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에 관한 시모음 33)
동백꽃 /신현정
눈 나리어 나리어
세상의 길들이 다 사라진 거기
어느 날 문득 그녀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나를
그리고 그녀가 무슨 인기척에 새벽을 나와 볼 적에
그야말로 섬뜩 놀라 자지러질 발자국이라도 찍어 놓고
그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갈 것을 궁리 중인데
어쩔거나
아 동백꽃이나 꽝 찍어 놓아야겠다.
동백꽃 /유순희
동백섬에 동백꽃이
피고 지고 또 피고
바람 좋고 볕 좋은
어느 날에
하늘도 맑아라
딱따구리 따다닥
종달새 쫑쫑
삐치삐치 모를 새
까악 깍 까마귀까지
머물다 퍼지는 동백 향
동백 1 /반태권
사철 푸른 소나무 아래
주저리 주저리 꽃을 연 동백
새빨강 이파리
노오란 수술대
그곳에서 높푸른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혼자 스스로 힘을 내고
제 몸보다 무거운 눈을 이고도
가만히 서 있지 못하고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오늘 날 저물었지만
그것 개의치 않고
눈물 같은 눈물이 어리듯
내 가슴 속엔
어머니께서 머리에 바른
동백기름 빈병이
옛 생각을 나게 합니다
빌어먹을 동백꽃 /유홍준
동백꽃 한 송이가 툭 떨어집니다 위층 사는 백수가 동백이파리 같은 피크를 쥐고 뚱땅뚱땅 기타줄을
퉁길 때 동백꽃 한 송이가 툭 떨어집니다 막 이혼한 여자가 옷가지를 챙겨 덜덜덜덜 가방을 끌고 지나갈
때 동백꽃 한 송이가 툭 떨어집니다 209동 경비아저씨의 졸음이 무겁고도 무거운 머리통을 떨어뜨릴 때
동백꽃 한 송이가 툭 떨어집니다 끼이익, 어디선가 다급하게 브레이크 밟는 소리 들릴 때 동백꽃 한 송이
가 툭 떨어집니다 아날로그 시곗바늘 세 개가 잠시 정오에 모였다가 째까닥 떨어질 때 동백꽃 한 송이가
툭 떨어집니다 앞치마 두른 내 여자가 분리수거통을 열고 음식물쓰레기를 쏟아부을 때 동백꽃 한 송이가
툭 떨어집니다 지랄하고는 허리가 부러졌나, 하루종일 드러누워 지내는 니트족 내 아들놈이 리모컨을 돌
릴 때 떨어집니다 채널이 바뀔 때마다 떨어집니다 동백꽃 한 송이가 툭 떨어집니다 에라 이 빌어먹을, 아
무짝에도 쓸모없는
동백꽃 /윤용운
동백꽃이
아름다운 거는
눈속에 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동백꽃이
행복한 거는
떨어져도 꽃동산이
되기 때문이다
동백꽃이
사랑스러운 거는
가슴속에
동백이 있기 때문이다
동백꽃이
아픈 것은
까맣게 멍들은
내 가슴이기 때문이다
동백꽃 /유영서
요염하다
여인네
립스틱 짙게 바른
붉은 입술
머나먼 길
해풍 헤치며
달려온 남정네
포개진 입
숨소리 거칠다
물씬하다
바닷냄새
물오른 몸뚱어리
어쩌지 못하고
차가운 바닷가
뜨겁게 활활
애 절 타
사랑 한줄기
목이 마른 긴 겨울밤
동백꽃 /임재화
매서운 바람 자주 불어도
오히려 그대의 모습
오롯이 웃음을 머금고
차가운 바람 앞에도
그대의 맑은 얼굴 붉은색으로
차츰차츰 물들어갑니다.
한 송이 외로운 동백꽃
지조와 기개 서린 모습으로
온몸에 위엄이 가득합니다.
쉴 새 없이 찬바람 불어도
그대의 흔들림 없는 모습
역시, 동백꽃이라 부르렵니다.
선운사 동백나무 /허청미
오백 살 여자가 아이를 뱄다고
노산(老産)의 산통이 온 산을 흔들 거라고
동박새는 제 부리를 콕콕 쪼아
무성한 소문을 전송하네
분만을 준비하는 동백 숲속
앙칼진 꽃샘바람이
이월의 짧은 꼬리를 뜯고 있다
늙은 임부는 진통이 와 몸을 떨고
언 산방에 불을 지피는
오후의 햇살
오! 눈부셔라
저 선홍의 무녀리
산방 문이 열리네
선운사 뒤란에 불이 붙겠네
동백꽃불 속 어디쯤
내 어머니 꽃등 하나 켜고 계실 것도 같은
환생의 씨앗 품고 모질도록
동백나무는
긴 겨울밤 깨어있었다
동백꽃 /최원종
빨 알간 동백 꽃잎이 추울까
하얀 털실의 모자를 쓰고
노란 입술만 내어놓고
춥다고 재잘거린다
사시사철 푸른 잎
언제나 청춘이라 생각했는데
늙어 가는 줄 모르게
나이는 먹어 가고
묵은 잎 세월의 무게가 무거웠던지
하나씩 내려놓는다
하얀 설원에 한잎 한잎 떨어지는 꽃잎
설원에 떨어진 꽃잎은
빨 알간 립스틱으로 분칠한다
떨어진 동백 꽃잎 하얀 눈밭을
빨 알게 물들이고
물들여진 눈가루는 바람에
술에 취한 모습으로
비틀비틀 힘겹게 날지 못하고
걸어가기도 힘든가 보다
하얀 눈 속에 숨어 있는 동백꽃은
눈 속의 달콤한 눈물을 먹었는지
오동통하게 살이 오르고
노란 꽃입술은 따스한 햇볕에
진한 키스를 하려고
길게 입술을 내밀고 있네
동백꽃 /문해관
바람 분다
넌츨넌츨
땅 위로 떨어지는 꽃잠
이불 없이도
참, 잘 자는 김영교의 꽃잠.
지독하게 추운 어느 날
눈이 많이 오던 날
어머니께서 기침을 하시더니
각혈까지 쏟더니
백설 위에
빨간 꽃, 피었다.
동백꽃 /최명운
달갑고 산뜻해서 곱다
진초록 잎 사이로
선홍빛 동백꽃 티 없다
살갗이 찢어질 듯 강추위라
맨살도 내놓지 못하는데
속살을 내놓고 웃는 넌
의젓하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사군자를 뜻하지만
칼바람도 누그러뜨리고
혹한 설한풍에 핀
허물 없이 깨끗한
그 어떤 꽃에 견줄 수 없는
과히 으뜸의 겨울꽃이다~
동백꽃 /정연복
붉은 핏덩어리 같은
동백꽃 꽃말을
오늘에야
뒤늦게 알았다
'그대만을 사랑해.'
그래
사랑이었구나
단 한 사람을 위해
온 마음 모아 살았기에
저리도 붉게
저리도 뜨겁게
활활 불꽃 되었네
불타는 심장 되었네.
동백꽃 지다 /이승은
수취인 불명으로 돌아온 엽서 한 장
말은 다 지워지고 몇 점 얼룩만 남아
이른 봄 그 섬에 닿기 전, 쌓여있는 꽃잎의 시간
벼랑을 치는 바람 섬 기슭에 머뭇대도
목숨의 등잔 하나 물고 선 너, 꽃이여
또 한 장 엽서를 띄운다, 지쳐 돌아온 그 봄에.
동백꽃 피고 지는 사연 /이경화
순정을 바쳐 맹세한 언약
물거품처럼 사라질 때
감당할 수 없는 고뇌의
시간은 어둠의 사유가 된다
비정한 현실 차디찬 눈빛
외면당한 빈 가슴에
검붉은 멍울이 차오르면
어리석은 미련은
치열하게 피었다 지는
열망의 꽃을 피운다
절망을 향해 온몸으로 저항하던
정열의 꽃잎은
잔인한 바람의 칼날에
심장을 베여
장렬하게 사그라지고
선연한 핏빛 그리움의 잔해가
나뒹구는 하얀 추억의 모래밭에
부르다 멈춰버린 애모의 노래는
향기 잃은 가슴에
고독한 진혼곡이 되어
쓸쓸하게 흐른다.
동백이 지던 날 /이도연
원양의 바다를 달려온
해풍이 머무는 끝자락
고통과 환희의 절정으로
붉은 입술이 함박눈처럼 피어나
바닷가 동백은
누구의 시선도 아랑곳없이
저마다의 계절로 붉게 물들어
등불처럼 찬란한 계절을 밝힌다
이름 모를 바다
알 수 없는 섬에서 불어온 바람에
온전히 제 몸을 맡기고
동백은 피어나고 뚝뚝 떨어진다
개별적이지만 개별성이 없는 동백의 낙화는
스스로 자진을 자축하며
흙으로 산화하기를 주저하지 않아
그 들만의 축제를 즐긴다
쪽빛 노을이 동백꽃 바람으로 지던 날
새로운 계절의 잉태를 위한
동백의 향연은 기꺼이 멈추지 않아
사람들은 그것을 봄이라 부른다.
동백꽃이 지지 않는다 /노태맹
5월이 다 지나도록
아파트 화단 동백꽃이 지지 않는다.
져야 할 것이 지지 않으니
끔찍하고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건 확실히 강박장애다.
난 중력에 병들어 있는 거다.
동네 돼지 수육집 혼자 막걸리를 마시며
이제 아무에게도 나를 이해시키지도
누구에게도 나를 설명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건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거다.
그러나 革命이
붉은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든
동백꽃처럼 그 자리에서 지지 않든
그건 동백이 가고 그 동백을 만나러 오는
봄바람의 몫이다. 모가지를 꺾고
붉게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봄바람의 동백꽃들 몫이다.
막걸리 잔에 앞머리 적시며 졸다가
나 문득 한 소식 본다. 사랑이란
그 사랑을 타인으로 놓아주는 것
지지 않는 동백꽃을
그저 붉은 동백꽃으로 바라다보는 것임을.
동백을 꺾다가 /김효선
잘 지내냐는 안부를 물어올 때
홧김에 절벽으로 뛰어내리고 싶었지
허공을 뒤집으면 공허해지는
봄이 오고 있었으니까
우린 서로에게 여전히 맛있을까
넌 엉덩이를 뜯어먹어
난 살점 없는 갈비를 뜯을게
얼마동안 풍경은 질리게 가쁜 숨을 뱉어내겠지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는 밤이었어
등이 가려워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절벽을 알고 나면 꽃은 우스워져
붙잡을까 손목을 잘라버린 너를
사랑한다 씨발ㅡ
목숨 걸고 뛰어내렸는데
아직,
허공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