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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이후로 한국 전쟁 때 제주 사람들이 빨갱이가 아닌 애국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해병대 자원 입대를 많이 했다고 들었긔
https://n.news.naver.com/article/661/0000027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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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1일 제주항, 열일곱 나이 소녀는 신병훈련소가 있는 진해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어린 딸의 해병대 입대 소식에 무뚝뚝했던 아버지도 결국 눈물을 보였습니다.
"군대 가려고 배에 타는데 우리 아버지가 독한 양반인데 눈물을 흘리시데. '하라는 대로만 다 하면 할 수 있다, 세상 어두운 일 없이 다 이겨낼 수 있다, 참고 훈련 잘 받고 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제주여중 2학년 고순덕은 해군신병훈련소 특별중대 1소대 1분대 소속 군인이 되어 최초 여성 해병대원으로서 훈련을 받게 됐습니다.
동기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축에 속했지만, 키는 가장 컸던 소녀는 훈련에서도 사격에도 능했습니다.
고 회장은 "사격 훈련을 했는데 시험도 있었다"라며, "(사격을 할 때)개머리판을 여기(어깻죽지)에 안 대면 무너져서 다친다. 사격훈련에서 100점을 맞았는데, 그땐 그것이 출세한 것만큼 좋았다. 속없이 싱글벙글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당시 훈련이 얼마나 고됐는지 당시 소대별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처음에 찍은 사진은 살이 퉁퉁한데 나중에 찍은 졸업(전역)사진은 살이 쪽 빠졌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연대책임으로 기합을 받았던 일도 떠올렸습니다.
그는 "조금만 잘못하면 신작로로 구보를 시켰다. 하나가 잘못해도 다같이 연대 기합을 받았다"라며, 특히, "카빈총을 '앞에 총'으로 해서 뛰게 했는데, 피나게 힘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고된 시간이었지만 나름 군대가 체질에 맞아 군인의 꿈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는 "기상도, 식사도 시간 정확히 딱딱 지키고 군대가 체질에 맞았다. 이왕에 총 맸으니까 대위, 소령까지 되고 싶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울러 "세상에 어떻게 여자가 해병대 맛을 볼 수 있겠나 그 시절이 아니면. 그런 경험할 수 있어서 얼마나 흐뭇한 지 몰라"라고며 자긍심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특히, "여자도 남자 같이 할 만하다. 여자도 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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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50년 8월 30일.
제주에선 남녀 학생과 젊은 교사 등 3천여 명의 청년들이 해병대에 입대했습니다.
이 가운데 여성 해병 지원자들은 모두 해병대 4기로, 126명에 달했습니다. 고순덕 회장도 이 대열에 합류해 입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전우회장을 10년 넘게 맡아온 고 회장에 따르면 126명 중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은 8명 정도라고 합니다.
생존자 중 가장 고령자는 당시 교사 신분이었다가 입대한 1927년생의 김병숙 씨라고 합니다.
이들은 1950년 9월 1일 제주항에서 LST해군함정을 타고 출발해 이튿날 경남 진해항에 도착, 진해에 있는 경화초등학교에서 10여 일간의 신병 기초훈련을 받았습니다.
이후 해군신병훈련소 특별중대로 배속돼 다시 군사 훈련을 받고 1950년 10월 10일 장교와 병사로 이름을 올리게 됐습니다.
계급은 소위 4명을 비롯해 병조장(상사) 2명, 1등병조(중사) 7명, 2등병조(하사) 9명, 3등명조(하다) 15명, 1등수병(상병) 89명 등이었습니다.
이들의 군번은 모두 '91~'로 시작하고, 소위로 임관한 간부 4명만 '81~' 군번을 부여받았습니다.
훈련을 다 받은 이들 중 상수가 부대 배치를 받지 않고 제주로 돌아갔습니다.
이에 실제 부대에 배치된 사람은 모두 76명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진해통제주정훈관(1명), 해군병원(1명), 진해근무(2명), 해군본부(27명), 진행 통제부(45명) 등에 배치돼 각각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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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950년 그시대에.. 대단하시긔
너무 멋있으시긔.. 입대 때 아버님 눈물이 어떤 눈물이었을까요 휴ㅠㅠ
와ㅜ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