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베이너스 건국일기. ---> 당근과 채찍 [2]
"꺄아아아아악!!"
왠 비명 소리지?! 갑작스런 비명소리에, 선잠에서 깬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적의 기습인가?! 에? 저건... 베게?
퍽!
그 순간 난 깨달았다. 베게야말로 일생일대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크윽.. 목, 목, 목이...
"당장 나가욧!!"
퍽!!
이번에는 이불이 날 덮쳐왔다. 목에 이상증후가 느껴져 별 수 없이 가만히 서 있어야 했던 나는, 그 이불에서 느껴지는 이상하리만치의 무게감을 느끼고는 천막을 벗어나야 했다.
쿠당..!!
푸른 하늘이 눈 앞에 보인다. 그리고 무슨 일인가 싶어 호기심에 가득 차 있는 듯한 병사와 그 병사와 재밌게 이야기를 나누던 듯한 포로들의 모습도, 기사들의 모습도 언뜻 보이지만, 지금의 난 그들의 그런 모습에 신경쓸 처지가 아니었다.
"왜 내가 여기 있죠? 무슨 짓을 한 거예요?!"
크윽. 이런 상투적인 전개가..!! 급히 그 전개를 멈추기 위해서 난 진실을 밝혀야 했다. 만약 이 일이 그 두 사람의.. 두 명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이, 이봐. 그건 네가..."
"시끄러웟!!"
찔끔..
.... 쳇, 내가 저 여자에게 쫄았단 말인가? 젠장.. 그러고 보니 잘못은 지가 해놓고, 나한테 난리를 치는군. 아아, 젠장...
"만약 지금 잘못했다고 느낀다면!!"
주변의 기사와 병사, 포로들이 오옷! 하고 시선을 집중했고, 나 역시도 그녀가 어떤 말을 할 지 궁금했기에 그녀의 다음 말에 이목을 집중했다.
"내일 나랑 다시 한번 대련해욧!"
.....하아. 뭔가 엄청나게 허망해..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말의 말발굽소리가 그 산길을 타고 들려왔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색의 그리 화려하지 않은 여행용 마차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길은 보통 여행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산길이었기에, 본래 마차가 오가기 좋은 길이 아니었지만 생긴지 꽤 오래되었기에 요즘은 꽤 평탄해져 있는 길이었다.
마부석에는 역시나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누더기를 차려입고 나른한 얼굴로 말이 산길을 벗어나지 않게끔 이끄는, 남루한 밀짚모자를 쓴 마부가 앉아 있었다. 길게 기른 수염이 인상적이었지만, 온 몸에 때가 탄 그 모습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세월의 연륜을 한껏 깎아내리고 있었다.
완벽했다. 마부의 모습으로 보기에는, 한낱 마부의 모습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완벽한, 보는 사람마다 '저 사람은 마부다', '마 가 아니라면 실업자(?)다'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모습을 지닌 사람이었다.
하지만 너무 완벽했기에 그는 어색해보였다. 그런 완벽한 모습에서도 전혀 한 점도 흔들리지 않는 그 완벽한 모습이 도리어 어색함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 마차가 곧 지나가게 될 산길에 주위에 숨어 있는 오크들은 그 점을 본능적으로나마 느끼고 있었다. 비록 이성보다는 파괴적인 본성이 앞선다고 알려져 있는, 납작한 돼지 코에 돼지의 눈을 붙인 듯한 가느다란 눈에 멧돼지처럼 아랫 송곳니가 위로 솟아 있어 그야말로 작달막한 난쟁이에게 돼지의 머리를 붙여놓은 듯한 오크들이었지만, 그 점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 마부는 완벽한 마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곧 마차가 그들이 서있던 길을 지나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달려들었어야 했지만, 그들은 너무나도 완벽한(?) 그 마부의 모습에 왠지 모를 한기를 느끼며 망설였고, 곧 그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버렸다.
'달려들자'는 강경파와 '그냥 보내자'는 온건파로.
서로 취익취익 거리면서 뭔지모를 대화를 빙자한 취익하는 거친 숨소리가 섞인 난투극을 벌이던 그들은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지나갔다는 사실을 깨닫고 싸움을 멈추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쫓아 갈 수는 있지만, 뒤에서 또 다른 마차가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오크들은 마차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한편, 너무나도 완벽한 마부가 끌어서 오크들이 덤벼들지 못했던 그 마차 안에서 한 여인의 한숨 섞인 투정이 흘러나왔다.
"쳇, 저놈의 오크들이 왜 안 덤벼드는 거야? 안 그래도 스트레스 해소나 해볼까 했더니만."
"그럼 안 된다니까요! 애가 그런 것만보고 자랐다가, 인격 형성에 심각한 문제라도 끼치면 어쩌려는 거예요?!"
또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냘픈 그녀의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의 말에 담긴 뜻은 엄청난 것이었다. 비록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해도, 한 웨어울프와 한 실버 드래곤, 그리고 한 레드 드래곤에게는 절대적인 영향을 가지는 것이었다. 비록 그 당사자 중 한 명은 여기 없었지만.
"아, 알았어. 알았다고."
찔끔한 표정의 은발의 여인은 질린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를 돌보고 있는 여자만큼 무서운 게 없다고 되뇌이면서.
"저, 세실리아드 님?"
마차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세실리아드라고 불린 여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제 제 겉모습을 바꿔주셔도 안 되나요?"
"....."
"세실리아드 님?"
"......"
"......"
잠시동안 이어지는 침묵. 하지만 흑발의 미소녀, 아니 이제는 아줌마가 되어버린 미녀는 그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체로 아기의 재롱을 보며 즐거워 하고 있었다.
"하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 마을에 도착하면, 풀어주실 거죠?"
"....... 알았어."
그렇게 작게 대답한 세리아는, 어딘가에 있을 레드 드래곤을 생각했다. 그리고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만약 여자를 하나라도 더 만들었다면... 가만 안 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