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대한노래지도자협회 임원 수련회를 아래와 같이 진행합니다.
문화와 소통의 장이 될 이번 기행은 선착순 40분으로 진행되며
회비는 10만원 입니다.
입금후 문자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계좌번호: 204-076601-04-021 기업은행(대한노래지도자협회 나유성)
2018. 05.26 - 27(1박2일)
날짜 | 시간 | 출발 | 도착 | 비고 |
5월 26일 | am 9:00 | 강화도 출발 | | 6호선 화랑대역 |
| 11:00 | | 용흥궁 | 반경1Km 이내 |
| 11:30 | | 대한성공회성당 |
| 12:00 | | 강화고려궁지 |
| 12:30 | | 강화산성북문 |
| 13:00~14:00 | | 식사 | 밴댕이 정식 |
| 14:30 | | 보문사도착 | |
| 14:30~15:30 | | 보문사 주차장 | |
| 16:00 | | 숙소도착 | 위딜펜션 |
| 17:00 | | 저녁준비 | 장어&고기 |
| 18:00~21:00 | | 식사 및 장기자랑 | |
5월 27일 | am 8:30~9:00 | | 아침식사 | |
| 9:30 | | 휴식 | |
| 10:00 | | 전등사 | |
| 11:00 | | 전등사 주차장 | |
| 11:30 | | 초지진 도착 | |
| 12:00 | | 점심식사 | |
| 13:00 | | 주차장 | |
| 13:30 | | 강화풍물시장 | |
| 14:00 | | 주차장 | |
| 16:30 | | 서울도착 | 해산 |
보문사 관음바위
보문사
신라 선덕여왕 2년인 635년 회정대사가 금강산에서 수행하던 중 관세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고 강화도로 내려와 창건하였다.
1911년 일제가 30본·말사를 제정하면서 전등사 말사가 되었다. 1918년에 대원(大圓)이 관음전을 중수하였고, 1932년에는 주지 배선주(裵善周)가 객실 7칸을 새로 지었으며, 1935년에는 나한전을 중창하였다. 그 뒤 관음전을 중건하고 대범종을 조성하였으며, 1976년 범종각과 요사를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관음전·대방(大房)·종각·석실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석실 굴 안에는 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석굴 입구에는 세 개의 홍예문을 설치하였고, 동굴 안에는 반원형 좌대를 마련하고 탱주(撐柱)를 설치하였으며, 탱주 사이에 21개 소의 감실이 있어 석불을 안치하였다.
이 밖에 이 절에는 마애석불좌상과 천인대(千人臺)가 있다. 마애석불좌상은 1928년에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승려인 이화응(李華應)이 보문사 주지 배선주와 함께 조각한 것으로, 높이 9.2m, 폭 3.3m이다. 석불좌상의 상부에는 거대한 눈썹바위가 있고, 좌측에는 비명(碑銘)이 있으며, 불상 앞에는 소규모의 석등이 있다. 이 석불과 석굴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하여 찾는 여인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
용흥궁
용흥궁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을 붙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용흥궁은 청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온수리 성당
강화도 성공회 성당
대한제국 시기인 1906년(고종 43) 영국인 주교 조마가(Mark N. Trollope)가 지은 성당으로 우리나라에 전래된 초기 서양 기독교의 교회양식을 볼 수 있는 목조건물이다. 초기 서양 기독교 양식의 2고주(高柱) 5량가(梁架)의 합각지붕 건물로, 본채인 예배당 건물과 2층 종탑 건물 등 2동이 있다.
성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중앙 1칸을 2층 종루로 삼은 문루와 정면 9칸 측면 3칸의 본당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원래 본채 건물의 외벽은 목조기둥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조적조로 변형되어 있는데, 서도의 중앙교회 건물 구조 및 양식과 매우 흡사하다. 지붕은 전통기와로 덮었으며, 처마는 홑처마로서 팔작지붕이다. 지붕 용마루 끝망과 뒤쪽에 십자가를 세웠고 합각 중앙에는 십자가 모양으로 붉은 벽돌을 쌓았다.
성당 정면은 건물의 서면으로 출입구이고, 중앙 칸에는 두 짝의 양식 판문(板門)의 문비(門扉)를 달았다. 양측 칸은 중앙에 유리창문을 설치했고 중방 밑은 벽돌을 쌓아 벽체로 하였다. 기둥 위 창방과 납도리 사이에는 접시받침을 배치하여 건물의 격을 높였다. 건물의 동면은 중앙 칸에 양식 판문 한 짝을 설치하여 본당 뒷문으로 삼았고, 양측 칸은 중방 위에 작은 유리창을 달았다. 건물의 남면은 양단 한 칸만 기둥위 창방과 납도리 사이에 접시받침을 설치하였다.
본당 내부는 중앙에 두 줄의 고주(高柱)를 세우고 비교적 가는 부재(部材)로 된 보를 걸었으며, 고주 머리에서 보 밑을 초공으로 받쳤다. 보 위 중앙에는 판대공(板臺工)으로 마루도리를 받쳤으며, 마루도리 밑에는 직접 장혀[長舌]을 붙이지 않고 접시받침을 배치하고 접시받침 밑에 장혀형 장재(長材)를 걸었다.
본당의 중방 밑 벽돌벽은 20년 전에 기둥하부 부식이 심하여 절단하고 중방 밑 전체를 벽돌벽으로 보수한 것이다. 원래는 입방체 화강석 기초 위에 세워진 2조 호형(弧形)으로 귀깍음한 각주(角柱)의 벽체는 전통기법의 회벽처리로 마감하였다. 현재 화강암 초석은 부근에 보존되고 있다.
종루 건물은 원래 모두 전통 목재건축기법으로 축조한 것으로 현존 건물과 같은 모습의 건물이었으나, 본당 보수시 부식이 심했던 기둥과 벽체를 모두 해체하고 시멘트 블록으로 축조하고, 지붕만 목조건축으로 꾸민 것이다.
전등사
전등사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라고 했다고 하나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그 뒤 1266년(원종 7) 중창하였고,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1282년(충렬왕 8) 승려 인기(印奇)에게 부탁해서 송나라의 대장경(大藏經)을 간행하여 이 절에 보관하도록 하고, 또 옥등(玉燈)을 시주했으므로 절이름을 전등사로 고쳤다 한다. 그러나 현재 그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또한,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된 대조루에는 선원보각(璿源譜閣)·장사각(藏史閣)·취향당 등의 편액이 남아 있고, 사찰 경내에는 70여 년 이래로 은행이 한 톨도 열리지 않았다고 전하는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초지진
초지진
요약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있는 진으로 신미양요 때 격전이 벌어졌던 곳.
사적 제 225호이다. 조선 효종 7년(1656)에 안산에 있던 초지량영을 강화로 옮겨 진으로 승격시켰다.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지은 요새이다. 신미양요(1871) 때 미국 해병 450명이 20척의 작은 배로 상륙을 감행하여 초지진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화력의 열세로 결국 점령당했고, 군기고와 화약 창고 등 군사 시설이 모두 파괴되었다. 1875년에는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면서 일시적으로 복구되었던 초지진 포대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돈대와 터의 기초만 남아 폐허가 되었다가 1973년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다. 현재 타원형의 돈대에는 포좌 3개, 총좌 100여개, 실제 조선시대 말기에 사용하던 대포가 1문 전시되어 있다.
첫댓글 알찬 내용으로 꾸며져있네요^^
기다려집니나~
빨리 가즈아~ㅎ
전등사 가고십퍼져요
빨빨리 기다려..~
삼총장 님 께서 볼거리 먹거리 글구 흥겨운 가무로 알차게 잘 꾸미셨네요 기다려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알찬내용이네요
협회장님 사무총장님
스케쥴짜느라 고생많으셨어요
알차고 행복한수련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감사합니다.
예쁜추억 많이 만들자구요.
강화도 첫경험입니다.
기대 백배 알찬내용 감사합니다~~^^
김미영부회장님, 이금란 같이 회비보냅니다
코스가 참 좋네요,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