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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식민지를 착취하고 학살을 저지른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
Leopold II
벨기에 왕가
이미지 크게보기레오폴 2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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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벨기에 왕국의 두 번째 왕이다. 부국강병을 위해 해외 식민지 건설에 적극적이었으며 모험가 헨리 스탠리 경을 앞세워 중부 아프리카에 ‘콩고 자유국’을 세우고 1884년 베를린 회의에서 중립지대로서의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고무 채취를 위해 주민들을 노예화하고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신체를 절단하고 매질을 가하는 등 1천만 명 이상을 학살해 ‘콩고의 학살자’라 불렸다. 여기서 얻어낸 재산으로 벨기에 곳곳에 호화 건축물을 짓어 ‘건축 왕’이라 불리기도 했다. 정치·경제·외교적 발전도 이뤘지만 잔혹한 식민지 경영으로 인해 국내외에서 비난을 받았다.
왕가
작센-코부르크-고타 ▶
외국어표기
Léopold II
공식칭호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Leopold II)
별칭
건축 왕(Builder King), 콩고의 학살자(Butcher of Congo)
지역 벨기에
재위기간 1865년 12월 17일~1909년 12월 17일
출생 - 사망 1835년 4월 9일 ~ 1909년 12월 17일
가족관계
부친 : 벨기에 국왕 레오폴 1세(Léopold I)
모친 : 프랑스 공주 루이즈(Louise)
계보
전임자 : 레오폴 1세(Léopold I)
후임자 : 알베르 1세(Albert I)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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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 2세가 건설한 중앙 아프리카의 콩고 자유국(노란색)
출생과 성장 과정
레오폴 2세는 1835년 4월 9일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국왕 레오폴 1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프랑스 국왕 필립 1세의 딸 루이즈 공주다. 1834년에 태어난 큰아들 루이 필립이 생후 1년도 되지 않아 점막 염증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레오폴 2세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9세에는 브라반트 공작 직위를 수여받았다. 브라반트는 수도 브뤼셀을 포함한 주의 이름이다.
레오폴 2세는 15세의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프랑스에서는 1814년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부르봉 왕가가 복위했는데 마지막 국왕 앙리 5세가 후세 없이 사망하자 1830년 7월 혁명을 통해 오를레앙 공작이자 레오폴 2세의 외할아버지인 루이 필립이 입헌군주로 추대되어 오를레앙 왕가가 출범했다. 그의 딸 루이즈 공주는 2년 후 1832년에 벨기에 국왕 레오폴 1세와 결혼했다. 그러나 1848년 2월 혁명이 발생하면서 루이 필립은 왕위를 내려놓고 영국으로 피신했다. 레오폴 1세가 소개한 조카 알베르트가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이었기 때문에 루이 필립에게도 영국 왕실은 사돈 집안인 셈이었다. 그러나 루이 필립은 피난지에서 1850년 서거했고 루이즈 공주도 그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같은 해 세상을 떠났다.
레오폴 1세는 어머니 없이 홀로 지내는 왕세자를 일찌감치 결혼시키기로 결정했다. 3년 후 레오폴 2세는 1853년 8월 22일 18세의 나이로 오스트리아 대공 요제프의 딸 마리 헨리에테와 혼인했다. 벨기에에서는 프랑스어로 마리 앙리에트라 불렸으며,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손녀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사촌이다. 과묵하고 소극적인 레오폴 2세와 달리 마리 헨리에테는 천성적으로 남을 돕는 일을 좋아해 왕성한 자선활동을 벌였으며 덕분에 ‘브라반트의 장미’라는 별칭을 얻었다.
1855년 20세 때는 상원의원이 되었고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식민지 건설에 대한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펼쳤다.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10년 동안 이집트를 비롯한 지중해 국가뿐만 아니라 인도와 중국까지 방문해 세계 지리와 무역 항로에 대해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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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 2세가 건설한 콩고 자유국의 문장
즉위
1865년 12월 10일 아버지 레오폴 1세가 서거함에 따라 레오폴 2세는 17일 즉위식을 가지고 벨기에 제2대 국왕이 되었다. 재위 기간 중 첫째 기조로 내세운 것은 국가의 부강이었으며 특히 식민지 건설에 적극적이었다. 1876년에는 과학자, 지리학자, 탐험가 등을 브뤼셀에 집결시켜 아프리카 내륙에 대한 국제회의를 개최했고 1878년에는 인도주의 단체인 ‘국제 아프리카 협회(IAA)’를 출범시켰다. 영국의 탐험가 헨리 모턴 스탠리 경도 이때부터 8년 동안 레오폴 2세의 지원을 받아 콩고 지방을 탐사하고 지금의 킨샤사에 해당하는 곳에 왕의 이름을 따서 레오폴빌이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통치
1884년 유럽 열강 14개국과 미국이 참석한 베를린 회의는 벨기에가 원주민들에게 반강제로 빼앗은 콩고 분지를 중립지대로 선언했고 레오폴 2세의 로비에 현혹되어 합법적인 지도자로 인정했다. 그러나 이듬해 레오폴은 벨기에 국토 면적의 76배에 달하는 이 지역을 콩고자유국으로 이름을 바꾼 후 개인 소유지 취급을 했다. 외국인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국경을 만들고 주민들을 노예화시키는 등 베를린 회의에서 약속한 중립 유지 조항도 지키지 않았다. 인도적 목표를 가졌던 유럽의 활동가들은 국제 아프리카 협회를 탈퇴하며 항의했지만 콩고의 식민지화를 막을 수 없었다.
당시 콩고에는 고무 채취에 적합한 밀림지대가 많았다. 벨기에로 보내면 7배의 수익을 얻을 수 있어 곳곳에서 강제노역이 행해졌다. 고무 채취를 위해 레오폴 2세의 부하들이 저지른 악행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주민들을 억류해서 가족들에게 야생 고무 채취를 지시했으며 툭하면 채찍으로 매질을 가해 불구를 만들거나 목숨을 빼앗았다. 어린아이에게도 할당량을 주고 이를 채우지 못할 경우 손목을 잘라버렸다. “마을 전체의 채취량을 늘리려면 주민 100명의 목을 베면 된다”는 말이 벨기에 장교들 사이에서 생산량 유지의 비결로 이야기될 정도였다. 이렇게 해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적게는 800만 명에서 많게는 2천만 명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다. 이를 ‘고무 테러’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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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 채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손목이 잘린 콩고의 어린아이들
레오폴 2세의 폭정과 학살은 결국 외지인들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고 벨기에 정부의 조사 결과 콩고에서 착취한 재산을 개인적으로 유용한 사실도 드러났다. 브뤼셀의 벨기에 독립 50주년 기념공원, 오스텐드의 왕립 미술관, 안트베르펜 중앙역사, 웰링턴 경마장 등 거대하고 화려한 건축물을 지어 ‘건축 왕(Builder King)’이라 불릴 수 있었던 것도 콩고 자유국에서 얻어낸 이권 덕분이었다.
여당과 야당 할 것 없이 인권을 문제 삼으며 국왕을 공격했고 레오폴 2세는 결국 1908년 콩고 자유국에 대한 지배권을 벨기에 정부에 양도했다. ‘벨기에령 콩고(Belgian Congo)’로 명칭이 바뀌면서 다수의 초등학교와 병원이 지어졌고 경제 개혁을 통해 전반적인 소득 수준도 높아졌다. 이때의 식민지 통치 방식은 ‘온정주의’라 불리지만 콩고 주민들은 여전히 대부분의 권리가 제한되어 있었고 강제노동도 곳곳에서 성행했다. 벨기에령 콩고는 1960년이 되어서야 독립을 얻어냈다.
레오폴 2세의 재위 중에는 정치·사회·외교 부문에서 여러 발전이 있었다. 12세 미만 아동의 공장 취업 금지, 16세 미만 청소년의 야간 노동 금지, 21세 미만 여성의 지하 작업장 출입 금지 등 노동자의 권리 향상이 이루어졌다. 남성의 보통 선거권을 명시하도록 헌법이 개정되었고 대외적으로는 강병 정책을 통해 중립국을 유지했다. 그러나 콩고에서의 잔혹 행위로 인해 여타의 업적은 희석되었고 ‘콩고의 학살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거
1902년 9월에는 마리 헨리에테 왕비가 목욕 중 사망했다. 11월 초 아내의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 제나로 루비노가 마차에 총을 쏘았다. 3발의 총알이 모두 빗나가면서 암살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유럽 전체가 증오하는 군주임이 명확해졌다. 7년 뒤 1909년 12월 12일 레오폴 2세가 서거해 국장을 치르고 유해가 22일 브뤼셀 시내를 통과할 때는 시민들이 야유를 퍼붓기도 했다.
콩고에서의 학살은 벨기에의 역사에 수치를 남겼다. 레오폴 2세의 사후에 왕실과 정부는 ‘거대한 망각’이라 불리는 대대적인 역사 정리 작업에 돌입했고 20세기를 지나면서 콩고의 비극은 빠르게 잊혀졌다. 레오폴 2세는 아랍권으로부터 아프리카 사람들을 독립시킨 왕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학자들의 조사로 인해 다시금 부각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저작물이 1998년에 출간된 『레오폴의 망령(Leopold’s Ghost)』이다. 저자인 애덤 호크실드는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침공했을 때 국경지대에서 어린아이들의 손목이 잘렸다는 소문이 돌았다”며 국가적 위선에 대해 시민들도 인지하고 있었음을 지적했다.
레오폴 2세의 유일한 아들 레오폴 왕자은 10살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로 인해 왕위는 레오폴 2세의 동생 필립 왕자의 아들 알베르 1세에게 계승되었다.
가족 관계
레오폴 2세는 마리 헨리에테 왕비와의 사이에서 1남 3녀를 낳았다. 첫째는 루이즈 마리 공주로 사촌오빠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 필립과 혼인했다. 둘째는 브라반트 공작에 봉해진 레오폴 왕자로 연못에 빠졌다가 폐렴에 걸려 10세의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셋째는 스테파니 공주로 오스트리아 황태자 루돌프와 결혼했고 이후 헝가리의 로니아이 왕자와 재혼했다. 넷째는 클레망틴 공주로 보나파르트 가문의 나폴레옹 왕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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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헨리에테 왕비
• 배우자
- 오스트리아 대공녀 마리 헨리에테(Marie Henriette, 1836년 ~ 1902년)
• 자녀
- 1녀 : 루이즈 마리(Louise Marie, 1858년 ~ 1924년), 작센-코부르크-고타 공비
- 2남 : 레오폴(Léopold, 1859년 ~ 1869년), 브라반트 공작
- 3녀 : 스테파니(Stéphanie, 1864년 ~ 1945년), 오스트리아 황태자비
- 4녀 : 클레망틴(Clémentine, 1872년 ~ 1955년), 나폴레옹 왕세자비
참고문헌>5확장영역 접기
김승렬 외, 『유럽의 영토 분쟁과 역사 분쟁』, 동북아역사재단, 2008년
마크 앨리엇, 『벨기에』, 이현철 옮김, 휘슬러, 2005년
Els Witte, Jan Craeybeckx & Alin Meynen, Political History of Belgium: From 1830 Onwards, ASP, 2009년
Paul Belien, A Throne in Brussels: Britain, the Saxe-Coburgs and the Belgianisation of Europe, Imprint Academic, 2005년
벨기에 왕실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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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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