접선은 다름 아닌 공산당, 즉 마키 측에서 유대인 인민평의회에 주선한 것이었습니다. 바트당의 동기를 파악하려던 로텐베르크는 UN 특별위원 중 버마 연방의 대표인 ‘바 쉐’가 버마의 지도자 아웅 산의 오른팔이며 중화민국의 탕성즈 총통을 방문한 중국-버마 관계의 한 축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바트당을 중국이 전폭적으로 밀고 있으며 지지한다는 일종의 선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빠지려는 영국, 방관하는 듯한 미국, 도와주긴 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소련, 아랍인들을 지원하는 중국을 두고 마사다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한편, 잠시 산책을 하겠다고 나온 스테인베르그의 진짜 목적은 편지의 송수신이었습니다. 소련의 초대 법무인민위원으로써 하루가 멀다 하고 체카와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사법 싸움을 하던 그로써 이 정도 분란은 아주 익숙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스테인베르그가 아무 생각이 없는 가운데, 팔레스타인 땅에서 나고 자란데다 눈치도 빠르고 제 몸을 지킬 줄도 알았던 하카람은 유대인들의 경호 인력이 ‘유독’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딱히 하카람에게 자신들이 들켰다는 것을 상관하지 않는 듯했지만, 불편한 것은 불편한 것이었습니다.
하카람의 도움으로 유대인 경호 인력을 따돌린 스테인베르그는 놀랍게도 이 시대 최고의 과학자 중 한 명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시온주의 운동을 도와주었지만, 유대인만의 국가가 건국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아인슈타인과 미국의 유대인 지식인 커뮤니티는 유대인과 아랍인들이 손잡고 통일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르군과 레히의 조직과 활동이 파시스트 정당과 유사하다고 비판 중이었습니다. 시온주의의 지지자가 아닌 영토주의(팔레스타인 이외의 땅에 유대인 공동체를 건설) 운동의 주도자였던 스테인베르그는 그러한 통일국가안에도 냉소적이었지만, 아인슈타인의 편지는 마사다의 일원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통일국가안’이라는 모험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마사다는 루벤 쉴로아와의 통화에서 바트당과의 동맹을 인정하였습니다. 군사력과 재력과 인재들을 갖춘 유대인들은 독립국을 세울 수 있었지만, 그러한 ‘평탄한 길’ 대신에 앞날이 불투명한 ‘가시밭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평탄한 길 너머에 절벽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한편, 쉴로아는 마사다가 의심받고 있다는 사실 또한 솔직하게 말합니다. 주류 시온주의 운동에 초기부터 투신한 이가 한 명도 없는 마사다는 일부 시온주의자들에게 ‘시온주의를 운명이 아니라 선택으로써 받아들인’ 이들이라 인식될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는 ‘스테인베르그를 잘 지키라’라고 조언…. 아니, 경고했습니다.
이윽고 1947년 9월 3일,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 유대인 인민평의회, 그리고 ‘팔레스타인 고위위원회’로 이름이 바뀐 아랍고등위원회는 중도에서부터 극좌에 이르는 유대인과 아랍인의 협조를 받아 가며 팔레스타인 해결방안을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1947년 11월 29일, UN 총회 결의안 제181호에서 ‘3개 단체가 협의한 경계선을 지역구분으로 하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연합국가를 건설할 것이며, 국명은 가칭 가나안으로 하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라는 명칭도 사용할 수 있게 함’이라는 내용이 발표되었습니다. 반대하는 이들이 분명 적지 않았지만, 어쩌면 최선이라 할 수 있는 방안이 선택된 것입니다.
바트당과 팔레스타인 내 아랍인 사회는 이윽고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정체성을 선전하며 기존 연합성전군의 이슬람 기반 범아랍주의를 부정하고 새로운 민족정체성을 건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대인들 또한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찬동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터질 것을 예측하기라도 한 것인지, 미국 국무부와 국무장관 조지 마셜은 중동 지역에 무기 금수조치를 진행하고 이를 UN 안보리의 금수조치로까지 확대했습니다.
더군다나 주변국의 반응도 심상치 않았습니다. 소련의 차기 지도자 후보 니콜라이 불가닌과 트로츠키주의 세력으로부터 ‘4국 방안’을 듣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이들은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들이 손을 잡고 통일국가를 건설한다는 상상도 못 한 결말에 크게 분노했습니다. 요르단강 서안을 합병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던 트란스요르단 국왕 압둘라 1세는 격노하였으며, 연합성전군의 잔당이 이에 동조하였습니다. 자신들이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정체성에 속하지 않는다고 믿는 이들 또한 반발하였습니다. 가자를 비롯해 시나이반도와 연결된 팔레스타인 일부를 합병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이집트 왕국 또한 분노하였고, 나사렛 지방의 기독교인 다수지역을 점유하려던 기독교도-드루즈교도-알라위파 국가 페니키아도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이들은 무력으로라도 자신들의 영토적 야심을 채우기 위해 군대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이들의 조종으로 아덴, 알레포,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인 다수 거주지에서 반유대주의 폭동이 일어나 여러 유대인이 사망하거나 피란민이 되었습니다.
이제 팔레스타인, 아니 ‘가나안’을 수호할 전쟁이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2-1~2 폭풍전야
연합성전군의 괴멸 이후 세워진 아랍 연맹은 사상누각이었습니다. 아라비아반도를 붉은 군대의 전차부대가 휩쓸었던 것을 이들은 잊지 않았고, 그렇기에 함부로 범아랍주의니, 이슬람주의니 하는 타령을 하기도 어려웠던 아랍 국가의 지도부는 전쟁이 눈앞에 다가왔음에도 제대로 협력도 하지 못했습니다. 카이로에서 아랍 연맹의 회의가 열렸지만, 회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했습니다.
더군다나 회의에 깽판을 놓기 위해 파견된 로텐베르크와 엘하난은 이집트 군부 내의 사회주의자 ‘할리드 모히딘’과 접선, 정보를 파악하면서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집트군은 장교가 부하를 시종처럼 부리며 아편을 피우고, 뇌물을 받거나 도박을 했습니다. 군대라고는 보기 힘든 도적떼 집단에 가까웠죠. ‘이런 군대로 어떻게 전쟁한다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때쯤, 로텐베르크는 도박 수를 던졌습니다.
바로 나치 독일의 무장친위대 장교로 위장하여 연합성전군의 잔당에게 접근, 그들에게 가짜뉴스를 뿌려 ‘낚시’를 시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중부유럽 출신에 나치의 수용소 생활을 겪었던 로텐베르크에게 있어서 그러한 위장은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손쉽게 성전군 잔당에게 접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밝혀진 것은 과거 연합성전군의 지도자였던 아민 알후세이니의 먼 친척인 압드 알카디르 알후세이니와 아민 알후세이니의 오른팔이었던 하산 살라마가 이끄는 성전군 잔당은 황당하게도 수십 명의 잔당에 불과하였으며, 알후세이니 가문의 자금력으로 ‘막 부활’하려던 집단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아직 자신들의 미래가 불투명한 시점에서 히틀러를 만난 경험이 있던 살라마는 로텐베르크에게 제대로 낚여버렸고, 엘하난이 적어준 연설문을 달달 외어 읊는 로텐베르크에게 알후세이니 또한 깜빡 속고 말았습니다.
엘하난과 로텐베르크가 아랍사회주의 바트당 이집트 지부에 공작을 가해 수정마르크스주의자를 지역당의 당수반으로 올리는 사이, 이집트 내에서 좌익세력의 기세가 점점 커졌습니다. 이들은 또한 페니키아 측에 ‘거짓된 페니키아를 타도하고 수니 레반트국을 건설하자’라는 가짜뉴스를 뿌리고, 성전군 잔당을 현혹해 트란스요르단으로 보냈습니다.
트란스요르단은 가뜩이나 혼란에 빠진 페니키아에 대비해 경계하고 있었고, 성전군을 이용하는 대신 토사구팽을 할 생각으로 이미 접선을 한 뒤였습니다. 그러나 성전군은 로텐베르크에게 현혹되어 ‘전투적인 대중 파시즘’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곳곳에서 농성과 가두시위를 벌입니다. 자칫하면 연합군이 자신의 나라에 쳐들어오게 생긴 압둘라 국왕은 이미 준비해놓았던 토사구팽용 체포팀을 움직여 알후세이니와 살라마를 사살하고, 잔당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로 보내버립니다. 하지만 가짜뉴스 살포 사건으로 긴장하고 있던 페니키아는 ‘이미 접선한 게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성전군을 신속히 체포했냐’라며 트란스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을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트란스요르단-바디아-페니키아의 사이에 감정의 골이 생기는 시점이었습니다.
한편 비슷한 시기, 게오르그 브라운과 카말 하카람은 여러 유대인 대표들과 함께 에티오피아로 향했습니다. UN 안보리의 금수조치로 그 어떤 국가도 중동에 무기를 판매하려 하지 않는 가운데,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무기 판매를 타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 외무장관은 공산당원도, 사회주의자도 아닌 자였고 이 거래는 ‘순수한 상업적 목적’이라고 여러 번 강변하였습니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단 측은 페니키아의 무기가 실렸다는 화물선의 위치를 매우 상세하게 유대인 대표단 측에 알려주었고, 엄청난 양의 무기를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심지어 나치 독일의 최신예 전투기였던 Bf 109K(S-99B)를 90대나 판매하겠다는 엄청난 조항까지 거래에 포함되어 있었죠.
하카람이 조사해본 결과 그 의도는 명약관화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원 사이에 숨은 소련의 정보기관 요원에 따르면, 이것은 ‘선물’이었습니다. 독립된 가나안 연방이 친소국가로써 남기를 바라는 소련, 특히 라브렌티 베리야가 주선한 거래였던 것입니다. 브라운과 하카람은 논의를 진행한 끝에, 하카람이 마르크스-시온주의 정당인 통일노동당의 당원증을 요원에게 보여주며 ‘같은 마르크스주의자 동지들끼리 협력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슬쩍 귀띔하였습니다.
이윽고 무기를 가득 실은 첫 화물선이 출발하는 가운데, 브라운과 하카람은 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받아들인 이상 대가가 있을 것이라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2-3~4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은 가나안 연방의 출범을 앞두고 산적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첫 번째는 토지개혁이었습니다. 유대인 피란민이 유럽 각지에서 몰려오고, 수니파 아랍인들과 외국계 아랍인들이 가나안 땅을 떠나는 가운데 유대인들의 토지 소유 비율은 가나안 전 국토의 10%에 불과했습니다.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은 두 민족의 토지 소유 비율이 50:50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해결책에 대해 의견이 갈렸습니다. 좌파 일색인 두 민족의 정치권에서는 집단농장인 키부츠를 확대하자던지, 토지은행이 토지를 판매하는 게 아닌 ‘경작권’만 판매한다든지 하는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주장하였으며, 토지개혁안을 돕기 위해 파견된 엘하난 또한 결국 좌익 토지개혁안을 제안하였습니다. 네게브 사막을 비롯한 황무지를 개척하는 사람이나 집단이 해당 토지의 권리를 10년 동안 점유할 수 있으며, 농지는 농민이나 협동조합, 집단농장만이 보유할 수 있고, 토지 소유면적은 1만 5천 평으로 제한하며 토지 매입의 대금 지급은 10년 만기의 국공채로 이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약 8년에 걸쳐 토지 소유 비율이 5:5가 될 것으로 예측된 가운데 추가적인 조항이 통과되었습니다. 소작세를 30%로 제한하는 방안, 국공채의 만기를 30년으로 늘리는 방안, 토지은행이 토지의 소유권이 아닌 경작권만을 판매하는 방안까지 전부 적용된 결과였습니다. 유대민족기금과 팔레스타인 민족은행을 공동관리할 ‘가나안 연방기금’은 토지 문제에 있어서는 소련의 국가계획위원회에 비견될 기관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너무 공산주의 정책에 가까운 게 아니냐고 우려하였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은 주로 이 방안을 환영하였습니다.
또한 전쟁이 눈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군사 조직의 개편 및 확충 또한 큰 문제였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무기를 보내주기로 한 가운데, 부족한 것은 인력이었습니다. 유대인들로 꾸릴 수 있는 무장 조직은 차고 넘쳤지만,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이 함께 이끌어갈 가나안 연방에서 유대인들만 군 복무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통일노동당 측은 정치장교 파견을, 노동당 측은 수니파 팔레스타인인을 제외한 복무를, 일부 세력은 일선 전투 병력에서 배제 등을 주장했습니다.
유대인 병사들과 장교들의 의견은 일관되었습니다. ‘충성심이 증명되면 복무를 시키지 못할 것도 없다.’였습니다. 하카람은 정치장교 파견을 동의하고, 반대로 요셉 미카엘은 어떻게든 두 민족을 통합한 군대를 운영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하일레 미카엘이 하가나 총참모장 이스라엘 갈릴리와 협력하여 절충안을 제시했습니다. 정치장교는 정훈위원으로 대체하고, 이 정훈위원은 일부 부대에만 파견할 것이며 정훈위원의 목적은 ‘특별정훈교육안’의 교육 및 적용을 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민족이 힘을 합쳐 싸우는 것을 당연하게 느꼈던 요셉 미카엘은 ‘감시받는 군대’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논의는 계속되어 최종적인 결론이 나왔습니다. 모든 민족은 보직의 구별 없이 부대를 편성하되, 중대 단위에서 수니파 팔레스타인인 부대를 편성하고 정훈위원을 파견한다. 이 위원의 파견 기간 및 위원을 파견할 ‘공보정훈국’의 활동 기한은 무조건 5년으로 한정하며 유사한 기관을 창설하려면 입법부 의결과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 비유대인 장교훈련 코스를 신설한다 등이 결론이었습니다.
장교조직을 독점하고 있던 통일노동당에서는 장군이나 지휘관 등이 당적이 있는 ‘혁명군사조직’으로써의 가나안 군사 조직의 혁명적 성격이 퇴색되는 것을 우려하기는 하였지만, 전쟁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인지하였기에 받아들입니다. 일부 기독교도나 알라위파 교도들은 페니키아와의 전쟁에 자신들이 투입될 것을 우려하였지만 대체로 동의하였으며, 수니파 팔레스타인인들은 떠나갈 이들은 빨리 떠나가고 적응할 이들은 빨리 적응하는 과도기에 접어듭니다. 이윽고 하가나와 팔마흐에 이어 팔레스타인인 부대인 ‘헤레브’와 친가나안 베두인 부대인 ‘팔하이브’가 창설되고 체코슬로바키아제 무기로 무장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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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국가 평판 :2 (약간 낮음)
종교주의/수정주의 세력의 영향력 :1/0 (낮음, 해당없음)
아랍인 저항 강도 :4 (약간 높음)
미국과의 관계 :3 (보통)
소련과의 관계 :4 (약간 높음)
중국과의 관계 :2 (약간 낮음)
여러분의 목표는 한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을 건국하되, 최종적으로는 약속의 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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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하십니다...
혹시 내일 이벤트 할 수도 있으니 말씀드리자면, 오후에는 폰 자체를 못봐서 응답 안되지만 저녁 7시 조금 넘어서부터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힘드시겠네요...
갑자기 생각난 드립 하나 : 작성자는 이미 글을 다 쓰고도 남았지만, 오후 12시 1분에 올린 다음, 오후에 올린다고 했죠? 라고 할 예정이다(?)
@dear0904 ???:(뜨끔)
양이 되게 많네요(...) 총선까지는 적었습니다.
완료..
수고하셨습니다.
2편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