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에 관한 시모음 34)
동백숲 /김 참
숲엔 동백나무가 가득했다. 가지마다 붉은 꽃 피어 있었다. 몽롱한 색이었다. 동백숲
너머 반짝이는 바다에서 검은 가마우지 몇 마리 숲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붉은 꽃과 초
록 잎사귀 흔들며 귀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끝없이 울어대는 바닷새 소리에 나는 좀 몽
롱해졌다. 해안 절벽 앞에서 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내려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깎아지
른 절벽을 타고 누군가 올라오고 있었다. 가쁜 숨 고른 뒤 만개한 동백을 바라보던 여자.
붉은 동백 한 송이 머리에 꽂고 기이한 노래를 부르던 여자. 숲과 바다로 파문처럼 번지
며 만물을 흔드는 그녀의 노래에 취해있는 동안, 습하고 차가운 바람에 떨리는 붉은 동
백 꽃송이에 취해있는 동안, 여자는 절벽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너무 놀라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놀랍게도 여자는 바람 탄 새처럼 두 팔을 펴고 공중에 가만히 떠 있
었다. 동백숲 곳곳에서 검은 가마우지들이 솟아올라 그녀를 따라 날아간 뒤 바다 너머
에서 희미하게 달이 돋아나고 있었다.
동백 /권순자
붉은 꽃송이 내려앉는 밤
얼어붙은 공기들이 붉은 물방울이 되는 밤
불꽃같은 심장들이 하나씩 제 몸을 분해하여
타오를 꿈을 펼치는 시간
숨소리가 파도의 턱까지 차올라 철썩거리고
어제를 찢고 어제를 뜯어
풀어진 것들이 뭉쳐질 힘을 온몸에서 우려내는 중
지나간 슬픔이 너를 껴안고 바람소리를 낸다 해도
폭설의 발자국이 차갑게 너를 움켜쥔다 해도
달빛이 중얼거리는 해변을
구름 어깨너머로 훔쳐보고 있는 너는
아픔을 문질러 가루를 만들어버리는
붉은 손을 가진 너는
보름달의 죽음을 바라보기만 하는 너는
유골단지에 네 붉은 머리칼을 던지는 너는
타락한 구름이 저들끼리 혼숙을 하고
슬픔과 고통의 최루가 쏟아져 내릴 때
자갈이 물 사이를 헤집고 헤엄치는 모습을 상상하는 너는
검푸른 파도가 네 침묵을 건드리고
겹겹이 꽃으로 둘러친 경계를 풀어 제치고
스스로 자유케 하는 힘으로
겨울의 심장에서 떨어져 나온 붉은 힘으로
어제의 붉은 기억을 뜨겁게 풀무질하는 힘으로
네가 놓아버린 고통들이 허우적허우적 파도쳐 갈 때
네가 보내버린 슬픔들이 성성하게 거품이 되어 파도칠 때
화염처럼 타오른 입술로
변방을 향해 감정의 내장들을 구불구불하게 펼치는데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않는 길이 사방으로 열리고
물음으로만 깊어지는 강이
도달하는 죽음 같은 고요가 저 혼자 깊어가고
통증은 잎사귀마다 차가워진 겨울의 민낯을 새긴다
바닥에서 꿈꾼 자의 얼굴로 붉게 떠오르는 몸 조각들,
눈물방울들.
분해되지 않는 뼈들을 잔뜩 달고
바람에 팔랑거리는
꿈을 달고
빠르게 늙어가는 연인에게
붉은 숨결을 던져.
자꾸만 던져.
동백꽃 /조병기
바다벼랑 아찔한데
누구를 기다리나
속가슴 드러내 놓고
아린 객혈 흩뿌리나
수평선 너머
부질없는 약속
칭얼대는 파도 소리
한밤 내 잠 못 들어 애타는 밤
떠나간 그 사내는
언제 올려나
동백나무 그늘 /이승주
붉은 해가 중천의 계단을 오르며
동백나무 그늘을 걷는다
동백나무 붉게 불은 젖꼭지에 고인 첫 꿀물이듯
고요하고 촉촉한
새 아침의 동백나무 그늘
고요와 향을 배양한 동백나무 그늘의 요람 속에서
고요히 동백나무 그늘의 고요를 읽는 어린 동박새처럼
동백나무 고요한 그늘의 요람 속에서
고요히 동백나무 그늘의 고요를 읽는 나는
빠르게 줄어드는 그늘의 자락 속으로 자주 자리를 옮긴다
한 발짝씩 가차 없이 빠르게 걷혀지는
동백나무 그늘, 동백나무 그늘의 요람을 사랑하는 나의
그늘의 고요, 고요의 그늘
다시 동백 /곽도경
지난밤 궂은비 오고
동백은 지고
한 여자 빨랫줄에
젖은 꽃 넌다
까치발 든 흰 발목
오히려 서러워
동백이 울고
최선을 다 했으니 괜찮다고
그녀도 울고
허공에 걸린 절정
한 송이 붉은 마음
그래
너, 다시 동백
선운사 동백숲 /김형미
선운사 절문 앞에 늦도록 앉아 있었네
꽃들은 모두 한 곳을 바라다보고 있었네
죽음이 이미 와 있는 방문 앞보다
더 깊고 짙은 어딘가를 향하고 있는 꽃들
동백을 홀로 바라본다는 일은,
큰 산 하나 허물어져 내릴 만큼 고독한 일
어쩌면 기억도 아득한 전생에서부터
늑골 웅숭깊도록 나는 외로웠네
꽃핀 숲보다 숲 그늘이 더 커 외로웠네
하여 봄볕에 흰 낯을 그을리며 나는
선운사 절문 앞에 한 오백 년 죽은 듯이 앉아
동백이 피고 지는 소리를 다 듣고 말았네
큰일 치룬 뒤의 동백숲이
어떻게 마음을 정리하는지를 다 알고 말았네
이제 붉은 피가 돌았던 내 청춘은
이끼 낀 돌담 속에나 묻어둘 테지만
고난이 더할수록 가슴은 설레어
선운사 동백숲에 작은 위안이 지나가네
동백꽃 사랑 /이동백
바다 건너 멀리 떠난 그리운 임
하염없는 기다림에
붉은 연정 토해내는 여심
잊으라는 말 듣지 못해
외로이 임 기다리다
흰 눈 속에 더욱 붉어진 연정
어느 날 행여 찾아올까
거친 해풍 이겨내며
동박새 소리에 금빛 꽃술 감추고
그리움 가득 품은 선홍빛 붉은 입술
애타게 바라보는 수평선
속절없는 그리움
겹겹이 사연 담은 붉은 눈물
뚝, 뚝 떨어트리는 서러운 여심
동백꽃 사랑 /박고은
눈보라 칠수록 솟구치는
설원의 붉은 순정
절정의 순간 목숨 다한대도
희열로 벙그는 향취의 입술
독장 같이 찬바람 먹고
쌍코피 쏟으며
뚝뚝 질 운명일지언정
고운 동백꽃아!
너 홀로 사랑이구나
시린 겨울을 지우며
보조개 수놓을 봄이구나
동백꽃 /주선옥
축제처럼 눈부시고
떠들썩한 웃음소리
짙푸르게 자지러지는 바다
하얀 손길 외면하고
붉은 물감처럼
툭툭 튀던 이별의 언어
어디로 돌아가 버린 걸까
한 발짝 씩 다가왔던
그대의 뜨거운 가슴은
가슴 가득히 헤집고 드는
너의 슬픈 눈망울에
맑은 차 한 잔이 그립다
선운사 동백꽃 /김승동
선운산은 만삭이다
아린 겨울 다 지나가도
반짝이는 윤기가 그대로인 치마폭 아래로
숨죽인 고요가 부산하다
일주문앞 개울도 허리를 풀어
드나드는 발자국들 잦아지니
행여 순산이라도 놓칠까
법당 안 노스님의 독경소리 빨라진다
대처 낯선 바람이 들었나
요사체 고운 보살님, 황급히
저녁햇살을 주워들고 문을 닫는데
맑은 울음이다 추녀 끝 풍경이 몸을 흔들고
온 산자락이 출렁인다
붉은 이슬이 비친다
산문 밖 올라오던 봄밤이 안절부절이다
붉은 동백 /해명 이명순
달빛이 고요히 흐르는 밤
별빛이 내리는 산사에
잠든 너의 모습 애달프구나
풍경도 잠이 들고
바람도 잦아든 뜰 안에
무서리 내려앉은 붉은 서리꽃
너의 붉은 입술이
여명에 이슬 되어 발아래 머문다
지친 영혼을 위한 위로의 샘이여
네 안에 고이 품은 뜨거운 열정이
내 가슴에 일렁인다
동백 꽃 추억 /보하 이문희
조개껍데기 엎어 놓은듯
흰 눈 뒤집어 쓰고 무겁게
내려 앉아 묵상하는 초가지붕
고향마을 온 천지가 설경의 극치
앞 동산 땅솔나무 숲길 지나서
독두산 산 자락 양지 바른곳
무겁게 흰 눈 머리에 이고
대롱대롱 슬픈 추억을 매달고
피어 있는 동백 앞에 선다
푸른 잎 사이로 그대 입술
빨갛게 내민 붉은 꽃 송이
노오란 꽃술 안에 숨어있는
그립던 슬픈 얼굴을 본다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눈을 닮은 눈섭. 하얀 눈속에
빛 바랜 뜨거운 눈물이 고인다
발길 닿는 곳 마다 목이 맨
추억이 매어달린 고향 산천아
동백꽃 묘혈 /은파 오애숙
눈보라 앞에서 당황치 않고서
그 누굴 그렇게 보고파 해풍에도
이 아침 고옵게도 단장하고 나왔는가
그대를 누구보다 사랑해요 외치려
이 아침 백설 속에 수줍음 마다 않고
임 보고파 엄동설한 속에도 웃고 있는가
눈보라 치는 바닷가 임 보고파 웃다
청렴한 옷 갈아 입은 지조 가슴에 슬어
그 누구를 가슴앓이로 연모 하고 있는가
그리움 달래려다 해질녘에서야
울다가 보고파서 울다가 애태우다
한 맺힌 멍울 안고서 서글프게 목멨나
가버린 날들 그대의 묘혈 속에
피어난 아리따운 사랑의 그 작렬함
그 누굴 그리도 애타게 사랑했는가요
백련사 동백꽃 /이수희
만덕산이 동백불을 밝히고 있다
바람이 덩달아 무릎을 꿇고
햇살도 일어나 기둥으로 서서
붉게 속정을 태우고 있다
백련결사가 잎잎으로 귀를 세운다
어찌할거나 어찌할거나 이 열기를
세상에 돌아온 꽃부처
봄도 젖어서 눈이 아프다
지난 내 겨울은
동백꽃 단내에 취해 있다
동백꽃 필 무렵 /황광주
초록 저고리 빼꼼히
붉은 꽃 잎술
봄바람에 입 맞춘다
마중 나온 아지랑이
가슴이 설레어
먼발치 까치발 돋았다
동백꽃 필 무렵엔
사그라졌던 그리움이
시리도록 타오른다.