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벧전 2:4-10)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성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아멘!
오늘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하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따라서 선포하겠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여러분! 아멘입니까?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되기 위해서, 우리의 심령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 능력 있는 믿음으로, 날마다 살아가는 모든 삶에 기적이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옛 솔로몬 성전을 받치고 있는 축대! - 유명한 통곡의 벽이 있습니다. 거기 다녀오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 통곡의 벽에 가면 돌멩이와 돌멩이 틈 사이가 새하얗습니다. 통곡의 벽 사이에 기도문을 써서 꽃아 놓으면 응답이 잘 된다는 믿음으로, 하연종이에 쓴 기도문을, 저마다 꽃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성지순례를 했던 우리교회 식구들도 기도문을 적어 꽂아 두었습니다.
또 어떤 분은 그 통곡의 벽 아래 있는 책상 위까지 올라가서, 남들보다 더 높은 곳에 넣어두었습니다. 아마 그렇게 하면 더 잘 응답되리라는 생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체신부인 베제크에서 통곡의 벽 옆에 팩시밀리를 설치해 놓고, 유대인들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자신의 기도 내용을 팩스로 보내주면, 수수료를 받고 대신 꽂아 줍니다. 신앙을 이용해 돈을 벌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의 믿음이 과연 온당한 믿음일까요?
아주 예쁘게 생긴 여전도사가 찾아와 자기는 다른 교단의 신학대학을 졸업한 사람으로서, 약 한 달 전부터 작정기도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 교회 전도사로 봉사하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 전도사님을 모실 계획도 없지만, 교단도 - 신학교도 맞지 않아 되돌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여전도사님이 돌아가면서 제가 들을 만큼 ‘참, 그 목사 믿음 형편 없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서 제 믿음을 점검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여전도사님의 믿음이 잘못 된 것인지, 진짜로 내가 믿음이 없는 건지? 그렇다면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는 어떤 믿음이 잘못 된 것 같습니까?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윈, 딸을 하나 둔 여 성도님이 재혼을 하려고 기도하면서, 재혼 대상자는 신학교 교수요. 목사요. 자식이 없는 홀아비였으면 좋겠다는 내용으로 기도했답니다. 이 기도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에게 그런 남편감을 주시려면, 신학교 남자 교수요. 목사 가운데, 누군가의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죽어야 기도응답이 됩니다. 그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누군가가 그렇게 죽어야만 이루어지는, 정말로 무서운 기도입니다.
또 간에 문제가 있어서 병원에 입원한 청년이 있었는데, 남의 간을 이식받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눈만 뜨면 빨리 간 좀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야 합니까? 누군가가 죽어야 응답이 되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과연 이런 생각과 기도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말하는 올바른 믿음이겠습니까? 바로 이런 이기적인 잘못 된 믿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과연 이런 믿음을 위해서,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까요?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는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의 수준까지 계속 성장해 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 어떤 순간에라도 정체되는 믿음은 바른 믿음, 성숙한 믿음, 옳은 믿음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믿음이라고 해서 다 같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옳은 믿음이 있는가 하면 잘못된 믿음이 있고, 성숙한 믿음이 있는가 하면 미성숙한 믿음이 있으며, 하나님께서 좋아라 기뻐 춤추시는 믿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믿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춤추며 기뻐하시는 성숙한 믿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미성숙한 믿음입니까? 우리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르기까지, 정말로 올바르게 성숙하고, 완성되어지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믿음의 시작과 동기가 분명하고 올바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믿음을 갖기 위해, 어떤 동기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까? 한마디로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첫째로, 인간인 나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는데도, 사람들은 스스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어느 교회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젊은 여자 강사분이 와서, 자녀교육에 대해 열심히 강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한 시간 내내 확신을 가지고 자기가 전공한 내용을 강의한 주제는 “이렇게만 하면, 자녀들이 절대로 속 썩이지 않고, 평생을 하루도 허비함 없이 잘 살 것이라.”는 명 강의였습니다.
그러면서 “도대체 어떻게 자식을 키웠길래 자식 때문에 속을 다 썩느냐?”며 책망까지 하였습니다. 강의가 끝난 후, 나이가 많으신 한 집사님이 그 강사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자제분이 몇입니까?’ “예 한 명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지금 몇 살입니까?” “예, 이제 만 두 돌이 지났습니다.” 그 집사님은 아무 말 없이 그냥 돌아섰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네 자식도 커 봐라.” 하는 말입니다.
두세 살 때 이쁘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다 천사처럼 이쁘고, 귀엽고, 말도 잘 듣습니다. 그러나 크면 자식이 부모 마음대로 됩니까? 단지 엄격하게 키운다고 해서 그 자식이 바로 됩니까? 부모로서 금쪽같은 내 자식이기에, 이쁘게, 바르게 잘 키워보고 싶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정말로 온 정성과 사랑을 다 쏟아 부었어도, 자식을 위한 부모로서의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식이 크면, 그 자식을 위해서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돈으로 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대한민국 부모들 중 약 70%가 죽을 때까지 자식에게 돈을 주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산다는 동네인 강남에서, 여섯 살 아이가 유괴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범인을 잡고 보니 아이를 벌써 살해해 버렸습니다. 그래 놓고서 부모에게 돈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 범인은 살려달라는 그 아이를 옷 넣는 트렁크에 넣은 채로, 자동차 뒤 트렁크에 싣고 다니다가, 경찰관의 검문이 두려워서, 살아 있는 아이가 들어 있는 채로 트렁크를 한강에 던져 버렸습니다.
나중에 범인이 잡히고 경찰이 건져 올린 그 트렁크 안에서 아이가 어떤 자세로 죽어 있었는지 아십니까?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살아보려고 트렁크 바닥을 열손가락으로 쥐어뜯으며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 자식의 모습을 본 부모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범인을 향한 분노는 죽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부모로서 자신의 아이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자책감과 한계를 느꼈을 것입니다. 모 고등학교 학생이 고층 아파트에서 떨어져 자살했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이유는, 같은 학급의 폭력 학생들에게 찍혀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자식이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을까 말까? 생사를 놓고 고민하고 있는데, 부모는 그걸 몰랐습니다. 자식은 자기 방에 들어가서 자살을 결심하고, 마지막 유서를 써 놓고 뛰어내리려고 준비하는데도, 그런 자식의 자살준비를 부모는 전혀 모르는 채, 잠 잘 자라고 인사하고 들어가서 잠을 잤답니다. 이처럼 우리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우리 자식들을 100% 보호할 수도 없고, 책임질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능력으로 가정을 바로 세울 수 있습니까?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물론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보겠다고 노력은 합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동네, 특히 여성들이 지상낙원으로 생각하는 로망! -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산다는 서울 강남의 주부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는데, 70%가 이혼하고 싶다고 응답했답니다. 그리고 결혼 전으로 돌아간다면 지금 남편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60%가 응답했고, 25%는 결혼하게 될, 기회가 다시 주어질 경우 계약결혼을 하고 싶다고 했답니다. 모두가 가정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 개인의 능력으로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습니까? 내 능력으로 내 머리에 흰머리를 막을 수 있습니까? 내 능력으로 내 이마에 주름살을 막을 수 있습니까? 1년, 10년, 화살같이 빠른 세월이 지나면서, 급격하게 쇠퇴해 가는 나의 기억력을 붙들 수 있습니까? 죄송합니다만, 60살 전만 해도 이렇게 강단에 서면, 성도들의 출석과 결석을 한 눈에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린 후, 서재에 가서 눈을 감으면 첫줄에 앉아 계시던 분부터 눈앞에 죽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날 나오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 머리에 탁 떠오릅니다. 그래서 전화하면 영낙없습니다. 제가 그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지 아십니까? 솔직히 기억이 잘 안 납니다. 그렇다고 결석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기억력이 100%이신 우리 하나님이 다 헤아리고 계십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 다 될 것 같지만, 사실 막상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나의 능력의 한계를 알게 될 때, 비로소 내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고, 나 자신은 물론 내 자식과 내 가정과 내 인생을, 온전히 하나님께 다 맡기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던 아침은,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던 아침이었습니다. 프로 어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능력의 한계를 통감하던 바로 그 아침에,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만약 그 날 밤에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았더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갓난아이들이 부모를 전폭적으로 의뢰하는 것은, 자기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저귀를 갈거나 젖을 먹거나, 부모가 다 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아이는 부모를 100% 신뢰하고 맡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내 능력의 한계를 알면, 예수님을 100%로 신뢰하고 맡기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 우리는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합니다.
둘째로, 인간인 나의 생명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명을 고쳐 주시는 놀라운 기적이 나옵니다. 그들이 나병 환자인 상태로 있을 때에는, 얼마나 열렬히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사모했습니까? 나병 환자가 마을로 나오면 돌에 맞아 죽는데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 치유 받은 아홉 명은, 나병이 낳은 즉시 예수님을 팽개치고 가버렸습니다. 이제 나병이 나았으니, 얼마든지 내 힘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능력의 한계, 생명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암에 걸렸다가 믿음으로 기도하고, 성경공부를 하는 동안 치유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온 성도들이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치유를 받은 그 사람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떠났고, 교회를 떠났고, 병을 얻기 전에 내연의 관계였던 여자를 찾아가는 타락이었습니다. 몸에 암 덩어리를 가지고 있었을 때에는 그토록 애절하게 주님을 부르던 사람이, 주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는 사람다움이 무엇인지를 몰랐고, 더 나아가 생명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모두 죽습니다.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죽을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치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착각하면서, 여전히 죄를 질 생각부터 합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죽지 않을 것처럼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결국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매일 매일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살아있는 내 얼굴을 가꿉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꾸어도 세월이 지나면, 우리는 모두 흙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우리 모두는 죽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 존재라는 것, 오늘 저녁에라도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생명되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됩니다.
창세기 4장 26절을 보면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이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찾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창세기 4장 26절에 가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여호와를 부른 것입니다. 그 때가 에노스 때입니다. “에노스”라는 단어를 히브리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언제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과, 죽음이 남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며, 오늘이라도 나는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생명의 한계를 알 때,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셋째로, 인간의 의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저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장례도 많이 집례하고, 마지막 죽어 가는 분들의 임종도 많이 지켜봅니다. 그런데 지금껏 죽음을 앞둔 사람이 ‘아, 그 때 천만 원만 더 벌었어도!’ 하면서 후회하면서 죽거나, ‘그 때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해서 그 직책까지 올랐어야 했는데’하면서 죽는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랑해야 할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눈물을 흘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을 후회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목사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고 선포하면 얼굴이 환해집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은 그 누구나 죽음 앞에 서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죽음 앞에 서면, 자기 스스로 결코 완전한 의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죽음이 임박해질수록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9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아멘입니까?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백성, 그의 백성으로 불러 주셨는데, 그 이유는 우리를 죄로부터 불러내어, 구원의 빛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죄인 된 우리가 어떻게 빛 가운데로 인도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습니까? 우리가 머리로 지은 죄를 속죄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왜 손에 못이 박히셨습니까? 우리가 손으로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왜 발에 못이 박히셨습니까? 우리가 발로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왜 옆구리를 창에 찔리고, 물과 피를 -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쏟아 내셨습니까? 우리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썩어 문드러질 이 육체로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철저하게 형벌 받아 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씻어 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의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뵈올 수 있고, 우리가 만난 예수님으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샌프란시스코 밑에 있는 카멜이라는 조그만 도시에 가면, 수도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수도원에서는 여러 물건을 전시해 두었는데, 옛날 수도사가 신던 슬리퍼 하나가 벽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 벽에 걸린 슬리퍼를 보면서 두 가지를 느낍니다. 하나는 우리 인간이 아무리 잘난 척해 봐야, 슬리퍼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슬리퍼는 남았지만 그 슬리퍼 주인인 인간은 이 세상을 이미 떠났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슬리퍼가 아무 의미 없이 놀러 다니면서 신었던 슬리퍼라면, 왜 거기 걸려 있겠습니까? 그 슬리퍼의 주인! - 그 슬리퍼를 신었던 수도사가 오직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바른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바른 믿음을 유산으로 남기는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에,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생명에도 한계가 있기에,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의에도 한계가 있기에,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왜 내가 예수님을 믿는지, 내 믿음의 동기를 분명히 알고, 주님을 바르게 만나고, 바르게 섬기고, 바르게 살다가,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 후회함이 없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예수님 앞에서 면류관을 쓰고, 당당하게 우뚝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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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이 없습니다 기도 부탁드립니다
먹을게 없어요,,,아무리 애써도 후원이 없습니다
본 카페의 후원을 부탁 드리는 글입니다
후원을 부탁드립니다..굶어 죽을 처지입니다
카페지기는 살기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1만원 이라도 도와주시면 카페지기는 큰힘을 얻습니다
건강문제로 박스나 고물도 줍지 못합니다
앿값이 없는데 먹을것을 사야합니다 오늘은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용기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먹을것도 못사고 공과금도 밀리고 치료비도 없습니다
공지글에 수급자에서 탈락되는 이유를 올렸습니다
요즘은 건강문제로 병원에 다니고 있어 카페일을 많이 못합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코리아 카페를 도와주실분을 기다리고 작정기도합니다 매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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