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관한 시모음 65)
어는 여름날에 /이재환
연못가에 모여
개굴개굴 노래하는 개구리
더운 날 나무 그늘에서
합창하는 매미
소나기 그치고 나니
메밀잠자리 평화롭고 놀고
시원한 계곡엔
개구쟁이들의 행복한 웃음소리
뜨거운 태양에도
폼을 잡는 망초꽃
만추의 계절을 향해
탐스럽게 익어가는 과일
파란 하늘 뭉게구름과
먹구름은 서로 잘난 체 한다
어느 여름 /은파 오애숙
극도의 열꽃 피어나는 8월
시원한 물줄기에 신바람 휘날려
한여름이 즐거운 날일세
녹푸름 짙은 숲 속에서
행복한 기쁨의 향그럼 심연에
피어나는 휘파람의 노래
창조주의 고귀한 선물
그 누가 막을수가 있으련가
만물 다 내 님의 것일세
대자연 합창의 하모니에
손 높이 들고 내 영혼 찬양하리
만유의 주재되신 이름을
비 개인 여름 아침 /김광섭
비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녹음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안희연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었다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
적당한 햇살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 속에서
한참 걷다보니 움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사방이 물웅덩이였다
나는 언덕의 기분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
언덕은 울상을 하고서
얼마 전부터 흰토끼 한마리가 보이질 않는다 했다
그 뒤론 계속 내리막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
언덕은 자신에게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토끼일까
쫓기듯 쫓으며
나는 무수한 언덕 가운데
왜 하필 이곳이어야 했는지를 생각했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여름에 피는꽃 /初月 윤갑수
녹음이 우거진 들녘엔 꽃들이
화사하게 햇살 바라기 하며
벌 나비 친구들을 맞이 한다.
일그러진 구름은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햇살을 시기하듯 바람은
뭉게구름을 몰고 오고.
우거진 잡초들 사이 터전을 잡은
이름 모를 꽃들이 하늘거리며.
비단결 같은 고운 꽃잎들이
살랑이는 바람결에 인사를 한다.
여름날 이글대는 햇살이 너울대는
한낮 무더움 속에서도 굴하지않는
강인한 들꽃으로 피어나길을...
무더운 여름 /민경대
무더운 여름 생각들이 벌판에
아무런 생각없이 웃음을 웃고 밤을 지나고
꿈을 나물로 삼고 밤그늘에 누워 혹은 철로에 누워
자장가같은 소리를 들으며
너는 나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지 못하고
구름속에 보이은 발자욱이 빗자욱에 지워진다
팔랑게비로 하늘에 바람 일으켜
더더욱 회호리 바람은 내 연구실 창가에서
놓여있지도 않은 화분이 토네이도 위력의 풍력에 넘어진다
어느 여름날 /안영준
푸른 구름은
조각배 하나 띄워놓고
뱃놀이한다
나무 밑 개망초는
서 있는 바람에 기대고
꾸벅꾸벅 졸고 있다
콩밭에 묻혀
비지땀 흘리는
촌부의 한이 배어 있는
여름 들녘
찜통 속에
녹초 된 그는
소나기 한 줌 그리운데
그늘 매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짝 찾는 소리만 외친다
여름아 안녕 /박진표
매미야 안녕
고추잠자리
코스모스
황금 들녘
허수아비
높고 푸른 하늘아
어서오렴
가지 않을 것 같았던
심술쟁이 여름아
자연의 섭리따라
떠날 준비 하는구나
네가 있어
오시는 가을이
포동포동 살이찌고
달님의 함박웃음
넉넉한 한가위
곱게곱게 만들어 주겠지
순리대로 순응하며
불평과 투정없이
그렇게 흐르며
지혜롭고 낮아지는
우리가 되자
사실
너의 심술로
때로는 지치고 힘들었어
이제 떠난다 하니
아쉬움도 있지만
내년에 다시 만나니
그래도 웃으며 보내마
내년에 만날때는
심술적게 부리고
골고루 단비내려
행복한 농심 만들어 주렴
조금 아쉬울 때
그리움 남겨 놓고
이쁘게 떠나거라
여름아 안녕
우리 서로
그리운 그리움 되자
우리 서로
잊지못할 추억이 되자
여름 한낮 /윤무중
어김없이 내려쬐는 햇살과
후덥지근한 입김을 내보낸다
사랑을 받던 빨간 꽃잎과
사랑을 주던 노란 꽃대는
더위에 지치고
한결같이 아쉬움을 삼킨다
햇볕이 많아지면
숲속에 어두운 미소만 남아
그림자마져 누워 잠자는데
단단한 멍 자국만 남는다.
요란한 빗소리는 파도와 함께
무더위가 한조금 떠나기만
기다릴까, 그렇지 않으면
어짜피 흠뻑 땀 흘려
가슴에 멍든 그리움을 떨칠까
여름이 여름을 버리는 일 /정재분
무덤이 없는 상자 속
무덤이 없어서 구름이 잘 자라는 상자 속
그 안으로 들어가려면 상자보다 작아야 한다
나는 상자를 채우지 못하는데
나는 남아돌아 뚜껑을 닫을 수 없다
보현봉이 보이는 어디쯤에서
칫솔질을 하는 오후 3시를 보며
부서진 마사토 알갱이들이 먼 산 보며 웃는다
마주 서서 꽃 진 유월도 칫솔질을 한다
오후 3시의 유월은 키스를 준비하는 걸까
치아에 충성을 감정에 배반을
네모난 상자에 들어가려면 잘게 부서져야 한다
부숴야 한다는 걸 아는 것과
부수는 것 사이에 치솟은 봉우리
산산이 깨져야 상자를 가득 채울 수 있고
나는 온전히 나를 집어넣을 수 있다
과연 뚜껑이 닫힐 수 있을까
뚜껑을 닫는 것은 나의 소관이 아니다
여름이 여름을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상자가 상자를 버리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상자가 상자를 버리고 한 필 옷감이 되어
있는 그대로의 나를 감싸는
피복의 형식을 취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각의 상자 속으로 들어가려면
나는 나를 잘게 부숴야 한다
나를 망가뜨리지 않고 나는 부서질 수 없다
치아에게 배반을
감정에게 충성을
여름 해무 /김일선
여름 바다에 안개가 피어나면
미지근한 여름비가 촉촉이 내렸던
바다와 등대섬과 장원섬이
수평선의 경계를 지우고
어두운 회색 빛 허공 속에
침울하고 눅눅한 습기만 채운다
여름 해무가 엷은 탓일까?
여름 태양이 용광로의 불꽃처럼
뜨거워서 일까?
가까운 꽃섬과 시루섬은 덮치지 못해
무신호가 울리지 않아 허전하기만 하다
뒤 돌아보면 달마 영봉을 흥건히 덮은
그을음처럼 검은 안개구름을
남풍이 느긋하게 휘몰아 오고 있는데
회색구름을 뚫고 뽀얗게 내민 태양은
안개구름 등마루에 눈부시게 백광을 쬐며
달아나는 안개구름을 헤치고 있다
겨울과 봄의 해무에 비해
여름의 해무가 쉬 사라지는 것도
여름바다를 즐기는 젊은이들을
더없이 환희에 넘치게 하는 것도
여름바다 위에 반짝이는 별들의 향연도
모두가 작열하는 태양이 있음이여!
적란운 뜨면 /김용호
자벌레 한 마리 도르르 몸을 말아 풀밭에 떨어진다
연잎에 청개구리 숨 할딱대다 물속으로 뛰어든다
울담 넘던 나팔꽃 덩굴손이 긴 촉수를 세우고 있다
한여름 새벽에 /박재삼
二十五坪 게딱지 집 안에서
三十 몇 度의 한더위를
이것들은 어떻게 지냈는가
내 새끼야, 내 새끼야
지금은 새벽 여섯 시
곤하게 떨어져
그 수다와 웃음을 어디 감추고
너희는 내게 자유로운
몇 그루 나무다
몇 덩이 바위다
사탕처럼 천천히 녹는 여름 /박해람
손가락 끝에서 먼저 물드는 것들, 충분한 염료가 여름 내내 펄펄 끓고 있다
깊어서 닿자마자 물드는 색
여름이 모든 열매들을 입안에 넣고 우물거린다
후두둑, 진한 색깔들이 익어가고 있다
모든 열매들은
그 몸의 팔랑거리는 그늘 색을 닮아간다
뽕나무는 제 그늘을 닮아 가려 했을 것이다
검고 푸른 것들이 매달려
검게 바람을 익히고 있다
누구나 제 그늘을 한 번쯤 내려다본다.
그러다 후드둑 떨어져 내리는 지경이 되어서야
제 색깔을 알아차린다
물들어 가는 시간
한차례 다 털어낸 색깔들
스스스 흔들려 올려다보는 뽕나무
진하게 익었다는 색
가장 끝과 닮았다는 색
올려다보는 이 한 몸과
먼저 깊어가는 생각의 끝이 물들어 가고 있다
물들어 가고자 하는 것들 단맛에 취해 호들갑이다
사탕처럼 천천히 녹아
꿀꺽, 해보지도 못한 한 생이 넘어 간다
엄살은 오디처럼 검은 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