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서 바라보는 저녁 구름
- 박희병 지음, 《연암을 읽는다》, 돌베개, 2007.
류인혜
무조건 적응해야 할 지금 이 시대의 상황이 심각하다. 개인이 누려야 할 자유로운 행동에 제약을 받는 요즘, 생각들도 함께 잠잠해진다. 무료한 듯 보내다가 이렇게 긴 시간을 마음껏 활용할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루어두었던 《열하일기》에 대한 원고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미처 못한 숙제가 있는 듯 늘 걸리던 부분이었다. 연암 박지원과 관련된 한글 파일의 자료들을 살피니 부족한 부분이 눈에 뜨인다. 관련된 책을 다시 읽으며 내용을 다듬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마침 도서관이 열려 필요한 책을 대출할 수 있다. 도서관에 없는 책은 중고서점에서 몇 권 사 왔다. 원고를 보충할 참고자료 중에서 먼저 《연암을 읽는다》에 집중한다. 연암의 산문이나 시를 수록한 책이 많지만, 이 책은 연암의 산문 스무 편만 집중하여 읽고 있으며,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모아놓은 자료가 풍부하다.
책의 제목 《연암을 읽는다》의 1차적 의미는 바로 연암의 뛰어난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뜻이다. 저자의 ‘읽기’는 바로 ‘연암 알아가기’이며, ‘문’으로 표현된 연암의 글을 읽음으로써 연암 박지원의 사유(思惟)와 그의 생애, 교유 관계, 문예 미학 등을 총괄해서 읽어낼 수 있다고 소개한다.
저자는 연암의 뛰어난 문장의 정독을 위해서는 단락별 번역·주해·평설·총평이라는 분석의 방식으로 연암의 글을 해설하고 있다.
‘주해’에는 한 편의 글을 여러 단락으로 나누어 해당 단락에 등장하는 고유명사(인명, 지명 등)와 용어를 풀이하여 본격적으로 작품을 분석하기에 앞서 사전 지식을 보충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평설’에서는 본격적으로 해당 단락의 내용을 분석하고, 아울러 연암이 이 글을 쓸 당시의 배경(교유 관계, 연암의 형편 등), 연암의 생각 등을 다른 문집의 자료들과 함께 비교해보기도 하고, 문장 구조를 분석하기도 하는 등 자세한 내용 분석이 이어진다.
‘총평’에서는 필자의 작품에 대한 평가, 그리고 창강 김택영,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 등 여러 문인의 연암 글에 대한 평가를 담았다고 설명한다.
책에 실린 스무 편의 글 중에 첫 번째 읽어가는 「큰누님 박씨 묘지명」은 연암의 산문을 소개하는 책에서 저자들이 빼놓지 않고 언급하는 글이다. 《연암을 읽는다》를 소개하면서 이 글의 해설을 보기로 삼는다.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
유인(孺人) 휘(諱) 모(某)는 반남(潘南) 박씨인데, 그 동생 지원(趾源) 중미(仲美)가 다음과 같이 묘지명을 쓴다.
유인은 열여섯에 덕수(德水) 이씨 이택모(李宅模, 자는 伯揆)에게 시집가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두었으며 신묘년(辛卯年) 9월 1일 세상을 뜨니 나이 마흔 셋이었다. 남편의 선산은 아곡인바 장차 그곳 경좌(庚坐) 방향의 묏자리에 장사 지낼 참이었다.
백규는 어진 아내를 잃은 데다가 가난하여 살아갈 도리가 없자 어린 자식들과 계집종 하나를 이끌고 솥과 그릇, 상자 따위를 챙겨서 배를 타고 산골짝으로 들어가려고 상여와 함께 출발하였다.
나는 새벽에 두뭇개의 배에서 그를 전송하고 통곡하다 돌아왔다.
아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에 얼굴을 단장하시던 일이 마치 엊그제 같다.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는데, 발랑 드러누워 발버둥을 치다가 새 신랑의 말을 흉내 내 더듬거리며 점잖은 어투로 말을 하니, 누님은 그 말에 부끄러워하다 그만 빗을 내 이마에 떨어뜨렸다. 나는 골을 내 울면서 분에다 먹을 섞고 침을 발라 거울을 더럽혔다. 그러자 누님은 옥으로 만든 자그만 오리 모양의 노리개와 금으로 만든 벌 모양의 노리개를 꺼내 나를 주면서 울음을 그치라고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스물여덟 해 전의 일이다.
강가에 말을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銘旌)이 펄럭이고 배 그림자는 아득히 흘러가는데, 강굽이에 이르자 그만 나무에 가려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문득 강 너머 멀리 보이는 산은 검푸른 빛이 마치 누님이 시집가는 날 쪽진 머리 같았고, 강물 빛은 당시의 거울 같았으며, 새벽 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울면서 그 옛날 누님이 빗을 떨어뜨리던 걸 생각하니, 유독 어릴 적 일이 생생히 떠오르는데 그때에는 또한 기쁨과 즐거움이 많았으며 세월도 느릿느릿 흘렀었다. 그 뒤 나이 들어 이별과 근심. 가난이 늘 떠나지 않아 꿈결처럼 훌쩍 시간이 지나갔거늘 영제와 함께 지낸 날은 어찌 그리도 짧은지.
떠나는 이 정녕코 다시 오마 기약해도
보내는 자 눈물로 옷깃을 적시거늘
이 외배 지금 가면 어느 때 돌아올꼬?
보내는 자 쓸쓸히 강가에서 돌아가네.
- 《연암을 읽는다》 15~16쪽
해설의 진행 형식은 먼저 이렇게 전체 원문을 제시하고 다음에 문장을 조금씩 나누면서 주해를 달아 단어와 내용을 설명한다. 그 다음에 평설이 나온다. 저자가 연암을 읽어가는 글의 구조를 알기 위해서 첫 문장에 대한 주해와 평설을 옮겨 온다.
유인(孺人) 휘(諱) 모(某)는 반남(潘南) 박씨인데, 그 동생 지원(趾源) 중미(仲美)가 다음과 같이 묘지명을 쓴다.
주해: ‘묘지명’이란 죽은 사람의 이름·신분·행적 따위를 기록한 글로, 보통 돌이나 도편(陶片 도자기 조각)에 새겨 무덤 속에 넣는다. 묘지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부분엔 죽은 이의 이름과 행적을 산문으로 서술하는바 이를 ‘지(誌)’라 하고, 뒷부분엔 죽은 이에 대한 칭송을 운문으로 붙이는바 이를 ‘명(銘)’이라 한다.
조선 시대에는 남편의 품계에 따라 아내의 작호(爵號)가 정해졌다. ‘유인’은 원래 정9품 및 종9품 문무관 처에 대한 작호인데, 생전에 벼슬하지 못한 양반의 처에 대해서도 높이는 의미에서 신주(神主)나 명정(銘旌)에 이 말을 사용했다. 연암의 큰누님이 돌아가셨을 당시 그 남편 이택모는 아직 아무 벼슬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후자의 용례로 쓰였다.
‘휘’는 원래 ‘기피한다’는 뜻인데, 보통 죽은 이의 이름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전근대 동아시아 문화는 남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큰 실레라고 생각했기에 ‘이름’을 ‘휘’라고 했다.
‘반남’은 박씨의 한 본관인데, 예전의 반남현, 즉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에 해당한다. 반남 박씨는 조선 후기에 유력한 벌열 가문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중미’는 박지원의 자(字)다.
평설: 대단히 절제되고 무미건조한 어조로 서두를 열고 있다. 여느 묘지명 같으면 이 대목에 대개 유인의 남편은 누구이며, 아버지는 누구이고, 어머니는 누구라는 사실 따위가 언급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연암은 이런 부분을 과감하게 생략해 버리고, 유인과 자신의 관계만 밝히고 있다. 대단한 파격이다. 이 파격성은 고도로 계산된 것으로, 이 글이 장차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고 구성될 것인지를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 《연암을 읽는다》 16~17쪽
저자는 「큰누님 박씨 묘지명」 전체를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이렇게 주해와 평설을 번갈아 단 후 글 전체를 아울러 총평을 넣었다. 총평에서는 당시의 큰 논쟁거리가 되었던 고문과 금문에 관한 상황을 제시하고 있지만 긴 내용은 생략하고 박지원이 주장한 ‘법고창신론’ 부분을 옮겨왔다.
연암은 대략 30세 이후 창작 방법을 둘러싼 이 문제에 대해 스스로의 입장을 확립하였다. 그것이 저 유명한 ‘법고창신론’(法鼓創新論), 즉 ‘옛을 본받아 새로움을 창조한다’는 명제다. 연암은 일방적으로 고문만 추구할 경우 격식에 빠져 창조력을 잃기 쉽고, 반대로 금문만 추구할 경우 경망스럽게 되거나 고전적 깊이를 결여하게 되기 쉽다는 점을 정확히 간파하고, 이 둘을 지양하여 변증법적으로 통일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바, 그것이 곧 법고창신론이다. 연암이 제창한 이 법고창신론은 중국까지 포함된 당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가히 최고 수준의 문예이론이었다. 연암이 35세 때 쓴 「큰누님 박씨 묘지명」은 연암의 이런 사고가 한창 무르익은 단계의 문장이다. - 《연암을 읽는다》 30쪽
총평의 마지막에는 연암의 제자이자 절친인 이덕무가 쓴 비평을 실었다.
정을 표현한 말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게 해야 비로소 진실되고 절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선생(연암)의 시를 읽고서 눈물을 흘린 적이 두 번이었다. 처음은 선생께서 그 누님의 상여를 실은 배를 떠나보내며 읊은 다음 시, 즉 “떠나는 이 정녕코 다시 오마 기약해도 /보내는 자 눈물로 옷깃을 적시거늘 / 이 외배 지금 가면 어느 때 돌아올꼬? / 보내는 자 쓸쓸히 강가에서 돌아가네”라는 시를 접했을 때다. 나는 이 시를 읽자 눈물이 줄줄 흘러내림을 금할 수 없었다.
이 글은 채 3백 자도 안 되지만, 진정(眞情)을 토로해 문득 수천 글자나 되는 문장의 기세를 보이니, 마치 지극히 작은 겨자씨 안에 수미산(須彌山)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겠다. - 《연암을 읽는다》 30~31쪽
연암의 열린 사고로도 적응해내기 어려웠던, 조선이라는 나라의 시대상이다. 찬찬히 읽어가노라면 연암이 지혜롭게 대처했던 방법들이 글을 통해 확연히 잡혀 온다. 저자는 연암의 문장을 읽는 감정을 이렇게 말한다.
연암의 산문은, 들판에 홀로 서서 바라보는 저녁 구름과 같다. 어둠이 내리기 직전까지 약 30분 가까운 동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해가는 저 구름의 미묘한 색조(色調)하며 자태를 보고 있노라면, 자신은 그만 휘발되어 사라져 버리고, 내가 꼭 구름이 된 듯한 느낌이 들곤 하지 않던가. 그 경이로운 느낌과 황홀감이라니! 그리고 사위(四圍)가 완전한 어둠 속에 잠겨 비로소 정신을 차렸을 때 엄습하는 그 쓸쓸함과 묘한 여운이란! 아마도 유한한 지상의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에서 우리는 그런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리라. - 《연암을 읽는다》 「책머리에」에서
저자는 연암을 스승으로 삼아 그의 자취를 따라다닌다. 1998년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지은 『과정록(過庭錄)』을 옮겨 《나의 아버지 박지원》이라는 제목으로 발간했다. ‘과정록’은 자식이 아버지의 언행과 가르침을 기록한 글이라는 뜻이다. 또 연암서거 200주기(2005년)가 되던 해 서울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을 옮겨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를 발간했다. 필자가 가진 그 책은 2006년 2월 개정판으로 나온 것이다.
필자는 긴 세월 연암을 뒤좇아가며 끝없이 이어지는 자료들에 대한 욕심으로 제풀에 지쳐버렸다. 몇 년의 휴식기를 지난 후 다시 연암을 마주 대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연암의 정직한 글들은 들판에 서서 세상을 읽어나가던 필자의 황망한 정신과 여린 마음을 채워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