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던져진 그 깊은 웅덩이에서도”
(시 130편) “1.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2.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5.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6.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7.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8.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
(고후 4:13-5:1) 질그릇에 담긴 보배 13. 기록한바 내가 믿는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15.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함이라“ 겉 사람 속사람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시편의 말씀 시 130
금주 시편 말씀은 성전에 올라가면서 불렀던 노래로서,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인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쓴 일종의 탄식시의 일종이다. 전반부(1-4절)에서는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고, 중반부(5-6절)에서는 더딘 하나님의 응답 때문에 하나님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마음을 아뢰고, 결론부(7-8절)에서는 자신을 향하여,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을 바랄 것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1절의 “깊은 곳”이라는 ‘미아아마킴’은 ‘깊음으로부터’라는 뜻인데, 그곳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심연의 바다를 뜻하는 말이다. 이것은 그 고통의 깊이가 얼마나 큰지를 시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시인은 지금 그런 아픔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 이 구절은 완료형 시제를 사용하는데, 히브리어 어법에서 완료형은 현재까지 계속되어 온 오랜 경험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음을 감안하면, 그의 부르짖음은 오랜 시간 계속되어 온 것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4절에서 반어적으로 “그러나”를 사용하여 다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토로한다. 그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면서, 다시 하나님을 향한 고백을 털어놓는다.
그는 어려움 가운데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채워간다. 하나님의 약속을 부여잡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마음을 토해 놓는다. 그러면서 그는 그 기다림을 파수꾼의 기다림에 비견한다. 아마도 임무 교대시간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야간 파수꾼의 마음을 통해 그의 간절함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성도들을 향해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고 권면하고 있다.
서신서의 말씀 고후 4:13-5:1
금주 서신서의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해 선포하시면서 질그릇에 보배를 간직하고 있음을 고린도 교회에 알려 주는 결론부와 같은 말씀이다. 이것은 깊은 믿음의 표현으로 우리를 살리시는 구원의 은혜가 지금 우리 가운데 임하여 있고, 우리 모두는 그 앞에 서 있음을 상기시킨다. 바울은 이것을 “믿음의 마음”(13 이라고 표현한다. 주의 은혜가 신비하고 놀라워서 자신의 생각과 관념을 벗어날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허망한 마음 때문이다. 바울도 그런 것에 사로잡혀 젊은 날을 보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다음에 그 믿음의 마음으로 서 있기에 그 마음속에는 은혜가 넘치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영광으로 나타나는데, 우리 구원의 최종적인 목적이 된다.
그러면서 겉 사람은 갈수록 낡아지고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고 표현하면서 그 은혜의 소중함을 토로한다. 지금 초대교회는 환난 가운데에서 허덕이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은 다 지나갈 것이며,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음을 고백한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쫓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것을 쫓아 살아가는 존재임을 밝힌다. 이 땅에서 안고 살아가는 모든 장막집은 유한적이고 임시적이어서, 하나님께서 친히 허락하시는 영원한 것이 나타날 때에 그 모든 것은 허망한 것임을 언급한다. 하나님이 친히 예비하신 영원한 집을 바라보기에 오늘의 모든 극한 환난은 넉넉히 헤쳐갈 수 있음을 고백한다.
복음서의 말씀 막 3:20-35
금주 복음서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신 후에 서기관들이 바알세불의 능력으로 그렇게 행하고 있다는 해석을 내렸을 때,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담고 있는 내용이다. 예수님은 여러 사역 때문에 식사할 겨를도 없이 분주하게 보내고 있었다. 아마도 예수님은 1:29과 2:1에서 언급된 가버나움에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그곳은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실 때 본부처럼 사용되던 집이다. 그곳에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했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여러 가지 정황과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서 불러 내려고 하셨는데, 이는 예수님이 귀신에 들렸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여기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범법행위를 조사하기 위해서 산헤드린 공의회의 파견을 받은 감시단이었을 것이다(7:1; 마 15:1). 적대자들의 비난은 가족들의 그런 생각을 훨씬 뛰어넘어 폄하하고 모독하는 수준의 것이다. ‘바알세불’은 헬라어로는 ‘베엘제불’의 표기이다.
이것은 ‘바알 왕자’ 또는 ‘고귀한 존재 바알’이라는 의미를 가진 가나안 셈족어의 신의 이름, ‘바알제불’(Baal-Zebul)에서 왔다. 유대인들은 이 ‘바알세불’을 귀신들의 왕, 혹은 사탄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는데, 예수님을 귀신에 사로잡혀 이런 기적을 행한 것으로 폄하시키고있다. 이것에 대해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서로 분쟁하는 집은 설 수가 없는데 어떻게 사탄의 힘을 빌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고 반문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언급하신다. 이것은 성경의 난해한 구절 중의 하나인데,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왔을 때,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인간적 관계를 전면 부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때를 알고 온전히 그것을 행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구원의 현재성과 개방성, 영적인 가족의 보편성을 일깨워 주는 말씀이다.
♣ 밥만 잘 먹더라
노래 제목이 재미있는 노래들이 있다. 언젠가 방송을 보다가 노래 제목을 듣고 웃음이 절로 나오는 것을 느꼈다. “밥만 잘 먹더라”, “총 맞은 것처럼” 저런 제목의 노래도 있구나. 대학 다니는 아들에게 한번 불러보라고 시켰더니 노래를 불러줄 생각은 안하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 아빠도 그런 노래를 좋아하세요? 그건 아빠 스타일 아닌데…….” 아들 말대로 내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인터넷 검색으로 들어봤더니 역시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래도 노랫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사랑이 떠나가도/ 가슴에 멍이 들어도/ 한순간뿐이더라/ 밥만 잘 먹더라/ 죽는 것도 아니더라.” 이별의 아픔을 겪으면서 죽을 것 같더니 그래도 살아지더라. 밥맛 잘 먹고 살고 있더라. “그래도 살아지더라.”는 반어법 속에서 거기에 담겨 있는 진한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죽을 듯 아파도 세월이 약이고, 밥만 잘 먹으면 이길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아무리 슬프고, 답답해도 “밥만 잘 먹더라.” 그러면 살 수 있다.
그러나 “총 맞은 것처럼”은 “밥만 잘 먹더라”보다 좀더 심각하다. “총 맞은 것처럼 정신이 너무 없어/ 웃음만 나와서 그냥 웃었어/ 그냥 웃었어/ 그냥 허탈하게 웃으며/ 하나만 묻자 했어/ 우리 왜 헤어져/ 어떻게 헤어져/ 어떻게 헤어져/ 어떻게/ 구멍 난 가슴에/ 우리 추억이 흘러넘쳐/ 잡아보려 해도/ 가슴을 막아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심장이 멈춰도 이렇게 아플 것 같진 않아/ 어떻게 좀 해 줘/ 날 좀 치료해 줘/ 이러다 내 가슴 다 망가져/ 총 맞은 것처럼 정말 가슴이 너무 아파/ 이렇게 아픈데/ 이렇게 아픈데 살 수가 있다는 게 이상해.” 총 맞은 것처럼 아픈데, 가슴이 무너지고 심장이 터진 것 같아도 그래도 살아진다. 사랑의 깨짐 때문에 당하는 아픔을 통해 인생길에서 만나는 아픔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총맞은 것처럼 가슴에 구멍이 나 찬바람이 일 때도 있고, 실망과 좌절로 몸을 떨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심장이 터질 것 같아도 그래도 살아진다.” 그렇게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죽도록 아픈 자리에서
그날 시인도 죽도록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그는 그 아픔의 시간을 “깊은 곳에서 부르짖나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그는 힘들어하고 아파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곳은 그가 도무지 뛰어넘을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어려움과 아픔의 문제였던 것 같다. 어쩌면 그는 아픔의 시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이리저리 헤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디에서도 도움을 주는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위로해 줄 사람을 찾았으나 그는 어디에서도 그런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문제가 더욱더 그의 삶을 조여오고 고통과 아픔 속에서 그는 갈수록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의 삶의 자리는 어려운 여건 가운데 서 있었다. 그러한 상황을 성경은 ‘광야’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거기에서 그는 방황하고 있다. 광야는 방향성을 찾기 어려운 곳이다. 이정표도 없고, 피난처도 없는 곳이지만 다윗은 그곳에서 쉼 없이 왕 되신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있다. 궁극적 실재이신 하나님을 그의 피난처로 삼고 있다.
지금 비바람이 몰아치는 무대에 서 있다. 그의 전신을 감싸는 삭풍은 온몸을 떨게 했을 것이며, 그의 가슴에는 북풍한설이 몰아치고 있었을 것이다. 사방을 아무리 크게 둘러보아도 그의 마음과 허리를 감싸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오직 외로움과 절망감밖에는 없었다. 그의 앞에는 높은 산이 겹겹으로 둘러싸여 있고, 길을 가로막고 있는 강물은 끝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길을 걸으면 가슴을 흔들고 들어오는 외로움과 서글픔이, 옷깃에 붙은 검불처럼 그의 삶을 에워싸는 쓸쓸함을 그는 견딜 수 없어 그렇게 방황하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높이 든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자비를 구하옵나니
“능선이 험할수록 산맥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능선에 눈발 뿌려 얼어붙을수록 산맥은 더욱 꼿꼿하게 아름답다.”고 했던가? “험한 바위 만날수록 파도는 아름답다.”고 했던가?(도종환) 암초와 격랑이 많아서 시인의 삶은 더 깊이 하나님께 향하게 된다. 그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주의 은혜의 보좌를 향해 날마다 달려가는 그는 순례자였다.
그러나 하나님밖에 도와줄 분이 없어 성소로 나아가는 자리에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니 죄악으로 얼룩져 있는 부끄러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님께서 외면하신다면 자신은 더 이상 설 곳이 없는데 자랑할 것이 없는 인생이었다. 하나님께 드린 것 없는 부끄러운 손이었다. 내놓을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더 엎드려 간구하였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면서 나아가고 있다. 주님의 자비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이다. 시인은 그것을 확실하게 믿었다.
나폴레옹에게 어느 날 한 병사의 어머니가 찾아왔다. 그 병사는 전쟁터에서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탈영을 시도하였다가 붙잡혀 갇혀 있었다. 전쟁터에서 탈영은 즉결 처형인데 그 병사는 두 번이나 탈영을 감행하다가 붙잡혔으니 다른 방도가 없어 보였다. 그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나폴레옹 황제를 찾아왔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어머니는 나폴레옹에게 눈물로 구명을 위해 호소했다. “황제폐하, 제 아들을 살려 주십시오.” 그러자 나폴레옹은 단호하게 말했다. “두 번씩이나 탈영한 네 아들을 위해서 이런 탄원을 하는 것은 의롭지 않다.” 병사의 어머니는 나폴레옹에게 말했다. “황제시여, 저는 황제 폐하께 자비를 구하고 있는 것이지 의를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나폴레옹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탈영했는데, 당신 아들은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다.” 이때 그 어머니는 다시 엎드리어 이렇게 빌었다. “폐하, 자격이 없기 때문에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받을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자비가 아닐 것입니다. 내 아들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 어머니의 간절한 간구 때문에 황제는 사형을 면해 주었다. 지금 시인은 하나님 앞에 자비를 구하며 달려가고 있다. 기독교의 예배 정신이 함축적으로 담긴 기도가 자비를 구하는 기도(키리에 엘레이손)이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긍휼을 구하며 나아오는 영혼에게 자비를 구하시는 분임을 시인은 확실히 믿고 그것을 의지하며 보좌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사유하심을 믿고 보좌 앞으로 담대히 달려가고 있다.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는 곳에
하늘의 은혜는 간절히 찾고 구하는 곳에 임하는 축복이다.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객들은 함께 무리를 지어 이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의 성소를 향해 걸음을 옮겨놓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간절히 사모하는 곳에 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온 가슴으로 느끼며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이제 이렇게 고백한다. “나 곧 내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그의 마음은 이제 온전히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달려나아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주님의 말씀을 간절하게 바라며 굳게 자신을 세워가고 있다.
그렇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는 간절히 사모하는 곳에 내린다. 사모하는 영혼을 가진 사람만이 하늘에서 내리는 그 은혜를 흡수할 수 있게 된다. 물이 없어 갈급한 땅에서 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듯이 그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나아가고 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대가 있고 고백이 있다. 그렇게 어려운 자리에서 하나님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아주 오래 전 강원도 군복무 시절, 동계훈련을 나갔던 기억이 난다. 영하 25도가 넘는 날씨에서 혹한기 훈련으로 치러졌기 때문에, 그 전에는 병사들과 참호를 파고 그곳에서 일주일을 견디다 오면 되는 개념의 훈련이었다. 그러나 그 해 새로 부임한 사단장은 “전쟁 중에 참호 파고 앉아 있을 수 있느냐”면서 전쟁 상황에서 기동훈련 개념으로 바꾸어서 하도록 지침이 하달되었다. 얇은 텐트 한 장 치고 얇은 군대 담요 한 장 가지고 그 겨울을 지내는 것은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밤 12시에 출동명령이 떨어져 정해진 고지를 점령한 시간이 새벽 3시였다. 그리고 상황이 종료된 시간이 새벽 4시였다. 훈련 중이었기 때문에 불을 피울 수가 없었다. 산등성이에서 아침이 오기를 2시간 남짓 기다릴 때의 그 간절함은 얼마나 간절했는지 모른다.
시인은 지금 그런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아침을 기다리는 파수꾼의 기다림이 그에게 있었다. “하나님 없이 저는 살 수없어요. 하나님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저는 일어설 수 없어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의 간절한 기도는 그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고은 시인이 “그 꽃”이라는 짧은 제목의 시에서 노래한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시인은 평안할 때는 볼 수 없었던 그 꽃을 지금 아픔과 고난의 시간을 보내면서 보고 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고, 그렇게 간절하게 기다렸던 적이 없었는데 인생의 깊은 골짜기에서 그는 지금 그렇게 간절하게 찾고 있다.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성전을 오르면서 자기 자신을 향하여 그렇게 외치고 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함께 손잡고 성소를 향해 가는 믿음의 친구들에게 외치고 있다. 기가 막히는 웅덩이에 빠져 어찌할 바를 알 수 없는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간절하게 외치고 있다. 믿음의 공동체를 향하여 외치고 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때로는 절망의 먹구름이 내 입술을 막아 버릴 때, 고통의 눈물이 내 마음을 멍들게 할 때에 그렇게 외치고 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그는 그렇게 깊은 웅덩이에 던져졌지만 일어서고 있었다.
그의 인생은 가뭄으로 논바닥이 갈라지듯이 갈라졌다. 푸르름과 아름다운 강의 모습은 사라지고 뛰놀던 물고기와 물새도 떠났다. 그러한 때에 그는 하나님 앞에 바짝 엎드리고 있다. 그 어려움의 시간에 그곳에서 오히려 믿음으로 야윈 몸을일으켜 세워 바닥을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 믿음의 물길 하나 더 큰 강줄기로 향하고 있다. 승리의 비결은 거기에 있다. 눈길 떼지 않으시고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는 주님,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 거기에 우뚝 서 계시는 그분을 만나면 일어설 수 있다. 오늘 내 인생이 비록 가물어 말라비틀어지는 강줄기 같다 할지라도 강바닥을 파고 바다로 연결할 때 그곳에서 벌떡 일어설 수 있다. 아멘
출처: 설교전문학교 글쓴이: 새생명 축복
첫댓글 한분이라도 도와 주시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후원이 없습니다 기도 부탁드립니다
먹을게 없어요,,,아무리 애써도 후원이 없습니다
본 카페의 후원을 부탁 드리는 글입니다
후원을 부탁드립니다..굶어 죽을 처지입니다
카페지기는 살기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1만원 이라도 도와주시면 카페지기는 큰힘을 얻습니다
건강문제로 박스나 고물도 줍지 못합니다
앿값이 없는데 먹을것을 사야합니다 오늘은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용기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먹을것도 못사고 공과금도 밀리고 치료비도 없습니다
공지글에 수급자에서 탈락되는 이유를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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