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일은 처음이다. 뒷산 누리장나무들이 꽃 없는 여름을 보내고 열매 없는 가을을 맞았다. 해마다 여름이면 흰 꽃이 무리 지어 피고, 꽃이 지면 별 모양의 꽃받침 속에서 남보라 열매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나무다. 잎과 줄기에서 지린내 누린내가 난다지만, 꽃은 맑고 열매는 보석처럼 예쁘다. 꽃말도 ‘깨끗한 사랑’이다. 몇 해 사이에 열매(씨) 떨어진 자리에서 나고 자란 어린나무들이 많아졌다. 산비탈 여러 곳에 군락지도 생겼다. 그런데 이게 웬일? 열매 한 톨 찾아보기 어렵다. 큰 기쁨 하나를 도둑맞은 것 같다. 나무들이 출산 파업에 나설 리도 없는데, 도무지 모를 일이다. 불길하다. 이 일 역시 기후변화?
얼마 전 추석을 앞두고 과일 수급에 비상이 걸렸다. 수요가 몰리는 시점, 소위 대목인데 물량 공급이 제때 안 된 것이다. 배는 작년에 수확한 재고가 나왔고, 햇사과는 값이 뛰어 ‘금 사과’가 되었다. 수확이 좀 늦어진 것이 아니라 날씨가 농사를 망쳐놓아서라고 했다.
올해 날씨가 ‘이례적’으로 유난하기는 했다. 이른 봄부터 이상고온이었다. 그 바람에 벚꽃은 평년보다 보름쯤 빨리 피었다. 일찍 핀 꽃들을 보면서 이런 걱정이 들었다. 꿀벌이 날아들기도 전에 봄꽃들이 팝콘 튀듯이 다 피고 지면 어떡하지? 꽃샘추위로 꽃들이 다 얼면 어떡하지? 기우가 아니었다. ‘기상 관측 이후 가장 따뜻했다는 이른 봄’은 과수원의 사과꽃도 성급하게 열어놓았다. 기온은 다시 곤두박질쳤고 사과꽃은 그대로 얼어버렸다. 간신히 살아남은 꽃들은 열매를 맺었지만, 어린 과육이 맞닥뜨린 것은 수난이었다. 우박과 서리, 긴 장마 중의 국지성 폭우, 이상고온. 한반도를 관통한 태풍 카눈은 사과의 주산지인 경북지역을 강타해 낙과 피해를 줬다. 설상가상으로 탄저병까지 발생했다. 그러니 이 모든 일을 가지 끝에 매달려 견뎌낸 과일 자체가 기적일지 모른다. 백화점에서는 못생겨도 맛과 영양에는 문제가 없는 사과를 ‘착한 과일’이라는 이름으로 값 내려 팔았다.
기후플레이션(기후+인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이상 기후의 영향으로 작황이 부진해서 식품 물가가 뛰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일은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올여름 인도에서는 ‘토마토 대란’이 발생했다. 인도에서 토마토는 양파와 함께 ‘절대적인 주식’이라는데, 반년 사이에 가격이 400% 이상 폭등했다. 이상고온 현상이 이어진 데다가 몬순 기간에 40년 만이라는 역대급 폭우가 쏟아져 토마토 농사를 망친 것이다. 인도인 식탁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토마토다. 썩은 토마토라도 팔아야 할 형편이 되자 토마토 수송 화물차를 습격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경호원이 등장했다. 토마토를 우리네 쌀로 바꿔 ‘밥 없는 밥상’으로 생각하니 수긍이 가면서 아찔해진다.
올해 과수원 사과꽃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인도의 토마토밭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나니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날씨는 더욱 극단적으로 치닫고, ‘계절 변화의 진폭’도 커지고 있다. 이런 기후변화는 작물 재배지의 판도도 바꿔놓았다. 뜨거워진 지구에서 아열대 기후로 가고 있는 우리나라, 전에는 동남아 여행이나 가야 먹을 수 있던 과일들이 이제는 ‘국산’으로 마트의 판매대에 올라온다. 애플망고, 구아바, 패션프루트, 올리브, 파파야, 바나나…. 아프리카나 중남미에서나 나는 줄 알았던 커피를 제주도나 전남 화순에서 재배한다. 생각하니 열대작물이 잘 자라는 환경이 된다는 것은 우리나라 토종 작물 재배가 어려워진다는 것,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강원도 고랭지 배추는 기온이 올라 경작지가 줄었다. 수미감자며 옥수수의 생산량도 줄었다. ‘작물 벨트’의 북상이 이대로 계속된다면 사과나 복숭아 재배는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만 가능한 날이 올 것이라고 한다.
다시 생각은 뒷산 누리장나무로 간다. 내년에는 다시 꽃이 필까. 보석 같은 남보라 열매를 볼 수 있을까.
(주부편지 11월호, 지구살림‧생명사랑 코너에 실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