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31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캐논 canon 》
말 3:2
<암 진단을 받은 후 달라진 것>
3년 반 전에 전립선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약물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다행히 예후가 나빠지지 않아서 전과 같지는 않지만 일상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립선 진단을 받은 후 저의 심경에 변화가 온 것은 분명합니다.
☞ 심경의 변화는 ‘나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의 확인입니다.
‘오늘일지 내일일지 모래일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 사실이란 것은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저의 목양실에는 적어도 1천여 권 이상의 책이 있습니다.
오늘 제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면, 아내는 이 책 대부분을 폐지로 처분할 것입니다.
저는 아내에게 아내가 해 주었으면 하는 일정한 바람이 있습니다.
그동안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하여 아내에게 잔소리도 하고 가끔 다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면, 아내에게 바라는 저의 요구가 그 순간 끝이 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아내를 향한 바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제가 요구했던 것들, 모두 물거품이 됩니다.
그러니 이래라 저래라 요구하는 것, 제 목양실의 책들과 똑같은 운명입니다.
돌싱으로 돌아와 두 손주를 안겨준 딸아이를 향한 바람도 그렇습니다.
두 손주를 향한 할아버지의 희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립선 진단을 받기 이전에는, 이 녀석을 어떻게 키워야지 하는 희망사항이 있었습니다.
그 희망 사항은 하나의 욕심일 수도 있고, 기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러한 기대치도 하나님이 저를 불러가시면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 세상을 향한 기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세상을 향해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출신 지역의 발전을 기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 비해 낙후되어서는 안 되리란 기대도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 성향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저의 희망 사항, 기대하는 마음, 욕망, 모두 하나님이 저를 불러가시면 물거품이 됩니다.
☞ 이런 생각은 저의 행동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행복을 확인하기>
제가 심경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저의 삶을 바라보는 인생관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저의 인생관이 바뀌었습니다.
이 말을 다시 한번 뒤집어보면, 제가 저의 인생을 재는 잣대를 바꿨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잣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관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저의 잣대를 바꾸었다고 말씀 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저의 인생을 바라보는 잣대는 물론, 아내와, 딸과 손주들을 재는 잣대도 바뀌었습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잣대에도, 우리 온고을교회 성도님들을 바라보는 잣대도 바뀌었습니다.
저의 설교가 달라졌다고 느끼는 성도님이 계실 줄 압니다.
저의 잣대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저 자신을 재어보는 잣대부터 시작하여 가족을 향한 잣대가 달라졌습니다.
교회와 크리스찬을 판단하는 잣대도 달라졌습니다.
잣대가 달라지니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 인생에서 전기를 맞이하면서 잣대가 달라질 때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칫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거나 희망의 끈을 놓아버릴 수가 있습니다. 위험하겠지요?
저는 그것을 경계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저의 잣대가 달라지면서 제가 서두른 일이 하나 있습니다.
“행복은 무엇이며, 행복은 어디에 있으며, 행복은 언제 누려야 하지?”라는 물음표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불러가실지 모르는데, 제가 행복을 모른다면 그것은 분명 억울한 일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행복을 확인하기 시작했습니다.
행복을 확인하는 작업을 시작했더니, 의외로 행복이 여기저기 있었습니다.
이것도 행복입니다. 저것도 행복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몰라서 누리지 못했습니다.
_ 제가 어떻게 행복을 확인하고 누릴 수 있었습니까?
_ 인생 사는 중에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_ 하나님이 언제 불러가실지 모른다는 현실인식에 제가 가진 잣대를 교체하게 되었습니다.
_ 제가 가진 잣대를 바꾸자 행복을 확인하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잣대를 바꾸었더니 행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행복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비로소, 이제야, 제대로 된 잣대로 측정한다는 뜻입니다.
<진실한 잣대>
☞ 여기서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제가 지금 가진 잣대가 올바른 잣대입니까, 아니면 이전 잣대가 올바른 잣대입니까?
☞ 제가 가졌던 이전 잣대보다 지금 가지게 된 잣대가 더욱 진실에 가까운 잣대입니다!
☞ 진실의 잣대를 가지고, 저의 모습을 진실되게 보았을 때, 행복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바꿔 말하면, 자기 실상을 진실되게 보았더니, 행복이 손에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행복을 확인시켜주는 잣대가 진실의 잣대입니까?
행복을 확인할 수 없는 잣대가 진실의 잣대입니까?
당연히 사람에게 행복을 확인시켜주는 잣대가 진실의 잣대입니다! 여기서 결론이 나옵니다.
☞ 사람의 행복은 어느 때 가능한가?
☞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재는 잣대를 가졌을 때 행복하다.
☞ 평안은 평안은 내가 누군지 알 때 온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평강을 줍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행복을 줍니다!
제가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잣대를 바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조금 방심하면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왜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도다”(마 26:41)
우리는 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잣대를 점검해야 합니다.
바른 잣대를 가지고 있을 때는 내가 행복합니다. 평강이 있습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나쁜 잣대를 품으면, 행복이 없습니다. 평강이 없습니다. 은혜도 없습니다.
행복과 평강과 은혜가 없다 생각되면, 얼른 자기가 가진 잣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 오늘 설교 제목이 ‘캐논’입니다. ‘캐논’은 잣대라는 뜻입니다.
캐논은 원래 헬라어인데, 갈대라는 뜻입니다.
☞ 옛날에는 잣대가 없으니 갈대를 꺾어서 길이를 쟀습니다. 오늘 본문은 잣대이야깁니다!
<불과 잿물>
(2절)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임하시는 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날을 의미합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할 때, 예수님은 아직 이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로부터 예수님은 400년이 지나서 오십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장차 오실 예수님을 어떻게 말합니까?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
금을 연단하는 것은 오직 불뿐입니다.
금이 금 되게 하는 것은 오직 불입니다. 불 말고 다른 것으로는 금이 금이 될 수 없습니다.
금이 금 되었을 때, 금은 비로소 금빛으로 빛이 나며, 세상이 그를 금으로 알아줍니다.
금이 금 되게 하는 불, 그것은 달리 표현하면 바로 “잣대”입니다.
돌과 섞여있는 금을 잣대를 대고 깎아내는 것입니다.
불이 돌과 섞여있는 금을 연단하지 않고는 금은 금이 될 수 없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예수님을 금을 연단하는 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예수님을 잣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른 잣대를 가져야 행복이 보이고 평강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잘못된 잣대로는 사람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평강이 없습니다.
금은 불을 만나야 금이 되고, 사람은 바른 잣대를 가져야 진실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실을 뽑아 천을 만들어 흰색으로 물들이기 위해서는 잿물이 있어야 합니다.
잿물 없이 눈과 같이 흰 천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잿물로 표백을 하여야 흰 눈과 같은 천이 나옵니다.
잿물은 천을 희게만드는 수단입니다. 바로 ‘잣대’라는 뜻입니다.
☞ 말라기 선지자는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불이요, 잿물이다!
<잣대 중의 잣대>
☞ 다시 말씀드립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캐논’입니다. ‘캐논’은 잣대라는 뜻입니다.
지금 말라기 선지자가 선포합니다. “오실 메시아가 불이며 잿물이다”
이 말은 오실 메시아가 “금을 금되고 하고, 흰색 천을 만들어내는 잿물이다!” 이 뜻입니다.
바로 “메시아가 잣대이다!” 이 뜻입니다.
잣대는 캐논입니다. “메시아가 캐논이다!” 이 말씀입니다.
진정한 캐논, 예수 그리스도! 그가 오실 것이다. 그가 오시면?
(2절a)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예수님이 잣대로, 예수님이 캐논으로 오시면 그 앞에 바로 설 자가 없다!
왜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죄 없는 자가 단 한 사람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캐논 앞에 “나는 죄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라기 3장 2절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말라기의 선포대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밝히 드러난 것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이 세상 모든 사람들,
불로 연단하지 않으면 돌에 감춰진 금입니다.
잿물로 탈색하지 않으면 죄가 주홍빛과 같이 붉은 자입니다.
오늘을 기준으로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금을 연단하는 불이 되시고,
주홍같은 죄를 양털같이 희게하는 잿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잣대입니다.
예수님이 캐논입니다. 할렐루야~
<정경 캐논>
기독교 경전인 성경을 캐논이라 부릅니다.
캐논은 ‘경전’으로 번역이 되는 단어입니다.
경전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66권입니다.
하나님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성경 66권을 우리에게 정경으로 주셨습니다.
‘캐논’으로 주셨습니다. 성경이 캐논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었습니다. 캐논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찬양하면서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을 캐논으로 읽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성경이라는 캐논으로 나 자신을 재는 일입니다.
성경 앞에 나는 누구인가? ~ 정말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내가 용서받지 못할 죄인인데,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았습니다.
이 진리를 깨달으니 나에게 평화가 왔습니다.
비로소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평안 세상은 알지 못하는 평안입니다.(요 14:27)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조금 교만스러운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마는, 성경이라는 캐논으로 불신자를 볼 때,
그들의 주홍빛과 같은 죄가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바위 속에 있는 숨겨진 금일뿐입니다.
드러나지 않은 금은 금이 아닙니다. 캐논으로 연단을 받아야 비로소 금이 됩니다.
불신자가 캐논, 성경을 만나, 그들도 금이 되게 하고 양털같이 희게하는 심부름꾼,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한편,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저의 병력을 말씀드렸습니다.
목사인데도 병고에 닥쳐서야 새로운 캐논을 갖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
먼저 믿은 우리부터 겸손하게 신앙생활하는 것이 절실합니다.
우리가 이 신앙으로 불신자 앞에 모범을 보여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그렇게 살아냅시다!
우리, 꼭 그렇게 살아낼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