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제(벽골제),화순(운주사,와불),광주
여행 후기 -----
2002년 9월 28일 5시 ~ 2002년 9월 29일 6시까지
☞
이번에 가본곳 (* 밑줄 친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장소로 바로 이동합니다.)
1. 서울역
2. 김제시내
3. 화호리(부량)
4. 벽골제의 대하여..
5. 벽골제
6. 수리민속박물관
7. 김제역
8. 광주역
9. 화순읍
10. 운주사의 대하여..
11. 운주사 원형다층석탑
12. 운주사 와불
13. 광주 진월동
14. 광주공원
15. 서5층석탑
16. 광주역
17. 영등포역
18. 서울 면목동
< 눈물 - 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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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사람 - 박효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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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라라 - 이수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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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sweetie - 보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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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액션 - 디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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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gain - 쥬얼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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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만고양이 - 체리필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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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트 드림 - 장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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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9월 28일 토요일 새벽 4:40분..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시간에 조용히 집을 나섰다.
원래 그날은 친구넘들과
해남,완도지역에
가기로 했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다음으로 연기되었고 대신
혼자서 전라도 김제,광주,화순 지역으로 가기로 했다.
우리집 부근
상계1동 버스정류장으로
나가니 서너명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군..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날씨가 좀
쌀쌀하다. 그래서 긴팔을 입고 나왔다. 안에는 반팔 티셔츠를 입고. 낮에는 반대로 날씨가 덥기 때문에..
4:50분이 되자
한성여객에서 운행하는 서울시내버스 15번(하계동↔도봉동↔신설동↔전농동↔하계동)이
와서
그것을 잡아 타고..
서울시내버스 15번의 자세한 노선은 ------->
(서울 15번 노선 안내)
한적한
도봉로(道峰路)를
무섭게 달려서 25분만에 미아리고개에 도착하여 내린다. (5:15분)
미아리고개에서 내린 이유는 서울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
미아리고개는 돈암동에서 길음동 방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버스에서 내린지 3분만에 서울역으로 가는
대진여객 소속 서울시내버스 710번(정릉동↔돈암동↔미도파↔고속터미널↔
↔압구정동↔삼성역,코엑스몰↔개포동,
☞
자세한 노선 보기)이
와서 잡아타고..
돈암동,삼선교,창경궁,청계천,
미도파,남대문시장을 지나 서울역에서
내린 다음 서울역사(驛舍)로 들어갔다. (5:40분)
매표소에 가서 예약한 열차표를 구입하고 좀 서성이다가 5:50분에 개표를 받고 타는 곳으로 나간다.
이번에 타는 열차는
아침 6:05분에 서울역을 출발하여 김제 경유 광주로 가는 무궁화호 제 431열차이다.
좌석은 10호차 59석, 운임은 11000원이다.
* 서울 -> 김제 무궁화호
승차권
1-2.
내가 탄 광주행 열차는 6:05분이 되자 서울역을 출발.. 한강을 건너
영등포역에서 엄청난 승객들이 열차에 탑승..
나는 밤을 샌 관계로 잠이 들고... zzz
깨보니 어느덧
강경역에
이르렀다. 열차내에 승객은 그렇게 많지는 않군..
함열역을 지나 교통의 요충지인 익산역(益山驛)에 이르니 많은 승객들이 내린다.
익산역을 지나 정시보다 7분이나 늦은 9:32분에
김제역(金堤驛)에 도착..
열차표를 기념품으로 가져오고 역을 나온다. (-> 처음 화면으로 가기)
2.
김제역이 있는
김제시(金堤市)는 전라북도의 주요 도시중 하나이다.
김제시의 주요 관광지로는
모악산도립공원,금산사,벽골제,망해사 등이 있으며, 우리나라
최대의 평야(平野)인
호남평야(湖南平野)가 펼쳐진 곳이다.
역전광장을 지나 길건너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여기서 부량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야되는데 9:30분 버스는 이미 도망을 쳤고, 10시에 버스가 있군.
버스를 기다리며 의자에 앉아있는데 뒷쪽 가게에 알록달록한 고양이 한마리가 이리저리 설치고 다닌다.
마침 주변에 파리가 한마리 왔다갔다 했는데 그 고양이는 그 파리를 잡기 위해 열심히 뛰어 다니는군..
고양이의 재롱을 보고 있으니 어느덧 시간은 10시가 되고..
내가 기다리던 부량방면 버스가 왔다. 버스는 김제역전 정류장에 정차..
이번에 타는 버스는
안전여객에서 운행하는 김제시내버스 12번(김제역↔부량면↔화호리,백산)이다.
김제시내버스 요금은 700원이다. 그런데 여기는 탈 때 요금을 안내고 내릴 때 요금을 내는군..
그런데 몇몇 사람은 탈 때 요금을 내고 그런다.
10:05분이 되자 김제 12번 버스는 김제역을 출발..
김제경찰서를 지나 신풍단지를 한바퀴 돌고 김제터미널,요촌동,옥산동을 지나 김제시내를 벗어난다.
그런데 피곤해서 그런지 잠이 들고.. zzz
잠에서 깨보니 버스는 호남평야를 좌우에 끼고 달리고 있었다.
호남평야 진짜 넓군..
그런데 어떻게 하다보니 목적지인 부량을 지나
정읍시(井邑市)의 화호리까지
오게 되었다.
그래서 서둘러서 내릴려고 하는데 운전사가 시외구간요금 150원을 더 내라고 그러는군.. 허걱..
겨우 시계(市界) 2km 지났는데 150원이나 받는다니...
할 수 없이 150원을 내고 버스에서 내렸다. (10:30분)
다시 부량,벽골제로 가야되는데 어떻게 갈까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걸어가기로 했다.
화호리(정읍시 신태인읍)에서
부량까지는 2km 거리이며, 벽골제 사적지까지는 3km를 더 가야된다.
호남평야를 옆에 끼고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그날따라 날씨도 좀 더웠음..
3. 도로 양편에 펼쳐진 드넓은 평야에는 누렇게 익은 황금빛의 벼들이 나를
맞이해준다.
2km정도 걸어가니 김제시 부량면의 중심인
대평리가
나온다. 평범한 시골동네로 조용하군..
그런데 마침 용곽리 쪽에서 김제시내로 가는
안전여객 소속 김제시내버스 39번(용곽리↔부량↔김제역)이
지나가는군.
그래서 그 넘을 잡아타고 금강리를 지나 벽골제 관광지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려서 벽골제 관광지 내로 들어서니 많은 사람들이 무슨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공원내에 여러모양의 허수아비를 잔뜩 만들어놓았고 여러가지 행사무대를 설치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10월 3일부터
10월 6일까지 열리는
지평선 축제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김제시의 대표적인 축제인
지평선 축제는
이곳 벽골제를 중심으로 열리기 때문에...
이 축제기간에는
마라톤대회,KBS전국노래자랑,그림그리기,허수아비만들기,매뚜기
잡기,농악경연대회,추수체험,
새끼꼬기,물고기잡기체험,대장간시연/체험,입석줄다리기등 여러가지 행사가
열린다.
그 외에 지평선 축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
(지평선 축제
알아보기)
* 단 2002년 10월6일에 모든 축제가 끝남. 그 이후는 링크가 안될 수 있음.
주차장을 지나니 단야루(丹若樓)란 누각이 나오고, 주변에 단야각과 수리민속관, 벽골제의 제방이 보인다.
여기서 잠깐 벽골제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 처음 화면으로 가기)
4-1.
벽골제(碧骨堤)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저수지의 하나로
사적 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흔히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3대 저수지(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 김제의 벽골제)에 하나이기도 하다.
* 벽골제는 부량면의 가운데를 통하여 남쪽으로 가로지르고 있는데. 남쪽으로 월승리 초승마을에서부터 북쪽으로
월촌동과 경계를 이루는 원평천의 포교까지 약 2500m에 걸쳐 뻗어 있다.
*
이 벽골제가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각각 신라 흘해왕 21년(330년)과
20년(329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위의 기록은 벽골제가 신라 흘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그 시절에 김제 지방은 백제(百濟)의 영역이었고 백제와 신라는 서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의 두기사는
작성한 이의 착오로 인해 백제의 사실이 신라의 역사로 잘못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 1975년에 벽골제의 현존하는 두개의 수문지에 대하여 발굴 조사를 실시한 바 있는데, 그 때 수문지 중 하나
인 경장거의 식물탄화층(이 지층은 벽골제 축조 직전의 이 부분 지표면으로 추정됨)을 대상으로
방가성탄소에 의한
연대측정을 행한 결과 그 연대가 위에서 언급했던 '삼국사기(김부식)'와
'삼국유사(일연)'의 벽골제 축조년대와
거의 비슷하게
나타난 것으로 알려졌다.
*
벽골제가 만들어진 이후 최초의 수축 기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원성왕 6년(790년)조에
보인다. 즉 '춘정월... 증축
벽골제 징전주등 7주인여역'이 그것이다. 이 때의 벽골제 증축에는 7개주의 백성이 동원된 대규모의 토목공사이었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이후 고려 현종(1009~1030)때 벽골제에 대한 증수를 한차례 하였고, 인종 21년(1143)에도
수축을 하였다.
고려시대에 있었던 이 두 차례의 벽골제 보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런데 인종(仁宗)은 벽골제를 보수한
지 3년만에 어느 이상한 무당의 말을 믿고
그 제방을 때려부셨다.
* 그 이후 300년 가까이 방치되어 오다가 조선 태종 8년(1408년) 9월에 전라도 병마절도사인 강사덕이 올린 3가지
건의안 중 마지막 조항에 벽골제의 수축을 건의했는데 태종(太宗, 이방원)은 이 건의에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시 태종 15년(1415년) 8월에 전라도 관찰사 박습이 '벽골제는 저수지로서
아주 우수하고 유용하다'고 태종에게 건의
를 하니 태종은 곧 벽골제의
보수공사를 명했다.
이리하여 1415년 9월 20일~10월 13일 까지 약 20여일 동안 벽골제 수축 공사를 다시 예전모습으로 복구 되었다.
복구된지 5년후인 세종 2년(1420)에 심한 폭우로 인하여 벽골제는 크게 파손되고 말았다. 그 이후 벽골제는 그 보수
와 폐기를
주장하는 논의가 되풀이되는 가운데, 점차 방치되어 그 넓은 저수지가 전답으로 바뀌어 갔으며,
그 당시 유물로는 2개의 수문과 돌기둥만 남아 있다.
* 약 500년 가까이 방치된 벽골제방은 1925년 동진농지수리조합(東津農地水利組合)에서 둑의 가운데를 파서 농지관개용
간선수로로 개조하면서 기존의 벽골제의 모습은 많이 손상되었고. 지금도 동진농지 개량조합에서 이를 그대로
사용하
고 있다. 현존하는 두개의 수문지에 대해서는 근래에 두 차례의 발굴 조사(1967,1975년)가 행해졌고 이때 수문(水門)
터를 발굴하여 수문의 모습을 복원하게 되었다.
* 이 벽골제가 한참 잘나가던 시절에는 그 길이가 60843척, 제하의 몽리면적이 약 9840결이었다고 한다.
* 벽골제의 모습
(사적 111호)
4-2.
벽골제와 관련된 지명들
지명 | 지명의 유래 |
배글이 | 배가 들어왔던 곳 |
호락(湖落)마을 | 호수가 떨어지는 곳, 즉 물이 떨어지는 곳. |
접주(接舟)마을 | 배가 닿은곳 |
내주평 | 배가 안쪽으로 들어왔던 곳으로, 지금은 넓은 평야의 일부가 됨 (* 확실하지 않음) |
용두마을 | 용이 살았다고 함 |
강정마을 | 벽골제의 물이 여기서 머물러 갔다고 함 |
소금산마을 | 소금배가 왕래했다고 함 |
소금배미 | 소금배가 전복된 곳. |
되배미(되논) | 벽골제
공사 당시 인원점검을 하던 곳으로 5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논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한번에 500명씩 헤아렸다고 함 |
신털뫼 | 인부들이
벽골제 공사를 끝내고 나오면서 짚신에 묻은 흙을 털었는데 그 흙이 모여 하나의 산을 이루었다고 함 |
4-3.
벽골제의 얽힌 전설
벽골제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으니...
☞
이 전설은 신라 38대 왕인 원성왕(元聖王)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벽골제의 제방은 너무 오래되서 무너질 형편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김제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태수(太守)들이
신라조정에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조정에서는 예작부(例作府)에서 근무하던 원덕랑(元德郞)을
벽골제 보수 공사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김제(金堤)로 파견했다.
칙명(勅命)을 받고 김제로 온 원덕랑은 외모가 준수한 청년이었는데, 그는 김제태수의 집에 머물면서 낮에는 공사현장
에서 일을 독려하고 밤에는 태수의 집에서 태수와 함께 제방공사와 관련된 여러가지 일에 신경쓰느라고 제대로 잠도
못자고, 쉬지도 못했다.
그 때 김제태수에게는 단야(丹若)라는 18살의 어여쁜 딸이 있었다. 단야와
원덕랑은 한집에 기거했으므로 자연히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 단야는 원덕랑을 알게되면서 부터 연정(戀情)을 품게 되고, 원덕랑 역시 단야에게 은근히
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고향에 월내(月乃)라는 약혼녀가 있었기 때문에 단야의 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오직 제방공사에만 온갖 정성을 쏟았다.
제방공사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제방 한곳이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지만 주민들의 원성은
높아만 갔다. 이 때 주민들은 '이런 큰 공사에는 반드시 용(龍)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지만
공사가 순조롭게
되는데,책임자인 당신이 그 말을 믿지 않고 공사를 했기 때문에 제방이 무너진 것이다'라고 이구동성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이때쯤에 원덕랑의 약혼녀 월내가 남장(男裝)을 하고 김제를 찾아 했는데, 이 사실을 보고 받은 김제태수는
월내를
한밤중에 보쌈하여 용에게 제물로 바치고, 딸 단야를 원덕랑에게 시집을 보내고, 제방의 붕괴로 높아진 주민들의 원성도
잠재워서 빨리 공사를 빨리 끝내자는 일거양득의 무서운 계략을 세웠다.
단야는 이런 사실을 알게되고 괴로워한 나머지 자신을 희생시키기로 결심,
자신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을 잠재울 수 있고, 자신이 사모하던 원덕랑이 월내와 혼인하여 아들딸 낳고
잘먹고 잘살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자신의 희생이 아버지의 살인계획(월내를
용에게 제물로
바치려는 계획)까지 막는 효도라 생각되자 죽음을 결심한 것..
이렇게 까지 생각하자 단야는 스스로 벽골제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그 이후 벽골제 보수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몇달뒤에 완공을 보았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해서 김제지역의 대표적인 축제인 '벽골문화재(碧骨文化財)'에서
'단야뽑기'는 그 축제의 상징이다.
4-4.
벽골제,수리민속박물관 입장료 : 없음, 무료
관람
4-5.
벽골제 접근 방법..
①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
1. 호남고속도로→태인나들목→신태인,부안 방면으로 진입(30번국도)→신태인읍→화호리→화호3거리에서
우회전→
부량(29번국도)→벽골제
2. 호남고속도로→금산사나들목→봉남,김제방면 712번지방도 이용→봉남→김제시내→부량,신태인 방면 29번국도→
용성리→벽골제
3. 서해안고속도로→부안나들목→신태인,김제방면 30번국도 이용→화호리→화호3거리에서 좌회전(29번국도)→
부량→벽골제
②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 (2002년 10월 현재)
서울,영등포,수원,천안,서대전,강릉(휴일에만 운행),동대구(휴일에만 운행)역에서 목포,광주,순천(서광주경유)행
무궁화호,새마을호 열차 이용, 김제역 하차.
목포,광주,순천(서광주경유),나주역에서 서울,서대전 방면 무궁화호,새마을호 이용, 김제역 하차
자세한 열차 시간표는 --->
(열차시간표 안내)
서울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부안까지 고속버스가 30~40분간격으로 운행,
익산,전주,군산,대전,광주,정읍,부안등에서 김제가는 직행버스 이용.
운행시간표와 운임은 해당터미널에 문의 바람.
김제역과 김제터미널에서 용성리,부량방면으로 가는 김제시내버스 11,12,16,39번 이용. 운임은 700원.
소요시간 20분정도. 배차간격은 15~30분간격.
*
김제 벽골제 찾아가기
이로써 벽골제의 역사와 규모, 전설,교통을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이제부터 벽골제와 수리민속관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 처음 화면으로 가기)
5.
단야루(丹若樓)를 지나니
단야각이 나온다.
단야루는 2층누각으로 벽골제의 상징인 단야의 이름을 따서 단야루라 한 것이다.
단야루 안쪽에 있는 단야각(丹若閣)은 단야의 초상화와 그녀의 일생을 기록화 비슷하게 하여 전시해놓은 건물이다.
건물 가운데에 있는 단야의 초상을 보니 대개 이쁘군...
그런데 밀양 아랑각에 있는 아랑의 초상(肖像)과
남원 광한루에 있는 춘향의 초상과 약간 비슷하군..
허걱 그들 모두 자매였나?? 그럴리는 없고..
단야의 초상화 주위에는 그녀의 일생을 그려놓은 그림들이 걸려있는데 그 내용은 위에서 잠깐 언급한 전설을 참고하면
된다.
단야의 초상화를 구경하던 아저씨들은 그 초상의 넋이 빠진 듯 바라보고 있군..
단야각을 보고 제방쪽으로 갔는데 잔디밭에는 여러가지 형상의 허수아비들이 세워져
있다.
옛날식 허수아비에서 부터 신세대식 허수아비까지 다양하군.. 축구선수 복장을 한 허수아비가 있는데 그 앞에는
축구공이 하나 놓여져 있다.
허수아비로 뒤덮힌 잔디밭을 지나니 연못과 정자가 나오는군..
연못주위에는 옛날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사용하던 무자위,용두레,맞두래 등이 설치되어
있다.
이것들은 모두 나무로 만들었는데 사람이 직접 조작하여 물을 퍼서 논에 공급하는 것이다.
몇몇 관광객들이 이것들이 신기한지 직접 해보는군.. 나도 잠깐 해보았다.
그런데 예상외로 좀 힘들군..
연못을 지나서 토성(土城)처럼 생긴 벽골제의 제방으로 올라갔다.
제방으로 올라가니 정면에 하천이 보인다. 이 하천은 동진강으로 흘러가는 하천..
제방의 중간부분에는 수문과 돌기둥이 있다.
수문은 최근에 복원한 것이며 수문앞에 서 있는 돌기둥은 옛날부터 있던 옛 벽골제의 흔적이다.
* 벽골제의 수문과 돌기둥
수문(水門)을 지나서 비각(碑閣)이 있는 쪽으로 내려 왔다.
비각 안에는 오래된 비가 하나 서 있는데 이 비는 바로 벽골제비(碧骨堤碑)이다.
비석의 높이는 2m 정도 되며, 약간 작은 비석이다.
이 비의 내용은 마멸이 너무 심한 관계로 알 수가 없다. 안타깝군...
비각 옆에는 벽골제에 대한 내용을 담은 넓직한 표석(標石)이 세워져 있다.
* 벽골제비(碧骨堤碑)
(비문碑文의 내용은 마멸이 심해서 알 수 없음)
6. 벽골제비를
둘러보고 옆에 있는 수리민속박물관(水利民俗博物館)으로 갔다.
이
박물관은 대지 면적 60.575㎡(128,356坪)의 박물관으로 입장료는 없다.
무료관람..
관람시간은 하절기(3월~10월)에는 9시~18시까지, 동절기에는
9시~17시까지이다.
박물관은 2층으로 되어있으며, 2층에는 기념품가게,전시실,안내소가 있고 1층에는 매점등이
들어서 있다.
지금부터 벽골제수리민속박물관을 간단하게 둘러보기로 하겠다. (-> 처음화면으로)
* 수리민속박물관 내부도
7.
나는 박물관 정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통해 박물관 내(內)로 진입..
2층으로 들어서니 넓은 로비가 나온다. 로비 오른편에는 기념품가게가 있고 왼편에는 안내소가 있다. 거기에는
박물관 직원 2명이 앉아있군. 그런데 로비 끝부분에 거대한 뒤주가 하나 있다. 이 뒤주는 광활한
김제평야의 농업규모
를 엿볼 수 있는 쌀뒤주로 50가마까지 저장할 수 있는데, 김제지역에 거주하는 어느 농민이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진짜 크군..
뒤주를 보고 제1전시관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농경사회의 생활을 살펴볼 수 있는 여러 유물을 폭 넓게 전시해 놓은 전시실이다.
여러가지 농기구, 농사(農事) 관련 유물들과 여러가지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특별하게 다룰만한 것은 없다.
다른 곳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유물들이 많기 때문에..
제1전시관을 둘러보고 제2전시관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수리(水利)의 역사를 다룬 전시실로, 주로 모형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기우제 풍경과 무자위질, 맞두레질,
용두레질을 하는 농부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선사시대(先史時代)의 농경생활을 모형으로 재현,전시하고 있다.
제2전시관을
대충 둘러보고 바로 옆에 있는 제3전시관으로 갔다.
여기는 벽골제의 축조과정을 모형으로 제작하여 전시하고 있는 곳.
특히 벽골제의 축조과정이 아주 자세하게 나와있다.
← 벽골제 축조과정의 처음부분..
* 기초 공사가 한참 진행중..
벽골제의
규모는 둑 길이 3.3㎞. 총 체적을 계산하면 286254㎡가 되고, 약 10,000㏊를
관개(灌漑)할 수 있는 아주 큰 저수지였다.
← 벽골제 축조과정의 중간부분..
* 둑이 거의 완성되고 수문(水門)이 만들어지고 있다.
벽골제에는 5개의 수문이 있었는데. 그 수문의 이름은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이다. 현재는 장생거, 경장거 2곳만 남아있다.
← 완성된 벽골제와 수문..
제3전시관 끝쪽 부분에는 조선중기(朝鮮中期) 때 장수인 조필달(趙必達)장군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조필달 장군(1600-1664년)은 무과에 급제한 후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丁卯胡亂,
정묘년에 후금의 만주족(=여진족)
패거리들이 평안도,황해도 까지 쳐들어와서 난동부린 사건)때 세자를 호위하였고, 인조 8년(1630년) 충좌위우부장의
직을 처음으로 제수받았다. 병자호란(1636년 丙子胡亂)때는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인조(仁祖)를 호위하였고.
그 이후에는 순안현령, 보성군수, 양주목사, 포도대장, 전라병마절 도사, 삼도통제사 등 72군데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이처럼 많은 관직을 거치면서 국사를 공정히 처리하고 재물을 탐내지 않았기 때문에 청백리(淸白吏)로서 명성이
널리 퍼졌고, 이를 알게 된 국왕(인조로 생각됨)은 그의 청렴함을 시험하기도 하였다.
그는 효종 때에 송시열(宋時烈) 등과 함께 효종의 북벌계획(병자년에 수치를 씻고 청나라를 때려잡자는
계획)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유물은 6종 17점이 있는데, 1983년 8월 24일에 전라북도 지방유형문화재
104호로 지정되었다.
이 유물들은 원래 그의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었으나 보관의 어려움을 이유로 이 박물관에 위탁하여 전시,보관하고
있다.
조필달 장군의 유물은 갑옷 1벌, 군척 1점, 지휘봉 1점, 호남육군병마기 1점, 사신대 1점(敎旨)등 옛문서 20점
(20점의 고문서 중 조필달과 관계있는 것은 13점)이다.
그러나 이 유물들은 모두 전시되어 있지 않고 일부만 공개되어 있다.
공개된 유물은 갑옷과 지휘봉,문서 일부이다. (안타깝게도 기억이 잘 안난다)
←
조필달 장군의 유물..
8. 제3전시관을 둘러보고 휴게실을 지나
제4전시관으로 갔다.
여기는 김제지역의 대한 온갖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곳으로 쉽게 말하면 김제지역을 홍보하는 홍보관으로 생각하면
될것이다.
여기는 김제쌀의 우수함과 김제지역 지도와 주요 관광지,문화재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데 특별히 다룰 만한 내용은
없다.
전시관 한쪽 구석에는 영상실(映像室)이 있는데 방영을 안하는군...
제4전시관을 둘러보고 2층 로비로 나왔다.
로비 오른쪽 안내소에서 지평선축제관련 안내문 몇장을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이로써 벽골제와 벽골제 수리민속박물관(舊 동진수리민속박물관)을 모두 둘러보았다.
박물관을 나와서 단야루를 지나 벽골제버스정류장으로 나왔는데, 정류장 뒤쪽에도 지평선 행사준비가 한참 진행중
이었다. (13:05분)
버스를 기다린지 15분만에
김제시내버스 16번(김제역↔벽골제↔죽산↔대장리,
안전여객)이 등장..
그 버스를 잡아타고 옥산동을 지나 김제시내로 진입.. 김제역에서 내렸다. (13:40분)
(-> 처음 화면으로 가기)
김제역으로 온 이유는 광주행 열차를 타기 위해서..
역사(驛舍)로 들어가서 광주방면 열차시간을 확인해보니 이런 간만의 차로 놓쳤군..
13:28분에 송정리 경유 목포행 무궁화호가 있는데. 약 15분차이로 놓쳤다.
그 다음 열차는 14:44분에 있군.. 어쩔 수 없이 1시간을 더 기다려야 된다.
이렇게 되자 오후 2시쯤에 광주역에서 마중나오기로 한 사람한테 늦게간다는 문자를 보내고 부근 식당에 들어가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9. 점심을 먹고 김제역 시외버스정류장으로 가보니
광주가는 버스가 1일 2회있는데. 요금은 6000원..
허걱~
그냥 철도타고 가는 것이 더 저렴하고 편하다.
역사(驛舍)로 들어가서 14:44분에 광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표를 구입하고 좀 기다리니. 14:30분에 서울방면과
광주방면 개표를 시작.. 개표를 받고 타는 곳으로 나간다.
14:40분이 되자 목포에서 서울로 가는 무궁화호가 김제역으로 진입.. 승객을 좀 태우고 북쪽을 향해 떠나고
14:43분에 서울에서 광주로 가는 열차가 김제역으로 진입...
이번에 탄 열차는 서울역을 11:25분에 출발하여 광주역으로 가는 무궁화호 제437열차이다.
운임은 5200원, 좌석은 6호차 21석이다.
( ∴ 김제 → 광주 무궁화호 승차권 보기 )
열차에 올라 지정된 좌석에 앉으니 열차는 김제역을 출발하고...
피곤해서 그런지 정읍역을 지나서 잠이 들고 말았다.. zzz
잠에서 깨보니 어느덧 장성역(長城驛).. 자고 있는 사이 노령산맥(蘆嶺山脈)을
지나버렸군..
장성역을 지나 10분정도 가니 임곡역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우리나라 제5의 도시인 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가
시작된다.
하남역을 지나서 송정리역 못미쳐에서 좌회전...
극락강역을 지나 15:55분에 광주역(光州驛)에 도착했다. 정시보다 5분이나 늦었음..
(-> 처음 화면으로 가기)
열차표를 기념품으로 가져오고 역사(驛舍) 대합실로 나왔는데 마중나오기로 한 사람이 안보이는군..
서로 연락을 한 끝에 16시에 만날 수 있었다.
10. 간단하게 인사를 한 다음 어디로 갈까 의논을 했는데 만난 이가 가사문화권(담양군
남면)에 가자고 그런다.
마침 나도 그 쪽에 가고 싶었기 때문에, 가사문화권(歌詞文化圈)지역으로 가기로 했다.
길을 건너서 광주시청 방면 전남일보 앞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그런데 가사문화권으로
가는 버스가 광주125번
(대인광장↔고서↔연천리)과
담양225번(대인광장↔연천리↔화순온천)이
있는데 배차간격이 거의 1시간이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이들 버스를 기다렸지만 4:30분이 넘도록 올 생각을 안한다. 허걱~
그래서 어떻게 할까 의논을 하다가 운주사에 가기로 했다. (4:35분)
그가 지금 운주사에 가면 늦지 않겠느냐고 걱정을 했는데 이에 나는 6:10분까지 충분히 갈 수 있다고 그러면서
안심을 시킨다.
광주역에서 운주사에 갈려면 광주17번을 타고 화순읍(광천동터미널,학동,백운광장에서도
승차가능)으로 가서 운주사가
는 버스를 타야 된다.
운주사로 행선지를 바꾸고 버스를 기다린지 10여분 뒤인 4:45분경에 우리가 기다리던 광주시내버스 17번(상무지구↔
광주역↔도청↔학동↔화순읍↔화순역,도웅리)이 오는군..
그 버스를 잡아타고 광주시청,계림동,전남도청,학동,지원동,광주1호선차량기지를 지나 울고
넘는다는 너릿재 터널을
통과하니 이제부터는 전남 화순군...
터널을 지나 15번국도를 벗어나서 화순읍(和順邑)내로 진입...
화순터미널 직전 정류장에서 내렸다. (5:20분)
그런데 여기는 소나기가 내렸는지 땅바닥이 젖어있었다.
11. 화순읍은 화순군(和順郡)의 중심지이다.
광주의 동남쪽에 위치한 이 화순군의 주요 관광지로는 운주사,쌍봉사,물염적벽,동복호,대곡지지석묘,도곡온천,
화순온천,사평자연휴양림 등이 있으며, 화순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광주광역시와 담양군, 서쪽에는 나주시,
동쪽에는 순천시와 곡성군, 남쪽에는 보성군과 접하고 있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린 다음 음료수 하나 사먹고 운주사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화순에서 운주사가는 화순군내버스 218번의 도암,중장터 방면 노선은 30~50분 간격으로 운행..
5:30분이 되자 우리가 기다리던 화순교통의 화순군내버스 218번(광주유덕동↔광천터미널↔백운동↔학동↔화순읍↔능주)
의 도암,운주사,우치리 방면 노선이 온다.
화순 217,218번은 번호 1개로 약 20~30여개의 노선을 운행하기 때문에 버스 앞면에 있는 행선판을 확인하고 타야된다.
버스에 올라 운주사까지 얼마냐고 물어보니 무려 1850원.. 허걱~~
우리가 탄 버스는 화순터미널,화순역입구를 지나 화순읍내를 벗어나고..
만수역,백암리를 지나 능주(화순군 춘양면)에 이른다.
능주시내를 한바퀴 돌고 822번 지방도로 진입.. 지석묘들이 무리지어서 주무시고
있는 대곡리를 지나니
도곡면의 중심인 효산리가 나오고, 여기서 818번 지방도로 좌회전하여 벽지리,도암(원천리),지월리를 지나서
6:15분에 운주사입구에 도착.. 화순읍에서 여기까지 약 45분이 걸렸다.
이때쯤 날은 거의 저물기 시작하고... 날씨는 은근히 쌀쌀해진다.
버스에서 내려서 운주사로 들어가는 길로 들어갈려고 하니 어떤 아줌마가 "지금 입장시간이 끝나서 절에 들어
갈 수
없다"라고 그러는군..
좀 들어가니 어떤 아줌마가 동행인한테 아는척을 하는데.. 알고보니 그와 아는 사람이다.
그 아줌마가 우리한테 운주사 보고 나올 때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에 들려서 저녁먹고 가라고 그러는군..
운주사입구 버스정류장에서 5분 정도 들어가니 운주사 주차장이 나오고..
주차장을 지나 매표소로 갔는데, 매표소 아저씨가 입장시간 끝났다고 못들어가게 하는군. 허걱~~
그래서 내가 "멀리 서울에서 왔는데 좀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들어주지를 않자,
이번에는 그가 약간의
미모?로 밀어부치며 부탁을 하니 그 아저씨는 매표소 안으로 들어가더니 입장권 2장을 우리한테 팔고 들어가라고
그런다.
시간도 늦었느데 그냥 들어가게 해주지.. 쩝..
운주사 입장권을 구입하고
어둠이 깔린 길을 2분정도 걸어가니 운주사일주문(雲住寺一柱門)이 나온다.
일주문을 지나니 이제부터는 운주사의 그 신비스러운 천불천탑이 우리를 맞이하는데...
(-> 처음 화면으로 가기)
12-1. 운주사(雲住寺)는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에 있는 사찰로
2000년 3월에 이어서 2번 째 와본다.
이 사찰은 나말여초(羅末麗初)때 도선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千佛千塔)을 세웠다고 하는 신비의 사찰로
나지막한 야산 분지에 있는 고려시대 절이다.
절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중기에서 말기까지 매우 잘나갔던 사찰로 보이며, 15세기 후반
에 다시 크게 지어졌다가 정유재란(1597년)때 폐사(廢寺)되었다.
운주사(雲住寺)에서 운주란 뜻은 '구름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배를 움직인다'는 뜻의 운주사
(運舟寺)로 불리기도 한다.
조선중기 인조 10년(1632)에 발간된 능주읍지에 나온 운주사 관련 기사에 '雲住寺
在縣南二十五里 千佛山左右山峽石佛
石塔 一千又有 石室二石佛 相背而座'라고 쓰인 구절이 있는데 이를 해석하면 '운주사는 현(능주)의
남쪽 25리에
있으며 천불산 좌우 산 협곡에 석불 석탑이 일천씩 있고 석실에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있다'라는 뜻..
이 기사를 봐서는 운주사의 일천개의 석불 석탑이 있었던 게 분명한 것 같고, 그 말미에 금폐(今廢)라는 문구가
있어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후 조사한 기록을 보면 석탑이 22기, 석불이 213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석탑 17기, 석불
80여기만 남아
있으며,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네차례의 발굴조사와 두차례의 학술조사를 하였으나 창건시대
와 창건세력, 조성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확증을 밝혀내지 못함으로써 운주사 천불천탑은 여전히 수수께끼의 유적으로
남아있다. 언젠가는 밝혀지겠지만..
작년 한국방송공사에서 방영한 역사스페셜에서는 천불천탑이 천문(天文)과 관련되있다고 언급한 바 있으며,
어떤 사학자는 고려중기 때 몽고 애들이 와서 세운 절이라고도 하는 등 여러가지 의견이 있으나
모두 확실하지는 않다.
운주사의 있는 석불(石佛)의 특징은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형태의 석불로 평면적이면서 토속적인 생김새에
어색하고 균형이 잡히지 않은 신체 구조는 고려시대 지방적인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석탑 또한 그 모양이나 무늬의 표현방식이 매우 독특하여, 3층,5층,7층 등 층수도 다양하다. 둥근 공모양의 원형탑이
나 호떡 모양의 돌을 올려놓은 듯한 원판형탑 등 특이한 모양의 탑도 있다. 또한 탑의 표면에 'X','◇','川'과
같은 기하학 무늬들이 새겨져 있어 특이하다.
절왼편 언덕에는 운주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와불이 누워서 주무시고 있다.
이곳 운주사는 사적 312호로 지정되어있다.
12-2.
운주사 입장료 :
구분 | 어른 | 청소년 | 어린이 |
개인 | 1,300원 | 1,000원 | 700원 |
단체 (30명이상) |
1,300원 (할인 없음) |
700원 | 400원 |
12-3.
운주사 접근 방법..
①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
1. 호남고속도로→서광주나들목→운암동,시내방면 좌회전→죽봉로,태남로
경유→백운광장→주월동→광주대→
칠구재터널→앵남리→도곡온천→도곡→도암→운주사
2. 호남고속도로→동광주나들목→동문로→서방4거리→필문로→남광주→백운광장→주월동→광주대→칠구재터널→
앵남리→도곡온천→도곡→도암→운주사
3. 호남고속도로→송광사나들목→주암(광천)→운월재터널→동복→복암리→동면→화순읍→보성방면 29번국도→
만수→능주4거리에서 822번지방도로 우회전→도곡→도암→운주사
②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 (2002년 10월 현재)
서울,부산,전주,대구,대전,인천,수원,고양,원주,청주,울산,순천,여수,부천,남원,김제,정읍,목포,완도,진주,성남,
익산에서 광주까지 고속버스나 시외직행버스 이용, 광주터미널(광천동터미널)앞
버스정류장에서 화순군내버스 218번
(광주유덕동↔광천터미널↔학동↔화순읍↔능주)버스중에서
도암,운주사,중장터 방면 버스 이용.
* 화순군내버스 218번 버스 시간표 (광주광천동↔화순읍↔도암↔운주사) 1일 23회 운행, 1:30분 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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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행회사 화순교통 062-373-5666, 위에 버스시간표는 2002년 9월 현재 |
또는 광주터미널(광천동터미널)앞
버스정류장에서 화순군내버스 318번(광주유덕동↔광천터미널↔광주대↔도곡온천↔
운주사,중장터)버스 이용,
* 화순군내버스 318번 버스 시간표 (광주광천동↔광주대↔도곡온천↔중장터) 1일 12회 운행, 1:20분소요 | |||||||||||||||||||||||||||||||||||||||||||||||||||||||||||||||||||||||||||||||||||||
|
☏ 운행회사 화순교통 062-373-5666, 위에 버스시간표는 2002년 9월 현재 |
*
운주사 입장권 앞면
*
운주사 경내
(☞
위에 사진을 클릭하면 바로 운주사 홈페이지로 이동함)
지금부터 운주사 경내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13. 일주문(一柱門)을 지나니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하늘 높이 솟은
9층석탑이다.
이 탑의 높이는 10.7m로 운주사에서 가장 높은 석탑이다. 커다란 바윗돌로 바닥돌과 아래층 기단을 삼고 그 위로
윗층 기단을 쌓은 후 9층에 이르는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윗층 기단의 가운데돌은 4장의 널돌로 짜였으며, 네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긴 후 다시 면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굵게 새겨 면을 둘로 나누어 놓았다. 또한 기단의 맨윗돌은 탑신의 1층 지붕돌로 대신하고 있는 점이 특이한데, 운주사
의 모든 탑이 이러하여 고려시대로 오면서 나타난 특징으로 보인다. 탑신의 각 몸돌에는 면마다 2중으로 마름모꼴을
새기고, 그 안에 꽃무늬를 두었는데, 이러한 수법은 운주사의 석탑에서만 볼 수 있다. 각 지붕돌은 밑면이 약간
치켜올려져 있고, 여러 겹의 빗살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꼭대기에는 원기둥모양으로 다듬은 돌과 보륜(寶輪)이 올려
져 머리장식을 이루고 있다.
탑의 면이 사각형인 것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탑들과 같으나, 지붕돌 밑면에 받침을 생략한 모습이나 각 면에 새긴
장식이 일반형에서 벗어난 모습들은 보기 드문 예이다. 이는 지방적인 색채가 뚜렷했던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나타
낸 것으로 보인다.
이 석탑은 원래 전남지방유형문화재 제8호였다가 1984년 보물 796호로
승급,지정되었다.
석탑(石塔)이 대개 날씬 하게 생겼음..
* 운주사 9층석탑
(보물 796호)
9층석탑을 둘러 보고 안쪽으로 좀 들어가니 벼랑 아래에 석불들이 서너기 서 있군..
이 석불들의 모양은 가지각색으로 별 장식도 없는 그냥 소박한 석불들이다.
* 9층석탑 주변에 있는 석불들
석불을 지나니 7층석탑이 우리를 맞이한다.
이 석탑도 앞에 언급한 9층석탑과 비슷하게 생겼다. 별 장식없이 그냥 소박하게 생긴 석탑..
이 석탑 뒤로 이것과 비슷하게 생긴 7층석탑이 2기 더 있다.
*
운주사 7층석탑
7층석탑을 지나니 왠 석불이 하나 서 있는데 석불 뒤에는 광배(光背)가 세워져 있다.
운주사 발굴조사 때 이 석불 주변으로 조선시대 기와가 많이 나왔는데 아마도 이곳에 불상을 모시는 목조건물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그냥 아무런 보호시설 없이 앞에 있는 7층석탑만 바라보고 있다.
이 석불은 고려시대 석불로 생각된다.
* 광배를 갖추고 있는 석불
석불 오른편 벼랑에는 아까전 벼랑밑에 서 있는 석불들과
비슷하게 생긴 석불들이 주무시고 있다.
이 석불들도 별로 꾸밈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불상들이다.
* 벼랑밑에 말없이 서 있는 석불들..
석불들을 지나니 집모양을 한 석조물이 있다. 그 안에는 석불
2구가 주무시고 있는데 이것은 석조불감(石造佛龕)이다.
불감이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든 집이나 방을 뜻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건축물보다는 그 규모가 작다. 다탑봉
(多塔峰) 골짜기에 자리한 운주사 석조불감은 건물 밖에 만들어진 감실(龕室)의 대표적 예이다.
감실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양쪽 벽을 판돌로 막아두고 앞뒤를 통하게 하였다. 그 위는 목조 건축의 모양을 본떠
옆에
서 보아 여덟팔(八)자모양인 팔작지붕 처럼 다듬은 돌을 얹어놓았다. 감실 안에는 2구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등이 서로 맞붙은 모습으로 흔히 볼 수 없는 것이다. 불상을 새긴 수법은 그리 정교하지 않지만, 고려시대
에 들어 나타난 지방적인 특징이 잘 묻어 나온다. 이처럼 거대한 석조불감을 만든 유례를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등을 서로 맞댄 감실 안의 두 불상 역시 특이한 형식으로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석조불감은 보물 797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원래는
전남지방유형문화재였다.
감실의 북쪽, 남쪽에 각각 문이 있고 그 안에 석불들이 주무시고 있다.
*
운주사 석조불감
(보물 797호)
14.
석조불감을 지나니 둥그렇게 생긴
이상한 모양의 석탑이 우리를 맞이 한다.
그 석탑은 바로 원형다층석탑(圓形多層石塔).. 말그대로 둥그렇게 생긴 다층
석탑이다.
이 탑의 구성이나 전체적인 형태는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양의 석탑으로 고려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
고 있다. (-> 처음 화면으로 가기)
기단(基壇)은 2단의 둥근 바닥돌에 높직한 10각의 돌을 짜올리고 그 위로 16장의 연꽃잎을 장식한 돌을 올려 마무리하
였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원형이고, 층마다 몸돌 측면에 2줄의 선이 돌려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6층 뿐이나 원래는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탑의 구성이나 전체적인 조형면에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가 드문 모습으로, 고려시대에 이르러 각 지방에서 나타
난 특이한 양식이라 할 수 있으며. 기단의 맨윗돌이 윗면이 편평하고 옆면이 둥근데 비해, 탑신의 지붕돌은 정반대
로 아래가 편평하고 윗면이 둥글다. 이는 상하의 조화와 안정감을 꾀하려 한 의도로 추측된다.
이 탑은 왜 이렇게 둥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다른 석탑과는 달리 독특한 개성을 가진 석탑으로
운주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석탑이다.
이 석탑은 보물 798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
운주사 원형다층석탑
(보물 798호)
원형다층석탑을 지나니 종무소(宗務所)라 불리는 맞배지붕 형태의 건물이 나온다.
종무소와 종루(鐘樓)를 지나니 운주사의 중심인 대웅전(大雄殿)이 나온다.
이때쯤 날은 완전히 어두워지고...
어둠에 덮힌 이 산사(山寺,운주사)는 조용하기만 할 뿐 적막감이 감돈다.
대웅전 왼쪽에는 승방(僧房)과 요사(寮舍)채가 자리잡고 있고, 오른쪽에는
지장전(地藏殿)이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 뒤쪽 언덕에는 공사바위, 마애여래좌상과 여러 개의 석탑이 있는데 날이
어두워진지라 가지는 않았다.
15. 대웅전을 둘러보고 종루 쪽으로 가니 승려 1명이 종루 안으로 들어가는군.. 저녁시간을 알리는 종을 치기
위해서 들어간 듯 싶다.
종루를 지나서 와불로 올라가는 산길로 진입..
산길은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
산길로 좀 올라가니 석탑 2개가 우리를 맞이하는데 하나는 5층석탑, 다른 하나는 7층석탑이다.
*
운주사 7층석탑(왼쪽)과
5층석탑(오른쪽)
석탑의 모양은 아까전에 언급했던 9층석탑, 7층석탑과 비슷하다.
이들 석탑도 고려시대 석탑으로 생각된다.
석탑을 지나니 길가 바위에 사람 2명이 앉아 있군.. 여행객으로 생각된다.
바위를 지나서 와불 못미쳐에 우뚝 솟은 석불이 하나 눈에 띈다.
이 석불은 시위불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시위불을 한자로 표시하면 '侍衛佛' 이것이
아닐까 생각이 되는군.. 옆에 와불을 지키고 있는 석불 같다.
* 와불 못미쳐에 있는 시위불
(석불입상)
시위불을 지나니 운주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와불(臥佛)이 우리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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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불은 세계에서 하나뿐인 와불(누워서 주무시는 佛)이다.
이 와불은 좌불 12.7m, 입상 10.26m의 대단히 큰 석불로. 나침반을 갖다대면 거의 정확히 남북으로 향하고 있어 이
1000번째 석불이 일어나면 곤륜산의 정기를 우리 민족이 받아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지상 최대의 나라가 된다는 전설
이 전해져 온다. 빨리 이 와불을 일으켜 세워야 될텐데......
이 와불이 이렇게 누워서 주무시는 이유는 신라말기 도선국사가 이곳에 천불천탑을 만들고 있을 때 일이다.
그는 하루밤에 1000불 1000탑을 모두 만들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석공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어느덧 1000개의 탑과 1000개의 석불이 완성.. 마지막으로 이 와불만 일으켜 세우면 운주사 공사는 끝나게 되는데.
와불을 일으켜 세울려는 찰라. 그때 아침을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를 듣고 하늘에서 내려온
석공들은 모두 하늘로 올라가 가버리고 결국 누운 형태로 이렇게 남게 되었다.
와불 곳곳에는 이 석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뚫어놓은 구멍들이 눈에 띈다.
아마도 그 당시 운주사 경내에 여러가지 사정으로 일으켜 세우지 못한 것 같다.
원래 입상으로 세우려고 하다가 그냥 와불형태로 둔 것일 수도 있겠다.
오늘도 와불은 하늘을 바라 본 채 주무시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운주사 와불
16. 와불을 보고 다시 왔던길로 해서 내려간다.
시위불을 지나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왼쪽으로 가면 대웅전, 앞쪽으로 가면 9층석탑,일주문이 나온다.
물론 앞쪽 길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도중에 칠성바위가 있는데 날이 어두운지라 그냥 지나갔다.
산을 내려와서 9층석탑과 일주문을 지나면서 운주사 경내를 벗어나고...
매표소,주차장을 지나 운주사 입구로 걸어갔다. (7시)
간만에 어둠으로 둘러싸인 시골길을 걸으니 좋군...
운주사입구로 나와서 동행한 이의 오빠의 친구분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가서 커피와 저녁을 얻어먹고 잠깐 쉬다가
그들의 차를 타고 도암,도곡,도곡온천,앵남리,칠구재터널,노대를 지나 광주대입구에서 내렸다.
여기서 그들과 작별을 하고..
우리는 어디로 갈까 의논을 하다가 충파,금남로 쪽으로 가기로 했다.
광주대입구(진월동)정류장으로 가서
광주시내버스 8번(도동↔백운광장↔충파↔무등경기장↔전남대↔장등동)을
타고
주월동,백운광장,사직동을 지나 광주의 중심지역인 충파에서 내렸다.
충파란 '충장로 파출소'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허걱~~
충장로를 좀 거닐다가 부근에 있는 광주공원에 가보기로 했다.
광주공원은 여기서 아주 가깝다. 도보로 10분거리도 안됨..
광주천(光州川)을 건너니 바로 광주공원(光州公園)이 나온다. 그런데 공원입구에는 포장마차들이 진을 치고
영업을 하고 있군..
포장마차군(群)을 지나 광주공원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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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광주공원(光州公園)은 광주시내에
위치해 있는 공원으로 공원내에는 현충탑,서5층석탑,광주향교 등이 있다.
입장료는 없음.. 그냥 아담한 휴식공원이다.
*
광주공원 접근 방법..
(2002년 10월 현재)
1. 광주역에서 광주 11,30,50번,나주 180,180-1번 이용. 사직동이나 향교입구 하차.
2. 송정리역에서 나주 160번 이용, 양동시장이나 롯데하차 도보 15분.
3. 광천동터미널에서 광주 118번 이용, 사직동,향교입구 하차
4. 광주역에서 도보 25~30분 소요. 택시로 10분 소요.
* 광주시내 지도와 광주지역 이동 경로(검은색
볼펜으로 표시함)
18. 공원에는 많은 시민들이 여기저기서 바람을 쐬거나 쉬고 있었다.
우리는 공원내에 있는 계단을 통해 정상부분까지 올라갔다. 정상부분에는 현충탑(顯忠塔)이 서 있다.
그런데 우리가 찾는 서5층석탑은 보이질 않는다. 그것이 공원 내에 있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공원을 한바퀴 둘러
보기로 했다.
현충탑을 지나서 공원의 북쪽 지역으로 가니 언덕 아랫쪽에 담장으로 둘러쳐진 한옥건물이 나오는군..
그것은 광주향교(光州鄕校)인데 향교 왼편에는
비석군(碑石群)이 세워져 있다.
광주향교 부근을 지나 서쪽으로 해서 공원을 한바퀴 도니 다시 현충탑이 나온다. 허걱~~
그래서 지도를
꺼내서 그 탑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고 향교 부근 쪽으로 내려가니 우리가 찾던 그 석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날이 어두운지라 멀리서는 잘 보이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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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 주변에는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앉아서 쉴 수 있도록 벤치도 여러개 설치되있다.
광주공원내에 있는 이 서 5층석탑(西五層石塔)은 고려시대 석탑으로 이 곳에는
옛날에 성거사(聖居寺)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이 광주공원은 원래 성거산(聖居山)이라 불렀는데, 산의 모양이 거북처럼
생겼으므로 광주를 떠나지
못하도록 등위치에는 성거사를 세우고 거북의 목 부근에는 이 5층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2단 기단 양식에서 기단을 1단만 두는
고려시대로의 양식변화를 보여준다. 또 지붕돌 추녀와 몸돌의 알맞은 비례감과, 위로 오르면서 줄어드는 비율이
크지 않아 전체적으로 높게 보이면서도 안정감이 있다.
1961년 해체,보수할 때 2층 몸돌에서 사리공(舍利孔)과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이 석탑의 연대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1층 몸돌과 3층 몸돌은 보수할 당시에 보충한 것이다.
이 석탑은 보물 10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대 부근에는 동5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이들 탑들은 서로 관련은 없음..
* 광주 서5층석탑
19.
서5층석탑을 둘러보고 광주공원을 나왔다. (21시)
공원입구에 무리를 지어 진을 치고 있는 포장마차에서 온갖 맛있는 냄새가 나의 식욕을 땡기게 만들었으나
그냥 통과..
광주천을 건너 금남로,대인광장,중흥동을 지나서 10시에 광주역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긴급한 일이 있어서 22:20분에 먼저 가버리고.. 쩝..
나는 표사는 곳으로 가서 예약한 표를 구입하고 의자에 앉아 잠깐 휴식을 취했다.
23:20분에는 역사(驛舍)내에 비치된 무료 pc를 20분정도 사용하고 23:40분에 개표를 받고 지정된 열차에 탑승..
이번에 타는 열차는 광주역을 23:50분에 출발하여 서울역으로 가는 무궁화호 제456열차이다.
나는 영등포역까지 가는데 운임은 14500원, 좌석은 3-25석이다.
지정된 좌석으로 가니 내 옆자리에 이쁘게 생신 여자가 앉아 있군.. 쩝..
(
∴ 광주 → 영등포 무궁화호 승차권 보기 )
23:50분이 되자 열차는 광주역을 출발..
극락강역을 지나서 호남선으로 진입...
장성역에 이를 무렵 나는 잠이 들고......... zzz
잠에서 깨보니 어느덧 수원역이다.
부곡,군포,안양,시흥역을 지나서 정시보다 10분이 늦은 4:36분에 영등포역(永登浦驛)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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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표를 기념품으로 가져오고 역사(驛舍)로 나온다.
화장실에가서 졀라게 세수를 하고 4:45분에 역사를 나와서 영등포신세계,경방필 건너편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이른 아침시간이지만 사람들은 졀라 많았다. 특히 술에 취해서 해롱해롱 거리는 사람들이 많군..
술좀 작작 마시지.. 쩝..
정류장에서 오뎅하나 사먹고, 5시에 중부운수에서 운행하는 서울시내버스 139번(문래동↔영등포역↔신촌로터리↔
남대문시장↔동대문운동장↔제기동↔장안동↔면목1동,
자세한 노선 보기)을 탔다.
이른 아침인데도 승객들은 그런데로 많았다.
버스를 타고 양남동,양화대교,합정동,신촌,아현동,서울역,남대문시장,명동,대한극장,동대문운동장,동대문,신설동,
제기동,전농동,장안동,면목두산아파트,면목1동을 지나 면목초교(면목역)에서
하차. (5:50분)
부근 면목역(面牧驛)에서 서울지하철 7호선(장암↔온수)을
타고 수락산역에서 내려 집으로 오니 아침 6:30분..
-> 이로써 김제,화순,광주지역 여행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20. 마무리
이번 여행은 전라북도의 김제와 전라남도의 화순, 광주광역시를 갔으며..
김제의 벽골제,수리민속박물관, 화순의 운주사, 광주공원, 서5층석탑을 관람했다.
----- 집으로 가져온것들 -----
1. 서울 -> 김제 무궁화호 승차권
2. 김제 지평선축제 관련 안내문 2장
3. 김제 -> 광주 무궁화호 승차권
4. 운주사 입장권
5. 광주 -> 영등포 무궁화호 승차권
* 현지에서 반갑게 맞아준 이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 이 후기는 2002년 10월 8일에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