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사랑하며 사는 믿음입니까?
(요 21:15-18) 내 양을 먹이라 “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서로 축복 / “잘되고 있습니다. 기도한대로 됩니다. 축복한대로 됩니다.” “선포한 대로 됩니다. 내게 은혜가 임하고 있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저를 따라서 신앙고백 하겠습니다. / “예수님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 나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 “나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 “나는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어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 “나는 예수님을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
이 예배시간은 물론 다음예배 시간까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며 사는 믿음입니까?” 하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사랑하며 사는 믿음입니까? 다함께 따라서 선포하며 고백하겠습니다. “내 믿음은 사랑하며 사는 믿음입니다.” 아멘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도대체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심과 동시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믿음은 어떻게 가지게 됩니까? 성령 충만함으로 갖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함으로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사는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사랑하며 살도록 역사하십니까? 오늘 주일 오전 오후예배 시간을 통해서 말씀드리려고 하는 주제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에게 똑같은 질문을 세 번 던지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에 베드로가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고백하자, 예수님께서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고 세 번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서의 결론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사람들을 사랑하라.” 는 것입니다.
“한 마음 한 뜻을 가지고, 주님의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모여서 예배만 드리고 헤어지면 안 됩니다. 서로 사랑한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 옆 사람과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 ‘사랑합니다.’ ‘사랑하며 삽시다.’
첫째로, 사랑하며 사는 믿음은 - 사랑하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믿음입니다.
우리 한글 성경에는 “양” 이라는 단어가 “어린양” “양” - 두 가지로만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여러 사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 번 모두 각기 다른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첫 번째 사용하신 “어린 양”은 “아르니온-arnion” 입니다. 이것은 갓 태어난 양을 말합니다. 두 번째로 사용하신 “양”은 “프로바티온 - probation” 입니다. 이것은 성장 중에 있는 양입니다. 세 번째로 사용하신 “양”은 “프로바톤 - probaton” 입니다. 이것은 성장이 끝난 어미 양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내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너의 마음에 맞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갓 태어난 “아르니온” 곧 “나보다 유치한 사람, 나보다 수준이 더 낮은 사람”도 사랑하고, “프로바티온 - 나와 수준이 비슷한 사람”도 사랑하고, “프로바톤 - 나보다 모든 면에 수준이 훨씬 더 높은 사람도 동일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대체로 우리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무시하고 함부로 대합니다. 그리고 나하고 비슷한 사람은 경쟁상대로 생각하며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은, 시기와 질투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괜히 트집을 잡고 미워합니다. 그래서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들, 나보다 수준이, 낮은 사람들로부터 나보다 수준이 높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오늘 본문 말씀의 결론이요. 명령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바르게 사랑하는지를 잘 몰라서, 참 사랑을 베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파리의 엥발리드 성당 한가운데에는, 엄청나게 큰 대리석으로 만든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1821년에 귀양처인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어 매장되었는데, 20년 후에 그의 유해가, 프랑스 파리로 돌아올 때, 엘발리드 성당 안에 무덤을 만들고 화장한 관을 거기에 안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대리석 관에 이르는 입구 위에, 다음과 같은 나폴레옹의 유언이 크게 양각되어 있습니다.
"나는 나의 유골이 쎄느강변,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프랑스 국민 한가운데서 안식하기를 원하노라."
나폴레옹은 프랑스 국민을 그냥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프랑스 국민”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나폴레옹은 세계 정복과 거대한 제국을 세우기 위한 자기의 야망을 위해서 수없이 많은, 청년들을 전쟁터에서 죽게 했으며, 남의 귀한 집 자식들을 모스크바로 데려가서 얼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승리의 영광과 정복한 나라의 왕의 자리는 아들과 누이들의 남편들에게 다 내주었습니다.
프랑스 국민들과 젊은 군인들은, 철저하게 그의 정복욕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내가 그토록 사랑했다.” 고 말합니다. 그리고 프랑스 국민들은 그 말을 믿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정부와 국민들은, 나폴레옹의 유언과 함께 무덤을 그렇게 크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도 연설할 때마다 ‘나는 독일의 게르만 민족을 사랑한다.’ 고 말했습니다. 그 잘못된 사랑 때문에 유대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하였고, 정복한 나라의 사람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나라 독일 민족 - 수많은 게르만 민족을, 배신자로 죽였고, 전쟁터에 내몰아 죽였습니다. 일본 천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독일 사람들은 사과를 하는데, 일본은 사실인 역사도 부인합니다. 이처럼 나폴레옹의 사랑, 히틀러의 사랑, 일본 천황의 사랑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사랑도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사랑이 대부분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사랑은 결코 참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사랑을 하면서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과 부딪치고, 깨뜨리고, 상처를 주면서도, 끝까지 자기만 잘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복음서의 결론으로 주시면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너보다 낮은 수준에 있는 어린양과 같은 사람에서부터, 너보다 월등한 수준에 있는 양들과 같은, 사람들까지도 사랑하라." - 이것이 사랑하며 사는 믿음이요. 사랑하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믿음입니다.
둘째로, 사랑하며 사는 믿음은 - 먼저 찾아가는 참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요 21:1)
예수님께서는 부활소식을 듣고도 자신을 떠나 갈릴리로 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을 친히 찾아 가셨습니다. ‘너희들 그럴 수 있느냐? 그렇게 장담하더니 도망은 왜 갖느냐?’ - 책망하기 위해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배반하고 다 떠나갔지만, 그래도 그들을 너무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먼저 찾아가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우리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씩이나 찾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이 숨어 있었던 마가 다락방으로 두 번, 갈릴리로 한 번 배신한 제자들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신하고 등 돌린 제자들이었지만, 사랑했기 때문에 기꺼이 먼저 찾아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모본을 보이신 사랑하며 사는 믿음이요. 먼저 찾아가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이처럼 사랑하며 사는 믿음, 참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은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힘없는 자가 힘 있는 자를 찾아가는 것은, 아첨이거나 굴종이지, 참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배신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프랑스 파리에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모나리자” 가 있습니다. 워낙 이름난 그림이라서 크기 자체가 대단히 크리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세로 77센티미터, 가로 53cm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그 작은 그림을 가지고 왜 그리 야단스럽게 구는가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에 대한 전문가의 설명을 들은 후 "모나리자" 라는 그림 앞에 서면 전혀 달라집니다.
“모나리자” 라는 그림은 가로 세로 비율이 가장 이상적인 황금비율을 이루고 있고, 최초로 분명한, 원근법이 사용된 그림이라서, 모나리자의 눈을 어느 각도에서 쳐다봐도 시선이 맞부딪치기 때문에,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입체감이 분명히 드러난 명작이라서, 그토록 세계적인 작품이 된 것입니다.
설명을 듣고 설마 그럴 리가 있을까 생각하면서 그림 사방에서, 모나리자의 눈을 마주쳐 보았는데, 모나리자의 시선이 계속 저를 따라 움직이면서, 어느 각도에서도 정확하게 저의 눈과 마주쳤습니다. 저는 그 순간, 왜 그 그림을 세계 최고의 명화라 하는지, 왜 루브르 박물관의 많고 많은 그림 중에서, 오직 그 그림만을 방탄유리로 특별히 보호하고 있는지, 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67세에 죽기까지, 평생을 그 그림만은 자기 옆에 걸어 두고 있었는지, 왜 그가 사람을 좀 더 정확하게 그리기 위해서, 열 번 이상 사람의 시체를 해부하면서, 특히 얼굴을 왜 세심하게 관찰했는지, 왜 프랑스와 1세가, 자기 소유였던 그 그림을 온 세계 사람들이 다 보도록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했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의 시선을 따라다니며 눈을 마주치는 “모나리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가지면, 내가 먼저 찾아가서 눈과 눈을 마주하며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자꾸 믿음으로 사랑의 시선을 던져 주면, 언젠가는 사랑의 열매가 반드시 맺히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옆 사람과 눈을 마주보면서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사랑하며 사는 믿음은 - 먼저 말을 거는 참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날이 새어 갈 때에 예수에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아멘!(요 21:4,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기를 배신한 제자들을 찾아가, 먼저 사랑의 시선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찾아오신 것도 모른 채, 계속 자기들 할 일만 하고 있습니다. 저 같았으면 ‘괘씸한 놈들, 그래 너희들끼리 잘 해봐라!’ 하고 못 본 채 돌아서 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얘들아, 고기가 있느냐?" 하고 그래도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상대방이 내게 어떤 반응을 보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먼저 말을 걸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상대방이 먼저 내게 말을 걸어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불필요한 오해들만 점점 쌓여 가고, 나중에는 치유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참 사랑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 곧 참 사랑은 내가 먼저 말을 걸어 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짓고 숨어 있는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이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두려워 떨고 있는 그들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먼저 말을 걸어 주시지 않으셨다면, 아담과 하와는 거기에서 끝나 버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먼저 찾아가시고, 먼저 말을 걸어 주신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담과 하와를 먼저 찾아가 말을 걸어주셨던 사랑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금 성령으로 저와 여러분의 심령 속에 거하십니다. 믿습니까?
그렇다면 옹졸한 내 마음 가지고는 할 수 없지만, 죄인 된 나를 먼저 찾아주시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내가 너를 용서하고 축복한다.’ 고 먼저 말씀해 주시고, 지금 저와 여러분 안에 성령님으로, 오셔서 거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내가 먼저 찾아가고, 내가 먼저 말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늘 변하는 인간적인 내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사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고 말씀하시며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우리 사람을 지으시고 복을 주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선포하신 후, 천지만물을 다 맡깁니다. 그리고 그냥 “보시기에 좋았더라.” 가 아니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큼 보시기에도 심히 좋은, 선하고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처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먼저 말을 거는 참 사랑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넷째로, 사랑하며 사는 믿음은 - 필요를 채워주는 참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갈릴리바다에서 밤새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그 말씀대로 던졌더니,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양의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건 한마디로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구운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밤새 고기를 잡느라 배고픈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가져다가 먹게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제자들이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필요를 먼저 알고, 채워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하며 사는 믿음, 참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 주는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사랑은 온유하며” 라고 사랑의 속성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이 부분을 원어에 있는 대로 직역하면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 이라는 뜻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다친 사람에게 '당신 고향이 어디요? 당신을 해친 강도가 몽둥이로 때렸습니까? 아니면 강도가 칼로 당신의 몸을 다치게 했습니까? 그리고 많이 아픕니까?’하고 묻지 않았습니다. 당장 다친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응급조치였고, 사마리아 사람은 그 필요를 채워 주었습니다. 그렇게 지금 강도를 만나 많이 다친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랑을 베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주님은 진정한 이웃 사랑을 베푼 참 이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이웃 사랑을 베풀려면, 저 사람의 생명과 내 생명의 가치가 동일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생명, 자기 인격, 체면, 자존심, 자기 가족과 재산은 귀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생명이나, 인격, 체면, 자존심, 그리고 그 가족과 재산은 함부로 다룹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생명, 내 인격, 내 체면, 내 자존심, 내 가족과 재산이 귀한 줄 안다면, 다른 사람들의 생명이나 인격, 체면, 자존심, 그리고 그 가족과 재산도 귀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진정한 이웃 사랑을 베푼 참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며 사는 믿음은,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는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이처럼 이웃의 필요를 채워 주는 참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가져야 할 믿음입니다. 지금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지금 내가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지금 내 형편이 많이 어렵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채워 주는 도움만 받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내 주머니에 아무 것이 없다고 해도, 내게 있는 무엇인가로 남의 필요를 채워 주려고 애쓰는 사람이, 진짜 멋쟁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의 본성입니다. 이 사랑을 실천하면 복을 받습니다.
일본의 기독교 여류 소설가인 미우라 아야꼬 여사는 척추 카리에스로 수년을 누워 있었습니다. 아야꼬 여사는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와 한 병실에 누워 있는 병실에는 다른 환자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를 생각하다가 “그래, 그리스도인은 이런 힘든 순간에도 절망하지 않고,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으며, 환하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는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 한 번도 하나님이나 사람을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간호사가 오면 더 부드럽게 웃었고, 옆에 누워 있는 다른 환자들에게는 늘 환한 얼굴로 위로했습니다. 그런 아야꼬 여사를 통해 감동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아야꼬 여사가 믿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사랑은, 꼭 물질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심령 속에 예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을 것인가?’ 만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저와 여러분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어떻게 채워 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참 사랑을 나눌 때, 거기에 참 사랑으로 인한 놀라운 축복과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하며 살아가는 믿음’에 대한 말씀을 마치고, 다음 예배시간을 통해 계속해서 “사랑하며 사는 믿음” 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며 사는 믿음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사람들을 사랑하는 믿음입니다. 먼저 찾아가 참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먼저 말을 거는 참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알고,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참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 모두 이와 같은 참 사랑을 나누고 베푸는, 실천하는 사랑의 믿음으로, 더불어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펌-
첫댓글 긴급 6월20일 헙병중을 검사하고 6월27일 인슐린과 약을 사야합니다
긴급...6월27일 병원예약일 약을 사야합니다
2월6월10월은...인슐린을 사는 달로 예약이 되어 있습니다
치료약 4개월치 인슐린과 여러가지 합병증 약을 사야 하는데
치료비가 없어요 공과금도 못내고 먹을것도 사야됩니다
본 카페의 후원을 부탁 드리는 글입니다
카페 지기는 살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랜 투병 생활로 심신이 많이 지쳐 있습니다
하루 인슐린 주사를 5번 맞는데 2가지를 맞아야 하고요 혈 당 체크
대문에 수시로 몸에 바늘을 10번 넘게 찔러야 하고요 먹는 약이 합병증
때문에 여러가지라서 약 먹고 주사 맞는데...건강이 너무 안 좋아서
아무것도 못하는 인생입니다
오늘은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용기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 드립니다
먹을 것도 사야 되고 공과금도 밀리고 치료비도 마련해야 됩니다
공지글에 수급자에서 탈락되는 이유를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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