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의 노래
시편 126:1~6
오늘 저녁 생각하게 되는 시편 126편은 말하자면 해방의 노래입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시를 누가 썼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이 시인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갔다가 파사 왕 고레스 때에 해방을 얻어서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읽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하였습니다. 바벨론에서 70년이란 긴 세월 동안 포로생활을 했으니, 말하자면 두 세대가 지나게 되었습니다.
대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마음 가운데 이제는 거의 포기상태에 있었으리라고 짐작이 됩니다. “우리는 이 바벨론에서 이렇게 한 세상을 살다가 가는 것이다”고 체념하는 사람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기대하지도 못한 때 이스라엘의 해방령이 내리게 되고 고국에 돌아가라 하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기 어떤 사형수가 감방 안에서 사형집행 날짜만 기다리고 체념 상태에 있는데 감방문을 열면서 “당신은 무죄 판결이 났으니 이 감방에서 나가 자유롭게 사시오.” 하면서 감방문을 활짝 열고 고랑을 풀어 준다면 사실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사실일 수가 있나, 너무 기뻐서, 너무 뜻밖의 일이어서 이게 꿈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가득 찼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의 고역이 끝나고 해방이 되던 때의 감격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의미로 볼 때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 민족에게도 이와 같은 경험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40대 이하의 청년들은 그저 역사책에서만 배운 것뿐이지만 50대 이상의 분들은 실제로 1945년 8월 15일 정오, 한국이 일제의 속박 속에서 해방되던 순간의 감격을 체험하신 분들이십니다.
우리 민족의 형편으로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말을 빼앗았습니다. 우리의 성을 갈았습니다. 말로는 내선일체(內鮮一體), 즉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고 하면서 결국은 우리를 식민지의 노예로 삼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좋은 것, 쌀이든 과일이든 생선이든 모두 일본으로 가져갔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그저 좋은 것은 일본 사람이 쓰는 것으로 으레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많은 사람을 징발해서 가장 위험하고 힘든 일을 일본 땅에서 시켰습니다. 지금 일본에 80만이 넘는 한국교포가 살고 있습니다만 대부분이 일제 시대에 일본으로 징발되어 갔던 우리 동포들의 후손입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우리 민족을 종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연합군의 승리를 가져오게 하셔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 우리는 완전히 해방을 맞게 된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우리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가득 찼었습니다. 그저 만나는 사람마다 반가워하며 감격하며 감사했었습니다.
너무 감격하니까 도둑놈도 없었습니다. 도둑놈도 감격해서 도둑질할 생각이 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무한한 감격과 감사는 자연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까 하는 보답의 지성으로 사람들의 마음마다 채워진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의 심정은 우리가 이렇게 큰 은혜를 받았으니 어떻게 하든지 이 은혜를 보답하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섬기고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그런 심정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아마 그때의 심정으로는 교회를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 무엇인가 봉사하고 희생할 일이 있다면 누구나 서슴지 않고 참여했을 것입니다.
그때는 어른, 아이, 학생, 선생,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따로 없이 그저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이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이런 감사와 감격의 지성으로 마음이 순화되어서 누구든지 바른 마음을 가지고 이제는 우리가 해방되었으니 어떻게 하든지 나라를 바로 세워서 우리 자손 만대가 복을 누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자”는 그런 참된 감사의 생각, 참된 봉사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사실 그때의 마음, 그때의 감사, 그때의 감격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우리 나라가 오늘날보다 얼마나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솔직히 말해서 지난 50년 동안에 우리 민족이 해방의 감격을 다 잊어버리고 말지 않았나 하는 염려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갔을 때 비파가 버드나무에 걸려 있었습니다. 저희에게는 기쁨이 없었고 슬픔과 탄식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포로는 되돌려졌고, 그들의 비파는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제 비파는 아름다운 곡을 타게 되었습니다.
여기 ‘시온의 포로를 돌리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구원을 의미합니다. 시온의 백성이 포로가 되어 간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인데 죄악으로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포로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제 형벌의 기간이 끝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포로된 이스라엘이 시온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고레스가 나라의 사정으로 이스라엘 포로들에게 자유를 선포했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로가 되게 하신 것은 풀을 태워 버리기 위해서 불에 던지는 것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금을 정금으로 만들기 위해서 용광로에 넣는 과정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백성, 택함을 입은 사람이 혹시 잘못된 길로 나아가면 돌아올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치십니다. 회개할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십니다. 생각하면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은 거룩한 산, 하나님의 전이 있는 시온의 포로를 돌리신 것이라고 불려졌습니다. 왜냐 하면 그들의 거룩한 관심의 회복과 이스라엘의 종교적 행사의 활기를 되찾게 된 것으로, 포로에서 귀환한 것이 얻은 가장 큰 소득이었기 때문입니다.
70년간이란 세월을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어려움 속에서 살다가 이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이 생기게 되었는지 저희들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꿈꾸는 것같이 생각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처럼 그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은 마치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짐 받은 것 같고, 고통 속에서 평안으로 인도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놀라움이 그들을 황홀하게 하였으며 기쁨과 감격을 표현하는 데 체면의 한계를 지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처럼 기뻐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이적을 행했었는가를 모두에게 알렸습니다. 저희의 입에는 새 노래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도하는 일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영적인 면을 생각하면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죄의 포로가 되어 어두움의 권세 아래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의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정치적으로 해방된 것도 귀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영혼이 죄악의 속박에서부터 해방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입니까?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내가 전에는 죽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살아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봅니다. 내가 전에는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랑합니다. 내가 전에는 어둡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밝게 삽니다. 이것은 나 때문이 아니고, 내 노력의 결과도 아니고 온전히 주님의 은혜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보십시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습니다. 당신도 예수님을 맞으면 나와 같은 기쁨과 행복, 만족과 감사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에 기쁨이 있고, 하는 일에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1. 주의 말씀 받은 그 날 기쁘고 복되도다
이 기쁜 맘 못 이겨서 온 세계에 전하노라
(후렴)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늘 깨어서 기도하고 늘 기쁘게 살아가리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아멘
2. 이 좋은 날 내 천한 몸 새 사람이 되었으니
이 몸과 맘 다 바쳐서 영광의 주 늘 섬기리
3. 이 작정한 그 날부터 평안한 맘 늘 있어서
이 복된 말 전함으로 내 할 본분 삼았도다
여러분, 우리가 이와 같은 감격과 기쁨으로 우리의 변화된 사실을 간증할 때 오늘 본문에 있는 대로 “그들은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 백성을 위해서 다른 신들이 우리를 위해 할 수 없는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하게 됩니다. 열방은 이스라엘의 환난을 보았고 환난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서 예수를 알기 전에는 어두움의 권세 밑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다가, 예수를 믿게 된 후 놀라운 변화를 하게 되고, 삶의 의미를 찾게 되고, 빛 가운데 걸어가며 많은 사람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이런 일로 인해서 예수께로 인도된 분이 많이 계십니다.
저 사람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가 있을까?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 아니요, 우리가 섬기는 신의 힘으로 되는 것 아닌가. 기독교에는 무슨 힘이 있다. 거기에는 대사가 행해진다.” 하면서 교회에 나오시게 되고 예수를 믿으신 분이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대사를 행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의 삶에도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시인은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 다음에 본문 3, 4절에 있는 바와 같은 간절한 기도를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여러분, 이것은 무슨 기도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대개 짐작하실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잡혀가서 70년 동안 종노릇한 다음에 바벨론이 파사 나라에게 멸망을 당하자, 파사 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주장하면서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되어 있던 것을 마음대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지으라고 조서를 내렸습니다.
조서를 내릴 뿐만 아니라 일찍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 왔던 모든 기명을 도로 내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가서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지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감격한 가운데 먼저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이 약 사천오백 명, 그리고 노비까지 합쳐서 약 오만 명이 제 일진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마 이 시를 쓴 사람은 제일 먼저 돌아온 사람 중에 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약 오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폐허된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했고 그 동안 황무지였던 전답의 개척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들은 이와 같은 가나안 복지 시온성에 들어왔지만 지금도 바벨론 하수가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포로, 자기의 동포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시온에 돌아와서 감격의 기쁨을 누리는 자기들로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동료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해방을 감사하면서 그 은혜에 감격해서 노래하고 동시에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아직 바벨론에는 포로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마치 남방의 시내처럼 돌려보내 주세요.”
남방의 시내가 무슨 말인가 하면, 저 유대나라 남방은 물이 많지 못한 곳입니다. 그러나 저 높은 산에서 눈이 녹게 되고, 비가 오게 되면 갑자기 홍수가 되어서 물이 많이 내려가는 그런 곳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직도 바벨론 하수가에서 돌아오지 못한 하수가 막 흘러 내려가는 것처럼, 수천 수만의 내 동료가 한꺼번에 내 조국으로 돌아오게 해 주세요. 이런 길을 빨리 열어 주세요.” 이렇게 아직도 채 돌아오지 못한 동료들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우리 나라가 50년 전 해방을 받아 감격의 날을 가졌지만 얼마 안 있어 38도선을 분기점으로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 남한에서는 자유를 누리고 있으나 같은 내 동포 중 북한에 거하는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철의 장막 안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따금 북한의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볼 때마다 똑같은 한국말을 쓰고 얼굴도 같이 생긴 내 동포가 지리적으로는 제일 가까이 있으면서 세상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되었고, 전혀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에 있는 것을 생각할 때 가슴 아픔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저 북한 땅의 해방은 언제 올 것인가? 하나님 외에 세상에서 누구도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이스라엘의 시인처럼 아직도 북한에서 고생하는 우리 동포들의 해방을 주실 것을 오직 천지의 대 주재가 되시는 공의의 하나님께 기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는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우리 남한에도 아직 죄의 노예가 되어 포로생활하며 시달리는 심령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온 지 100년이 넘은 이때, 이 죄의 포로된 심령들을 위해서 저희들의 심령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찬양할 일이 넘친다고 해도 여전히 기도할 일은 남아 있는 것을 본문이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되고 번영 중에 있게 될 때에 우리는 고난과 속박 중에 있는 우리의 형제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미 돌아온 형제들과 함께 연합하여 포로 중에 있는 자들이 오는 것은 남방의 마르고 건조한 나라들의 물줄기가 양편으로 흐르는 것처럼 환영될 것입니다. 목마른 영혼에게 냉수가 주어지는 것처럼, 이 좋은 소식은 먼 나라에서부터 오는 것 같을 것입니다.
잠언 25장 25절에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 하였습니다. 믿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기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모르고 지내던 불쌍한 심령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구원받았다는 소식처럼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산다 하는 소식을 들은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5, 6절을 읽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해방 받은 사람들의 신앙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미 말씀드린 바대로 포로 되어 갔던 이스라엘 백성 중에 몇 만명이 먼저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이방나라에서는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방해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고레스 왕이 죽은 다음에 아가사스트 왕이 새로 임금이 되었는데 그 왕에게 무고를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옛날부터 아주 패역한 도성이요 유대인들로 말하면 언제나 반대편에 서고 어려운 일만 일으키는 그런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을 이제 와서 성전을 짓게 하고 예루살렘을 다시 쌓게 하는 것을 허락하게 되면 필경 이 사람들이 왕을 배반하고, 큰 역적이 될 것이니 이것을 그냥 두면 안되겠습니다.”
그러니 이와 같은 무고를 들은 새 왕은 자기의 조상들이 어떻게 했는가는 알지도 못하고 “그 놈들이 그래?” 하고는 곧 일을 중단시키는 명령이 파사 왕으로부터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기쁨과 감격, 그리고 큰 기대 속에서 성전의 지대를 놓고 굉장한 기공식과 정초식을 거행했지만 그만 성전 건축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무려 15년 동안이나 중단되었습니다.
사실 이처럼 원수가 많은데 전답을 찾아 개척하는 일이나 집을 다시 지어야 하는 일이 먼 나라에서 오랫동안 포로 생활하다가 돌아온 사람들에게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눈물로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울면서 들로 나가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포로에서 석방되어 돌아올 때는 기쁨으로 돌아왔지만 그 후 20년은 눈물의 역사요, 그야말로 탄식의 역사요, 환난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해방이 되어 고국에 돌아온 민족은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울면서도 씨를 뿌리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하는 확실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돌아와서 이렇게 고생을 하지만 이 모든 고생은 씨를 뿌리는 것 같아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면 반드시 이 씨가 장성해서 열매를 맺고 수확을 해서 단을 가지고 돌아올 때가 있을 것이라는 장래에 대한 굳은 신념과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우주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해방시켜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아무리 원수가 많고 환경이 어지럽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이 고생을 꾸준히 해나가면 반드시 장래에 큰 수확이 있습니다. 지금 흘리는 눈물은 다 변해서 기쁨이 될 것이고 단을 가지고 돌아오는 감격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념이 저희에게 있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형편을 보아도 꼭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와 사망에서 건짐을 받은 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생각지 않았던 어려움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실망을 주고 낙심시킨 사건들이 많습니다. “내가 뭐 이럴 것 있나,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이 이렇게까지 힘이 드나?” 하는 의심도 생기게 됩니다. 사방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번영을 방해한 것 같이 우리의 주위에도 우리의 발전과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와 조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신념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믿습니까?
갈라디아서 6장 9절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이와 같은 신념을 가지고 계속 의의 씨를 뿌리고 사랑의 씨를 뿌려 생명과 사랑의 열매를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시 126: 1-6)
인간 역사에 나타난 수많은 사건들은 어느 것도 우연히 된 일은 없습니다.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심오한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 큰 분수령이 된 8.15 광복절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1945년 8월 15일, 2차 대전의 전범자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제국주의의 종말을 고함으로써 우리나라에 해방을 안겨 주었습니다. 온 세계를 살육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2차 대전은 세계 각국에서 1천만 명의 군대가 동원되고 2천9백여 일 동안 1천7백만 명의 시체를 남기고 끝이 났습니다. 본문 성경을 기록한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고 하였습니다.
1.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役事)
성경은 인류의 역사나 만물의 기원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창 1:1, 롬 11:36). 그렇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이 개입하면서 하나님의 역사 경영을 방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강력하신 힘이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1) 인간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역사가 걸출한 영웅이나 제왕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처럼 생각하곤 합니다. 때로는 강한 자가 나와서 나라를 세우고 힘으로 다스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다 몰락하고 무너져 버렸습니다(단 2:31-35). 그것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이상적인 나라를 추구하고 있습니다(마 6:33).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인류를 한 족속으로 만드시고 각 나라의 연대와 국경을 정해 주셨습니다(행 17:26).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세력들이 무너지고 모든 사람이 천부의 자유와 권리를 향유하는 쪽으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세계 2차 대전이후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신생 독립국가가 생겨난 것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한 것입니다.
2) 선민의 역사에 나타난 구속사적 경륜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천하만민 가운데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신 7:6-8). 그렇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는 간단없는 외적의 침략과 지배로 수난을 겪었습니다. 그때 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그들을 구해 내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에 의하여 노예 생활을 하던 때에는 큰 재앙으로 그곳을 심판하고 자기 백성을 해방시켜 주었습니다(출 12:29-36).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에서 왕국을 수립한 후에도 하나님을 배반하였다가 멸망하였습니다. 70년간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이 고레스 왕의 칙령에 의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기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고 한 말씀은 그때의 감격을 노래한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운동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시고 그들에게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창 1:26-28). 그러나 아담이 마귀와 결탁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영원한 멸망에 이르고 말았습니다(창 3:1-6). 이에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을 멸망에서 구원하고자 특단의 방법을 강구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셔서 죄와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고 거기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창 3:15). 그 계획대로 예수님이 처녀의 몸을 빌어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사 7:14). 이것이야 말로 역사에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는 큰 사건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예수님의 오심을 예고하면서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하였습니다(마 1:23).
2. 8.15 광복을 통한 하나님의 경륜
근래에 진보 성향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해방 전후의 역사를 이념적인 시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8.15 광복은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 드러난 것입니다.
1) 일제 강점기와 기독교
올해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로 합병된 지 백년이 되는 해입니다. 1910년 경술년에 대한제국은 문을 닫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채 36년간 우리나라의 역사는 종식되었습니다. 정치,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면 세습적인 봉건왕조가 한계에 이르렀고,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대처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정신사적인 면에서 볼 때는 수천 년을 이어온 샤마니즘 문화와 삼국시대 이후로 민족정신이 되어온 불교의 전통과 유교적 가치관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전환기적인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리게 하였습니다. 최초의 선교사 토마스(J. Thomas)의 순교이후 1885년부터 정식 선교사가 들어왔고 1890년대부터 교회가 세워지는 등 본격적인 선교활동이 전개되었습니다.
2) 민주정부의 수립은 하나님의 축복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우리 민족은 꿈같은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1948년 민주정부가 수립되기까지 정치적인 혼란과 사회적인 불안 속에 수없이 많은 위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같은 민족끼리의 이념적 대립과 갈등은 무자비한 테러와 폭력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민족상잔의 전쟁을 불러오고 말았습니다. 그때 만약 무신론적 공산주의자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그들 중심의 정부를 수립하였다면 이 땅에 민주주의도 자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세습적인 공산체제하에서 겪고 있는 북한 동포들의 불행한 현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적인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우고 국가의 기틀을 다지게 된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3) 한국의 현대사와 기독교
온갖 미신과 이교풍토의 배타적인 토양에다 복음의 씨를 뿌리고 가꾸어 기독교적인 문화를 이루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초기의 선교사들은 말할 수 없는 박해 속에서도 열심히 전도하며 성경중심의 교육을 시도하였습니다. 평양이나 서울 같은 대도시를 비롯하여 중소도시와 농촌에까지 기독교 계통의 학교를 세우고 이 땅에 신식교육과 정신문화를 주도하였습니다. 전통적인 봉건사회의 폐습인 신분과 남녀의 차별, 축첩, 도박, 술, 담배와 같은 퇴폐적인 문화를 추방시켰습니다. 기독교 청년(YMCA)운동을 중심으로 사회 전반의 개혁과 계몽활동이 국민의 의식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기미년 3.1운동과 같은 독립정신을 심어 주었고 해방 후에는 건국세력과 나라의 기초를 다지게 하였습니다.
3. 기쁨의 열매를 거두게 하는 일입니다.
본문 말씀 5-6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땅에 뿌려진 복음의 씨는 엄청난 축복의 열매를 거두고 있습니다.
1)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해방된 일을 두고 이웃의 나라들은 하나님께서 큰일을 행하셨다고 말했습니다(2절). 하나님의 백성은 이 일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였습니다(3절). 오늘날 우리도 조국의 발전과 번영에 대하여 꿈같은 하나님의 축복인줄 알고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조선시대와 같은 세습 왕조가 계속되었다든지, 일제 강점기와 같은 식민지 아래서 신음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8.15 해방 후 남북한이 모두 다 소련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 버렸다거나, 6.25전쟁으로 완전히 공산화 되어 버렸더라면 지금은 북한과 같은 비참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불과 반세기 남짓 짧은 기간에 엄청난 격동기를 거치면서도 이처럼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고 세계 10위권의 경제와 문명의 대국으로 발전한 것은 꿈같은 축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2) 교회의 부흥과 선교의 역량을 이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에는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을 겨자씨와 누룩으로 비유하였습니다(마13:31-33). 전자는 매우 작은 씨앗이 큰 나무로 자라게 되는 양적 성장을 뜻하고, 후자는 적은 량의 누룩이 가루 서 말의 반죽을 부풀게 하는 것 같은 질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 땅위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온 후 일백 여년의 짧은 기간에 괄목할만한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신자의 수적인 증가와 더불어 교회의 대형화 역시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발전하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선교적 열정은 민족 복음화와 더불어 세계 선교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초기의 선교사들이 교회의 설립과 함께 학교를 세우고 신식교육을 주도함으로써 수많은 크리스천 인재를 양성하여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세계 도처를 누비면서 그리스도의 역량을 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눈물을 흘리며 뿌린 씨의 열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2:2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 오랜 시간과 많은 희생이 따를 뿐입니다. 백 년 전 나라를 잃은 민족의 한을 품고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선각자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자주 독립국가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벽안의 서양 선교사들이 이름도 모르는 우리나라에 와서 불쌍한 영혼들을 위하여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주었기에 이처럼 선교역사의 신기원을 이룩하였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자가 거두는 기쁨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과실을 우리 민족과 세계인이 나누어 먹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